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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새벽 6시부터 9시까지 3시간 동안 전국에서 모인 경전반 수강생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한 후 9시 30분부터는 문경 용추계곡에서 정토회 저녁반과 청년국 자원활동가들과 함께 봄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문경 정토수련원에서는 어제부터 1박 2일 동안 경전반 특강수련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지난주말에는 수도권에서 경전반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을 위한 수련이 있었고, 이번 주말은 수도권을 제외한 전국에서 모인 경전반 학생들을 위한 수련입니다.
대수련장에서 하룻밤을 잔 대중들은 새벽 4시에 기상해 108배와 명상을 한 후 스님이 수련장에 들어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새벽 6시, 죽비 삼성과 함께 명상이 끝나자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잘 주무셨어요? 코 고는 소리 들으니까 잠이 잘 오죠? 혼자 자면 외로워서 잠을 못 잤는데 여러 사람이 같이 자니까 잠이 잘 왔을 겁니다.”(모두 웃음)
스님의 환한 웃음에 그제서야 눈을 비비며 잠을 깨는 분도 눈에 보였습니다. 스님은 대중들이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알아보기 위해 지역명을 하나씩 말하며 손을 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대구경북, 경남, 부산울산, 광주전라, 대전충청 등 수도권을 제외한 전국 각 지역에서 500여 명이 참석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지금 수업 진도가 어느 정도 나갔는지도 확인했습니다.
“지금 금강경 배우고 있죠? 몇 분까지 배우셨어요?”
“6강까지 배웠어요.”
“금강경 제1분 법회인유분, 제2분 선현기청분, 제3분 대승정종분... 이런 거 몰라요? 여러분들 수준이 어떤지 대충 알겠어요.”(모두 웃음)
시작부터 자신들의 수준을 들켜버린 덕분에 대중들도 잠에서 확 깨어난 눈치였습니다. 새벽에 하는 법문이기 때문에 이어진 질문과 답변 속에서도 스님은 일부러 대중들의 졸음을 깨워주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사전에 질문지로 올라온 신청이 무려 25개나 되었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3시간인데 모두 답할 수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었지만, 일단 스님은 질문을 하나씩 읽어내려가며 정성껏 답변을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 금강경을 배우고 있어서 그런지 ‘상을 짓지 않는다’는 개념이 무엇인지, 그것을 자신의 고민을 풀어나가는데 적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묻는 질문이 많았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두 가지 질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일곱 번째로 질문한 여성분은 남자친구와 사주가 나쁘다며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님 때문에 너무 괴롭다며 어떻게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결혼하려고 하는 남자친구가 사주도 최악으로 안 좋고, 아집이 있어서 고생할 거라며 격하게 말리시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제가 결혼하려고 노력할수록 위독한 병세로 건강이 악화되시는 부모님을 보고 있기가 괴롭습니다. 저는 남자친구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은 저를 원망하고, 남자친구도 저희 가족을 원망합니다. 저는 제가 모두를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원망스러워 참회기도를 해보기도 했습니다. 경전반 수업에서 ‘상이 상이 아닌 줄 알라. 있는 그대로 보라’라고 들었습니다. 상인 줄 알아차리고 내려놓으면 괴로울 게 없다고 하셨는데, 저는 제가 어떤 상을 내려놓아야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첫째, 부모님께 얘기 하세요. ‘제가 결혼하기를 원하십니까? 안 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결혼하기를 원한다’고 하시면 ‘저한테는 이 남자밖에 없습니다. 이 남자가 안 된다고 하시면 저는 당분간 결혼은 어렵습니다. 둘 중에 선택하세요’ 하고 공을 부모님께 넘기세요. 왜 공을 내가 받아서 고민을 합니까?(모두 웃음)
부모님이 죽으면서까지 그 공을 갖고 놀든지 말든지 상관마세요.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결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사주가 좋든 안 좋든 저한테는 이 남자밖에 없습니다’라고 얘기를 했는데도 부모님이 ‘사주가 안 좋으니까 결혼하지 마라’라고 하시면 ‘그럼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결혼하라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라고 얘기하세요.
