스님의하루

2020.3.4. 온라인 수행법회
“변화가 없다고 느껴질 때 자기를 점검하는 방법”

안녕하세요. 출가열반재일 정진을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입니다. 스님은 전국의 정토회 회원들에게 온라인 생중계로 법회를 했습니다.

10시에 서초 정토법당에서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공동체에 살고 있는 활동가들 몇 명만 법당에서 법문을 듣고, 지역 정토회 회원들은 각자 처한 곳에서 법문을 들었습니다. 스님은 카메라를 보며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진 잘하고 있습니까?”

“네!”

“오늘은 출가일로부터 3일째 되는 날입니다. 매일 과거에 촬영한 출가열반일 영상을 보내드리고 있지만, 오늘 직접 강의를 하게 된 것은 천일결사준비위원회에서 요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법당에 모여서 법문을 듣고 정진하는 게 아니라 개별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격려하는 차원에서 직접 법문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이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격려하라고 하니까 격려합니다.” (모두 웃음)

스님이 격려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서 말 그대로 격려를 해주자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수행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수행이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내가 바라는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삶을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입니다. 수행의 핵심은 ‘변화’입니다. 마음가짐에 변화가 오든, 행동양식에 변화가 오든, 뭔가 변화가 와야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은 조금씩 늘 변화하고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똑같은 상황이 늘 반복되기도 합니다.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기 때문에 ‘영원하다’ 또는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부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항상(恒常)하는 것은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항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을 좀 더 길게 놓고 보면 사실은 늘 변화하고 있습니다. 항상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집착을 하게 되는 거예요. 집착의 대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집착하고 있을까요?

첫째,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집착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갖고 있는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실제로는 변화해버리니까 상실감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발생하는 고통인 애별리고(愛別離苦)가 일어나게 되고, 내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한 잃어버림의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늘 변화한다는 사실을 애초에 알고 있으면 거기에 집착을 안 할 수 있어요. 집착을 하지 않으면 변화가 일어났을 때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변화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봄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봄이 여름으로 변한 것이고, 여름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여름이 가을로 변한 것이고, 가을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가을이 겨울로 변한 거예요.

우리가 겪는 헤어짐의 고통과 잃어버림의 고통은 결국은 집착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고, 집착은 변하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데서 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변한다는 것을 꿰뚫어 알아야 합니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함을 알게 되면 집착할 바가 없어지고, 집착할 바가 없어지면 변화가 일어났을 때 고통이 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예요. 생로병사(生老病死), 즉 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은 사계절처럼 변화하기 마련인데, 젊음도 건강도 삶도 영원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되는 거예요. 주름살이 지거나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늙음의 징표를 갖고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는데 그건 그냥 나무에 단풍이 든 것과 같아요. 영원히 건강할 것처럼 착각하니까 병이 나면 괴로워지는 겁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거나 병든 게 좋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변화의 한 과정일 뿐이라는 뜻이에요. 죽음이란 것도 그냥 변화의 한 요소이자 과정이에요. 그걸 알면 흰머리며 주름살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병이 났을 때도 치료에 임하되 그 병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이라고 하는 변화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죽을 때 통증이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게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말의 참뜻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이런 말을 자꾸 쓰면 마치 육신이 영원히 사는 것 같은 착각을 주기 쉽습니다. 그래서 일부 종교에서 육신 영생론을 주장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걸 믿다가 그 믿음의 대상이 죽는 모습을 보고는 허탈해하고, 허탈해하는 걸 달래려고 다시 부활했다고 하고, 이런 악순환이 자꾸 생겨나는 겁니다.

둘째, 내가 싫어하는 것에 대한 집착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이 고통이 영원하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내가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니까 괴로움이 가중됩니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또한 변화하는 것입니다.

