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INEB 컨퍼런스에서 ‘총체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주제로 기조 발제를 했습니다.
어제 INEB 참가자들은 구조적 폭력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우리 개인의 일상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에 대해 토론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총체적 개발’에 대해, 그리고 ‘총체적 개발을 가시적으로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주제로 이번 INEB의 핵심적인 토론이 이뤄졌습니다.
먼저 컨퍼런스를 시작하기에 앞서 중국 스님들과 대만 스님들이 함께 앞으로 나와 챈팅(예불)을 함께 해주었습니다. 중국과 대만은 우리 나라의 남한과 북한처럼 양국 사이가 좋지 않은데 오늘 행사장에서 스님들이 함께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모두 큰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남한과 북한도 국제 행사에 이렇게 함께 자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 중국 스님들과 대만 스님들이 함께 기도하는 모습
예불을 마치고 곧바로 컨퍼런스가 시작되었습니다. 사회자는 미얀마에서 온 ‘사이 샘 캄(Sai Sam Kham)’ 씨. 먼저 사회자가 스님을 소개했습니다. 알고보니 이미 법륜 스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분이어었습니다.
“오늘 기조 발제를 해주실 분은 우리에게 큰 영감을 주시는 분입니다. 한국의 정토회에서 오신 법륜 스님을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법륜 스님은 아주 저명한 스님이십니다. 우리 미얀마에서는 매년 미얀마 스님들이 정토회를 방문합니다. 방문을 마친 뒤 한 유명 미얀마 작가가 법륜 스님과 정토회에 대한 기고문을 써서 미얀마 사람들에게 전했는데, 법륜 스님의 업적을 소개하는 서문의 제목을 ‘A Simple Monk’라고 붙였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총체적 발전에 대한 스님의 관점을 오늘 나누어주실 것입니다.”
사회자의 소개가 끝나자 국제 불교 지도자들은 큰 박수로 스님을 맞이했고, 이어서 스님의 기조 발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들 앞에서 발표하게 되어 대단한 영광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주제는 ‘총체적 발전’입니다. 아마 우리가 사는 세계가 총체적으로 발전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데 대한 문제제기인 것 같습니다. 물질적인 발전이 빠르게 진행되는 데 비해 우리의 영적 개발, 즉 정신적 발전이 더딘 것도 문제입니다. 지역적으로도 일부 지역은 빠르게 발전하는 데 비해 다른 지역은 낙후되어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불균형 발전도 문제가 됩니다. 또 ‘오늘날 우리의 발전이 과연 지속 가능한가?’도 큰 문제입니다.
붓다의 말씀을 종합해 생각해보면 ‘총체적 발전’, 다시 말해 ‘지속 가능한 발전’이야말로 우리들의 행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행동 동력은 욕구입니다. 사람들은 욕구를 따라 행동합니다. 사람들은 욕구가 충족되면 즐거워하고 충족되지 않으면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욕구가 다 충족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또 그 욕구가 충족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들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얻는 즐거움에만 너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즐거움과 괴로움’이라고 하는 고와 락이 계속 되풀이됩니다. 이것을 붓다께서는 윤회, ‘삼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즐거움이 지속 가능해질 수 있는지가 붓다의 과제였습니다. 이 윤회에서 벗어나서 열반, ‘닙바나’를 얻는 것이 목적입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함께 행복을 누리되 그 행복이 미래에도 괴로움에 빠지지 않는 지속가능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욕구를 따라가서 얻는 만족을 통한 즐거움은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욕구를 따라 만족을 얻기를 추구하는 것을 쾌락주의라고 합니다. 여기에 반대해서, 욕구를 억제하고 억압하는 것을 고행주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긴장을 초래하기에 이것 또한 열반에 이르는 길이 아닙니다.