또 남자친구가 ‘이렇든 저렇든 결정을 하라’고 하면 ‘우리 부모님 돌아가신 뒤에야 당신하고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부모님 돌아가실 때 까지 기다리든지 급하면 다른 여자에게로 가든지 하세요.’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왜 질문자가 공을 갖고 전전긍긍해요? 공을 줘버려요. 고민이 해결됐습니까?”
“네. 해결됐습니다.”(모두 웃음)
“그래요. 삶을 좀 지혜롭게 살아야 해요. 대학을 나왔다고 지혜로운 게 아니에요. 생활의 지혜가 있어야 돼요. 공을 빨리 상대한테 넘겨버리세요. 공을 넘기기 제일 쉬운 대상이 누구일까요?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주는 공을 다 받아주시니까요. 그러니까 질문자도 ‘부처님이 하라고 그러시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시면 안 할게요’ 하고 부처님께 떠넘기고는 기다려 보는 거예요. ‘하라’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요.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런 소리가 안 돌아올 거예요.(모두 웃음)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목사가 주일에 들어온 헌금을 공중에 탁 던지면서 ‘주여, 주의 것이거든 하늘로 가져가시고, 저의 것이거든 땅으로 떨어지게 하소서’라고 했단 얘기가 있잖아요(모두 웃음) 웃을 일이 아니에요. 그게 얼마나 지혜로운 건데요. 내가 주님께 안 드리고 혼자 다 쓰는 게 아니고, 일단 드리긴 드렸단 말이에요. 그런데 안 가져가시고 다 돌려주시니 그게 내 것이다 이겁니다. 이 정도 지혜는 있어야지요. 이렇게 돈을 먹는 사람이 여러분들은 얄미워 보여요? 저는 ‘야, 그 정도면 먹을 만하다’라고 생각해요.(모두 웃음)
제가 지난번에 세계 100회 강연을 다닐 때 독일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신호등에 걸려서 정차를 하고 있었는데,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애들이 적신 수건으로 차창을 막 닦더니 돈을 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독일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주지 마세요. 동유럽에서 온 아이들이 저래요’ 하는 거예요. 독일에서는 ‘닦아라’라고 서로 계약이 되지 않은 건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또 안 그렇잖아요. 내가 닦으라고 했든 안 했든, 애가 차창을 닦아줬으니까 다만 동전이라도 줘야 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1유로 짜리를 주려고 하니까 현지 사람이 말린 거예요. 그래도 제가 주려고 하니까 ‘그럼 1유로만 주세요’라고 해서 결국 차창을 열고 2유로를 건네줬는데, 애가 잘못 받아서 그 2유로짜리 동전이 도로 우리 차 속으로 떨어진 거예요. 그렇다고 좁은 차 안에서 그 동전을 주워서 다시 건네기는 좀 그러니까, 제가 우리 일행한테 ‘하나만 더 줘라’고 해서 2유로를 다시 얻어서 그 애한테 건넨 뒤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도착해서 차 안을 뒤져보니까 2유로가 아니라 1센트 짜리가 떨어져 있는 거예요.(모두 웃음) 그러니까 그 애는 1유로를 받는 척하면서 미리 손에 쥐고 있던 1센트를 차 안에 떨어뜨림으로 해서, 즉 좁은 차 안에서 바닥에 떨어진 걸 줍기가 번거롭다는 점을 이용해서 2유로를 더 받아낸 겁니다.”