변화한다고 이해하면 어려운 상황에 처하거나 고통을 당할 때 좌절하고 절망하는 게 아니라, 그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통증이 없다는 게 아니라 통증이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고, 헤어짐이 없다는 게 아니라 헤어짐이 영원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헤어짐이 영원하지 않으니 또한 만날 기회가 다시 생기는 겁니다.

우리는 반복되는 습관을 ‘까르마(Karma)’라고 합니다. 먹는 습관, 행동하는 습관, 말하는 습관, 삶의 습관, 생각의 습관, 마음 씀씀이의 습관이 모두 까르마입니다. 한 번 습관이 들면 잘 안 변하니까 이걸 두고 ‘전생으로부터 타고났다’, ‘그게 네 팔자다’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그러나 까르마 또한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잘못된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열립니다.

예를 들면, 어릴 때부터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부정적인 사유 체계가 자리 잡은 사람은 사물을 항상 부정적으로 보고 ‘이게 내 성격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부정적인 사유 체계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금방 그렇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길이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즐거운 것이 괴로움의 씨앗이 되는 이유

지금 즐거운 것이 괴로움의 씨앗이 되기 때문에 이 즐거움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 더 이상 괴로움을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괴로움에 빠져 있지만 이 괴로움 또한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있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괴로움을 더 이상 만들지 않는 거예요. 이렇게 할 때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즐거운 것은 시간이 흐르면 괴로움의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즐거운 것에 내가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집착을 할까요? 영원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괴로움의 씨앗을 심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늘 지금의 즐거움에 취해 있지만, 그것은 곧 괴로움의 씨앗을 심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루벨라 가섭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해탈을 얻었을 때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옛날에 제가 복을 빈 것은 윤회의 씨앗을 심은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을 만나고 나서 저는 윤회의 씨앗을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삶을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성차별이 있을 때는 여자로 태어난 것이 괴로움이고, 신분 차별이 있을 때는 종으로 태어난 것이 괴로움이고, 신체장애에 대한 차별이 있을 때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 것이 괴로움이고, 이성애자를 우대하는 세상에서 동성을 좋아하는 성향을 타고난 사람은 그렇게 태어난 것이 괴로움이고, 부자를 부러워하는 세상에서는 가난하게 태어난 것 자체가 괴로움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영원하지 않고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거기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가만히 놔둬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좋아지지만, 우리가 변화를 위한 노력을 하면 빨리 그 괴로움을 없앨 수 있어요. 그게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을 하면 괴로움의 씨앗을 심지 않을 수 있어요. 현재의 즐거움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미래의 괴로움을 만들지 않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과거에 지은 씨앗으로 인해 현재에 생겨난 괴로움을 소멸시키게 되는 거예요. 있는 괴로움은 소멸시키고, 앞으로 발생할 괴로움은 미연에 막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괴로움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있는 괴로움을 없애는 것만 수행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있는 괴로움을 없애는 노력은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계속 괴로움의 씨앗을 심고 있다면, 괴로움을 완전히 없앨 수가 없습니다.

괴로움의 씨앗을 심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하는 것이 바로 ‘계율’입니다. 성질대로 하게 되면 지금은 좋을지 몰라도 나중에 괴로움의 과보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계율을 어기는 행위를 멈추라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 괴롭다면 그 본질을 꿰뚫어서 거기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들이 죽어서 괴로운 여인이 있다고 합시다. 지금 아들이 죽은 것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에요. 이미 과거에 아들이라는 존재에 대해 집착했기 때문에 지금의 괴로움이 발생한 거예요. 이 괴로움에는 실체가 없다는 본질을 꿰뚫어서 알 때 바로 여기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방향성을 잘 잡고 있는가

해탈로 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이 방향성의 핵심은 괴로움이 있는 현실에서 괴로움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고(苦)로부터 멸(滅)로, 중생으로부터 부처로, 고뇌와 속박으로부터 열반과 해탈로 나아가는 거예요. 이런 방향성이 잘 잡혀 있어야 올바른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거야.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면 행복할 거야. 인기가 있으면 행복할 거야. 지위가 높으면 행복할 거야. 시험에 합격하면 행복할 거야.’

