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3.17. 룸비니 초청법회
“돈 욕심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오늘도 파란 하늘에 화창한 날씨입니다. 스님은 아침 일찍 산나물을 캐러 뒷산으로 향했습니다.

공동체 실무자들은 어제 일하던 비닐하우스 앞에 도착해 함께 일나누기를 한 후 비닐하우스 안에 퇴비를 뿌리는 일을 함께 했습니다.

퇴비를 다 뿌린 후에는 포크레인으로 땅을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땅을 한 번 뒤집고 나면 다음 주부터는 각종 채소들을 이곳에 심을 수 있을 겁니다.

비닐하우스 정비를 거의 끝마치고 실무자들은 감자를 심으러 밭으로 이동했습니다. 흙을 만지며 감자를 모두 심고 나니 어느덧 오전 시간이 다 지나갔습니다. 스님은 오전에 법사님들과 올해 농사에 대해 의논을 하고, 원추리나물을 한 바구니 뜯은 후 서울 갈 채비를 했습니다. 실무자들이 감자를 심고 있는 사이 스님은 사단법인 룸비니의 초청법회를 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사)룸비니는 직장, 학교, 가정 등 현실에서 바른 불교를 실천하고자 만들어진 재가 불자 단체입니다. 1959년, 서울의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과 몇몇 대학교 학생들이 종로구에 있는 한 고등학교 강당에서 룸비니를 창립했습니다.

60여 년이 지나 그때의 청년은 노년이 되고, 장년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자녀가 이제 청년이 되어 함께 손잡고 룸비니를 찾았습니다. 오늘은 청년법회지만, 어린이부터 청소년, 청년, 장년, 노년까지 다양한 연령의 불자 백여 명이 룸비니 강당에 모였습니다. 자리가 꽉 차 서서 듣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회원들은 최근 들어 가장 많은 사람이 모였다며 기뻐했습니다. 여느 즉문즉설 강연보다 더욱 설레는 분위기였습니다.

한 편, 스님은 기차역에서 종로구까지 오는 길에 마라톤대회로 차가 많이 막혀 조금 늦게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기다린 청중들에게 사과하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근데 청년들 법회인데 연식이 좀 많네요.(모두 웃음)

인생문제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비교적 합리적이고, 비교적 효과적인 길을 찾아서 이리저리 인생을 사는 것이거든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악몽을 꾼다면 악몽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이 뭘까요? 악몽의 종류는 수백, 수천 가지입니다. 그 문제를 꿈속에서 해결하려고 하면 악몽의 종류만큼이나 해결책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꿈을 깨는 것이 해결책이라면 그 꿈의 종류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눈만 뜨면 되니까요. 그러니 꿈의 종류를 너무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떤 말을 하던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아요. 자, 누구든지 자유롭게 질문해보시기 바랍니다.”

첫 질문자는 룸비니에 청년들이 많이 오게 할 수 있을지 물었습니다.

“그것은 비유하면 자영업이 잘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모두 웃음) 룸비니에만 청년이 안 오는 것이 아니라, 전 불교계에도, 불교계뿐만 아니라 전 종교계에도 청년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적절한 비유에 청중들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왜 룸비니에 와야 합니까? 젊은이들의 고뇌에 우리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그들이 절에 오고 안 오고가 핵심이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절에 와서 좋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모두 웃음) 우리처럼 나이 든 세대는 허무맹랑한 종교적인 이야기들을 늘 듣고 살았지만, 젊은이들에게는 그런 것이 관심사가 아니라는 거죠. ‘어떻게 하면 룸비니에 젊은이들이 오게 할 거냐’는 관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 젊은이들이 많은 곳에 가서 그들이 어떤 문제를 고뇌하고, 어떤 걸 좋아하는지 대화를 해보세요. 만약 젊은이들이 영화를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한다면, 룸비니에서 그런 것을 이용해서 법회를 만들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그 일을 룸비니가 해야 할까요?

그냥 홍보를 열심히 하는 것은 일시적 도움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사양산업을 조금 유지시킬 수 있지, 새로운 미래의 방향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초등학생을 만나보거나, 중고생을 만나보거나, 대학생을 만나봐서 그들이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엇을 힘들어하는지 들어보고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접근하면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스님은 종교계가 처한 현실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다음으로 사업을 하는 청년이 돈에 대한 욕심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소프트웨어 개발과 온라인 광고를 하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욕심, 사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업을 하다 보니 돈 욕심이 생깁니다. 제가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면 좋을까요?”