붓다는 보드가야 근교에서 6년 동안 고행하면서 이 두 가지 모순에 대해서 새로이 중요한 발견을 했습니다. 욕구를 따라가는 것도, 억압하는 것도 다만 욕구에 속박되고 있다는 뜻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둘을 떠난 제3의 길을 발견했는데 이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그것은 욕구를 따르지도 억압하지도 않고, 욕구를 욕구로서 다만 알아차릴 뿐입니다. 붓다는 이 중도를 통해 결국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가 얻은 깨달음을 ‘연기법’이라고 합니다. 연기법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개별적인 독립체로서 함께 모여 있는 집합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분적으로 관찰하면, 다시 말해 일부분만 바라보면 독립된 존재인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혹은 총체적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붓다가 고타마 싯다르타로 살았던 어린 시절에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이기도 했습니다. 어린 고타마는 농경제에 참여했다가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가 죽어야 하는가? 함께 사는 길은 없는가?’라는 큰 의문을 가졌습니다. 스승과 부모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거기에 답을 하지 못했기에 그는 스스로 사색했습니다. 성 밖으로 나가 세상을 보았을 때 그런 현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동쪽 문으로 나가서는 늙었지만 보호받지 못하고 버려진 사람을 보았습니다. 남쪽 문으로 나갔을 때는 병들었지만 보호받지 못하고 치료받지 못한 채 버려진 사람을 보았습니다. 서쪽 문으로 나갔을 때는 죽었음에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길거리에 버려진 시체를 보았습니다. 붓다는 단순히 사람이 늙고 병들어 죽는 모습을 본 것에 그치지 않고, 보호받지 못하고 버려진 사람, 즉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아픔과 연민을 가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궁중 안에서 누리는 풍요가 성 밖 노예들의 그런 고통 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코살라국의 빠세나디 왕이 질문했을 때 붓다가 이렇게 답합니다. ‘타인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지 마십시오.’ 이런 대답은 그의 어릴 때 겪고 깨달은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붓다가 자란 전통적인 브라만 문명의 가치관과 신앙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북쪽 문으로 나갔다가 브라만 문명에 반대하는 비주류 문명인 사문류의 수행자를 만나고, 그를 통해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문류에 합류하고자 출가했고, 6년의 수행 끝에 결국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나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의 관계 속에 있고 가족의 일부라는 것, 우리 가족이라는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관계 맺은 마을의 일부라는 것, 우리 마을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 마을과 함께 이 지역의 일부라는 것, 이 지역이라는 것이 다른 지역과 더불어 이 나라의 일부라는 것, 우리 나라라고 하는 것이 이웃 나라와 더불어 인류의 일부라는 것, 사람들이라는 것도 결국은 다른 생명과 더불어 전체 생명의 일부라는 것, 생명이라는 것 또한 생명 아닌 것과 더불어 함께 있다는 것, 존재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것과 더불어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사물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붓다의 가르침, 즉 붓다 담마를 따른다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볼 게 아니라 우리 삶의 토대로 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을 정복과 개발의 대상으로만 봤기 때문에 오늘날의 환경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공기를 오염시키고, 물을 오염시키고, 우리가 먹는 음식을 오염시켜서 결국 우리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나라만의 발전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웃 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결국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자기중심의 욕망(탐, 貪), 자기중심의 주장과 견해(진, 瞋), 자기주장과 어리석음(치, 癡)이라는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탐진치(貪瞋癡)’가 우리 고통의 원인이라고 붓다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소위 말하는 소비주의, 즉 많이 생산해서 많이 소비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버려야 합니다. 소비주의를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소비를 줄이면 가난한 사람들과 나눠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비를 줄이면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 우리 개인적으로는 삶에 헐떡거리지 않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명상만 한다고 마음에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올바른 이해 위에 우리 삶을 실천해가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 불교인들마저도 불교의 발전이 마치 이 세상의 물질의 발전과 같은 것인 양 여기며 소비주의에 휩쓸려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을 좀 더 총체적으로, 종합적으로 보고 생활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컨퍼런스의 핵심 주제가 되는 근원적인 내용을 말씀해주신 것에 대해 참가자들 모두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사회자는 “아주 심오한 메시지를 전해주셨습니다.”라고 하며 스님의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공감했습니다. 심포지엄이나 포럼에 가면 교육이니 뭐니 하는 분야별 이야기를 흔히 듣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겉으로 드러난 증상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스님은 소비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그것을 붓다의 가르침에 비교함으로써 우리가 배워야 할 근원적인 부분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오늘 INEB 참가자들이 ‘총체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고민하려면 스님이 지적한 ‘인간의 욕망과 소비주의’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첫 번째 패널로 스리랑카의 현재 국회의원이면서 스님이기도 한 ‘챔피카 라나와카(Champika Ranawaka)’ 스님의 발표가 이어졌습니다. 스님은 “영성을 강조해 마을 단위에 있는 스님들의 지지를 얻어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고 소개하면서, “총체적인 개발을 실현하려면 영성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더불어 현재 스리랑카에서 화학비료를 많이 사용해 지하수가 오염되고 있는 문제 등 영성의 부족으로 인해 생긴 많은 문제들을 열거해 주었습니다.