이것은 해탈로 가는 방향성이 아니에요. 이것은 마치 마약처럼 일시적으로는 행복감을 주지만 그게 또 다른 괴로움의 씨앗이 돼서 더 큰 괴로움을 만들고, 그 과정이 계속 반복됩니다. 반복되기 때문에 이걸 ‘윤회(輪廻)’라고 하는 거예요. ‘이 길이 진정한 자유와 행복으로 나아가도록 해주느냐’ 하는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그게 바로 수행의 관점입니다. 올바른 관점을 잡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 관점을 제대로 잡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애는 많이 쓰는데도 결과가 잘 안 나오는 거예요. 노력도 부족하겠지만, 대부분 관점을 제대로 못 잡은 상태에서 애를 쓰기 때문에 힘든 거예요. ‘단식을 한다’, ‘허리를 땅에 안 붙이는 수행을 한다’, ‘삼천 배를 한다’ 이러면서 공연히 야단을 부립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이라잖아요. 방향을 잘못 잡아놓아서 그래요. 대전에 사는 사람이 부산에 가겠다면서 북쪽으로만 계속 올라가니까 아무리 가도 끝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첫째, 방향성을 잘 잡아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가

둘째, 지속성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방향을 잘 잡았다고 해도, 방향만 잡아놓고 안 가고 있으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가 없습니다. 꾸준히 지속적으로 행해야 그 방향으로 갈 수 있어요. 하루 만에, 혹은 한 걸음 만에 목적지에 다다를 수는 없습니다.

방향성에 있어서는 대승(大乘)불교보다 선(禪)불교의 관점이 더 좋아 보이기도 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경전을 많이 읽고, 고행을 많이 하고, 세세생생 수행을 해야 해탈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해탈이 너무 막연하게 느껴지기가 쉬워요. 그런데 선(禪)불교에서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하면서 너의 본심을 딱 꿰뚫어 보면 바로 해탈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대승불교에 비해 굉장히 파격적이죠. 그런데 이런 선불교의 관점만 가지면 요행을 바라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일확천금을 노리듯이 어느 순간에 팍 깨쳐서 모든 걸 끝내버리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지금 한국 불교에는 이런 병폐가 굉장히 많습니다.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꾸준함입니다. 꾸준히 해야 변화가 오는 거예요. 동지(冬至)가 지나면 태양이 하루 동안 내리 쬐는 시간이 늘어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방 따뜻해지는 게 아니잖아요. 서너 달이 지나야 비로소 우리가 피부로 느낄 만한 따뜻함이 생겨납니다. 동지가 12월 22일이니까 1월 22일, 2월 22일, 3월 22일, 4월 22일, 이렇게 서너 달은 지나야 풀도 나고 새순도 올라옵니다. 이처럼 수행도 꾸준히 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마지막에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세상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수행 정진해라.’

세상은 덧없다는 말은 세상이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니 집착할 바가 못 된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어에 대한 해석을 잘못하기 때문에 자꾸 허무주의에 빠지는 거예요.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뜻입니다.

‘괴로움에는 실체가 없다. 그러니 너무 집착하거나 좌절하지 마라. 꾸준히 수행하면 자유롭고 행복한 삶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

이 말을 하시기 전에 부처님은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나는 출가한 후 지난 51년 동안, 성도(成道)를 하기 전이나 그 이후나 늘 꾸준히 이 길을 걸어왔다.’

그런데 우리는 꾸준함이 없어요.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고 하듯이 뭐든지 막 성질대로 하다가 안 되면 금방 그만두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방향성을 잘못 잡아서 아직 헤매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방향성을 잘 잡아도 꾸준히 안 해요.

