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이상설 유허비 ► 솔빈부성 ► 4월참변비 ► 거북공원 ► 고려인문화센터 ► 우정마을 고향마
2016.8.14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2일째 "연해주 독립운동사"


 

안녕하세요?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2일째가 되었습니다. 오늘 스님은 청년 150명과 함께 이상설 유허비와 솔빈부성을 둘러본 후 최재형 집무실, 4월 참변비 등 우수리스크 주변의 독립운동 유적지에 대해 안내했습니다. 고려인 문화센터에서 고려인들의 삶을 살펴본 후 상고사와 독립운동사, 그리고 통일을 앞둔 우리들의 과제에 대해 강연 했습니다.

 

새벽 6시. 청년 역사기행단은 보슬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우수리스크 시내를 빠져나와 우수리스크 외곽에 위치한 이상설 유허비에 도착했습니다.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는 수분하 강이 굽이쳐 흐르는 강가에 우뚝하니 세워져 있었습니다. 

 


▲ 이상설 선생 유허비

 

스님은 이상설 선생이 남긴 업적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습니다. 

 

“헤이그 밀사 아시죠? 보통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렇게 말하잖아요. 이 세 분 중에 대표가 누굴까요? 바로 이상설 선생입니다. 이상설 선생이 돌아가시고 그 재를 뿌렸던 유허지에다가 이렇게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 분은 조선의 마지막 과거에 급제하셔서 성균관 교수도 역임하셨고, 30대에 이미 고위 관리가 되신 분입니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해서 장관급의 고위 관직을 버리고 국권 회복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국내 상황으로는 도저히 국권이 회복되기 어려웠기 때문에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이라는 학교를 세웠습니다. 결국 일제의 간섭에 의해서 학교가 폐쇄되자 이곳 연해주로 와서 주로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연해주에서 일어난 모든 독립활동에 지도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특히 1907년 고종황제의 밀서를 갖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로 가서 을사조약이 부당하다는 것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일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이준 선생은 순국하게 되고, 이위종 선생은 건물 밖 계단에 서서 연설을 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이상설과 이위종은 일제에 의해 재판에 회부되고 고종의 밀서를 조작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연해주로 다시 돌아와 이곳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계속 해나갑니다. 

 

 

1914년에는 권업회가 해산되고, 결국 병을 얻어 1917년에 사망하게 됩니다. 사망할 때 ‘동지들은 합세하여 기필코 조국광복을 이루라. 나는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혼인들 어찌 감히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글은 모두 불사르라. 그 재를 여기 옛날 발해 땅이었던 솔빈강에 뿌려라.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서 여기 앞에 흐르는 수분하(綏芬河) 강가에 재를 뿌렸다고 합니다.”

 

나라의 기운이 점점 쇠하고 있던 시절에 나라의 고위 관리이자 이 시대의 어른이었던 이상설 선생은 자신의 앞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었을까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한결같이 나라를 위한 충성의 길을 걸어갔던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 앞에 유유히 흘러가는 수분하 강이 우직했던 그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청년 역사기행단은 이상설 선생의 넋을 기리며 잠시 묵념을 한 후 다음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다음은 발해의 15부 중의 하나였던 솔빈부성으로 향했습니다. 솔빈부성은 흙으로 조성된 토성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성곽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 곳입니다. 

 

스님은 솔빈부성에 들어서자마자 성벽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으로 청년들을 안내했습니다. 해자를 사이에 두고 내성 밖에 덧성을 쌓아 성벽은 마치 두 겹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발해의 성 중에서 가장 튼튼한 수비력을 갖추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 발해 솔빈부성

 

아직까지 주위가 전혀 개발되지 않았고, 내성 쪽으로 작은 마을이 조금 있을 뿐 다른 곳보다 성벽이 꽤 잘 보존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곳이 발해성이라는 것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스님의 발걸음과 설명을 따라가 보니 토성의 크고 웅장한 규모에 감탄이 나왔습니다.