▲ 첫 번째 패널, ‘챔피카 라나와카(Champika Ranawaka)’ 스님
두 번째 패널로는 스웨덴의 아리가또(Agiratou) 단체에서 온 ‘한스 우코(Hans Ucko)’님이었는데, 아이들을 위한 여러 활동들을 하면서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게 되었다며, 타인을 보살피고자 하는 마음을 아이들을 돕는 활동들을 하면서 일깨울 수 있다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세 번째 패널로는 미얀마의 Development Foundation에서 온 ‘한스 반 윌런스워드(Hans van Willenswaard)’님이었는데, 대안적인 삶을 이야기할 때 비즈니스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그 대안을 논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면서 자신은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 지속가능한 대안으로 ‘사회적 기업’을 생각하게 되었다며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불교 지도자들이 기업인들도 불교를 배울 수 있게 인도해야 하며, 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은 소비행위 자체가 또다른 투표권의 행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환경을 파괴하거나 불공정한 방식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 제품에 대해 불매 운동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 세 번째 패널, 한스 반 윌런스워드(Hans van Willenswaard)
이렇게 기조발제와 패널들의 발표가 있은 후 간단히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러 가지 질문들이 오간 후 오전 세션을 마쳤습니다.
식사를 하러 이동하기 전 참가자 단체사진 촬영이 있었습니다. 언어와 국적, 문화가 서로 다른 곳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참여 불교’를 주제로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을 기뻐하며 환한 웃음을 띠었습니다.
▲ 다 함께 기념사진 촬영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스님은 INEB의 현재 회장이면서 이번 대회를 주관한 세바란카 재단(Sevalanka Foundation)의 ‘하르샤(Harsha)’ 님과 INEB의 창립 원로인 ‘술략 시바락사(Sulak Sivaraksa)’ 박사님과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하르샤님은 한국 방문 일정 때 법륜 스님을 꼭 뵙고 싶다며 스님의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문의했고, 술략 박사님은 스님의 바쁜 해외 일정들을 듣고선 “유명한 사람은 원래 전세계를 돌아다니고, 나처럼 유명하지 않은 사람은 집에만 머무른다”고 웃으며 농담을 했습니다.
▲ 술략 시바락사(Sulak Sivaraksa) 박사님(왼쪽)과 하르샤(Harsha) 씨(오른쪽).
그러자 스님이 “박사님처럼 유명한 사람은 사람들이 박사님을 찾아오기 때문에 집에만 머무르시면 되는데, 저처럼 유명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안 찾아오기 때문에 제가 직접 다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라고 말해 더 큰 웃음을 주었습니다.
낮에는 무척 덥기 때문에 점심 식사 시간을 여유롭게 가진 뒤 오후 1시 30분부터 오후 세션이 시작되었습니다. 오후에는 ‘오픈 스페이스(Open Space)’라는 제목으로 자유롭게 토론하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먼저 오전에 패널들의 발표를 들은 후 자신이 가장 열정적으로 토론해보거나 활동해보고 싶은 내용을 각자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참가자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둥글게 앉았습니다. 사회자가 “물건을 판매하듯이 자신의 의견을 잘 포장해서 시장에 내어놓아 보라”고 하자 다양한 주제들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미래에는 로봇과 싸워야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지적하는 사람, 닭고기 1kg을 먹기 위해서는 곡식 7kg이 필요하다며 채식의 중요성을 말하는 사람, 파리 협약은 불충분하다며 탄소 방출을 줄이는 적극적인 방인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 등 모두가 한 가지씩 의견을 내어놓았습니다.
이렇게 50여 명의 참가자들의 발표가 있은 후 거의 마지막 즈음에 스님도 함께 대화해보고 싶은 주제 한 가지를 발표했습니다.
“저도 물건을 만들었는데 판매는 포기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스님이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물건은 판매할 수 없어요. (웃음)
저는 ‘까르마(업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까르마를 얼마만큼 변화시킬 수 있고, 얼마만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입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엄마의 상태가 어떠한지가 아이에게는 굉장히 큰 영향을 줍니다. 자살이라든지 여러 가지 우리들의 번뇌의 문제가 여기서부터 비롯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더 자세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스님의 발표에 많은 참가자들이 관심을 보였지만 워낙 다양한 제안들이 많이 나와서 이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해보지는 못했습니다. 농담이긴 하지만 스님도 판매를 포기했고요.
이어서 50여 명의 발표 내용을 비슷한 주제끼리 다시 합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크게 6가지 주제로 그룹이 만들어졌는데, 스님은 종교 간의 차별 문제를 주제로 한 그룹에 들어가 함께 토론을 했습니다.
