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6.1.24 (인도 18일째) 델리 인도국립박물관, C팀 출국


 

안녕하세요? 인도에 도착한지 18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C팀을 이끌고 라즈가트를 참배한 후 델리 인도국립박물관을 안내했습니다. 

 

아그라에서 하룻밤을 잔 후 6시 30분에 숙소를 출발했습니다. 순례를 하는 동안에는 매일 새벽 3시, 4시에 출발을 했는데, 어제 일정 공지 시간에 스님이 “비싼 호텔에 잤으니 조금이라도 본전을 더 뽑아야 하잖아요.” 라고 하자 모두들 무척 기뻐했습니다. 

 


 

어제가 무슬림의 휴일인 금요일이어서 타지마할 관람을 하지 못했는데, 그래서 오늘은 가장 먼저 타지마할을 찾았습니다. 타지마할 입구에 도착하자 아침 7시가 되었습니다. 문은 열었지만 아침 일찍이라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그래도 아그라에 왔는데 타지마할을 안 볼 수는 없어 모두가 티켓을 끊고 입장을 했습니다. 

 


▲ 타지마할 관람을 위해 입장하는 대중들

 

타지마할 관람을 마치고 나온 분들에게 소감을 물어보니 “안개만 자욱했다. 흰 벽 앞에서 사진을 찍고 왔다”는 대답을 하며 웃었습니다. 

 

9시에 델리로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세 사람이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일정을 연기할 수는 없어 결국 스탭 한 사람을 남기고 전체는 출발했는데, 다행히도 마지막에 출발한 버스가 세 사람을 길에서 발견하여 10시가 되어서야 겨우 델리로 출발했습니다. 알고보니 릭샤꾼이 주차장으로 가자는 얘기를 아그라성으로 가자는 얘기로 잘 못 알아듣고 아그라성으로 가는 중이었다고 합니다. 대중들은 무사히 버스에 올라탄 세 사람을 향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아그라에서 델리로 가는 길은 지금껏 성지순례를 다니며 보았던 풍경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6차선 고속도로가 한국처럼 깨끗하게 펼쳐져 있고, 델리에 가까워질수록 양 옆으로 아파트가 줄줄이 건축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깔끔한 복장에 신발을 신고 다니는 풍경이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성지순례를 할 때 보았던 맨발에 헐벗은 차림의 인도인들, 허름한 집들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풍경이었습니다. 

 


▲ 아그라와 델리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야무나 익스프레스

 

특히 델리 근교의 노이다(NOIDA) 지역은 엄청난 규모의 공단이 들어서서 막 성장하는 인도 산업의 태동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 노이다 공단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 버스 안에서는 어젯밤 숙소에서 미리 싸둔 주먹밥을 꺼내 먹었습니다. 마지막 여정의 아쉬움을 달래며 쉴 새 없이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델리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라즈가트’입니다. 라즈가트는 인도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마하트마 간디를 화장한 곳입니다. 넓은 공간에 잔디밭으로 둘러싸여 공원처럼 잘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간디를 화장한 후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고 해서 지금도 계속 불꽃이 타고 있도록 해놓고 있었습니다. 순례단은 간디의 뜻을 기리며 불꽃을 항해 잠시 묵념을 한 후 라즈가트를 나왔습니다. 

 


 


▲ 라즈가트

 

라즈가트를 나와 길을 건너니 간디 박물관이 나왔습니다. 간디의 전 생애가 다양한 사진들로 전시가 되어 있었는데, 시간이 넉넉지 않아 주마간산 식으로 훑어 보고만 나왔습니다. 간디가 얼마나 인도 민중의 행복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쳤는지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델리 인도국립박물관을 관람했습니다. 검색대를 통과해 대중들이 모두 박물관 입장을 마치자 스님의 설명이 곧바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박물관 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는 얘기를 미리 들었기에 다들 기대감을 안고 서둘러 입장을 했습니다. 

 

박물관 입구에 마련된 인더스문명관을 시작으로 마지막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곳까지 스님은 차례대로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먼저 인더스문명관에 들어섰습니다. 

