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신한촌 ► 혁명광장 ► 독수리전망대 ► 라즈돌노예역
2016.8.13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1일째 "신한촌 그리고 고려인"


 

안녕하세요? 오늘은 통일의병 동북아 역사기행의 마지막인 9일째인 동시에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의 1일째 날입니다. 스님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통일의병 역사기행팀을 배웅한 후 곧이어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한 청년 역사기행팀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어제밤 12시 넘어서 강연이 끝나는 바람에 대중들은 잠시 눈만 붙이고 새벽 4시에 기상해서 5시부터 마지막날 기행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어제 국경을 통과하면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는 바람에 오늘은 새벽부터 여러 곳을 바쁘게 둘러봐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녘,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이상설 유허비입니다. 이상설 선생은 성균관 교수에, 지금으로 치면 장관급까지 지낸 고위관리인데 관복을 벗고 독립운동에 앞장 선 분입니다. 유허비 앞에 선 대중들은 다함께 선생의 유언을 함께 읽고, 그 뜻을 기리는 묵념을 했습니다. 

 


▲ 이상설 선생 유허비

 

“동지들은 합세하여 기필코 조국 광복을 이루라. 나는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혼인들 어찌 감히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글은 모두 불사르라. 그 재를 여기 옛날 발해 땅이었던 솔빈강에 뿌려라.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와 같은 선생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하여 수이푼 강에 뿌려졌고, 지금은 비석만이 이곳에 남아 선생의 넋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묵념을 하는 도중 갑자기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상설 선생이 기행단의 추모 행렬을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요, 남북통일을 통해 이 한을 풀어달라고 간절히 울부짓는 것일까요? 오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대중들은 우왕좌왕하지 않고 비를 맞으며 묵념을 마치고 버스에 탑승했습니다. 

 

이어서 우수리스크 주위에 있는 다양한 독립운동 유적지를 참배했습니다. 발해 시대의 유물인 거북이 조각이 있는 거북공원을 지나 최재형 선생이 체포되어 사살되기 직전 1년 여 간 머물렀던 집무실, 대한국민의회의 전신인 전로한족중앙총회가 열렸던 장소, 4월 참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4월 참변비도 잇달아 참배했습니다. 

 


▲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에 머물렀던 집

 


▲ 전로한족중앙총회가 열렸던 장소

 


▲ 4월 참변비

 

마지막으로 발해의 솔빈부 성터 유적지를 찾았습니다. 솔빈부성은 발해의 15부 도시 중의 하나인 솔빈부의 수도 역할을 했던 성으로 추정됩니다. 수이푼 강을 자연해자로 이용할 수 있게 축조한 것이 고구려의 여러 성들과 비슷해 보였습니다. 

 


▲ 수이푼 강을 자연 해자로 해서 절벽 위에 쌓은 솔빈부성

 

솔빈부성에 도착한 기행단은 수이푼 강을 자연해자로 한 한쪽 절벽 위에 위치한 전망대에서 주위의 풍광을 조망해 보았습니다. 광할한 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잠시 발해인이 되어 초원 위를 말을 타고 달리는 상상을 해 봅니다. 기행단은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며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날 멋진 선물을 받아간다”며 기뻐했습니다. 

 


▲ 솔빈부성 전망대에서 바라본 우수리스크

 

스님도 “발해 성터에 왔으니 성 안을 걸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하며 산책을 제안했습니다. 외성에서 내성 쪽으로 15분 가량 걸어 보았습니다. 

 


 

가까이에서 본 내성은 생각보다 높고 규모가 컸습니다. 스님도 성벽의 크기를 가늠해 보고선 “지금까지 제가 답사해 본 발해 성곽 중에서 이 정도 크기로 남아있는 것은 정말 보기 드물다” 라고 하면서 반가운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내성 바로 앞에는 작은 덧성을 쌓아서 그 사이에 해자를 만든 겹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역시 스님은 “고구려 산성인 백암산성에도 가보면 성벽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런 덧성을 쌓은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 발해 솔빈부성의 내성과 덧성

 

스님은 대중들을 이끌고 성벽 위를 잠시 거닐어 본 후 솔빈부성을 나왔습니다. 

 

이제 기행단은 고려인들이 최초로 강제 이주 당한 라즈돌노예 기차역을 둘러본 후 이번 역사기행의 마지막 일정인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으로 향했습니다. 신한촌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벌어진 항일독립운동의 중추기지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지금은 신한촌을 상징하는 기둥 세 개가 아파트 단지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기행단은 이곳에서 조촐하게 참배 의식을 한 후 스님의 설명을 듣고 블라디보스톡 시내로 향했습니다. 

