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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델리 한국문화원에서 인도인들을 대상으로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어젯밤 델리 불자회에서 운영하는 법당에서 하룻밤을 주무신 스님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예불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아침 식사 후 원고 교정 업무를 보고 8시 30분에 델리 한국문화원으로 향했습니다.
▲ 델리 불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법당
강연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해 한국문화원 원장님과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 델리 한국문화원
▲ 인도인 대상 통역 즉문즉설 강연 안내 포스터
최근에 인도 정부에서 U·P주의 ‘아요디아’에 한국불교 전래 유적지를 가꿀 수 있게 1만㎡(약 3000평) 정도의 땅을 마련해 주기로 하였는데, 이와 관련해서 스님은 원장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가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래한 사람이 바로 당시 아요디아 왕국에서 온 공주와 장유 화상인데, 그래서 아요디아(한국명 아유다)는 한국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입니다.
10시 정각이 되어 스님은 원장님과 함께 강연장으로 향했습니다. 스님이 강연장으로 들어서자 한국문화원 지하 대강당을 가득 메운 70여 명의 인도인들은 큰 박수로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한 인도인 대학생이 대표로 스님께 꽃다발을 건네자 더 큰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한국문화원 원장님의 소개로 무대에 오른 스님은 먼저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힌디어를 할 줄 몰라서 닥터 쁘리앙카가 통역을 하겠습니다. 제가 인도에 처음 온 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 힌디어를 별로 못 배웠어요. ‘나마스떼’, ‘잘디 잘디’ 이것밖에 몰라요.” (모두 웃음)
오늘 즉문즉설 통역은 JTS가 보드가야 근교 불가촉천민 마을에 세운 학교 ‘수자타아카데미’ 교장직을 맡고 있는 쁘리앙카 박사님이 해주었습니다. 쁘리앙카 박사님은 한국에서 8년 간 불교학을 공부해 동국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작년 2월에 수자타아카데미 교장선생님으로 취임했습니다. 또 정토회에서 공동체생활을 오랫동안 했기 때문에 스님의 법문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오늘도 아주 통역을 잘해 주었습니다.
▲ 통역을 담당한 쁘리앙카 박사님
인사말에 이어서 스님은 2천년 전부터 있었던 한국과 인도의 각별한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불교가 들어온 지는 2,000년 정도 되었습니다. 당시 인도 아요디아 왕국의 공주가 장유 화상이라는 스님과 함께 배를 타고 한국 남쪽의 가야라는 작은 나라에 도착해 그 나라를 세운 김수로왕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기록에 보면 아들을 10명 낳았는데 장남은 가야 왕의 성인 ‘김’씨를 이었고, 둘째와 셋째 아들은 인도에서 온 공주가 하사 받은 성인 ‘허’씨를 이었고, 7명은 출가해서 스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에 온 최초의 인도 스님이 머무른 절이 가야정사입니다. 가야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지었어요. 오늘날 김해, 마산, 부산에 이르는 한국 동남부지역인데 지금도 한국 안에서 불교세가 가장 강한 지역입니다. 그리고 인도 공주의 장남이 대를 이은 성씨인 ‘김해 김’씨가 한국에서는 인구의 10퍼센트 정도를 차지합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한국에 왔을 때 ‘한국 사람의 10퍼센트가 인도계’라고 말한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국과 인도는 이미 2,000년 전에 문화적 교류뿐 아니라 혈연적 교류가 있었습니다.
