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6.8.10 (통일의병) 동북아 역사기행 6일째
“발해의 상경용천부 그리고 봉오동 전투터...”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역사기행 6일째를 맞이하여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 유적과 봉오동 전투터를 둘러본 후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5시 정각에 모두 버스에 탑승한 기행단은 스님의 “잘 주무셨어요?” 하는 아침 인사와 함께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버스 창 밖으로는 돈화벌의 넓은 평야가 드넓게 펼쳐졌습니다. 

 

가장 먼저 돈화 시내 한 가운데에 있는 강동 24개석 유적에 도착했습니다. 24개석은 발해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유적입니다. 

 


▲ 강동 24개석

 

스님은 발해가 남긴 24개석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학자들의 견해를 빌어 몇 가지 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상경용천부에서 중경현덕부, 동경용현부, 남경남해부 이 사이에 난 길에 이 24개석이 군데 군데에 있습니다. 이건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 주요 교통로에 있는 ‘역참’이라는 주장도 있고요. 역참인데 돌을 왜 저렇게 놓았느냐 하기도 하지만 주요 교통로에 있기 때문에 역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둘째, 왕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갈 때 관을 보관하던 곳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셋째, 양식 창고라는 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춧돌이 이렇게 여려개 놓여있다는 것은 그 위에 엄청나게 무거운 것을 올렸다는 것을 말하거든요. 

 

현재 확실하게 공통적으로 밝혀진 것은 건축 유지라는 것입니다. 기와 조각이 발견되면서 여기에 건축물을 세웠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 건축물이 어떤 건축물이냐는 문제죠.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확정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만약 이것을 연구해서 발표하면 박사 학위감이 될 수 있어요.”(모두 웃음) 

  

어제부터 무척 궁금해 하던 내용이었는데 몇 가지 제기된 설을 들으니 모두 다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발해의 역사가 조금 더 깊이 연구되길 기원해 봅니다. 

 

다음은 같은 형태의 요전자 24개석 유적을 찾아갔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길가에 핀 코스모스가 기행단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줍니다. 요전자 24개석은 옥수수밭 한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옥수수밭 속을 가로질러 한 줄로 들어가 한바퀴 돌면서 24개석을 보고 나왔습니다. 풀과 꽃이 무성하게 자라서 24개석이 모두 보이지는 않았지만 예쁘게 핀 꽃들과 함께 사진 몇 장을 남기고 다시 버스에 올랐습니다. 

 


 
▲ 요전자 24개석

 

다시 한참을 지나니 용암이 막혀 형성된 호수, 길이 23km에 달하는 ‘경박호’를 만났습니다. 저 멀리 작은 호수처럼 보이는 듯 시작된 경박호는 계속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은 채 마치 바다로 생각될 정도로 아주 넓은 호수입니다. 호수는 넓은 평야와 어우러져 또 다른 아름다움을 주었습니다. 

 


▲ 경박호

 

오랜 시간 버스가 달려 도착한 곳은 발해 시대의 절인 흥륭사입니다. 흥륭사는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 성터에서 뻗어나온 주작대로 옆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 흥륜사

 

흥륭사는 상경용천부에 있는 9개의 절 중 유일하게 유물이 나온 곳이라고 합니다. 흥륜사 경내의 맨 뒤편에 위치한 법당에 들어가 큰 불상 앞에 선 기행단은 다함께 예불 의식을 했습니다. 예불을 마친 후 스님은 기행단을 위해 축원과 발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발해 멸망 이후 1100여 년 만에서야 이곳에 찾아왔다”고 하면서 “민족사의 정통성이 잘 계승되고, 발해의 옛 터들이 다시 복원되고, 참배한 우리들이 부여 고구려 발해의 민족 정기를 잘 계승해 나가겠다”며 이 인연 공덕으로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는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이 서로 협력하고 하나되는 통일을 이룩하기를 발원했습니다. 