 


▲ 통일의병팀 신한촌 참배

 

신한촌 참배 프로그램이 끝나자 스님은 “이제 역사기행은 끝났어요. 잠시나마 관광객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을 드릴게요.”라고 하면서 환한 웃음을 보였습니다. 

 

관광객으로 돌아간 기행단은 먼저 혁명광장에 내려 기념사진 몇 컷을 찍고 독수리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전망대에서는 블라디보스톡 전체를 조망해 볼 수가 있는데 아쉽게도 안개가 자욱하여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중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즐겁게 기념사진을 찍으며 마지막 추억을 남겼습니다. 

 


▲ 블라디보스톡 혁명광장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블라디보스톡 공항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는 스님과의 즉문즉설을 통해 역사기행을 다시 총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은 역사기행단을 블라디보스톡 공항까지 무사히 배웅한 후 곧이어 오후 3시부터는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막 도착한 청년 역사기행팀을 반갑게 마중했습니다. 

 


▲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한 청년 역사기행팀

 

청년 역사기행팀이 공항을 빠져나와 버스에 올라타자 스님의 생동감 넘치는 강의가 다시 시작됐습니다. 스님은 러시아 연해주 조선족 이주 역사와 항일독립운동사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톡 시내에 진입한 청년 역사기행팀은 가장 먼저 신한촌을 방문했습니다. 신한촌을 상징하는 세 개의 기둥을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둘러서서 참배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 청년팀 신한촌 참배

 

태극기는 없지만 이곳에서 활동한 독립투사 분들을 생각하며 태극기에 대하여 경례를 하였습니다. 스님의 선창에 따라서 청년들도 목소리를 보태어 애국가도 불렀습니다. 학창 시절에 무심코 부르던 애국가가 오늘은 정말 애절하게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애국 선열들에 대한 묵념의 시간도 가졌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이곳 신한촌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습니다. 

 


 

“이 일대가 1937년까지 한국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살았던 신한촌입니다. 그 당시 연해주 전체에 한국 사람들이 약 30만 명 정도 살았다고 추정되는데요. 이곳은 연해주 30만 한인들의 중심지였다 할 수 있습니다. 교육, 문화,예술,독립운동 등 이 모든 것의 중심지 역할을 했어요. 1937년에 한인들이 강제이주를 당하면서 신한촌이 폐허가 되었고, 그 자리에 근래에 와서 아파트가 완전히 들어차면서 신한촌이 흔적조차 사라졌어요. 아무것도 없던 이곳에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 비석 세 개를 세웠어요. 그래서 이 정도라도 기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석조 기둥이 세워진 이 터를 지키고 있는 고려인 2세를 모시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몸이 불편하신 와중에도 오히려 청년들을 향해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 모습에 애잔함이 밀려왔습니다. 

 


 

스님 말씀처럼 이곳이 지금의 모습이 아닌 독립투사들을 위한 기념비도 세워지고, 그들의 희생을 위로하는 곳으로도 더욱더 잘 꾸며지길 소망해 봅니다. 

 


▲ 신한촌 역사기념관 건축 조감도

 

비록 작은 공간의 기둥 세 개만 놓여있지만 청년들의 염원과 스님의 노력을 가득 담아 파이팅을 외치며 사진 한 장을 남겼습니다. 훗날 발전된 모습으로 바뀐 이곳에서 함께 모여 파이팅을 다시 외칠 수 있길 바래봅니다. 

 


 

청년 역사기행단과 스님을 태운 버스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출발역이자 종착역인 모스크바 역을 지나 혁명 광장으로 향했습니다. 혁명 광장에서는 이번 러시아 일정 안내를 맡은 동북아평화기금 강용구 사무국장님과 일행 분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동북아평화기금 강용구 사무국장님

 

그리고 10분의 자유시간이 주어지자 광장에 모여 특색 있는 조별 사진을 찍었습니다. 스님은 청년들에게 “역사기행이 아니라 관광 온 것 같다”며 사진을 찍는 청년들을 재미나게 구경했습니다. 

 


▲ 블라디보스톡 혁명 광장

 

다음은 독수리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안개 속에 휩싸인 다리가 펼쳐지자 차가운 바람과 함께 아무르만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즐겁게 단체사진을 찍으며 러시아에서 만난 첫 풍경을 마음 속에 한가득 담아봅니다.  

 


▲ 독수리전망대

 

블라디보스톡에서 우스리스크 방면으로 한 시간 가량을 달려 버스에서 내리니 눈앞에 기차 길이 펼쳐졌습니다. 