스님은 먼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욕구에 따라 살아가는 욕계(欲界)라는 것을 자세히 설명한 뒤 욕구가 왜 괴로움이 되는지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욕구가 왜 괴로움이 될까

“욕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우리 존재의 모습입니다. 어찌 보면 사람이 살아가는 동력이 욕구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욕구 자체가 고뇌의 원인인지, 아니면 욕구의 어떤 부분이 고뇌가 되는 것인지 따져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할 때 그것이 모두 괴로움이 될까요? 아닙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기분이 좋다고 느끼죠. 그것이 곧 락(樂), 흔히 말하는 즐거움입니다. 반대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져요. 이것이 곧 고(苦), 괴로움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고에 따라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껴요. 이 둘의 뿌리는 모두 ‘욕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고(苦)와 락(樂)을 윤회한다'라고 표현하셨어요. 보통 윤회를 사람이 죽어서 다음 생에 동물로 태어났다가, 그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하는 것을 윤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건 인도 전통사상인 힌두교나 브라만교에서 의미하는 윤회예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윤회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되풀이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즐거움을 행복으로 삼고, 즐거움을 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을 얻으려고 할 때, 반드시 괴로움이 뒤따라와요. 그러니 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즐거움을 행복으로 삼는 가치관을 ‘쾌락주의’라고 합니다. 이런 가치관으로 살면 욕구가 만족될 때 잠깐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러나 욕구는 금방 더 커지는 습성이 있습니다.

즐거움이 줄어드는 법칙

'즐거움 감퇴 법칙'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예를 들어, 여기 이 학생이 저에게 대학교 등록금이 부족하다며 도움을 청했다고 해봅시다. 학생의 이야기를 듣고 제가 매달 100만 원을 지원하기로 하면, 우선 이 학생은 기분이 좋을 거예요. 첫 달에 100만 원을 주고, 다음 달에도 100만 원을 줬어요. 그렇게 매달 100만 원씩 받으면 기분이 좋긴 할 텐데, 받을 때마다 늘 같은 정도로 기분이 좋을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강도가 약해질까요?" (모두 웃음)

"줄어들 것 같아요."

"네, 같은 100만 원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즐거움이 줄어듭니다. 1년, 2년이 지나고 3년 정도가 되면 즐거움이 줄어드는 정도가 아니라 '아직도 100만 원만 주나?' 이렇게 불만이 생기기 시작해요. (모두 웃음) 그때부터는 괴로움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여기에서 처음 느낀 즐거움을 유지하려면 첫 달에 100만 원을 주고 몇 달 동안 100만 원씩 주다가 즐거움이 줄어든다 싶을 때부터는 매달 200만 원으로 올려주어야 합니다. 200만 원을 받을 때의 즐거움도 계속 유지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같은 일이 생깁니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또 300만 원으로 올려줘야 해요. 그렇게 400만 원, 500만 원으로 계속 올려야겠죠.

그런데 돈이 늘어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에요. 매달 100만 원 주다가 200만 원 받으면 그때는 기분이 좋은데, 그 후로 300만 원, 400만 원으로 늘어나면 이제 언제 돈이 늘어날지 예측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는 또 '계속 100만 원씩만 올려주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즐거움이 줄어들기 시작해요. (모두 웃음)

그렇다고 기하급수로 100만 원, 200만 원, 400만 원, 800만 원으로 올려주면 해결이 될까요? 그것도 처음에는 즐거움이 유지될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고 패턴이 예측되면 다시 즐거움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욕구를 만족시키는 방식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걸 장작불에 비유하셨어요. 장작불을 피운다고 생각해보세요. 불이 커지면 많은 장작이 필요하고, 불이 더 커지면 더 많은 장작이 필요하잖아요. 그것처럼 욕구도 끝이 없습니다. 욕구를 충족하는 것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근원적인 해결 방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중도 中道

부처님께서도 젊은 시절에는 욕구를 충족하는 길을 따랐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하셨어요. 그러다가 29살이 되던 해에 '적어도 욕구를 충족하는 길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하고 출가(出家) 하셨어요. 출가한 후에는 고행을 시작하셨습니다. 고행상에 나온 모습 보셨죠? 주변에 함께 수행하는 친구들이 부처님을 보고 '저 사람은 반드시 성불할 것이다'하고 존경할 만큼 그 누구도 하지 않은 정도의 고행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건 고행을 통해서도 해탈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출가 전까지는 욕구에 따라 살았고, 출가 후에는 욕구를 억제했습니다. 욕망의 씨를 말리기 위해 극심한 억제를 했는데도 욕망은 끝이 나지 않았어요. 그렇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던 부처님은 새로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쾌락주의와 고행 주의가 정반대 같지만 그 뿌리가 같다는 것이었어요. 쾌락주의와 고행 주의는 욕구에 대한 대응방식이 다를 뿐 둘 다 '욕구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에서 같습니다. 욕구를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억제할 것인가에 따라 쾌락주의와 고행 주의로 나뉘는 거예요.