  


 

스님의 간절한 발원에 역사기행 대중들도 함께 간절한 마음을 모아 보았습니다.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역사 속에서 점점 잊혀져간 발해의 이야기를 들으며 안타까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발해인들의 뜻을 계승한다는 것은 통일 한국과 동북아 공동체 건설이 아닐까 상상해 보며 스님의 발원을 나의 발원으로 새겨 봅니다. 천년 전의 역사와 오늘의 내가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불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발해 시대의 석등이 마당 한가운데에 우뚝 세워져 있었습니다. 스님은 “학창 시절 국사 교과서에 나왔던 발해 시대의 바로 그 석등”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석등 앞에서 조별로 기념사진을 찍고 흥륭사를 나왔습니다. 

 


 

다음은 당시 발해의 수도 중 하나였던 상경용천부의 왕궁터 유적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버스에서 내리기 전 상경용천부 유적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주었습니다. 

 

“발해는 비록 동모산에서 작게 시작했지만 3대 문왕 때까지 오면서 50년 만에 동북아 지역을 거의 다 차지하는 대제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견현덕부의 경우 한 부의 중심도시 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수도를 상경용천부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아주 넓은 터를 잡아서 수도를 만들었습니다. 외성의 한 변의 길이가 4km 정도 됩니다. 돌과 흙을 같이 섞은 토석혼축성으로 지금도 형태가 비교적 잘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외성을 쌓고 외성 안에 내성을 쌓고 그 안에 궁성을 쌓았습니다.” 

  

대단히 큰 규모에 대중들도 모두 놀라워하는 모습이였습니다. 지금은 성벽 위로 백양 나무가 높게 자라고 있어 멀리서도 금방 그 윤곽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차창 밖으로 정말로 백양 나무가 나란히 늘어선 모습이 한눈에 보였습니다.  

 


▲ 외성 위로 백양 나무가 늘어선 모습

    

먼저 박물관으로 이동해 발해의 영역 지도와 궁성 조감도를 보며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상경용천부 성터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장안성 못지않게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성터에는 토대와 흔적만 남아 있기에 그 위에 어떤 건물들이 지어졌을지 상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박물관에서 모형도를 보고 스님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야 대중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규모에 감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먼저 동궁 옆에 위치한 ‘어화원’ 유지를 향해 걸었습니다. 어화원 안에는 사람 얼굴 모양으로 만들어진 연못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었습니다. 스님은 이 부분이 ‘눈’, 이 부분이 ‘귀’ 라고 하면서 이곳저곳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곳곳에 코스모스가 피어 있어서 대중들을 반겨 주었습니다. 

  

스님의 안내에 따라 내성 안의 궁성으로 들어가서 맨 뒤쪽에 위치한 내성 북쪽 성문을 시작으로 제5궁성부터 제1궁성까지 차례대로 걸어가 보았습니다. 5궁성에서 1궁성 쪽으로 나아갈수록 궁터의 지대가 점점 높아져 뒤쪽에서 바라보면 앞쪽의 궁터들이 차례대로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냥 지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계획되고 관측되어서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 궁성의 북쪽에 난 성문

 


▲ 제1궁에서 바라본 제2궁, 제3궁, 제4궁의 모습

 

성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성을 한바퀴 다 도는 것이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제3궁으로 와서는 앉아서 잠시 휴식을 취했습니다. 노래 두 곡을 함께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부른 ‘발해를 꿈꾸며’ 노래는 MP3를 틀어서 듣고, ‘황성옛터’라는 노래는 방송인 김병조씨가 나와서 멋들어지게 직접 불러주었습니다. 

 


 

이렇게 상경용천부 궁성터를 모두 둘러본 후 오봉루 앞에서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전생에 우리는 발해인이지 않았을까’ 하는 어떤 분의 농담에 활짝 웃음을 지어보기도 했습니다.  

 


 

다시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성을 쌓기 위해 돌을 채취한 자리에 현무호라는 호수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버스의 차창 밖으로 호수를 바라보며 성을 짓는데 얼마나 많은 돌이 사용되었는지 가늠해 보았습니다. 