오는 봄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태양이 일정하게 꾸준히 비추면 온도도 일정하게 올라가야 할 텐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주어진 조건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올해도 1월에는 봄날 못지않게 따뜻해서 꽃이 피고 난리였다가 소한(小寒), 대한(大寒), 입춘(立春)까지 다 지난 2월 말에 연중 최고 추위가 닥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햇살이 꾸준히 내리쬐면 어쨌든 오는 봄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진행 과정에는 기복이 있기 마련이에요. 내 마음에 기복이 있다기보다는 주변 상황에 변화가 있을 때가 많습니다.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고, 따뜻한 날도 있고, 추운 날도 있어요. 내가 가는 것은 꾸준히 가지만, 그 날 그 날에 따라 오르막을 만나면 속도가 느려지고, 내리막을 만나면 속도가 좀 빨라지는 거예요. 물이 평지를 만나면 천천히 흐르고, 약간 비탈을 만나면 빨리 흐르고,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돼서 사납게 흐르고, 연못을 만나면 멈추는 것과 같아요. 물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게 아니에요. 주어진 환경에 따라서 결과가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정토회가 하는 사업도 시대의 변화를 잘 만나면 조그마한 일도 굉장히 큰 주목을 받게 됩니다. 반대로 굉장히 잘나간다고 야단이던 연예인이 어느 한 사건에 휘말려서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럴 때 인기에 집착하는 사람은 거기에 들뜨거나 거기에 절망하기 쉽습니다.

물론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반성을 해야 하지만, 가는 것은 꾸준히 가야 해요. 그런 변화는 살면서 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 같이 정토회 안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환경에 따라서 어떤 사람이 갑자기 ‘와, 잘했다’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고, 어떤 경우는 한 해 동안 진짜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주위 환경을 만나느냐에 따라 이런 일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희로애락에 물들게 되면 희로애락에 빠져버립니다. 우리의 삶은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고, 어려움도 있지만, 그것을 보는 내 마음은 잔잔해야 해요. 그런데 여러분은 상대가 자기를 좀 좋아해 주면 홀딱 빠지고, 자기에게 조금만 말 한마디 잘못하면 삐쳐서 말도 안 하고 서로 원수가 되잖아요.

그러니 꾸준함이 중요합니다. 오늘이 8일 출가열반 용맹정진을 시작한 지 3일째인데, 작심삼일이라고 벌써 오늘부터 정진을 안 하는 사람이 생겼겠네요. (모두 웃음)

변화가 없다고 느껴질 때 자기를 점검하는 방법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자꾸 꾸준함을 강조하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어요.

‘저는 꾸준히 3년 동안 정진을 했는데 왜 변화가 없습니까?’

그 이유는 첫째, 방향성이 잘못 잡혔거나, 둘째, 아직 바깥으로 드러날 때가 안 됐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없다고 느낀다면 ‘아, 그러면 더 꾸준히 해나가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해요. 평균적으로 볼 때 100일 정도 꾸준히 정진하면 자기를 알 수 있어요. ‘내가 화가 많구나’, ‘내가 게으르구나’ 이런 걸 알 수 있습니다.

3년 정도 꾸준히 정진하면 다른 사람이 볼 때 ‘이야, 너 요새 성질이 많이 죽었다’ 이런 얘기가 한두 마디씩 나오게 됩니다. 그 말은 변화가 왔다는 뜻이지만, 사실 변화는 그때 온 게 아니에요. 그전부터 변화는 꾸준히 오고 있었지만 남의 눈에 띌 정도로는 아니었던 거예요. 눈에 띌 정도의 변화가 왔을 때 비로소 옆에 있는 사람들이 ‘좀 변한 것 같다’, ‘얼굴이 밝아졌다’ 이렇게 평가를 합니다. 적어도 그 정도가 될 때까지 꾸준히 해야 합니다. 무턱대고 ‘스님, 저는 3년 지났는데 왜 안 바뀝니까?’ 이렇게만 물으면 안 돼요. 그건 꾸준함이 없었거나 방향이 잘못 잡혔다는 뜻입니다.