 


 

“저기 앞에 보이는 것이 성벽입니다. 높죠? 여기서 저기까지 얼마나 높을까요? 10미터는 되겠지요? 이렇게 성벽이 높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해자입니다. 해자는 성벽에 적이 접근하지 못하게 물이 흐르도록 한 것을 말합니다. 일반 평지성은 반드시 해자를 만들지만 산성에는 보통 해자를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건 언덕 위에 쌓은 것이라 해자를 만들었고, 여기에 덧성도 쌓은 거예요. 아마 낮은 언덕이어서 그런 것 같아요. 성을 쌓고 사이에 해자를 마련해서 물을 채운 거예요. 이렇게 성벽이 이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통 석성 위에는 적이 쏘는 화살을 피하거나 공격할 수 있도록 구멍이 뚫린 ‘여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토성이라 그러지 못하니까 성벽 위에 쑥 들어가서 방어를 할 수 있도록 가운데 물길처럼 홈을 파 놓았어요. 성벽 위에 올라가면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본성의 바깥에 덧쌓은 덧성 위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해자입니다. 앞에 높이 솟아있는 이것이 바로 성벽입니다. 성벽을 지나서 저 안쪽은 성 안쪽이고요. 여기는 성 밖이 됩니다. 그리고 저 변두리에 외성을 쌓았습니다. 내성을 이렇게 높이 쌓은 것을 보면 성 안이 요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성을 쌓은 이 부분이 이 산 전체에서 제일 높은 지대예요. 자, 성벽 위로 올라가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벽의 큰 규모에 청년들도 모두 놀라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발해의 기와 유물을 쌓아둔 곳이 있었습니다. 박물관에 잘 전시해 두어야 할 발해의 소중한 유물이 빗물을 맞으며 켜켜이 쌓여있었습니다. 그것도 그나마 잘 쌓아둔 것을 누군가가 뒤져 기와를 가져가느라 흐트러졌다는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소중한 유물이 계속 방치되어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전망대로 향하는 길에는 수신기를 통해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 노래를 들었습니다. 발해 땅에서 듣는 ‘발해를 꿈꾸며’는 평소에 TV와 라디오에서 듣던 곡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젊은 우리의 힘들이 모이면 세상을 흔들 수가 있고”, “더 행복한 미래가 있어”라는 20년도 더 된 곡의 한 마디가 마음에 콕 박혔습니다. 넓은 대지 위에 단 한 발자욱만 더 내디뎌보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전망대에 서서 우수리스크 시내와 수분하 강을 조망해 본 후 아침 도시락을 먹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드넓은 평야를 바라보며 도시락을 먹으니 기상이 하늘을 찌를 것 같았습니다. 한 참가자는 “이렇게 넓고 푸르른 땅이 지금 우리나라에 있었으면 이미 개발하고 아파트를 세웠을 것 같다”는 소감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나서는 ‘홀로 아리랑’과 ‘광야에서’ 노래를 함께 부른 후 다시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다음은 4월 참변비에 도착했습니다. 4월 참변은 일본군에 의해 한국독립군이 학살당한 사건이라는 설명을 얼핏 들어서 우리 나라 말이 있는 비석이 있을 줄 알았는데 러시아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서 왜 그런지 알게 되었습니다.

 


▲ 4월 참변비

 

“이곳은 4월 참변비입니다. 이건 한국 사람들이 세운 게 아니고 러시아 정부에서 세운 겁니다. 어제 혁명광장에 갔을 때 1917년에서 1922년이라고 쓰여 있잖아요. 1917년 모스크바 지역에서는 혁명에 성공했지만, 러시아 전체에서는 황제를 지지하는 정부군과 혁명군 사이의 전투가 계속되어 5년간 내전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1922년 제국의 군대가 완전히 항복하면서 러시아 혁명정부가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혁명군을 ‘적군’이라 부르고 황제의 군대를 ‘백군’이라 불러요. 백군과 적군 사이에 5년 동안 전투가 계속 벌어졌던 겁니다. 

 


 

러시아 제국 즉 백군은 일본 제국과 동맹관계니까 한인들이 독립운동을 못 하게 했는데, 러시아 혁명정부는 약소국의 식민지 해방을 지지했기 때문에 당연히 나라의 독립을 꿈꾸었던 한인들과 독립군들은 혁명 정부가 승리하기를 바랬던 겁니다. 그래서 여러 회의와 전노한족중앙총회 등을 할 때도 은근히 혁명정부 쪽으로 지지발언을 많이 하게 되지만, 일단 남의 나라의 문제이니까 정치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했던 겁니다. 내전에는 개입을 가능하면 안 했지만 적군파를 지지하는 그런 쪽이었습니다. 

