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6.8.12(통일의병) 동북아 역사기행 8일째
“러시아 연해주, 발해 염주성과 안중근의 단지동맹 기념비...”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동북아 역사기행 8일째를 맞이해 통일의병 150명과 함께 중국 훈춘에서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에 도착했습니다. 발해시대의 성인 염주성을 둘러본 후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 기념비를 참배하고,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우수리스크에 도착해 ‘연해주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오늘부터는 러시아에서 온 버스에 탑승했습니다. 운전기사들이 모두 러시아 사람들이어서 말이 잘 통하지가 않아 대중들은 아침부터 손짓 발짓을 해가며 짐을 싣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스님은 “러시아 사람을 보니까 외국에 온 것 같아요?” 하고 농담을 던지며 오늘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새벽 6시. 훈춘 시내에 위치한 새벽 시장에 내린 대중들은 아침 식사를 한 후 점심으로 먹을 간식을 구입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중국의 새벽 시장은 언제나 활기가 넘치는데 훈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훈춘 새벽 시장

 

중국 훈춘에서 러시아 크라스키노로 향하는 길에는 국경을 넘어야 합니다. 훈춘에서 출국 수속을 밟고 다시 버스에 올라타 국경을 지난 다음 다시 러시아 땅에서 입국 수속을 했습니다. 

 


▲ 중국 쪽 국경변

 

착오가 생겨서 국경을 통과하는 데 예상 시간보다 2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더욱이 러시아 시간은 중국 시간보다 2시간이 더 빨라서 국경을 넘어오고 나니 벌써 오후 2시가 지나 있었습니다. 

 


▲ 러시아 쪽 국경변

 

어렵사리 국경을 통과하고 나서 스님이 가볍게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모두들 국경 통과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국경 통과하는 게 참 복잡하고 힘들었죠? 유럽은 유럽연합이 되면서 국경 통과가 정말 편리해졌는데 여기는 이렇게 불편하네요. 우리도 동아시아 경제공동체를 만들면 국경 통과가 정말 편리해질 텐데 언제쯤 가능할까요? 그러려면 남북이 먼저 통일이 되어야 할 겁니다.”

 

정말 국경이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스님 말씀처럼 남북이 통일되어 동아시아 경제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해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러시아 국경을 넘어오니 주위는 온통 허허벌판이었습니다. 아까운 땅이 이렇게 황무지로 버려져 있는 것에 대해 스님도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한국 사람들 같았으면 어떻게든 이런 땅들을 잘 이용했을 텐데 말이죠. 또한 이 드넓은 벌판을 잘 개간한다면 북한의 식량난 해결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 기지로서도 의미 있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상상해 보기도 했습니다.

 

30여 분 동안 허허벌판 위를 달리다가 처음으로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스님은 도로 왼편에 보이는 이 마을이 조선족들이 많이 살았던 ‘연추마을’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 연추마을로 들어가는 길

 

“저 길이 연추 마을로 가는 길이에요. 연추 마을은 상연추, 중연추, 하연추 마을이 있는데, 우리 조선족들이 많이 살았던 마을입니다.” 

 

연추마을을 지나자마자 곧바로 크라스키노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스님과 대중들은 운동화 끈을 조여매고 습지를 행군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염주성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 염주성으로 향하는 갈대숲길

 

염주성 발굴 작업을 하고 있는 겔만 교수님과 아침 10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12시 30분이 되어서야 크라스키노에 도착했습니다. 도로변에서 염주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약 30분 가량 갈대숲을 헤치며 걸어가야 했습니다. 다행히 며칠 동안 햇살이 강하고 가물었기 때문에 진흙 길은 아니었습니다. 

 

키 보다 더 높은 갈대숲을 지날 때는 도무지 앞이 분간이 되지 않았지만, 선두에 선 스님은 지난 봄에 답사를 해두었기 때문인지 금세 길을 찾아갔습니다. 

 


 

30분이 넘도록 갈대숲을 헤치며 길을 걷고 나니 드디어 저 멀리 염주성의 북쪽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성벽 위에는 겔만 교수님이 손을 흔들며 역사기행단을 반겼습니다. 스님과 겔만 교수님은 작년 여름에 만난 적이 있기 때문에 보자마자 너무나 반가워하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 염주성을 발굴하고 있는 겔만 교수님

 

염주성에 도착하고 나서는 겔만 교수님이 직접 이곳저곳을 안내했습니다. 우선 가장 먼저 살펴본 곳은 절터 유지입니다. 발굴 결과에 대한 교수님의 설명이 있은 후 이어서 스님이 궁금한 점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교수님은 가장 먼저 절터가 발견된 곳으로 대중들을 안내했습니다. 