그룹 참가자들은 처음에는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하나의 공감대를 찾았습니다. 각 나라마다 종교 구성이 다수와 소수를 점유하는 정도가 각기 다른데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는 일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분은 영국 식민지 시절 땅을 강제로 빼앗기고 이주하는 과정에서 무슬림과 불교 간의 갈등이 빚어졌고 지금 불교는 소수가 되어 차별받고 있다고 했고, 인도네시아에서 온 분은 무슬림이 다수인데 다수인 무슬림이 소수인 기독교를 탄압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이야기하면서 법규정을 통해서라도 이런 차별을 철폐시켜 나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또 이런 변화를 위해 INEB에 정부 단체 관계자를 다 참가시킬 필요가 있음도 덧붙였습니다. 특히 무슬림은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는데 지역에 따라 소수가 되기도 하고 다수가 되는 점을 이야기해 모두가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토론 내용을 경청한 스님은 여러 가지 의견들을 하나의 관점으로 다시 정리를 해주었습니다.
“종교 차별은 종교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다수가 소수를 어떻게 포용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미얀마, 스리랑카, 태국에서는 불교가 다수이지만 방글라데시에는 불교가 소수이죠. 또한 인도에서도 소수입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는 무슬림이 다수이지만 필리핀에서는 무슬림이 소수예요.”
그리고 다시 많은 토론이 있은 후 한 사람이 스리랑카에도 급진적인 행동을 하는 BBS라는 단체가 있음을 이야기하자 모두가 놀라하며 순식간에 화제가 되었습니다. 스님은 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스리랑카 불교인들도 상처가 있음을 이해해야 해요. 우선 영국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불교의 자기 정체성을 탄압받았습니다. 그런 후 기독교가 갑자기 들어와서 확대가 되었어요. 거기에 대한 스리랑카 불교인들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지금은 다수의 기득권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탄압받았던 기억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리랑카 불교인들은 타밀족에 대해서도 저항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타밀족이 인도로부터 스리랑카로 침범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지금만 생각하면 다수 기득권인데 과거에 소수자로서 겪었던 피해의식이 함께 작용하기 때문에 BBS와 같은 승려들의 극단적인 행동들이 나오는 겁니다. 미얀마도 그런 성격이 있어요. 불교가 민족주의와 결합이 되어 있어서 종교의 형식을 빌리지만 사실은 민족주의적인 저항과 관계가 있습니다.”
스님의 이야기에 모두 공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여기에 한 분은 “미얀마의 경우 불교의 정체성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함께 지적해 주었고, 또 한 분은 “갈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종교 간에도 서로 교류를 하면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신 그 방법이 폭력적이지 않아야 한다.”고 덧붙여 주었습니다. 스님은 이 이야기들을 듣고 다시 스님의 생각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다수가 소수를 포용해야 한다는 것은 잘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은 대부분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소수자들에게도 ‘분노를 갖고 저항만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분노를 통해서는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스님의 이야기에 모두가 공감하자 캐나다에서 오신 분은 “소수가 오히려 포용적인 자세를 취할 때 감동을 주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의견을 덧붙여 주었습니다.
토론을 곧 마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방글라데시에서 온 분은 더 많은 이야기를 토로하고 싶어 했습니다. 시간 제약이 있음에도 너무 길게 이야기하려는 이 분을 모두가 꺼려하는 눈빛을 보내자 스님은 “방글라데시 불자들은 상처가 많아요.”라고 하면서 이 분을 감싸주고 마음을 진정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 답답함을 토로하고 싶어하는 방글라데시 참가자(왼쪽)
토론을 마치면서는 한 명씩 돌아가며 총체적인 발전과 구조적인 폭력을 없애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씩 만을 말해보기로 했습니다.
“가능한 많은 다양한 그룹들에게 손을 뻗어서 다가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교 간 대화를 할 때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후변화를 위해 같이 행동하는 것과 같이 실제로 협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법에 기초해서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양성을 수용하면서 함께 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긴 시간의 토론 내용이 짧은 한 문장으로 명쾌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언인지 한 마디로 정리해 주었습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참가자들은 스님이 아주 중요한 점을 이야기해 주었다며 공감을 표하면서 토론을 마쳤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전체 참가자가 한 자리에 모여서 소감을 한마디씩 나누는 것으로 폐회식을 갈음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자신이 감동받은 것을 이야기했는데, ‘참여 불교’를 주제로 전세계의 사람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함께 행동할 수 있음을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습니다. 스님의 차례가 되자 스님도 짧게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왔고요.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좋았고, 특히 젊은 사람들이 많아서 더 좋았습니다. 특별히 좋았던 것은 이슬라믹 부디스트를 만난 것입니다.” (모두 웃음)
이슬라믹 부디스트는 어제와 오늘 스님과 함께 토론한 ‘야야 키스비야(Yayah Khisbiyah)’씨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슬라믹 부디스트란 표현에 참가자들도 모두 크게 웃었습니다.