 

1919년에는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났고, 대한국민의회에서는 독립을 선언하고 임시정부를 구성했습니다. 또 상해에서도 임시정부가 생겼고, 양쪽의 통합작업도 일어났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곳 연해주에서도 많은 활동이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일본 제국주의가 독립군들이 이런 활동을 못하도록 러시아 정부에 강력히 요청했겠지만, 러시아에는 새로운 혁명정부가 일어났고 내부가 분열되어 있는 상황이어서 소통이 어려웠습니다. 이렇게 백군과 적군의 내전이 계속 일어나니까 일본 제국주의에서는 누구를 지지하겠어요? 백군을 지지하겠죠. 그런데 한인 독립군들은 적군을 지지했던 겁니다. 판세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한쪽은 일본군과 러시아 백군이, 한쪽은 독립군과 러시아 적군이 한 편이 되어 3월 전투가 벌어졌는데 독립군과 러시아 적군 측이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는 더 많은 군대를 데리고 와서 이 지역을 공격합니다. 결국 독립군과 러시아 적군은 밀리게 되었고, 블라디보스톡에 이르러서는 한인 지도자 300여 명이 학살되고, 우수리스크에 이르러서는 다시 전투가 붙었는데 큰 패배를 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러시아 적군들도 많이 사망하게 되었고, 최재형 선생도 이 때 체포되어 이송 중에 탈출하려다가 사살당합니다. 이것이 4월 참변입니다. 

 


 

그래서 이 비석은 4월 참변 때 돌아가신 한인 독립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게 아니라 소비에트 정부가 러시아 적군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입니다. 자, 그럼 그 때 순국한 애국자들의 넋을 기리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식민 지배를 받았던 선조들의 고통만 생각하며 다니다가 다른 나라 사람들의 희생도 접하게 되니 전쟁이라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잠시 묵념을 하며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음은 거북공원에 도착했습니다. 공원에는 발해 시대의 거북이 조각이 있다고 해서 함께 찾아가 보았습니다. 

 


▲ 거북공원

 

주로 업적과 공적을 새기는 비석의 받침으로 쓰이는 것이 거북이입니다. 경주 사천왕사지와 태종무열왕릉 앞에도 이와 비슷한 거북이 조각이 있는데, 스님은 서로 비교를 하면서 “크기는 경주에 있는 거북이보다 더 큰데 정교함은 조금 떨어지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큰 비석받침을 가진 비석 안에는 발해 시대의 어떤 공적이 쓰여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바로 이어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최재형 집무실에 도착했습니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최고 대부였던 사람의 집무실인 만큼 어느 정도 잘 가꾸어져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크기도 작고 앞에 붙어있는 태극기 말고는 역사적인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어떤 표시도 없어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외국에서 그나마 이렇게라도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 최재형 선생이 죽기 전 머문 집무실

 

다음은 전로한족중앙총회가 열린 장소를 둘러본 후 고려인 문화센터를 방문했습니다. 고려인 문화센터 입구에는 ‘연해주의 불꽃, 고려인’이라는 영상을 시청했습니다. 고려인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던 청년들 중에서는 너무나 부끄럽고 슬퍼서 눈물이 났다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고려인들과 이곳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연혁을 읽으며 이곳이 우리 민족이 숨 쉬는 곳이라는 걸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 고려인 문화센터

 

이어서 고려인 정착마을인 우정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우정마을에는 한글 교육이 이루어지는 로지나서당이 있는데, 로지나는 ‘고향’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 우정마을의 로지나서당

 

이름도 예쁜 로지나서당 안에는 서툴지만 또박또박 쓴 한글 노트와 아이들의 그림이 여기저기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러시아 땅에서도 우리 민족임을 잊지 않고 사는 작은 공간이 참 곱고 예뻤습니다.