 


▲ 현무호

 

버스가 성 밖에 있는 목단강 앞에 다다르자 스님은 당시에 거란으로 가는 통로가 있었다며 칠공교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여기서는 안 보이는데, 저쪽으로 강이 한번 굽이쳐서 흐르는 부분에 가보면 칠공교가 세워졌던 흔적이 남아 있어요. 목단강을 건너는 다리였는데, 발해 당시에 거란으로 가는 통로였습니다. 돌을 쌓아서 다리의 기둥을 일곱개 놓았는데 그 유지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다리 이름도 칠공교라고 불렀습니다.”

 

칠공교를 버스 차창 밖으로 먼 발치에서나마 보려고 했는데 잘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스님이 “그럴 때는 ‘어렴풋이 봤다’라고 하는 거예요” 라고 농담을 하자 대중들도 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이렇게 발해의 유적지를 모두 살펴본 후 아쉬움을 뒤로 하고 버스는 이제 독립운동 유적지를 향해 달렸습니다.  

 

버스로 한참을 달려 드디어 봉오동 전투 기념비에 도착했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3.1운동 이후 만주에서 일어난 무장 독립운동 중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 준 최초의 성공적인 전투였습니다. 스님은 기념비 앞에 선 기행단 일행에게 봉오동 전투가 일어났을 때의 정황과 그 의미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습니다.

 


▲ 봉오동 전투 기념비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7일 홍범도를 사령으로 한 독립군이 협산벽곡 봉오골에서 두만강을 건너 침입한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반일무장투쟁의 첫 봉화를 지핀 전투입니다. 독립군은 이곳 봉오골에서 매복을 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기여들자 삼면고지에서 일제히 불벼락을 퍼부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150여 명을 사살하였는데, 이 소식은 국내에 있던 민중들에게도 반일투지를 크게 북돋워 주었습니다. 

 

이후 일본의 대대적인 토벌이 이루어졌으나 우리 선조들은 많은 희생을 거치며 접경 지역인 중국, 러시아에서 무장 독립 운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이런 소중한 독립 운동의 역사를 민족의 자긍심으로 끌어안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함께 기념비를 참배했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오늘 우리들은 통일 한국을 이루는데 기여를 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묵념도 하였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연길시로 이동하면서 스님은 궁금한 점에 대해 묻고 답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두 분이 질문을 했는데, 한족과 한민족이라고 부르는 용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조선족은 중국에서 어떤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고 있으며 전통 문화가 사라지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스님의 답변이 있었습니다.  

 


▲ 연길 시내 청년 광장

 

연길시에 도착한 대중들은 곧바로 식당으로 이동해 식사를 했고, 스님은 대중들이 식사를 하는 사이에 조춘호 선생님 병문안을 갔습니다. 조 선생님은 지난 20여 년 간 스님이 안내하는 역사기행 실무를 도맡아 온 조선족 분입니다. 그런데 이번 역사기행이 시작되기 3주일 전에 갑자기 뇌경색이 찾아와 쓰러지면서 역사기행에 함께 하지 못하고 지금은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조 선생님이 못하게 된 역사기행 실무는 여행사의 후배 직원 분과 조 선생님의 작은 딸 조신 양, 큰 딸의 남편 분이 지금 대신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조 선생님 댁을 방문해 조 선생님이 심리적인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조언과 위로를 해주었습니다. 

 


▲ 조춘호 선생님

 

“조 선생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돼요. 조 선생이 지난 20년 동안 길을 잘 닦아 놓은 덕분에 이번에도 아무 탈 없이 잘 진행되고 있어요. 조 선생이 딸과 사위를 정말 잘 두었더라고요. 얼마나 일을 척척 잘하는지 나무랄 데가 없었어요. 그리고 이 병은 다리 부러진 것처럼 수술하거나 기브스를 하고 있으면 금방 낫는 병이 아니에요. 알고 있어요?” 