 


▲ 라즈돌노예 역

 

스님은 이곳이 라즈돌노예역이라고 소개하면서 고려인들을 강제 이주시킨 첫 기차역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여기는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해서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기차역이에요. 우수리스크하고 블라디보스톡의 중간쯤 되는 것 같아요. 왜 갑자기 이런 아무것도 없는 작은 기차역에 우리를 세워놓았나 싶죠? 

 


 

이곳은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첫 기차’가 출발한 역이에요. 여기에서 제일 많이 고려인들을 기차에 태워 중앙아시아로 보냈어요. 물론 다른 기차역에서도 강제 이주가 이루어졌지만 대다수가 이곳에서 이루어졌어요.

 

1937년 9월 17일 새벽 4시, 여기에서 첫 기차가 출발했어요. 소련 정부는 고려인들에게 사나흘 전에 강제 이주를 통보했어요. “짐 챙겨라!”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지만 거꾸로 서쪽에 있는 소수 민족들은 이곳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는데요. 그 사람들이 조선인들이 살던 곳에 와 보니까, 집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밭에는 옥수수가 주렁주렁 잘 익어 있었다고 해요. 강제 이주가 너무나 급작스러워서 다 자란 농산물을 수확도 하지 못하고 떠난 거죠. 

 

그러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강제이주 시켰느냐? 약 3만6천 가구, 17만 명입니다. 124회에 걸쳐 기차로 사람들을 실어 날랐어요. 사전 준비는 당연히 못했고, 이주를 위해 소련 정부가 지원한 건 거의 없어요. 기차에서 죽은 사람만 1만1천여 명이라고 합니다. 거의 10명 중 1명 꼴이죠. 도착한 후에는 겨울을 나야 하잖아요. 또 수많은 고려인들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 나갔어요.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의 3분의1에 가까운 숫자였다고 합니다.”

 

재배한 농작물을 수확도 하지 못한 채 일방적인 통보로 떠나게 된 고려인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느껴봅니다. 추운 겨울날 연고지도 없이 기차에 몸만 실은 채 떠나게 된 고려인들의 삶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스님은 소련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러시와 일본이 갈등을 겪고 있었고, 그 속에서 고려인들은 일본의 첩자로 의심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스님이 설명하는 동안 멀리서 기차가 한 대 지나갔습니다. 그 당시 고려인들이 실려 가는 듯 그때의 기차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스님은 고려인 강제이주야말로 가장 비극적인 과거사라고 말했습니다. 설명을 마친 스님은 버스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때 다른 기차 한 대가 또 지나갔고 우리의 아픈 역사를 잊지 말라는 듯 소리를 내며 빠르게 지나쳐갔습니다. 러시아인들에겐 그냥 기차역이겠지만 우리 청년들에게는 지금을 살게 해 준 소중한 장소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너른 들판 사이로 막힘없이 난 도로를 달려 우수리스크에 도착해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시간이 늦어진 관계로 저녁식사를 진행한 강당에서 첫째날 저녁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연해주의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 대해 1시간 30분 동안 개괄적인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의 독립운동사는 왜 점점 빈약해지게 되었는지 이 이유에 대해 스님은 명쾌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민족주의적 성향의 독립운동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승리와 자유시 참변으로 거의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이 괴멸된 이후에는 독립운동이 없었을까요? 그건 아니에요. 그 이후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더 많은 독립운동에 참여했지만 대부분 사회주의적 성향의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들은 민족 해방만이 아니라 민중 해방까지 쟁취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던 거예요. 

 


 

당시만 해도 양반과 상놈은 한 자리에서 밥도 같이 안 먹었는데, 실제는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동등한 자격으로 의병이나 독립군으로 참가했거든요. 그러니까 의병에 상놈이 들어오면 양반들의 시중을 들어야 되는 문제가 있었던 거예요. 이런 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던 겁니다. 또 민족 운동을 하러 들어올 때는 다 자기를 버리고 들어왔는데도 여자는 늘 밥을 해야 하고, 남자는 먹기만 하니까 이런 것도 문제가 됐어요. 문화적인 부분에서 충돌이 일어났던 거예요. 의병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양반도 있지만 평민이나 노비가 더 많다 보니까 이들은 당연히 새로운 사회주의 이념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고요. 