 


▲ 고려인 아이들의 작품

 

다음은 10분 정도를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고향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고향마을은 동북아평화기금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에게 고향 땅인 연해주로 재이주할 수 있게 정착 지원을 하면서 만든 마을입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고향 마을’입니다. 한글학교를 주요사업으로 하고 있으며 이런 활동들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 콩을 재배하거나 청국장 등 가공식품을 만드는 일도 함께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발해의 꿈’이라는 사회적 기업을 통해 가공식품을 직접 수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 고향마을

 

점심 식사는 고려인 어르신들이 청년 역사기행단을 위해 직접 차려주었습니다. 고려인 어르신들이 만들어 준 된장국을 먹고 난 청년들은 “한국에 가면 ‘발해의 꿈’ 상표가 적힌 된장을 꼭 사겠다”고 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점심 식사 후에는 청년들의 풍물놀이 공연이 있었습니다. 햇볕이 뜨거웠지만 신나게 뛰노는 풍물팀의 흥에 취해 모두가 일어나서 한바탕 어우러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넓은 고향마을 평야에 울리는 풍물 소리가 심장을 울렸습니다. 이렇게 신나는데 왠지 모르게 자꾸 눈물이 나오고 울컥했습니다. 

 


▲ 풍물놀이

 

풍물로 한바탕 어우러진 후 우정마을의 로지나서당에 다니는 고려인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선물은 노트와 학용품, 그리고 전통민속놀이 물품이었습니다. 동북아평화기금 주인영 대표님은 “놀이 물품이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했다”고 하면서 무척 감사해 했습니다. 

 


▲ 선물 전달

 

청년 역사기행단의 한 친구는 다큐 영상 ‘귀향’을 보고 감명을 받아 김을 선물로 가져왔습니다. 고려인들이 겪었던 슬픔을 자신의 슬픔처럼 깊이 공감하는 한 친구의 마음씀을 보면서 청년들의 눈시울도 함께 붉어졌습니다. 

 


▲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고려인 어르신들

 

조별로 마음나누기를 한 후 우수리스크에 있는 숙소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스님은 풍물 공연을 한 친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샤워를 하고 싶다고 마음나누기 하는 것을 엿듣고 선 특별히 샤워 시간을 40분 주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샤워 시간에 다들 열광했습니다. 

 

3시 30분부터는 어제 저녁식사를 했던 식당에 모여 스님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스님은 왜 우리가 이렇게 역사기행을 다니고 역사를 깊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인지에 대해 약 3시간이 넘도록 다양한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했습니다. 

 


 

크게 세 가지 이유를 설명했는데, 첫째가 고대사 부분, 둘째가 독립운동사 부분, 셋째가 서양 문명에 대한 부분입니다. 그 중에서 독립운동사 부분에서는 이런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사는 왜곡과 손실이 많습니다. 1800년 이후에 민중이 저항을 하고 외세가 침략하면서 일대 혼란이 있었던 근대 역사를 모르면 지금의 분단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현재 한국의 교과과정에서 독립운동사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은 고대사보다 더 왜곡이 큽니다. 북한에서 배우는 독립운동사 또한 엄청난 왜곡이 있고요. 왜 이렇게 100년밖에 안 된 역사에 엄청난 왜곡이나 손실이 있게 된 걸까요? 분단 때문입니다. 분단이 되자 남과 북이 각각 정통성을 주장하다보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중국공산당에 들어가서 독립운동을 했든, 러시아공산당에 들어가서 독립운동을 했든, 장개석 밑에서 독립운동을 했든, 조선공산당에 들어가서 독립운동을 했든, 미국에 가서 독립운동을 했든,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한 모든 행위는 독립운동사에 포함이 되어야 하는데, 그가 북한정부에 참여했다고 독립운동사에서 빼버리고, 나중에 친일했다고 빼버리고, 뭐했다고 빼버리고, 그러다 보면 독립운동사에 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사에 남은 사람은 어렸을 때 죽은 사람만 남았다는 말도 나오는 겁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17살, 18살에 죽어버리면 친일 행위를 할 새도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에게 독립운동가로 늘 거론되는 분들은 유관순 누나와 윤동주 시인처럼 요절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요절한 분들 또는 자결한 분들께는 흠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요절하고 자결한 분들만 있었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됐겠어요? 그리고 또 나이가 들면 안주하기가 쉽잖아요. 그가 젊었을 때는 3.1독립선언문에 서명도 하고 또 뭐도 했지만, 나이가 들어 돈도 좀 벌고, 지위도 좀 올라가고, 이름도 알려지면 일본 관료들이 와서 자꾸 뭐라고 유혹하거나 협박하게 됩니다. 젊을 때 같으면 도망을 가든지 저항을 했겠는데, 체면도 있고 기반도 있으니까 도망도 못 가고 저항도 못 해서 일제에 협조를 좀 하게 되는데, 이러다 보니 친일 행각이 된 거예요.  