 

“네.”

 

“이 병은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그냥 편안히 있어야 낫는 병이예요. 할 일 없으면 그냥 ‘나무아미타불’ 하면서 염불을 하거나 산책을 하면서 조금씩 움직이는 연습을 하거나 해야지 자꾸 무리를 하려고 하면 안 돼요. 특히 마음이 조급하면 안 돼요. 자꾸 ‘빨리 나아서 일해야지’, ‘언제쯤 다 나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병을 더 악화시키는 게 돼요. 그러니 이것을 장기전으로 보고 마음을 편안하게 먹어야 해요. 그리고 역사기행 실무는 잘 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알았죠? 걱정할거예요? 걱정 안 할거예요?”

 

“걱정 안 할게요.” 

 

“또 이 병은 시간이 지나야 낫는 병이니까 너무 조급해하면 안 돼요. 회복하는 기간을 좀 길게 잡아야 해요. 그래서 음식도 잘 먹고, 재활 운동도 하세요. 몸은 좀 불편하지만 자기가 기쁜 마음을 갖고 살아야 가족들도 희망이 생기잖아요. 그런데 밥도 안 먹고 신경질을 내고 그러면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게 돼요. 알았죠?”

 

“네” 

 

조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은 가능하다고 해서 스님은  ‘행복’ 책을 사인해서 선물했습니다. 또 뇌경색에 좋다는 한약을 한국에서 지어왔는데 함께 선물로 건냈습니다. 조 선생님은 스님의 방문과 격려에 모처럼 환한 웃음을 보였습니다. 

 


 

다음주에 청년팀이 연길시로 올 때 다시 병문안을 오기로 약속하고 스님은 다시 저녁 강연이 열리는 숙소로 향했습니다.  

 

저녁 7시 30분부터는 ‘독립운동사’를 주제로 저녁 강연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긴 시간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독립운동의 한계가 어떻게 남북 분단과도 연결이 되었는지 그 과정도 설명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는 전투의 승리가 결국 막대한 민중의 희생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면서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조금 더 민중적인 성찰이 필요함을 강조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초기에 민족주의적 의식을 갖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전부 대종교인이었어요. ‘내가 독립운동가가 되겠다’ 그러면 대종교에 입교해야 됐고, 대종교에 입교했다면 독립운동을 해야 됐습니다. 그래서 김좌진 장군, 서일 총재 등도 전부 대종교인입니다. 그러니 대종교인은 곧 독립운동 부대였어요. 처음에는 단군을 교주로 했기 때문에 단군교라고 했는데, 일제가 탄압을 하니까 이름도 대종교로 바꿨고, 본부도 북간도로 옮겼던 겁니다. 내일 우리가 가는 ‘화룡’이 바로 그 본부가 옮겨진 곳이에요. 그러니 대종교의 지도자들은 전부 독립운동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1921년도에 이 주위에 있는 모든 독립군 부대가 밀산에서 통합을 했어요. 십여 개의 독립군 부대를 총 합하니까 3,500여 명 정도가 됐는데 그 정도면 대부대였지요. 당시 그 주위에 있던 200명, 300명, 500명 규모의 독립군 부대를 전부 밀산 지역에서 합하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또 중국 안에서는 일본이 만주 군벌 장작림에게 독립군을 몰아내라고 압력을 계속 가하니까 결국 장작림은 독립군에게 나가라고 통보를 했고, 그래서 넘어간 곳이 러시아의 연해주였습니다. 그때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뒤였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의 주도권이 러시아로 넘어갔고, 당연히 또 러시아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안에는 ‘이르크추크파’와 ‘상해파’라고 하는 두 개의 독립운동 세력이 있었습니다. 코민테른, 즉 국제공산당 운동의 지지를 더 중요시하는 이르크추크파와 상해 임시 정부와 더 가까운 상해파 사이에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누가 쥘 것이냐?’ 하는 분쟁이 생긴 겁니다.  