이것을 알게 되자 부처님은 욕구를 놓아버리는 새로운 길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욕구를 따라가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는 거예요. 이렇게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또는 욕구를 놓아버리는 것이 중도(中道)입니다. 중도는 쾌락과 고행의 가운데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둘로부터 벗어나버리는, 즉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화가 날 때 화를 내는 것은 쾌락주의의 방식이고, 참는 것은 고행 주의의 방식입니다. 앉아서 오랜 시간 명상을 하며 다리가 아플 때 다리를 펴는 것은 쾌락주의의 방식이고, 참는 것은 고행 주의의 방식이에요. 다리가 아프면 다리를 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때 다리를 펴고 싶은 것이 욕구예요. 그 욕구를 따라서 다리를 펴면 나중에 후회합니다. (모두 웃음) 후회가 싫어서 참으면 또 스트레스가 생깁니다. 욕구가 일어날 때 참으면 스트레스를 받고, 욕구를 따라가면 과보를 받습니다.

그런데 제3의 길이라고 하는, 붓다가 발견한 중도(中道)는 그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욕구가 일어날 때 욕구를 따라가지도 않고 억제하지도 않고 다만 알아차릴 뿐입니다. 이걸 '알아차림'이라고 해요. 욕구를 따라갈 것인지, 참을 것인지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욕구가 욕구인 줄 알 뿐입니다. 욕구를 참으면 스트레스를 받는데, 참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어,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가 일어날 때, 그 욕구를 따라서 담배를 피우면 과보를 받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불평을 하고, 담배 연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과보가 따릅니다. 그렇다고 참으면 본인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다 보니 참다가 터지고, 터지면 과보를 받으니까 또 참고, 그렇게 참다가 다시 터지고를 반복하는 게 우리 인생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붓다의 가르침을 체험하고자 한다면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 '아, 지금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하는구나'하고 자신의 욕구를 알아차리는 거예요. 그래서 '피워야겠다'거나 '안 피워야지'가 아니라 다만 올라오는 욕구를 알아차릴 뿐입니다. 막상 실제로 이걸 해보면 한쪽으로 넘어지게 됩니다. (모두 웃음) 그래서 욕구를 따라가거나 억제하기 이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선(禪)의 언어로 표현하면,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예요.

이것을 연습하는 게 수행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수행이 되는 게 아니에요. 실제로 해보면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입니다. 이쪽으로 치우치면 또 일어나서 해보고, 저쪽으로 치우치면 또 일어나서 하면서 자꾸 연습을 해나가면 조금씩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해나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걸 꾸준히 연습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참선도 하고 나름대로 수행을 열심히 하는데도 자기 고뇌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이유는 수행의 관점과 목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부족해서입니다. 참선을 하거나 수행을 할 때 관점을 정확하게 잡고, 그 목표를 향해서 연습해나가야 해요. 수행의 원래 목표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흉내 내니까 실제로는 형식적 연습만 할 뿐 마음의 자유로움이라는 결과가 얻을 수 없는 겁니다.”

스님은 욕구와 수행에 대해 전반적인 설명을 한 뒤 욕구와 욕심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욕구와 욕심의 차이

“질문자가 돈을 많이 벌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심리입니다. 돈을 벌고 싶으면 돈을 벌면 돼요. 만약 이번에 시도했는데 기대만큼 벌지 못했다면 다시 해보면 됩니다. 그런데 기대만큼 벌지 못해서 괴로워진다면, 즉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서 괴롭다면 그건 ‘욕심’ 때문입니다. 객관적으로 그 욕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열 번의 노력을 해야 하는데, 두 번만 노력하고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괴로워하거든요. 괴로움이라는 것이 왜 생기는지를 가만히 보면 이렇습니다. 원하는 것이 안 되면 다시 시도해보면 됩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것 자체가 욕심은 아니에요. 그런데 괴로움은 욕심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이 도리를 잘 알면, 무언가를 이루고 싶을 때 연구해서 노력하면 됩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다행이고, 안 되면 '이렇게 하니까 안 되네, 다음에는 저렇게 해 봐야지'하고 다시 해보면 돼요. 그렇게 이 방식도 해보고 저 방식도 하면서 자꾸 연습을 하면, 계속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가니까 실력이 늘어납니다. 그렇게 궁극적인 길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거예요. 그렇다고 반드시 가야 되는 건 아니에요. 하다가 '아, 이거 할 필요가 없구나'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만둬도 됩니다. 그런데 보통 중간에 힘이 부족해서 그만두기 때문에, 미련이 남아서 괴로운 거예요. 미련이 없으면 괴롭지 않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원(願)을 중요시하는데, 욕심과 원(願)의 차이는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내가 괴로우면 욕심이고 괴롭지 않으면 원(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심과 원을 구분할 때 이 같은 기준을 잡으면 비교적 정확합니다.