그러자 참가자 중에 한 분이 번쩍 손을 들면서 “여기 스리랑카에도 이슬라믹 부디스트가 있어요” 라고 외쳐서 또한번 웃었습니다.
▲ INEB 폐회식
이렇게 소감 발표를 끝으로 INEB 대회를 모두 마쳤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어제 만난 중국인 교수님이 스님을 또 찾아와 ‘스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며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중국인 교수님은 막시즘을 신봉하다가 최근에 불교공부를 시작한 분인데 스님은 이 분의 어깨를 토닥이며 다시 한 번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 어제에 이어 다시 스님을 찾아온 중국인 교수님
“중국이 옛날에는 마오이즘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마오이즘도 거의 없어졌잖아요. 그래서 텅빈 머리를 이제 불교로 채워야 해요.” (웃음)
“최근에는 미국이 중국의 모델이 되어버렸어요. 이제 중국을 지배하는 것은 물질주의입니다.”
“그래요. 더군다나 중국 불교도 지금 문제가 많아요. 오직 복을 빌기만 하잖아요. 그것만 가지고는 중국을 변화시킬 수 없어요. 붓다 담마를 공부하고 체득해야 해요. 그래야 중국도 환경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인 빈부격차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중국이 힘은 세어지고 머리는 텅 비어가기 때문에 큰 문제예요. 그래서 붓다 담마로 머리를 다시 채워야 해요. 미국만 따라가서는 안 돼요.”
“미국을 따라가면서 중국은 많은 대가를 치렀어요. 미국을 모델로 하면 성공할 수 없어요. 성공해도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이 그러했어요. 경제는 성장했는데 사람들은 그만큼 행복해지지 않았어요. 자살율이 세계 1위이고, 불만족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아요. 출산율은 세계 최저이고요.
한국은 지금 온갖 문제들이 뒤섞여 있어요. 나쁘게 생각하면 혼란스럽고, 좋게 생각하면 앞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항상 서양 문명을 극복할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고 노력합니다. 따라 배우는 것은 이제 끝났어요. 어떻게 이것을 넘어설 것이냐의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격려를 해준 후 스님이 다시 한번 “몸은 중국, 머리는 대만, 이렇게 함께 가야 한다” 라고 말하자 옆에 있던 대만에서 온 닥터 요요씨가 “아주 중요한 포인트를 말해주었다”며 크게 웃었습니다. 닥터 요요씨는 “2003년도에 INEB 한국 행사 때 임진각에 갔는데, 그 때 스님이 말해준 남북 평화의 메시지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오늘도 스님의 강력한 파워를 느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
▲ 대만에서 온 닥터 요요씨.
또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인도네시아에서 온 무슬림인 ‘야야’씨를 다시 만났습니다. ‘야야’씨가 스님에게 감사 인사를 하면서 “불교로 개종하는 것을 고민하면서 많은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자 스님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고개를 흔들면서 “이슬라믹 부디스트가 되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슬람교를 버리지 말고 이슬람교를 믿으면서 붓다 담마도 함께 공부하면 된다”고 하자 ‘야야’씨는 더욱 기쁜 표정을 지으며 스님에게 감사함을 표현했습니다.
▲ 무슬림인 '야야'씨를 격려해 주고 있는 스님
스님은 한국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하면서 연락처를 건넨 후 ‘야야’씨와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저녁에는 이번 INEB 행사에 참가한 한국인들끼리만 모여서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스님은 통역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한국에서 직접 비행기 티켓을 끊고 온 이진아씨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스님이 “저는 한 가지 주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 이야기하다가 과학 이야기하다가 환경문제 이야기하다가 통일 이야기가 나오면 사드 배치 문제를 이야기하니까 한국말로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생길 수 있는데 그것을 통역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라고 하자 이진아씨는 “스님이 오히려 저의 수준을 헤아려서 말씀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마쳤다”며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금세 밤이 깊어졌습니다. 내일은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INEB 총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2
전체 댓글 보기스님의하루 최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