 


 

“입구에 보면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인더스문명을 설명해놨습니다. 인더스문명은 한 두 군데에 집중된 게 아니라 여기 지도에 점으로 표시되어 있듯 한 250군데가 됩니다. 구자라트가 있는 하류 지역에서 펀잡 지방까지 인더스 강 유역 전체가 옛날에 문명이 발달한 곳이에요. 여기는 도시문명이 발달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초원지대입니다. 도로도 포장이 되어 있었고, 공중 목욕탕과 신전 등 건축물 뿐만 아니라 조각이나 염주, 흙으로 만든 소품 같은 것도 아주 발달했어요. 

 


 

이것은 청동기 유물입니다. 우리 나라도 청동기로는 주로 제기로 사용했습니다. 나중에는 무기를 좀 만들었지만 그 시대의 농기구는 대부분 석기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토기가 유명합니다. 토기를 보면 아주 사실적으로 조각이 되어 있습니다.

 

고대 4,500년 전 유적지 사진인데 굉장하지요? 여기는 모헨조다로입니다. 모헨조다로나 하라파는 유물이 발견된 마을 이름이에요. 여기는 주로 토기와 작은 화살촉, 바늘 같은 것들이 많이 나왔어요. 이런 목걸이는 요즘 걸어도 좋을 정도로 장신구도 굉장히 발달했습니다. 너무 오래 되었으니까 큰 물건들은 다 파괴되고 작은 소품만 땅속에서 나온 거예요. 그러나 많은 소품에 마차가 있는 걸 보면 당시에도 마차가 발달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우리나라도 아직 세계에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기 전이어서 그렇지, 요하문명이라고 해서 지금부터 5,000~6,000년 전에 세계에서 최고로 발달한 배달문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중국 땅에 있어서 우리가 접근하기 어렵지만 엄청난 유적과 유물들이 지금도 많이 발굴되고 있어요. 

 

배달문명을 창시한 환웅 천황님께서 환인으로부터 떠나오실 때 천부인 세 개를 가져왔다고 해요. 그 천부인 세 개가 청동거울, 청동검, 청동방울입니다. 그러니까 환웅은 청동기문명의 소유자였다고 볼 수 있어요. 세계 최고의 문명 집단에서 일파가 떨어져 나와서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이런 유물들이 박물관 안에서는 많이 볼 수 있으니 흔해 보이지만 모두 역사교과서에 나오는 유명한 것들입니다. 대부분은 토기와 석기이고 청동기가 더해집니다. 청동기가 발달해서 많이 쓰여진 것은 3,000~4,000년 전이지만 청동기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은 6,000~7,000년 전 쯤까지 보고 있습니다. 요즘은 유물 발굴 기술이 발달되어서 연구에 큰 진척을 이루었어요. 신석기 문명도 8,000년 전 쯤으로 보다가 지금은 10,000년 전 쯤으로 보고 있고요.” 

 


▲ 당시 시신이 매장된 모습을 그대로 복원해놓은 것

 

이어서 마우리아왕조 때의 유물이 전시된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여기는 마우리아왕조, 즉 아쇼카왕 때 작품입니다. 사르나트에서 우리가 봤던 네 사자머리 석주가 있지요? 아쇼카왕 시절은 아직 부처님을 사람 형상으로 묘사한 불상이 나오기 전입니다. 아쇼카석주의 머리에 있던 것은 사자와 코끼리와 소와 말인데 각자 동서남북을 가리킨다고 해요. 여기도 부처님을 법륜(법바퀴)으로만 표시해놨지 불상으로는 표시하지 않았어요. 

 


▲ 부처님 대신 법륜 마크를 조각한 모습

 

이 그림은 부처님이 태어났을 때 아시타 선인이 부처님을 보고 ‘이 세상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되고 출가하면 부처를 이루리라’라고 예언하는 모습입니다. 

 


▲ 아시타 선인의 예언을 표현한 굽타 시대의 작품

 

여기서도 무릎에 아기를 안고 있지만 아기를 사람 형상으로는 아직 그리지 않았습니다. 정반왕과 아시타선인이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에요. 여기는 1세기 경 작품들입니다.”