 


 

“이곳은 절터입니다. 이것은 절과 시내를 구분하는 담장이고요. 옆에 돌들이 많이 박혀 있는 것은 서문 쪽으로 가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스님들이 지나다니는 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발해 시대의 종이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성벽 밖에는 성벽으로부터 300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무덤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겔만 교수님과 대중들은 다시 절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여기가 대웅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둥이 5개씩 6줄이 있었고,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크기가 크지 않았어요. 큰 불상은 아마도 누군가가 도굴해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외에도 연해주에서 총 5개의 절터가 발굴되었습니다. 그 중 1개만 이렇게 성터 안에서 발굴되었고, 나머지 4개는 성터 밖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성의 규모는 상당히 컸고요. 성벽은 두께가 5m 정도 되었고, 높이는 3m 정도 되었습니다. 성을 지을 때는 돌을 이용해서 지었는데 이 주변에는 돌이 없어서 멀리서 가져와야 했습니다. 옆에 강이 흐르는데 강을 통해서 돌을 가져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성은 계획 도시였던 것 같아요. 성 안에는 길마다 돌을 주욱 깔아서 도로 포장도 해놓았습니다. 그 길로 외부 손님들이나 상인들이 많이 지나다녔던 것 같습니다.”

 

“혹시 탑이 있었던 자리가 발견되었나요?”

 

“탑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이 되는 곳은 있는데, 확정은 할 수가 없는 상태예요.”

 


 

“저희들이 지금 서 있는 위치가 어디쯤 되나요?”

 

“여기에 염주성 지도가 있는데 이걸 한번 보시면 우리는 지금 성의 북쪽에 와 있습니다. 바다가 있는 아래쪽이 남쪽입니다. 무역을 하거나 외국에서 온 장사꾼들, 일본에서 온 사신들은 주로 성의 남쪽에 머물수 있는 공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성의 북쪽은 주로 절이나 관청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 겔만 교수님이 그린 염주성 지도

 

“이 성에는 혹시 고구려 시대 때 흔적은 없었나요?”

 

“정확히 답변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고구려 시대까지 발굴하려면 2m 이상을 파야하는데, 이 성은 바닷가의 갯벌 근처에 성을 쌓아서 조금만 땅을 파도 물이 차오르는 바람에 발굴이 무척 힘듭니다. 물을 계속 퍼내면서 발굴을 해야 하거든요. 아직 여력이 없어서 발굴을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제가 지금 발굴을 막 진행 중인 곳입니다.

 


▲ 현재 겔만 교수님이 발굴하고 있는 현장


그리고 이 성은 발해에서 일본으로 가기 위한 뱃길의 출발점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으로 가는 항구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기록에 따르면 발해와 일본의 공식적인 사절단은 발해 사신이 34회, 일본 사절이 13회 파견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어서 겔만 교수님은 동문 쪽으로 대중들을 안내했습니다. 

 

“성문의 모양은 어떻게 생겼나요?”

 

“여기는 동문인데요. 동문 앞에는 옹성을 만들어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을 보호했습니다.” 

 


▲ 동문과 옹성

 

“고구려 성의 특징인 치는 없나요?”

 

“성벽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툭 튀어나도록 성벽을 쌓은 치가 있습니다. 여기 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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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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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겔만 교수님과 스님은 많은 내용을 묻고 답하며 대중들이 염주성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설명을 다 듣고 나니 결국 염주성은 발해의 해상 교통로 역할을 했던 성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발해의 사신들이 일본으로 갈 때도 이 염주성을 지나갔을 것이고, 일본에서 발해로 사신들이 올 때도 이 염주성을 지나갔을 것입니다. 또 염주성에는 옹성도 있고, 치도 있고 정말 고구려의 성벽과 많이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인들이 쌓은 성임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겔만 교수님의 설명은 1시간이 넘게 계속 되었고, 설명이 끝나자 스님과 대중들은 겔만 교수님에게 깊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염주성을 나왔습니다. 

 

겔만 교수님은 오늘 오후에도 계속 발굴 작업을 해야 한다며 성 안으로 들어갔고, 스님은 “15일 아침 6시에 청년들 150명과 함께 다시 염주성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한 후 다시 갈대숲을 헤치며 성 밖으로 나왔습니다. 