“아...” (대중들 모두 감탄)
“그 정도면 2유로를 더 챙길만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저는 그 일이 기분 나쁘다기 보다는 ‘야, 재주 좋다’ 싶었어요. 그렇듯이 질문자도 공을 떠넘기란 말이에요.(모두 웃음)
너무 고지식하게 살지 말고, 약간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부모님이 ‘결혼하라’고 하면 ‘네’ 하고, ‘언제 할 거니?’ 하면 ‘곧 할게요. 그런데 아직 남자가 없습니다’ 이러면 되잖아요. 또 남자가 있는데 사주가 안 좋다고 하면 아까 제가 얘기했듯이 그렇게 공을 떠넘기세요. 그러니까 이건 발뺌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자꾸 압박을 받을 때 그것을 다 받아치려면 피곤하니까 옆으로 약간 비켜서 피해 가는 거예요. 적이 쏘는 화살을 다 잡을 수 없다면 이렇게 피하고 저렇게 피해 보는 거예요. 중국 무협지 안 봤어요? 진짜 고수는 확 멀리 피합디까? 살랑살랑 조금씩 옆으로 피합디까? 화살이 날아오면 딱 1㎝ 옆으로만 피하잖아요. 질문자도 그렇게 사세요.(모두 웃음)
우리가 살아가는데 부모가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괴로움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어릴 때 밥 좀 먹여줬다고 얼마나 자식들 인생에 간섭을 하는지 몰라요. 아이들 얘기 들어보면 성질이 나서 먹었던 밥 다 게워내서 주고는 인연을 끊어버리고 싶을 정도라고 합니다. 키운 건 키운 걸로 끝나야지, 너무 간섭을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부모가 그렇게 간섭하는 원인이 또 있는 것 같더라고요. 자기가 결혼해서 너무 너무 고생을 했기 때문에 제 자식도 결혼해서 고생을 해봐야 자기 심정을 알 수 있으니까요. 제 자식이 말을 안 들으면 부모가 ‘너도 나중에 결혼해서 자식 한번 낳아봐라. 내 속을 알게 될 거다’ 라고 하잖아요. 그 말은 결혼해서 행복하라는 거예요? 고생하라는 거예요? 내 속을 알기 위해선 너도 고생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건 저주에 속합니다. 부모란 사람이 자식한테 그렇게 저주를 해서 되겠습니까? ‘나는 너 키운다고 고생했지만 너는 나중에 나처럼 살지 마라’ 이렇게 얘기를 해줘야지요. 그러니까 부모 말이라고 다 들을 게 못 됩니다. 저를 보세요. 고등학교 때부터 부모 말을 안 듣고 사니까 이렇게 잘 살잖아요.”(모두 웃음)
스님의 재치있고 유쾌한 답변에 질문자도 웃고 청중들도 웃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듣고선 경전반 학생 중 한 명은 '스님이 코메디언보다 더 웃긴다' 며 무릎을 치기도 했습니다.
계속해서 질문과 답변이 이어지는 가운데, 14번째 질문자는 스님의 법문을 듣고 나니 오히려 좋은 글과 말을 접해도 언어의 개념에 빠져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스님은 우리가 자꾸 정답 찾기를 하다보면 법상과 법집에 빠질 수 있음을 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요즘 저는 스님의 법문과 금강경의 가르침을 받아 지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것을 자꾸 써먹으려는 마음이 강해집니다. 특히 좋은 글이나 말을 들을 때 그 글이나 말이 언어의 개념에 빠져있을 뿐 참된 지혜로 읽히지 않아서 자꾸 지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시련을 극복하면 좋은 결실이 온다’라는 말을 했다면 저는 속으로 ‘시련이 시련이 아니다. 시련이란 상을 짓고 개념화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그러니 시련도 없고, 시련 아니랄 것도 없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거나 그런 생각을 친구들에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부 친구들은 이런 저를 좀 마뜩치 않게 여기는 것 같아요. 제가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질문 잘 하셨어요. 누군가가 ‘시련을 극복하면 좋은 결실이 온다’라고 하면 질문자는 ‘그려려니’ 하고 그냥 들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모두 웃음)