욕심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욕심이 괴로움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에요. 운동선수가 운동을 하는데 괴로울 일이 뭐가 있고, 사업하는 사람이 사업을 하는데 괴로울 일이 뭐가 있으며, 스님들이 수행을 하는데 괴로울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선방에 가보면 많은 스님들이 괴로워합니다. 20년째 40 안거를 했는데 이번 안거에서도 깨닫지 못했다고 괴로워해요. 20년 동안 국회의원 선거에 나갔다가 계속 떨어져서 우는 것이나, 20년 동안 사업을 했는데 아직 큰돈을 벌지 못해서 우는 것이나, 20년 동안 정진했는데 도를 이루지 못해서 우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심리적으로 보면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괴로워한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그 대상이 돈이면 세속적인 것이라고 하고, 도(道) 면 수행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정의가 잘못된 방식이에요. 여기서 도와 돈의 차이는 'ㄴ'자 하나 붙은 것밖에 없어요. (모두 웃음)

무언가 손에 쥐려고 하는데 그것이 감자냐, 고구마냐, 누룽지냐, 사탕이냐의 차이밖에 없는 거예요. 이 손에 쥐려는 것을 놓아야 합니다. 쥐는 대상이 도(道)라 하여 도를 닦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수행적 관점을 지니고 있으면 돈을 벌든, 사업을 하든, 학문을 하든, 이렇게 해서 안 되면 저렇게 하고, 저렇게 해서 안 되면 또 다른 방식으로 해서 나날이 실력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루 하면 하루만큼, 열흘 하면 열흘만큼, 한 달 하면 한 달만큼 좋아지는 것이 수행이에요. 그런데 요즘 수행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가만히 보면 수행도 하나의 대상으로 삼고 욕심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욕심을 내려놔야 하는데, 그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수행인데, 도리어 욕심의 대상으로 수행이라는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고뇌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 거예요.

관점만 바로 잡으면 사업을 하는 것도 수행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드리는 말씀의 요점이에요. 관점만 분명히 하면 욕구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질문자도 수행자로서 사업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수행자는 괴로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니 만약 사업을 하다가 괴로우면 '아, 내가 수행의 관점을 놓쳤구나'하고 돌아오는 것이 수행자입니다.

자, 질문을 하고 들어 본 소감이 어때요?”

“스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욕심이 많았는데, 욕심은 내려놓고 놀이를 하듯이 편하게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님은 웃으며 질문자에게 _“옛말에 '일은 사람이 하고 뜻은 하늘이 이룬다’는 말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마세요.”_라고 격려했습니다.