아요디아 공주가 가야에 온 지 300년쯤 뒤 중국을 통해서 한국에 불교가 다시 전래되었습니다. 그리고 6세기 정도 되어서는 한국이 완전히 불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3개의 나라가 서로 경쟁하고 있었는데 불교를 믿는 국가가 중심이 되어 하나의 통일국가를 형성했습니다. 14세기까지 한국은 불교왕국이었지만, 15세기에 중국에서 유교가 들어와서 500년간 유교왕국이 지속되었습니다. 이 500년간 불교는 탄압을 받아 많은 절이 파괴되었습니다. 200년 전에는 카톨릭이 전래되었고, 100년 전에는 개신교가 전래되었습니다. 이후 한국은 20세기 초엽에 36년간 일본의 지배를 잠시 받았고, 독립과 동시에 남북이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남한은 미국의 영향력 하에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가 급속히 전파되었습니다.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학교와 병원 등에 많이 투자하고 활발히 선교 활동을 했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기독교를 많이 믿게 되었어요. 지금은 기독교 인구가 불교 인구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불교는 500년 동안 유교에 탄압을 받았고, 근대 서양문명이 들어올 때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다가, 이제야 자리를 잡아서 한국 불교가 새롭게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은 문화적으로 보면 전통적인 불교국가라고 할 수 있지만 오늘날의 한국은 사실상 기독교적인 영향력이 더 큰 나라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저도 어릴 때 교회에 다녔을 정도로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교회를 많이 갔었어요. 교회에 가면 다양한 서양문화를 접하고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한국의 전통문화가 많이 위축되었지만, 이제는 경제적으로 좀 여유로워지면서 전통문화를 하나하나 다시 복원하고 있는 중입니다.
불교라고 하지만 두 가지 서로 다른 성격이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로서의 불교이고, 하나는 진리로서의 불법(佛法)인데 이 두 가지 개념이 서로 다릅니다. 종교로서의 불교는 문화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고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로서 아시아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로서의 불법은 종교적인 개념을 초월합니다. 개인이 어떤 믿음이나 종교를 갖든 그것은 진리를 배우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과학과도 아무런 모순이 없어요. 2,600년 전에 고타마 붓다가 편 가르침은 종교로서의 불교라기보다는 진리로서의 담마(불법)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어떤 종교나 현대문명에도 구애받지 않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가르침입니다. 여러분들이 제기하는 어떤 질문이나 의문에도 같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가르침이지, ‘그것은 믿음이기 때문에 대화를 할 수 없다’ 이런 요소는 없습니다.
이 담마로서의 불교는 인도에서 일어났지만 오늘날에는 중국, 한국, 일본은 물론 동남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등 전 세계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인도에서 수학이 발달해서 전 세계에 영향을 준 것처럼, 붓다 담마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가’에 대해 훌륭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종교가 힌두교든 무슬림이든 관계없이 다들 붓다 담마를 공부하셔서 2,600년 전 인도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최고의 문명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던 붓다 담마를 잘 알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붓다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개별적 단독자의 집합이 아니라 모두 연관되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생겨나는 것이지, 원인 없이 결과가 생겨나는 것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현상을 보고 ‘신기하다’, ‘신비하다’고 여기는 것은 어떤 현상의 원인을 모르는 무지로부터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신비로운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잖아요. 그러나 붓다는 ‘신비하다’라고 여기는 생각은 무지로부터 일어나는 것, 즉 원인을 알지 못할 때 일어나는 정신 현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은 오늘날의 천체물리학, 생명공학, 화학 같은 현대과학의 어떤 원리와도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청년 여러분들은 지금 학교에서 과학, 역사, 문화 등 다양한 학문을 배우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학문적 전공과 관계되어도 좋고 관계없어도 좋으니 어떤 것도 의문나는 게 있다면 저와 함께 대화해 봅시다. 제가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의 문화나 역사나 정치에 대해서 물어도 좋고, 제가 승려니까 불교에 대해서 물어도 좋습니다. 그 외에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면 서로 대화를 해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어떤 괴로움이나 갈등도 좋습니다. 주제에 관계없이 무엇이든지 대화할 수 있다는 자세로 이야기를 나누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질문을 받겠습니다.”
한국과 인도의 각별한 인연에 대한 이야기에 인도인 청년들은 흠뻑 몰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교와 관계 없이 진리로서의 불교에 대해, 어떤 주제든 편안하게 대화해 보다는 스님의 말씀에 모두들 열린 마음이 되었습니다.
스님의 이야기가 끝나자 곧이어 인도인 청년들이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총 6명이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은 약 2시간 30분 동안 다양한 질문에 대해 모두 답변해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한 가지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어려 곳을 방문하고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부모님의 반대가 심해 고민이라는 질문에 스님은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집을 떠나 설법하시고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셨지만 그때 부인이나 가족들이 많이 괴로워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저도 지금 하고 싶은 게 많아요. 다른 곳을 방문하고 돌아다니며 활동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런 활동을 제가 좋아하고 도움도 많이 되지만, 부모님들은 제가 여자니까 집에 있어야 좋다고 생각하세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각 나라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미성년과 성년을 구분하는 나이가 있습니다. 이 나이가 옛날에는 15세였고, 지금은 보통 18세에서 20세 사이로 두고 있어요. 인도에서는 몇 살이 되어야 성인으로 봅니까?”