‘사물이 공하다’ 하면 공한 줄 알면 되지, ‘공하다’는 상을 짓게 되면 다른 사람이 ‘공하지 않다’ 하는 걸 못 받아들입니다. 여기 산이 하나 있는데, 이 동네 사람들은 동산이라 부르고, 저 동네 사람들은 서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서로 어떤 이름이 맞는지를 두고 싸우게 됐어요. 그래서 양쪽이 첫 번째로 확인 작업을 합니다. ‘우리 동네 사람한테 물어볼까?’. 다수 의견을 확인하자는 건데, 그건 양쪽이 다 자신이 있었습니다. 각자 자기네 동네에서는 다 동산이라거나 서산이라고 하니까요. 두 번째로 ‘역사 기록을 한번 볼까?’ 하고 나옵니다. 이 또한 양쪽이 다 자신 있었어요. 자기네 동네 기록에는 다 동산이라거나 서산이라고 기록돼 있으니까요. 세 번째로는 ‘실제로 우리 확인을 한번 해 보자. 산에서 해가 뜨는지 지는지’ 라고 했습니다. 이 또한 양쪽이 다 자신이 있어요. 각자 늘 자기 동네에서 해가 뜨는 걸 보거나 해가 지는 걸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산이라고 하는 사람은 동산이라는 확신을 갖고, 서산이라는 사람은 서산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겁니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지금만 그런 게 아니고 옛날부터, 그리고 과학적으로 확인까지 됐다면, 이제 이건 객관화 되는 겁니다. 이게 ‘상을 짓는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첫 번째는 서로 주장을 하다가, 그 다음에는 서로 ‘미친놈’이라며 대화를 중단했다가, 그래도 ‘대화를 해야지’ 하면서 다시 서로 설득을 하는 과정이 되풀이 되는데, 이것이 갈등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갈등을 할 때는 시종일관 ‘내가 옳다’ 하는 걸 힘으로 관철시키려 한다든지, 설득해서 관철시키려 한다든지, 하여간 ‘관철’이 목표이기 때문에 모든 대화는 형식적 대화에 불과해 집니다. 대화라는 건 자기가 옳다는 주장을 일단 내려놓고 들을 자세를 가져야 되는 건데, 일단 자기가 옳다는 걸 딱 쥐고, 외면하느냐, 대화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나는 변화가 없는 겁니다.
가끔 정치인들을 보면 대화하러 가면서 ‘일단 대화는 해 보겠지만 저는 변함이 없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걸 볼 수 있잖아요. 이 사람들은 이미 도덕적으로 ‘내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옳은 걸 관철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옳은 걸 내려놓으면 ‘내가 진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대화를 하니까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왜 대화를 통한 타협이 안 되나?’ 생각하겠지만 스님은 그들을 잠깐 만나 봐도 그런 성격이 파악되니까 ‘오, 저 사람들은 대화로는 안 된다’ 하는 걸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형식만 대화이지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의견을 듣고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해 봅시다’ 이런 게 없거든요. 고집이 되게 센 거지요.
그러면 각각 동산, 서산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화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일단 각자의 마을에서 나와야 합니다. 각각 자기 동네에서 나온 사람은 ‘오, 동산 아니네?’, ‘오, 서산 아니네?’ 이렇게 첫 번째로 느낀다면 그걸로 갈등은 끝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면 그럼 뭐라는 거야?’라며 또 다른 상을 짓습니다. 우리의 사고체계에는 꼭 뭐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늘 ‘동산이다’ 하다가 ‘오, 동산 아니네?’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일단 갈등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끝이에요. 그런데 우리의 사고시스템에서는 ‘그럼 무슨 산인고?’ 또 이렇게 정답을 찾는 거예요.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니까 ‘비동비서산’이 되는 거예요. ‘동산도 가짜고, 서산도 가짜고, 진실은 비동비서산이다’ 이렇게 또 답을 만듭니다. 진실이라는 상을 또 짓는다는 말이에요. 이것 역시 누가 서산이라고 하니까 ‘택도 없는 소리다. 동산이다’, 누가 동산이라고 하니까 ‘택도 없는 소리다. 서산이다’ 이러는 것과 똑같아요. 즉 누가 동산이라고 하니까 ‘택도 없는 소리다. 비동비서산이다’, 누가 서산이라고 하니까 ‘택도 없는 소리다. 비동비서산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또 진리냐, 진리가 아니냐는 갈등이 생깁니다. 상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동산이다’ 하는 것이 아상이라면, ‘이건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고 공이다’ 하는 상을 짓는 것은 법상이예요.