방향이 잘못 잡힌 경우라면 다시 지도를 받든 지 자기 점검을 해야 해요. 부처님은 6년 동안 정진을 하고도 해탈을 못 했어요. 그래서 부처님도 자기 점검을 했습니다. 부처님은 꾸준함이 문제는 아니었어요. 본인이 생각해도 게을러서 해탈을 못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본인이 목숨을 걸고 했는데도 해탈에 이르지 못하니까 자기 점검을 한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자기 점검을 할 필요가 별로 없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부처님처럼 노력을 해본 적이 별로 없으니까요. (모두 웃음)

일단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다가 안 되면 ‘어, 이게 왜 안 되지?’, ‘뭐가 잘못됐지?’ 이렇게 반성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 이 문제 때문에 그랬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문제가 잘 발견되지 않으면 도반들에게 물어봐야 해요.

‘저를 위해서 좀 얘기해주세요. 제가 제 모습은 잘 파악이 안 됩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제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지적을 요청하면 말해주는 사람도 말하기가 쉽습니다.

내가 노력하지 않았는데 나에게 주어진 것은 절대 내 재산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정성을 들이고 공덕을 쌓은 만큼 사람도 유지되고 재물도 유지되는 거예요. 복권에 당첨돼서 그 돈으로 더 잘 살게 된 사람은 백 명에 한 명도 드물어요. 거의 다 패가망신(敗家亡身)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재앙보다 더 무서운 게 복입니다. 여러분은 조금 노력하고 많은 이득을 보려고 하지만, 그러는 것 자체가 자신을 파괴하는 일이에요. 우리가 한 명 한 명에게 정성을 들여서 꾸준히 성과를 쌓아나가야 어려움이 닥쳐도 이 규모를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정토회도 지금 법회를 2주째 안 하고 있는데, 앞으로 법회를 안 하는 기간이 더 길어지면 정토회가 얼마나 착실한 사람들이 모인 단체인지 그 여부가 드러날 거예요. 사람이란 딱히 신심(信心)이 없어도 매일 이렇게 모여서 법문을 듣다 보면 거기에 취해서 같이 가게 됩니다. 이것도 까르마이니까요. 그런데 이걸 딱 중지시켜 놓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중심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출가일부터 열반일까지 앞으로 일주일간은 코로나19가 어떻게 되든지, 수입이 늘든지 줄든지, 출근을 하든지 안 하든지 관계없이 그냥 꾸준히 정진을 해나가 봅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정진하라’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앞에서 얘기했잖아요. 영원한 것도 없고, 실체도 없기 때문에 집착할 바가 없어요. 그러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웃으면서 정진합시다.”

“네.”

가볍게 웃으며 법문을 마쳤습니다. 법문을 마치고 대중은 수행자로서 자신의 방향성과 지속성을 돌아보며 300배 정진과 명상을 했습니다.

오후 2시에는 러시아 크라스키노 발해박물관 신축공사와 관련해 시공사 대표님을 만났습니다. 정토행자이기도 한 김태우 대표님은 스님의 발해역사 복원 사업에 힘을 보태고 싶다며 적극적으로 신축 공사를 맡아 주기로 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왜 이 공사를 하게 되었는지 취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러시아 크라스키노 지역에 가면 발해시대의 염주성 터가 남이 있는데, 거기서 유물이 계속 발굴되고 있어요. 매년 여름에 제가 동북아 역사기행을 가고 있는데, 발굴하는 교수님이 그 유물들을 전시할 곳이 없다고 해서 이번에 좋은벗들에서 발해역사관을 지어주기로 했습니다.