 

다음은 쿠샨왕조 때의 유물이 전시된 곳으로 들어섰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쿠산왕조 시대입니다. 쿠샨왕조는 마우리아왕조 다음에 인도를 통일한 왕조이고 시기상으로는 1세기에서 3세기 정도예요. 또 활석처럼 맨질맨질한 돌 위에 아주 예쁘게 새겨놓은 이런 조각들을 ‘나가르주나콘다’ 양식이라고 해요. 저런 양식은 남인도, 특히 첸나이 인근에 많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정면에 있는 여자 조각상이 마투라 양식입니다. 마투라식은 붉은 사암을 쓰고 여성의 아랫도리를 노출하는 게 특징이에요.  

 


▲ 마투라 양식

 

오른쪽에 줄지어 있는 게 전부 나가르주나콘다에서 발굴된 나가르주나콘다 양식입니다. 여기 그림들은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그린 거예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한 장면 한 장면씩 그림으로 표현했어요.

 


▲ 나가르주나콘다 양식

 

이게 초기 불상입니다. 1세기 즈음의 간다라 양식인데 여길 보면 부처님 머리가 처음에 어떤 모양이었는지 알 수 있어요. 끈을 묶어서 뒤로 늘어뜨린 것을 이렇게 잘라버렸잖아요. 

 


 

이 끈 묶은 자리가 초기에는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 모양이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모양이 되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우리가 아는 구불구불하고 동글동글한 모양으로 조각의 표현이 변한 거예요. 지금 이 불상은 묘사가 무척 사실적이에요. 그리고 신체 모양이 굉장히 당당하고 힘이 있어 보입니다. 

 


 

조선시대 불상들은 어깨가 올라오고 고개가 쭈그러져 있잖아요. 불교가 억압받다보니 그래요. 그리고 이 때는 좌상보다 입상이 많습니다. 천천히 걷기는 하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활보하는 자세가 많아요. 또 대부분 서서 설법하는 모습입니다. 앉아서 명상하는 상보다 교화하는 상이 많아요.”

 

다음은 굽타시대의 유물이 전시된 곳에 들어섰습니다. 

 

“다음은 굽타시대, 즉 4~5세기 경의 불상 작품들입니다. 굽타시대는 벌써 불교만이 아니라 힌두교도 상당히 다시 복구해서 숭상하던 때예요. 중국 유교도 비슷합니다. 공자의 유교가 한나라 시대에 국교가 되었다가 불교가 들어오고 나서 수당 때는 불교가 번성했어요. 그러다 송나라 때 와서 불교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유교가 새로이 부흥했는데 그게 주자학입니다. 유교는 유교지만, 초기의 유교보다 상당히 이론화된 유교라고 볼 수 있죠. 힌두교도 마찬가지여서 원래 브라만교가 쇠퇴했다가 불법의 영향을 받아 다시 힌두 신앙으로 재정립하게 되었어요. 그러니 힌두교는 사실 불교보다 더 늦게 나왔다고 볼 수 있어요. 브라만교가 있고, 불교가 나오고, 불교가 쇠할 때 불교의 영향을 받은 힌두교가 다시 일어난 것이니까요. 

 

이 시대는 벌써 힌두교가 다시 부흥해서 불교와 양립하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불상도 많지만 신상이 아주 많아요. 그리고 신상과 보살상이 잘 구분되지 않아요. 보살상이 머리를 깎은 스님이 아니라 머리를 기른 상이다 보니 이름이 신이라고 붙어 있으면 신상이고 보살이라고 붙어 있으면 보살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불상은 완전히 모양이 다르니까 알아보기 쉽지요.

 

이런 불상은 사르나트 양식입니다. 여길 보면 ‘A.D 5세기, 굽타, 사르나트’라고 써놨습니다. 허리에 이런 띠가 있고 얼굴 모양이 이런 것은 사르나트 양식입니다.” 