 

다음은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 기념비를 참배했습니다. 기념비는 염주성 들어가는 입구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한국 기업 유니베라 농장 입구에 단정하게 잘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 안중근 의사(외 11명) 단지동맹 기념비

 

“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을 기념하는 탑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황해도 출신입니다. 천주교 집안이었고요. 1905년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나라가 위기에 처한 것을 알고 독립운동에 뜻을 두었지만 일제의 탄압이 견고해지면서 국내에서는 더 이상 활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해주로 오게 되었습니다. 

 


 

연해주에서 최재형이라는 분의 후원을 얻고, 간도 관리사를 했던 이범윤 선생이 의병 대장이 된 일단의 의병단이 있었는데, 안중근 의사도 여기에 참여했습니다. 1908년에는 연해주에서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에 있는 일본군 초소를 습격하는 유격전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회령 전투에서 참패를 하면서 많은 동지들이 죽고 겨우 살았습니다. 이 참패에 대한 책임의식도 있었고, 유격전은 소모적이라고 느끼면서 이제는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히로부미를 죽여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그래서 동지 11명과 함께 한 명씩 손가락을 자르면서 태어나기는 다르게 태어났지만 죽을 때는 같이 죽기를 맹세합니다. 이것이 단지동맹입니다. 마침 1909년 10월 26일에 이토히루부미가 하얼빈역으로 온다는 것을 알고 저격 모의를 하게 된 겁니다.” 

 

스님의 설명에 이어서 대중들은 애국가를 제창한 후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단지동맹 동지들과 그 외에 많은 애국 열사들의 넋을 기리는 묵념을 했습니다. 

 


 

이렇게 참배를 마친 후 기념사진 찍는 시간을 잠시 가졌습니다. 마침 유니베라 농장의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단지동맹 기념비 관리도 함께 하고 있는 장민석님이 찾아와 역사기행단을 반갑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장민석님의 부인 역시 지금 한국에서 평화재단 소속으로 통일의병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해서 통일의병들로부터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러시아에서의 첫날 일정을 마친 후 역사기행단은 숙소가 있는 우수리스크로 향했습니다. 밤10시에 우수리스크에 도착한 기행단은 조촐하게 만찬을 함께 하면서 역사기행의 마지막날 밤을 더욱 뜨겁게 보냈습니다. 

 


 

만찬 후 곧이어 1시간 동안 스님의 마지막 정리 강연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은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사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역사”라고 강조하면서 밤12시까지 열정적으로 강연을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러시아에 대해서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해야 돼요. 이렇게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기반은 러시아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하지만 독립운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 또한 러시아의 국가 이익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러시아의 입장 때문에 최재형 선생은 1911년에 권업회를 만듭니다. 겉으로는 사업하는 것을 돌봐주며 상부상조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비밀 리에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를 만든 겁니다. 독립군의 이름으로 단체를 만들면 또 일본이 러시아에 항의할 수 있으니까 표면적인 형식을 다르게 해서 단체를 만든 거예요. 대종교도 원래 이름이 단군교인데 탄압을 받으니까 대종교로 이름을 바꾼 것과 같은 거죠. 

 

이렇게 활동을 하다가 1911년에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연해주 전체에 조선 사람들이 10만 명이 살고 있었고, 연해주 지역의 중심 도시인 블라디보스톡에는 조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개척리라는 마을도 있었습니다. 1911년에 이 개척리에 콜레라가 발생했는데 군부대가 근처에 있는데다 조선인들의 위생상태가 안 좋아 보였기 때문에 개척리를 없애 버리고 시의 외곽으로 강제 이주를 시킵니다. 그곳이 신개척리입니다. 당시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은 조선이라는 이름을 잘 사용하지 않고 ‘대한’, ‘한인’ 등의 이름을 썼는데, 아마도 대한제국의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서 그랬나 봐요. 그래서 이곳에 신시가지가 형성되면서부터는 개척리는 ‘구한촌’으로 부르게 되었고, 새로 옮긴 신개척리는 ‘신한촌’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1911년에는 첫째, 권업회가 만들어졌고, 둘째, 개척리가 이주를 해서 신한촌이 형성되었습니다. 신한촌은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서 요즘 말로 하면 한인타운이 형성되었습니다. 한인타운 안에 권업회를 만들어서 사업을 상부상조하는 형태를 빌면서 그 안에서는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특히 학교를 많이 세워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그 수가 130여 개가 넘었다고 해요. 또 권업신문, 해조신문 등 여러 가지 신문을 발간하는 등 문화사업도 했고요. 그리고 이런 기반 위에 비공식적으로는 독립군을 양성하고 훈련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런 모든 일을 해나간 것이 권업회입니다. 이 권업회의 최고 책임자가 최재형 선생이였습니다. 