 

3.1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중에도 이름만 빌려준 분들이 있었습니다. 일본이 망할 것 같으니까 참여했는데, 갈수록 일본이 망하기는커녕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만주를 점령하고,  중일전쟁도 일으키고, 태평양전쟁도 일으키는 등 일본이 전 세계를 집어삼킬 것 같으니까 ‘저항해 봐야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싶어서 1938년 내지 1940년 사이에 많은 조선 사람들이 일본에 협조를 하게 됩니다. 사실 일본이 망하기까지 5년밖에 안 남았는데 말이에요.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그들이 친일파가 되는데 그들을 다 빼버리면 독립운동사에 남을 사람이 많이 줄어듭니다.

 

어쨌든 그들이 1919년도에 이름만 빌려줬던 일들도 역사발전에는 도움이 됐잖아요. 그걸 뭐 “저 사람은 이름만 빌려줬다더라” 이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어쨌든 빌려줘서라도 3.1독립선언문에 33인이 서명을 했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니까요. 그 33인 다 감옥에 가는 불이익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걸 너무 따지면 안 되고, 귀한 것은 귀한 대로 쓰고, 나쁜 건 나쁜 대로 써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가 훨씬 풍성해지는 겁니다. 

 

안 그래도 얼마 안 되는데 차 떼고, 포 떼버리니까 남는 게 별로 없습니다. 하다못해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에도 가봐도 독립운동의 내용이 별로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그때 아무 것도 안 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학교에서는 1930~40년대에 독립운동을 별로 안 한 것처럼 배우니까, 우리는 마치 미국에 의해서 해방이 된 것처럼, 그래서 미국이 우리에게는 은인인 것처럼 된 거예요. 미국이 일본을 패망시키면서 우리의 광복에 큰 역할을 한 건 사실이지만 우리 민족이 36년간 독립을 위해 끝없는 투쟁을 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민족주의적인 개념으로 투쟁을 할 때는 우리 이름으로 투쟁을 했는데, 당시 중국, 특히 연해주에 사회주의 이념이나 공산당의 영향력이 커지면서는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주의 원칙 때문에 우리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김구 선생의 상해임시정부는 장개석 아래에 있으면서도 우리 이름으로 활동할 수가 있었지만 여기는 사회주의 혁명이 우선이었습니다.  

 


 

러시아 적군도 자기네 사회주의 혁명이 우선이지 조선의 독립이 우선은 아니었습니다. 자기네 필요에 따른 반일 전선에 우리 민족이 참가하는 건 괜찮지만, 어쨌든 그렇더라도 자기들의 목표에 우리 민족이 기여를 해야 되는 거였어요. 그러다 보니까 우수리스크에 있는 고려인문화센터에 갔을 때도 ‘러시아가 완전히 혁명에 성공한 1922년 이후부터는 독립운동이 없었다’라고 말하잖아요. 왜 없었겠어요?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뭘 했겠어요? 여전히 투쟁하고 있었지만 소비에트 적군에 들어가서 하다보니까 우리 나라 이름으로 한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중국에서도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해서 했으니까 우리가 한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이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우리가 독립하는데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한 게 없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이제 이런 역사를 다 발굴해내서 당시 우리 민족이 그런 시절인연 안에서도 독립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었음을 밝혀내야 합니다.”

 