 

이렇게 되니까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이념 성향이 사회주의 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그렇게 된 원인은 첫 번째, 나이든 사람들은 아직 민족주의적 성향만 가지고 있었는데, 젊은이들이 사회주의 쪽으로 급속하게 기울어졌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공산당 운동은 일국일당 주의를 지켜야 했던 영향이 컸습니다. 내가 조선에서 조선공산당 운동을 하다가 중국에 가면 조선공산당 이름으로는 중국 안에서 활동할 수가 없고, 일국일당 주의 원칙에 의해서 중국공산당에 소속되어서 활동해야 했습니다. 또 러시아에 가게 되면 러시아공산당에 소속되어서 활동해야 하는 식이었습니다. 김일성도 중국으로 갔을 때 중국 공산당 군부대 산하로 편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러시아로 건너가면 다시 러시아 군대나 러시아 공산당에 편재될 수밖에 없었고요. ‘대한’이나 ‘조선’의 이름으로 저항할 수 있는 독립적인 부대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국제사회가 볼 때는 조선 사람은 일제침략에 독자적으로 저항한 게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겁니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침략에 저항했는데, 이런 공산당 운동의 조건으로 인해서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었던 거예요. 이것은 결국 조선의 독립이 유예가 되고, 신탁통치로 넘어가게 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또 미국과 소련이 전후 정리를 하면서 충돌해야 했던 외부 요인도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우리가 독립운동을 안 해서가 아니라 독립운동을 했지만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는 사회적인 조건이 그렇다 보니까 이런 결과가 나온 거예요. 

 

거기에 더해서 해방이 되고나서 남북이 분단되다 보니까, 결국 미국은 자기에게 유리한 남쪽 정부를 구성하려고 이승만을 내세웠고, 북쪽도 마찬가지이다 보니까 김일성을 내세웠고, 그것이 독자적인 정부로 구성이 되어나가다 보니 결국은 서로가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나는 정통한 국가이고, 너는 괴뢰 정부이다”라며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독립운동을 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북한정부 구성에 참여한 걸 남쪽에서 인정하면 결국 북한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게 되니까 결국 인정하지 않고 독립운동사에서 삭제를 했습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3.1운동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 하는 걸 근거로 ‘우리 남한 정부가 정통이다’라고 주장하는데, 북한은 그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북한에서는 3.1운동을 역사적인 큰 사건으로 다루지도 않고, 상해임시정부는 아예 저평가하는 겁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사는 분단이 되면서 상당 부분이 남북에서 각각 왜곡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가 역사 속에서 독립운동사를 배울 때는 당시에 투쟁을 했다고 할 만한 게 거의 없어진 겁니다. ‘유관순 누나가 만세운동을 했다’, ‘윤동주 시인이 시를 썼다’라는 얘기 정도만 유명한데 이런 걸로만 독립이 되겠어요? 그런 활동도 중요하지만 그게 독립운동의 중심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우리들의 무의식 세계에는 열등의식이 자리잡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해방은 미국이 우리 민족에게 가져다 준 선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것처럼 되어버렸으니까요. 이런 왜곡된 역사가 결국 분단 이후 지금까지 남북 갈등의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간도의 독립운동사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곳 연해주의 독립운동사는 너무나 중요한 겁니다.

 


 

그러면 왜 1920년 이후에는 눈에 띄는 독립운동이 없는 것처럼 보일까요? 그 이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분들은 당시 소비에트 군대에 모두 소속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중국에 있던 분들은 왜 그 이후에도 청산리 봉오동 전투 같은 활동이 보이지 않느냐? 그 분들은 다 중국의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되어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소련과 중국이 모두 사회주의 국가였고, 그렇게 소비에트 군대나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했던 분들은 나중에 북한 정부 구성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들의 활동을 인정할 수 없다 보니까 독립운동사에 공백이 생긴 거예요.”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왜 빈약해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청년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습니다. 

 

여행을 시작한 지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보고 듣고 느끼게 될 곳들에 미리 공부하고 느껴보는 소중한 시간이였습니다. 항상 열정적으로 강의를 해주시는 스님에게 큰 박수를 보내며 첫째 날 일정을 마쳤습니다.

 


 

오늘은 통일의병들과 8박 9일 동안의 역사기행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청년들과의 8박 9일을 다시 시작하는 바쁜 날이었습니다. 내일은 청년들과의 역사기행 2일째를 맞이해 우수리스크 주변에 있는 독립운동과 발해 유적지를 둘러본 후 고려인들이 살고 있는 우정마을과 고향마을을 방문해 함께 교류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 동북아 역사기행 기간 동안 발행되는 글은 참가자들의 도움으로 작성됩니다. 오늘 글의 스케치는 <김인연>님이, 강연 정리는 <김현영>님이, 사진촬영은 <권성준>님이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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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의 통일을 발원하면서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성지 '신한촌'의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 계좌번호 : 국민은행 578601-01-272869

- 예금주 : (사)좋은벗들 

전체댓글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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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

법륜스님 사랑해요

2017-06-29 10:40:46

김귀자

스님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2016-08-27 08:56:18

김성동

잘 읽었습니다. _()_

2016-08-25 14:3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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