 

그러나 권업회 마저도 러시아의 간섭으로 1914년에 해산되게 됩니다. 왜냐하면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 관계가 되면서 일본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서 권업회의 해산이 종용된 겁니다.  

 

1917년이 되면서는 1차 세계대전이 마무리가 되고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납니다. 1918년에는 러시아에 있는 모든 조선인들이 모여서 총회를 열고 ‘전로한족중앙총회’를 만듭니다. 여기에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가 나오면서 ‘전로한족중앙총회’가 ‘대한국민의회’로 바뀝니다. 이 대한국민의회는 임시 정부의 성격을 점차 갖춰 나갔는데, 연해주에서는 이때부터 벌써 조국의 독립을 꿈꾸면서 세계 만방에 조선의 독립을 요청하고 선언하는 활동을 해나가게 됩니다. 특히 1919년에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곧바로 연해주에서도 3월 17일에 독립선언을 합니다. 여기는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었거든요. 

 

마침 상해에서도 임시 정부 구성에 대한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 강력하고 실제적인 세력은 연해주에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통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연해주 쪽에서는 이미 먼저 준비를 했고, 지지 기반도 있다 보니까 상해 쪽이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나 많은 회의를 통해서 문창범, 최재형 이런 분들이 상해로 가서 임시 정부 구성에 협력을 하게 되고, 결국 상해 임시 정부 쪽으로 형식은 단일화가 됩니다. 

 

그러나 국내의 3.1운동 열기도 일제의 탄압에 의해서 점점 쇠락해 가고, 상해임시정부도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면서 북간도에서 독립운동 했던 사람들은 다시 북간도로 돌아가서 무장투쟁을 하기 시작합니다. 러시아는 기반은 좋았지만 러시아 정부의 눈치를 봐야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간도는 장작림이 군벌로 있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신경을 못 쓰는 변방이었거든요. 그래서 1920년에 들어오면서는 북간도의 골짜기마다 숨어서 무장투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1920년 4월에 일본군이 갑자기 신한촌을 급습합니다. 주요한 한인 지도자 300여 명을 잡아서 죽이고, 우수리스크에 있던 최재형 선생도 일본군에 잡혀서 탈출하다가 사살됩니다. 뿐만 아니라 수백 명의 한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을 당하게 되는데 이것을 ‘4월 참변’이라고 합니다. 내일 아침에 저희들은 4월 참변비를 참배할 예정입니다. 

 


 

4월 참변을 피해서 북간도로 건너간 홍범도 장군 등은 봉오동 전투의 승리를 얻어내는데, 그 여파로 일본군은 훈춘 사건을 일으켜서 대대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0여 개의 독립군 부대가 백두산 산록으로 각기 피신을 갔고, 그 과정에서 청산리 전투에서는 대승을 거두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니까 일본군은 더 많은 군대를 파병을 하게 되고, 결국 중국의 장작림도 독립군들을 더 이상 보호하지 못하겠다 하니까 결국 러시아로 넘어가게 됩니다. 러시아로 넘어오기 전 밀산 지역에서 모든 독립군들이 결집해서 연합 부대를 만들었지만, 어제 설명했듯이 ‘흑하사변’ 또는 ‘자유시참변’을 통해 독립군 전체가 괴멸되게 됩니다.”  

 

연해주 지역에서 펼쳐졌던 독립운동사 전체를 다시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신한촌에 대해 조망하면서 신한촌의 역사 회복과 재건에 대해 대중들의 참여를 다시 한 번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연해주는 우리에게 희망과 좌절의 땅이었는데 이것을 또 어떻게 새로운 희망으로 만들거냐 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은 과제입니다. 우리 민족이 많이 살았던 신한촌은 1997년 강제 이주 당한 후 최근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옛 흔적이 다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 세운 신한촌을 표시하는 기둥 세 개만이 놓여져 있을 뿐입니다. 그나마 고려인 후손 한 분이 삼각형짜리 작은 땅을 아파트 사이에 확보해서 발해 문화관을 짓고 싶다고 했는데, 지금 중풍이 와서 말을 잘 못하고 몸이 많이 불편합니다.  