원래는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신한촌 유적지를 복원하기 위해서 몇 해 전에 좋은벗들에서 모금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업을 주관한 국제한민족재단에서 공사에 대한 허가를 러시아로부터 받아내지 못하는 바람에 사업이 중단되었어요. 모금한 돈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던 중에 겔만 교수님을 만나서 발해 유물을 전시할 곳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모금한 돈을 발해역사관을 짓는데 쓰면 어떠냐고 해서 이 사업이 추진되게 된 거예요. 마침 유니베라회사에서 크라스키노 지역에 있는 빈 땅을 제공해 준다고 했고, 좋은벗들에서는 건축비를 지원하기로 한 겁니다. 그래서 당시에 모금을 해주신 분들에게 모금액이 이렇게 사용되었다고 알려줘야 해요.

저희는 후원자들이 모금해 준 돈을 최대한 아껴 써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지금까지 활동해 왔어요. 그러니 대표님께서 최대한 비용을 아껴서 돈이 적게 들도록 건물을 지어 주셔야 해요.” (웃음)

“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비용을 아껴서 지어달라는 스님의 요청을 대표님은 흔쾌히 받아 주었습니다. 더불어 대표님은 스님이 고려인들을 좀 도와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제가 예전에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인들을 위한 예술회관을 짓는 일도 했었는데요. 고려인들도 힘들게 살고 있어서 도움이 많이 필요하더라고요. 스님께서 우즈베키스탄에도 꼭 한 번 오셔서 고려인들을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고려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아요. 정부를 설득해서 추진할 수 있는 일이면 굳이 제가 해야 할 이유는 없거든요. 그런데 발해역사관을 짓는 사업은 제가 정부를 여러 번 설득해 봐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어요. 우수리스크에 최재형 집을 복원하는 일은 민족의식과 관계된 일이니까 정부가 좀 관심을 가지는데, 발해역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 이 일은 제가 하려고 하는 거예요.”

“고려인들이 한국에 갈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을 해봐도 좋겠는데요.”

“자꾸 그분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려고 하면 안 돼요. 그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책을 해야 해요. 해외에 살면서 한국에 충성하는 동포들이 몇 십만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엄청난 자산이거든요. 그분들을 자꾸 한국에 데려오는 것은 대한민국의 자산을 잃어버리는 행위예요. 우리가 그 나라에 가서 새로 자리를 잡으려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리고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숫제 건물만 지어주면 좋은 소리만 들을 수 있는데, 사람을 도와주면 대부분 원수가 됩니다. 처음에는 고마워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왜 이것밖에 안 도와주냐’ 하는 원성을 들을 수밖에 없거든요. 헌신적으로 도와줘도 오해가 생길 수 있는데, 심지어 공익을 내세우면서 약간의 사익까지 추구하면 그 모습을 현지 사람들이 다 보고 배웁니다. 그래서 그들도 나중에는 사익을 추구하게 돼요.

그래도 우즈베키스탄 안에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각지대가 있다면 이야기를 해주세요. 저도 얼마든지 도울 마음이 있거든요.”

스님은 다시 한번 크라스키노 발해박물관을 최대한 예산을 아껴서 지어달라고 당부한 후 사인한 책을 대표님에게 선물했습니다.

미팅을 마친 후 스님은 평화재단 사무실을 돌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 실무자들을 격려했습니다. 저녁에는 서울 정토회관으로 돌아와 여러 업무들을 처리한 후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8일 출가열반 용맹 정진을 시작한 지 4일째를 맞이하여 정토행자들을 위해 온라인 생중계 법문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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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야


감사합니다
방향성과 꾸준함으로 부지런히 수행 정진 해야겠다 나를 다시 점검합니다

2023-01-07 06:26:27

금강지

방향성과 꾸준함에도 깨어 수행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10-11 20:17:37

호롱불

복이 재앙보다 무섭다는 말씀 깊이 새기겠습니다. 노력은 적게하고 많은 이득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나를 파괴 하는 일이라는 말씀에 두려운 마음으로 경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10-11 07:2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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