 

소련의 공산군은 당연히 이르크추크파를 지원했기 때문에 결국 그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았는데, 상해파가 승복을 안 하니까 결국 공격을 해서 무장해제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3,500명의 독립군이 하루 아침에 풍비박산이 나버렸습니다. 이것을 ‘흑하사변’ 또는 ‘자유시 참변’이라고 합니다.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승승장구하다가 이 사건으로 한 칼에 박살이 나버린 거예요. 그래서 서일 총재가 그 책임을 지고 자결해 버렸고, 이후 독립군 부대도 해산이 돼버렸어요. 이렇게 해서 민족주의적 성향의 독립운동은 일단락이 됐어요. 

 

그러나 이것은 위쪽 지도층의 얘기이고, 아래쪽 젊은이들이 품었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의 열기는 여전했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들 중에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사람은 결국 모택동 부대의 동북 항일 연군의 산하로 편재가 되어 활동을 계속 했고,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사람은 러시아 적군에 속한 소비에트 군단에 편재가 되어 활동을 계속 했습니다. 당시에는 조선 독립을 위한 조선의 독자적인 군대를 만들기가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경에 인접한 만주와 연해주가 독립운동을 하기에 제일 유리했습니다. 

 

또 당시 공산당의 방침이 일국일당 주의였어요. 예를 들어 조선 안에 조선공산당 하나만 있지, 조선공산당 따로 있고 무슨 공산당 따로 있고, 이런 식으로 2개의 공산당을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즉 내가 한국에 있으면 조선공산당에 속해 있지만 중국에 가면 중국공산당에 들어가야 되고, 러시아에 가면 러시아공산당에 들어가야 되는 거였어요. 그렇게 지역별로 편재가 되어 있어서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독립된 부대를 가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자유시 참변 이후에도 무장투쟁을 계속한 건 맞는데, 대한독립군의 이름으로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 각국이 조선의 독립 문제를 다룰 때 조선이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게 없잖아요? 다만 김구 선생이 상해임시정부에서 말년에, 즉 1945년이 가까워지면서 대한광복군 500명을 조직하고 훈련시켰는데, 이들이 전쟁에 참여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강대국들이 볼 때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주도세력이라는 게 안 보이잖아요. 그러나 사실은 우리는 독립운동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만요. 

 

그런데 당시 자료를 보면 여자 중에 약 398명이 이 연변 지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전사했는데, 1명만 조선족이 아니고 나머지가 전부 조선족 여성이었어요. 남자들도 93%가 조선족이었고요. 얼마나 조선인들이 열성적이었는지,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항일독립전선에 참가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이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허용하게 된 것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항일투쟁에 조선족이 엄청나게 피 흘려 싸운 공로를 모택동과 주은래가 인정한 결과입니다. 또 이 사람들 중 일부는 6.25전쟁 때는 의용군으로도 참가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분열이 해방 이후에도 분열이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고, 그래서 강대국들은 ‘3년 정도 신탁통치하고 독립을 시키자’고 했던 겁니다. 미국은 일본을 패망시켰지만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는 한반도까지 자기네 영향력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동쪽은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해서 항복 받았잖아요. 그런데 만주는 이미 소련군이 점령한 상태였습니다. ‘만주에 있는 무장한 100만 관동군은 소비에트가 해제시킨다’ 이건 미국이 인정한 거예요. 그래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이 하겠다’, ‘소련이 하겠다’ 라며 서로 주장하다가 38선을 그어서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하기로 하고 이어서 신탁통치를 하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우리는 2차 세계대전의 피해자인데도 일본의 일부로 인식이 된 거예요. ‘독립’보다는 ‘무장해제’란 이름으로 미소가 한반도에 들어왔다가 결국은 ‘신탁통치’란 이름으로 바꾸고, 그러면서 3년 동안 작업을 해서 미국은 남쪽에 친미정부를 세웠고, 소련은 북쪽에 친소정부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결국 남쪽은 미국 유학생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세우고, 북쪽은 김일성을 세웠지요. 당시 동북항일연군으로서 더 뛰어난 성과를 쟁취한 김일성보다 훨씬 더 쟁쟁한 독립운동가 선배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사람들이 러시아 편은 아니었거든요. 그 당시에 주도권을 쥔 건 러시아였지 모택동이 아니였습니다. 모택동은 당시 중국의 통일도 이루지 못 했을 때였으니까요. 그런데 김일성은 이미 1940년부터 연해주로 건너가서 하바로스크에서 러시아 부대와 같이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이름도 알려져 있었고, 러시아에서 5년이나 있었으니까 당시 주도권을 쥔 러시아에서는 김일성을 앞세웠던 거예요. 