 

그런데 국제한민족포럼의 이창주 교수가 신한촌에 가보고 이를 기념하는 곳이 너무 초라하다며 스님이 도와주면 공원으로 꾸미겠다고 해서 작년에 저도 신한촌을 방문해 보고, 올 3월에는 기공식도 했습니다. 이렇게 지금은 신한촌 역사회복재건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신한촌에 역사기념관을 작게 짓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옛 선조들의 정취를 남기고 또 새로운 의욕을 갖도록 여러분들도 동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이번 역사기행을 마무리하면서 왜 우리가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역사기행을 다녔는지에 대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죽어라 고생하며 역사기행을 다녔는데, 많은 분들이 아직도 ‘결국 뭐 하자는 거냐?’라는 의문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더 이상 이런 비극을 만들지 말자는 게 핵심입니다. 더 이상 전쟁은 없어야 되고, 더 이상 이렇게 흩어져서 남의 나라에 가서 괄시 당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는 겁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전쟁이 나면 여러분들은 여기저기 남의 나라로 피신해서 괄시받고 살아야 하는 겁니다. 미국 같은 나라에 이민 가서 살면 된다고 하지만, 남의 나라에 가서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우리가 조금만 양보하고 마음을 모으면 대한민국을 발전시킬 수 있고, 여기에 남북이 통일을 하게 되면 조금만 노력해도 경제력이 세계 10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강력한 국가를 만들 수 있습니다. 

 


 

결론은 이거예요. 우리는 몰락한 양반 집안인데 그 뼈대는 괜찮더라는 겁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환웅의 배달 문명은 그 어떤 민족보다 앞선 선진 문명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중간에 잘못하는 바람에 영토가 작아지고 거기다 최근에는 분단까지 되어서 형제끼리 싸웠고, 형제는 이웃집의 보호를 받고 있고, 이렇게 쪼들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것들이 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이 이만큼이라도 된 것은 앞으로의 꿈을 가질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정적인 요인을 가지고 부정적으로만 얘기하지 말고 그런 부정적인 부분을 다 상쇄하고도 통일의 이익은 더 많으면 많았지 적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꼭 알았으면 합니다.  

 

대한민국을 기반으로 평화도 정착시키고 통일도 하면 천년의 한을 풀고 새로운 100년의 꿈을 우리가 꿀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 기회를 또 놓치고 미중의 변방으로 전락해서 우리 후손들도 또다시 백년을 이렇게 살게 될 겁니다. 이 기회를 잘 살려서 과거 100년의 한을 풀고, 미래 100년의 희망도 만들고, 또 천년 동안 쪼그라든 나라도 일으켜 세우고, 또 우리만 잘 살자는 게 아니라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서도 우리가 기여해 보자는 겁니다. 그런 가능성이 지금 우리에게 열려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조금만 각성이 되면 충분히 그런 기회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 대한민국을 우리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만들기 위해 이런 기행을 하는 것이지 여행하는 게 핵심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려면 여기 직접 와서 민족의 한도 보고, 미래의 희망도 보고, 가능성도 보고,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야 이런 활동이 지속적으로 이뤄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내가 나라의 희망이라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활동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스님의 당부와 격려의 말씀에 대중들 모두 큰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스님의 정리 말씀을 듣고 나니 8박 9일 동안 참으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었구나 되돌아봐졌습니다. 

 

강의는 밤12시가 넘어서 끝났습니다. 늦은 밤 숙소로 들어간 대중들은 잠깐 눈을 붙인 후 새벽 4시에 일어나 마지막 9일째 일정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내일은 새벽 5시부터 우수리스크 일대에 위치한 이상설 유허비, 4월 참변비, 솔빈부성 등을 오전 내내 둘러본 후 블라디보스톡 신한촌 방문을 끝으로 이번 통일의병 역사기행 1팀의 모든 일정을 마치게 됩니다. 오후 3시에는 청년들로 구성된 역사기행 2팀이 블라디보스톡공항에 도착하게 되고, 스님은 다시 8박 9일 동안의 동북아 역사 대장정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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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의 통일을 발원하면서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성지 '신한촌'의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 계좌번호 : 국민은행 578601-01-272869

- 예금주 : (사)좋은벗들 

전체댓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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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자

오늘도 깨달음이 있는 역사공부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08-15 22:02:15

감동

신한촌 고려인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기차안에서 죽음 아무연고도 없이 겨울을 이겨내지 못하고 희생되어서 너무 안타깝네요^^글을 읽은 내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독립운동 하신 분들을 생각하면서 고개숙입니다 ^^

2016-08-15 19:30:45

오유진

무한대로 감사합니다~~♡♡

2016-08-15 01: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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