재가 불자 단체여서인지 재가불자로서 어떻게 수행해야 할 지에 대한 질문도 있었습니다. 스님은 재가자가 지켜야 할 여덟 가지 계율을 자세히 설명한 후 재가자가 수행하기 좋은 이유에 대해서도 알려주었습니다.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것은 출가, 재가 여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출가하면 도가 더 높아지고, 재가하면 도가 낮다는 법도 없어요. 비구 스님을 중심으로 경전이 편집되어서 그렇지, 부처님 당시에 깨달은 사람 중에 비구와 비구니의 차이가 없고 출가수행자와 재가 수행자도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제가 수행지도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재가 수행자들이 출가 수행자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도를 이룰 수 있는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출가 수행자들은 화를 낼 일이 별로 없는데, 재가자들은 옆에서 아내나 남편이 계속 긁어줍니다. (모두 웃음) 거기에 말려들면 매일 화를 내면서 살겠지만, 수많은 연습을 통해서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시장통에 살면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출가 수행자들은 산속에서는 평정심을 유지하지만, 막상 자갈치 시장에 가서 장사를 하면서도 유지될 것인지 모르겠어요. 그런 점에서 실제 수행의 정도는 재가 수행자들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토회 공동체 안에 사는 사람들과 밖에 살면서 수행하는 사람들을 비교해도 그렇습니다. 공동체에 사는 사람들은 평소 예불에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공동체에서는 시간이 되면 목탁을 치고 다 같이 예불을 드리니까 모두 참석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는 명절에 집에 가서 술도 마시고 가족들과 어울린 다음 날 기도를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재가 수행자들은 매일 그런 조건 속에서 기도를 하니까 명절이든 초상 날이든 크게 관계없이 기도를 합니다. 평소에 보는 사람도 없고 깨워주는 사람도 없는데 매일 5시에 일어나서 기도를 하니까 별 어려움이 없는 거예요. 재가자들은 처음에 시작하기가 어렵지 일단 한다면 악조건에서 출발해서 하기 때문에 수행을 하는데 훨씬 도력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운동을 할 때도 코치가 있는 게 도움이 되죠. 수행에서는 바로 옆에 있는 아내, 남편, 부모, 자식이 코치예요. (모두 웃음) 저는 여러분과 가끔 만나니까 여러분을 속일 수 있지만 아내나 남편은 늘 만나니까 속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웃으려고 해도 아내가 조금만 긁으면 속에서 성질이 올라오잖아요. 이건 내가 정말 변해야 편안해질 수 있지 지속적으로 속일 수 없어요. 그렇게 재가 수행자들이 연습할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에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활동을 하는 데에는 승려의 모습을 하는 게 유리할 수 있겠죠. 능력보다 우선 외형적인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신뢰하잖아요. 수행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재가자들이 남을 속이지 않고 솔직하게 자기 힘껏 정진한다는 점에서 유리한 조건에 있습니다. 출가자들은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위선적인 행동을 많이 할 수 있어요. 머리 깎은 모양, 입고 있는 옷도 다르기 때문에 실력이 없는데도 가려지는 부분이 있어요. 진짜 실력이 있으면 머리 기르고 같은 작업복을 입고도 존경받는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 대중들과 다른 모양을 하고, 이름과 권위를 가지고 하는 것 자체가 실력을 보완하는 점이 없지 않아요. 그래서 저도 늘 제 자신을 경책 하면서 나 스스로를 속이지 않도록 유의하려고 합니다. 설령 대중들이 나에게 속더라도 나는 나에게 속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나에게 속으면 나 자신이 불쌍해집니다.

저도 제가 입고 있는 옷과 명칭, 대중의 환호에 속을 위험이 있습니다. 연예인들이 대부분 대중의 환호에 속거든요. 대중의 환호에 속으면 자기 인생을 망치게 돼요. 저는 정말 솔직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승려가 되었는데, 내가 나를 속이는 인생을 산다면 인생이 참으로 불쌍해집니다. 그러니 내가 나 자신에게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천하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내가 눈 감을 때 여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여러분도 생활하면 좋겠습니다."

법회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속지 말라.’며 승려로서 자신을 경계하는 스님의 모습에 큰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조계종 포교사로도 활동한다는 질문자는 “안 그래도 부인 때문에 매일 탐진치가 일어납니다.(웃음) 수행을 현실에 잘 맞춰 설명해주셔서 큰 도움이 됐습니다.”며 소감을 밝혔습니다.

그 외에도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법,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유학 중에 만든 단체의 운영이 어려워져 어떻게 도와야 할 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법회를 마치고 스님은 참석한 불자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1층 응접실과 마당에는 모든 청중들이 담소를 나누며 떡과 과일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오신다고 하셔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온 가족이 왔습니다.”

스님은 약 한 시간 동안 종교 전반과 불교의 현실, 청년 포교 등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룸비니는 창립 직후부터 한동안은 용성조사님이 계셨던 대각사의 법당을 빌려서 활동하기도 했는데요. 스님은 최근 3.1운동100주년 기념하여 발표하였던 알려지지 않은 용성조사님의 업적에 대해서도 알려주었습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룸비니 회원들은 다시 한번 룸비니를 찾아줄 것을 요청하며 스님을 배웅했습니다. 스님은 심야 고속버스를 타고 농사를 짓기 위해 다시 두북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전체댓글 31

0/200

각연

스님 감사합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2020-08-23 21:52:41

정명데오

"욕구를 충족하는 것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근원적인 해결 방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04-05 08:07:55

오진수

늘감사합니다

2019-04-12 20: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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