“18살입니다.”
“18세가 넘으면 독립된 한 사람의 성인이 됩니다. 18세가 넘으면 나는 내 인생을 독립적으로 살 권리가 있습니다. 출가해서 스님이 되든, 누구와 결혼을 하든, 외국을 가든 자기 인생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어요. 부처님은 29살에 출가했기 때문에 성인으로서 자기가 자기 삶을 결정한 거예요. 물론 부모님은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반대한다고 출가를 하지 않았다면 부처님은 이 세상에 나올 수가 없었어요. 조그마한 나라의 왕이 된 것에 그치고 말았겠지요. 어려서 돌봄을 받을 때는 부모님이 이 세상에서 제일 은혜로운 사람이지만, 성년이 된 뒤에 부모 말만 듣는다면 그건 부모의 노예이지 독립된 인간이 아니에요.
그러니 질문자는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습니다. 다만 부모님은 세상을 많이 살아보신 분이니까 많은 경험이 있고 나는 경험이 좀 부족해요. 그러니 부모님이 조언을 해줄 수 있어요. 그건 내가 참고로 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나를 나쁘게 하려고 조언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만 해서도 안 되지만, 부모님의 말씀을 내가 참고할 필요는 있다는 거예요.
이 때 또 하나의 조건이 있어요. 독립한다는 것은 경제적인 독립도 포함해야 합니다. 먹고 사는 걸 자기가 해결해야 해요. 부모님이 대학 학비를 도와주거나 부모님 집에 얹혀살거나 용돈을 받는다면 부모님이 스폰서인 셈이에요. 그러면 스폰서의 말을 좀 들어야 해요. 제가 만약 여러분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준다면 여러분들이 제 뜻을 좀 따라야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부모님께 도움은 받으면서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인도인들 모두 웃으며 박수)
여러분들에게는 무엇이든지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에게는 반대할 권리가 있어요. 부모님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내가 잘못된 것도 아니고, 서로 의견이 다를 뿐입니다. ‘이걸 내가 어떻게 할 거냐’는 내가 결정하면 됩니다.”
스님의 답변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자 질문한 학생은 한가지 더 물었습니다. 참고로 인도는 여자가 바깥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지금도 굉장히 보수적인 곳입니다.
“또 하나 질문 드리겠습니다. 부모님의 의견이 딸을 대할 때와 아들을 대할 때가 다릅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건 현실이고 문화적인 차이예요. 부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어요. 남자만 출가할 수 있었고 여자는 스님이 될 수 없었어요.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여자도 출가해서 수행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러나 부처님의 어머니와 부인을 비롯한 여성들이 처음 출가를 요청했을 때 부처님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사회적인 분위기와 문화가 여성이 혼자서 수행하기 어려운 조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나무 밑에서 혼자 수행할 수 있지만, 여성이 나무 밑에서 헐벗고 수행하고 있으면 남자들이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하기 때문에 출가해서 수행하기가 거의 불가능했어요. 이렇게 조건이 다르니까 허락을 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출가를 처음 청했을 때는 승낙하지 않았어요.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승낙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부처님이 카필라바스투에서 바이샬리로 가셨어요. 그러자 이 여성들이 바이샬리까지 따라가서 출가를 또 요청했어요. 그래서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여자는 수행하면 해탈할 수 없느냐고, 즉 열반에 이를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부처님이 ‘있다’고 답하셨습니다.
인도 전통에서는 여자는 해탈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여자는 붓다가 될 수 없고, 전륜성왕이 될 수 없고, 인드라가 될 수 없고, 브라만이 될 수 없고, 자재천왕이 될 수 없다.’ 당시 전통은 여자는 이렇게 다섯 가지가 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있다’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런데 왜 허락하지 않으십니까?’라고 아난존자가 다시 묻자 부처님이 비로소 출가를 허락하셨어요. 대신 8가지 조건을 붙였습니다.