그러니까 공인 줄 알아야지, 공이라는 상을 지으면 안 됩니다. 공이라는 상을 지으면 또 갈등이 생기거든요. 그러면 이번에 생기는 갈등은 앞에 있었던 갈등보다도 더 세집니다. ‘동산이다’, ‘서산이다’ 라고 주장할 때는 사실 자기가 틀릴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비동비서산’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은 이제는 자기가 틀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진리라는 고집은 천년을 갑니다.(모두 웃음)
그러니 ‘동산이 아니다’, ‘서산이 아니다’ 하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거기서 끝내야 되는 겁니다. 거기서 끝내면 누가 뭐라고 말해도 더 이상 갈등을 안 해요. 그런데 정답을 만든 사람은 누가 뭐라고 말하면 갈등이 생깁니다. 마치 동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서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갈등하듯이, 비동비서산이라는 답을 찾은 사람은 동산이라고 주장하거나 서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또 갈등을 해요. 그러나 ‘동산이 아니다’, ‘서산이 아니다’ 라고 알게 되었을 때 거기서 끝내면, 누가 ‘동산이다’ 하면 ‘저 사람은 저 동네에서 왔나 보다’ 라고 이해하고, 누가 ‘서산이다’ 하면 ‘이 사람은 이 동네에서 왔나 보다’ 라고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법집, 법상, 진리라는 집착, 진리라는 상을 뛰어넘어야 해요. 이걸 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누가 ‘시련을 극복하면 좋은 결실이 온다’라고 말하면 그걸 듣는 사람은 그냥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 되는 겁니다. ‘시련을 극복하면 좋은 결실이 온다’고 할 때 그는 시련을 시련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사람한테는 시련이 있는 것이고, 그것을 참고 이겨내면 또 좋은 결실이 오리라는 것도 그 사람의 수준에서는 맞긴 맞는 얘기잖아요. 그러니 ‘그런가 보다’ 하면 됩니다. 물론 시련을 시련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극복한다는 생각도 할 게 없어지지요. ‘시련을 극복하면 좋은 결실이 온다’는 말도 할 필요가 없어지고요. 그러나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이 ‘이 마이크와 비교해서 이 컵은 작다’라고 하는데 질문자가 자꾸 ‘작은 것도 아니고 큰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면 그 사람 입장에서는 ‘저 사람이 미쳤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질문자가 또 진리라는 상을 지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해가 되셨습니까?”
“네. 이해했습니다.”
스님은 질문자가 이해를 제대로 했는지 확인을 했는데, 질문자는 큰 목소리로 대답을 했습니다. 스님이 너무나 쉽게 비유를 들어 주어서 금방 이해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덧 약속한 3시간이 다 지나가고 시계는 9시가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25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까지 모두 마치자 스님은 “아무튼 답변을 다 마쳤습니다.”라며 웃음을 보였습니다. 대중들도 바쁜 시간을 할애해서 열정적으로 강연을 해준 스님에게 박수갈채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문경 정토수련원을 출발한 스님은 곧바로 대야산 자락의 용추계곡으로 향했습니다. 용추계곡에서는 오전 9시 30분부터 전국에서 모인 정토회 저녁반과 청년국 자원활동가들과 함께 봄나들이 겸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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