 


 

이렇게 해서 결국 1948년도에 통일정부 구성이 좌절되게 됩니다. 미소의 이해관계도 안 맞았고, 남북의 각 정부의 이해관계도 안 맞다 보니까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이 되어 지금의 남한과 북한이 되었습니다.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싸우다가 전쟁이 일어났고, 휴전한 이후에는 북쪽에서 파란 색깔은 남쪽으로 내려오고, 남쪽에서 빨간 색깔은 북쪽으로 올라가고, 이렇게 완전히 서로 다른 색깔이 되었습니다. 남쪽은 반공 정부가, 북쪽은 공산 정부가 들어서서 적대관계를 유지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지금 독립운동의 현장을 학습하고 있는데 ‘여기서 청산리전투가 있었다’ 이런 사실들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 전투에 승리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살펴보면 전술적으로 김좌진 장군이 잘했던 것도 있지만 결국 민중의 광범위한 뒷받침이 있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 이 전쟁의 승리가 반드시 좋은 것만이 아니고 결국은 민중의 엄청난 희생을 가져왔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이 전투의 승리가 결국은 일본의 강력한 탄압을 초래했고, 그랬기 때문에 결국 러시아로 피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러시아에 새로 생긴 혁명정부의 의도와 독립군 내의 분열 때문에 한 번도 싸워보지도 못하고 자중지란에 빠져서 순식간에 해체되어 버렸어요. 

 

만약 여기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일본과 싸우다가 졌다면 패배를 했더라도 또 싸우고 할 텐데, 주도권 다툼을 하느라 깨져버렸으니까 의욕이 상실돼 버려서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되어버린 겁니다.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던 그 강력한 사람들이 그냥 다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 거예요. 그 위대했던 홍범도 장군도 결국 러시아에서 농사 짓고 살다가 강제이주 당해서 말년에는 극장에서 수위를 하다가 죽었다고 해요. 이것이 우리 민족의 비극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문제를 볼 때는 결과만 보지 말고 그것이 이루어진 과정을 봐야 합니다.  승리라는 결과가 오히려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이런 것까지 같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남한 입장만의 독립운동사에서 북한의 입장까지 생각해 보게 되면서 독립운동에 대해 더욱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강연장에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땀이 많이 났는데 스님은 “오늘은 날씨도 덥고 하니까 더 자세한 내용은 내일 현장에 가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강연을 마쳤습니다. 대중들은 열강을 해준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내일은 새벽 3시 30분에 기상하여 4시에 연길 새벽 시장을 방문해 아침식사를 할 예정입니다. 오전에는 깊은 산속으로 산행을 하며 청산리 전투터를 둘러보고 오후에는 대종교 3인묘, 일송정, 용정중학교 등을 둘러보며 독립운동의 생생한 현장을 더 자세히 살펴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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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의 통일을 발원하면서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성지 '신한촌'의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 계좌번호 : 국민은행 578601-01-272869

- 예금주 : (사)좋은벗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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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체팅 안된다.

2016-08-15 12:29:14

이인연

감사드립니다.

2016-08-13 11:23:08

원승

중도의 관점 놓치지않고 지속 가능한 행복 유지해갑니다?감사합니다 스님!

2016-08-13 10: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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