그리고나서 스님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강의를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서양 문명을 성공적으로 따라 배웠어요. 그런데 우리가 주체적인 입장에서 따라배우기를 했어야 창조가 나오는데, 우리는 주체 없이 따라배우기만 했기 때문에 창조가 안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가진 열등의식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고대사는 중국문명에 대한 열등의식을 갖게 했습니다. 둘째, 독립운동사는 일본에 대한 열등의식을 갖게 했습니다. 일본에 대해서 지나치게 분개하는 것도 다 우리의 열등의식 때문입니다. 세 번째, 지금 우리는 서양 문명에 대한 열등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근대사는 문명적인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열등의식을 어떻게 극복해야 될까요? 첫 번째로 제일 쉬운 방법은 고대사부터 정리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적어도 ‘몰락한 양반이지만 조상의 뿌리는 괜찮다’하는 식의 입장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몰락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가 있습니다. 뿌리는 괜찮으니까요. 그리고 두 번째는 통일을 통해서 우리가 가진 근현대사의 열등의식을 해결하는 겁니다. 우리는 늘 침략 받았고, 우리끼리 분열했다는 열등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분단으로 인해 왜곡된 민족정기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이것을 토대로 해서 우리는 창조력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서양에 주눅 들거나 그렇다고 우월감에 도취되거나 하지 않고, 서양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뭐든지 할 수 있어야 해요. 박세리 선수가 골프에 물꼬를 터버리니까 골프에 대한 열등의식이 없어져서 많은 아이들이 다 골프 한번 해보겠다고 덤비잖아요. 양궁은 우리가 세계를 재패해 버렸기 때문에 우리 선수들이 외국으로 나가서 가르쳐주는 입장이 됐잖아요. 그렇게 권위주의가 덜 한 것에서는 이미 극복이 좀 되어가지만, 아직도 사상이나 철학 분야는 사대주의적 근성에 젖어있어요.

 

이런 것들을 우리가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제 세계화의 시대, 창조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데, 이런 시대에는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자녀가 주역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결혼을 하면 지금처럼 자녀들에게 주입식 교육을 해서는 안 됩니다. 창조적인 사고를 할 수 있고, 실험을 할 수 있는 교육을 해야지, 여러분들이 배웠듯이 외워서 하는 공부는 이제 수명이 다했습니다. 시스템도 바뀌어야 합니다. 왜 아직도 우리는 정치를 꼭 남의 나라에 가서 배워야 합니까? 아직도 벤치마킹할 게 좀 있긴 하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실험을 해서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배우고, 한국의 환경정책을 배우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걸 여러분들이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것은 한 세대 즉 30년만 노력하면 됩니다. 우리가 가난했을 때 한 세대가 노력해서 먹고 살 수 있게 됐고, 우리가 군부독재에 신음할 때 한 세대가 희생했기 때문에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통일의 시대를 만들고, 통일을 기반으로 한 창조의 시대를 만들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서른 살이라면 예순 살까지 이런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옛날에 고구려가 뭐 했는지 알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에요. 우리는 역사기행을 통해서 역사의식을 갖고자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민족사관을 확립해서 민족적 자긍심을 갖고 당당하게 새로운 시대에 도전하기 위해서 이 먼 곳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는 겁니다.” 

 

열등의식이 어디서 비롯되었고, 왜 역사기행을 왔는지 스님이 되짚어 주자 청년들도 모두 공감을 표하며 기쁜 마음으로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나니 저녁 7시가 되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20분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서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이동 중에는 몇몇 청년들이 스님의 강연을 들은 소감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모두들 한결같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서서히 자부심이 생겨나는 것 같다”라고 말하는 것을 엿들을 수 있었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조별로 다시 마음나누기를 하였습니다. 가장 많이 나온 이야기는 “독립운동 현장과 발해 유적지를 실제로 보고 나니까 조금씩 열등감이 치유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였습니다. “역사는 나의 혼, 나의 뿌리입니다.”라는 명심문이 가슴 속에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내일은 새벽 1시에 기상하여 2시에 염주성이 있는 크라스키노 마을로 출발합니다. 새벽 5시 무렵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 기념비를 참배한 후 오전에는 염주성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오후에는 중국 국경을 넘어 훈춘을 지나 봉오동 전투터까지 달려갑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 동북아 역사기행 기간 동안 발행되는 글은 참가자들의 도움으로 작성됩니다. 오늘 글의 스케치는 <김미진>님이, 강연 정리는 <윤은지>님이, 사진촬영은 <권성준>님이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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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의 통일을 발원하면서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성지 '신한촌'의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 계좌번호 : 국민은행 578601-01-272869

- 예금주 : (사)좋은벗들 

전체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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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

스님의 명쾌한 해석, 강의 잘 들었습니다. 항상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2016-08-25 00:19:14

청원

스님의 동북아 역사기행을 읽으면서 단절된 역사와 왜곡된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쉽게 할 수없는 으리의 근세사 역사테마여행이 사고없이 안전하게 마쳐지길 기원합니다.

2016-08-17 10:06:50

이상자

역사공부를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벗들을 통해 저의 작은 성의가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

2016-08-17 09: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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