왜 카필라바스투에서는 허락하지 않다가 바이샬리에서는 허락을 하고, 또 8가지 조건을 붙였을까요? 당시 인도에서 제일 진보적인 도시가 바이샬리였습니다. 다른 도시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했지만 바이샬리 사람들은 그래도 여성의 출가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기에 부처님이 거기에서 허락하신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제한을 두신 이유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 여성 출가수행자인 비구니가 생겼어요. 남성 출가수행자인 비구가 생긴 지 20년 쯤 지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치적으로는 똑같지만 사회 현실적으로는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 부처님이 시간을 좀 끌다가 바이샬리라는 진보적인 도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허락하신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년이 지나자 비구니제도가 없어져버렸어요. 그래서 남방 불교에서는 비구니제도가 없습니다. 인도사회의 여성 차별 때문에 여성의 출가를 인도사회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원래 허락하지 않았는데 아난다가 자꾸 이야기해서 허락을 했기 때문에 여성 출가는 무효다’ 이렇게 주장을 했어요. (모두 웃음)
그러니 인도의 이런 사회 문화적 배경 때문에 부모가 딸이 자유롭게 다니는 것을 다소 꺼려하는 것은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해는 하되 ‘내가 어떻게 할 거냐’는 내가 결정할 일이에요. 여기 통역해주는 쁘리앙카가 이렇게 집을 나와서 수행을 하는 데도 집안에서 반대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에서 봉사를 하고 있을 때 오빠가 찾아와서 혁대를 풀어 때린 적까지 있습니다. 외국 사람과 같이 있어서 물들었다는 비난도 들었어요. 이렇게 저항이 많았습니다. 쁘리앙카의 조카도 함께 봉사를 했었는데, 조카는 집안에서 억지로 결혼을 시켜서 결국 나갔어요. 그래도 쁘리앙카는 부모와 갈등하면서도 끝까지 남았습니다. (모두 박수)
지금은 관계가 다시 좋아졌어요. 결혼시키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돈도 안 들고 좋잖아요. (모두 웃음)
그러니까 이런 인도사회에서 여성이 조금 자유롭게 지내려면 한국이나 미국이나 유럽보다는 조금 더 이겨내는 힘이 강해야 해요.
그렇다고 이런 인도문화를 나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문화는 서로 다릅니다.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의 방향에 따라 실천하기가 조금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건 비난할 대상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대상입니다. 여성이 혼자서 독립할 수 있도록 제일 먼저 길을 열어준 사람이 붓다예요. 여자는 세 가지에 묶여 있다고 합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보호자고, 결혼하면 남편이 보호자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이 보호자예요. 그런데 비구니가 됐다는 것은 남자 없이 자기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거예요. 여성이 독립적 인간임을 최초로 선언한 분이 붓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붓다의 나라인 인도는 위대한 나라예요, 하하.” (웃음)
스님은 큰 웃음 소리에 인도인 청년들도 큰 박수로 공감을 표했습니다. 여기까지 답변을 모두 마치고 약속한 시간이 다 되자 스님은 마지막으로 짧게 인사말을 덧붙였습니다.
“질문이 더 있겠지만 시간이 제한되어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내년에 와서 또 할 테니 그때 또 많은 질문을 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인도인 청년들은 이제 막 자기 고민들을 꺼내놓기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벌써 마칠 시간이 되어 아쉽기만 했습니다. 내년에 또 오실 것을 약속한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이렇게 강연을 모두 마치고 참석한 인도인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활짝 웃는 모습을 보니 오늘 강연이 너무나 좋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 강연을 들은 인도인들과 기념사진
집으로 돌아가는 한 인도인 청년에게 강연을 들은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평소 힘들어할 때가 자주 있었는데 스님의 답변을 들으니 부모님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며 기쁜 표정을 지었습니다.
▲ 스님의 영문 책을 구입하고 있는 인도인 청년들
이어서 한국문화원에서 준비해 준 비빔밥으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원장님은 맨 앞에서 가장 열심히 강연을 들었는데, 인도인들에게도 이렇게 좋은 강연을 들려줄 수 있어서 무척 고맙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오후 1시부터는 한국 교민들을 대상으로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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