 


▲ 사르나트 양식

 

사르나트 박물관에서도 보았던 사르나트 양식을 이곳에서도 보니 무척 반가웠습니다. 다음은 신상들이 많이 전시된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여기는 7세기 이후 12세기까지의 작품들입니다. 인도가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힌두 왕국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에 불교도 융성하고, 힌두교도 융성하고, 서로 섞이기도 했던 시기입니다. 이때는 주로 신상이 많습니다. 우리 한국 불교에서는 보살상이나 불상이 앉아 있는 자세가 많은데 여기 보면 한쪽 다리를 내려놓고 있어요. 경주 남산 칠불암 위쪽에 있는 신선암의 마애보살반가상이 저런 자세예요. 인도 신상 중에는 저렇게 앉아 있는 신상이 아주 많아요. 

 


▲ 한쪽 다리를 내려놓고 있는 신상

 

불상처럼 생겼는데 남자 성기가 그려져 있으면 불상이 아니라 마하비라상입니다. 자이나교의 실질적 창시자인 마하비라를 묘사한 거예요. 

 


▲ 자이나교의 마하비라상

 

자이나교는 무소유 사상을 강조해서 옷을 안 입으니까 자이나상도 그렇게 표현했어요. 여길 보면 불상과 비슷해 보이지만 좀 투박하고 아랫도리가 노출되어 있잖아요. 이건 불상이 아니라 자이나상이에요. 인도에는 자이나교도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가슴에 다이아몬드처럼 마름모꼴 모양이 있는 것도 자이나상입니다. 이렇게 옷을 입은 자이나상은 백의파의 것입니다. 자이나교의 교파에는 나체파(공의파)와 백의파, 이렇게 두 가지가 있는데 백의파는 옷을 입습니다.

 

이것들은 힌두 사원에 한 부분씩 장식되어 있던 게 떨어져 나온 거예요. 독립된 한 개의 상이 아닙니다. 

 

팔이 여러 개 있는 이런 신상이 변한 게 관세음보살상이에요. ‘관세음보살은 천수천안이다’라고 해서 조각하거나 그릴 때 40개 팔을 그리는 게 여기서 나왔어요.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이 연극할 때 맨 앞의 아이가 손을 코끼리 코처럼 잡고 뒤에 아이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손을 내밀던 게 이런 모습을 표현한 거예요. 앞에서 보면 이 신상처럼 손이 여럿인 양 보이잖아요. 모르고 보니까 뭐가 뭔지 몰라 ‘왜 저러나’ 싶었죠? (대중 웃음) 불상이든 신상이든 마하비라상이든 인도 안의 같은 문화다 보니 비슷한 점이 많아요.

 

이 상들은 머리를 깎지 않았어요. 머리를 묶고 옷도 화려하게 입었습니다. 이건 보살상, 즉 보디사트바상입니다. 이건 마에트레야, 다시 말해 미륵보살이에요. 2세기 작품이라고 되어 있네요. 1~2세기 간다라 미술기의 작품이어서 조각이 사실적입니다.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서 그래요.”

 

이렇게 안내가 계속 이어지던 중 드디어 부처님의 진신 사리가 모셔져 있는 곳에 다달았습니다. 스님이 앞에 보이는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가르키자 모두들 탄성을 지르며 그 앞에 멈춰 섰습니다. 

 


 

“저 앞에 보이는 금으로 만든 탑 안에 부처님의 진신 사리, 즉 부처님의 유골이 모셔져 있습니다. 원래 그냥 모셔져 있었는데 태국 분들이 기증을 해서 저 안에 모시게 되었어요. 이게 여러분들이 참배했던 삐쁘라하와에서 나온 사리예요. 너무 가까이 가진 말고 삼배 드리겠습니다. 왼발을 한 발 내밀고 합장을 한 채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는 ‘우슬착지’ 자세를 취하고 고개 숙여 인사드리는 것을 세 번 하겠습니다.” 

 

 

스님의 말씀대로 다함께 우슬착지로 공경의 예를 표했습니다.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은 엊그제 순례단이 직접 참배한 곳이라 진신 사리의 친견은 더욱 뜻깊었습니다. 다시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금강경에 ‘편단우견 우슬착지 합장공경 이백불언(偏袒右肩 右膝着地 合掌恭敬 而白佛言)’이라고 나오죠? 지금도 제가 시골의 석가족들에게 가면 석가족들이 무릎을 꿇고 스님의 발에 이마를 대며 인사합니다. 그게 최대로 경의를 표하는 인사법이에요. 그걸 형식적으로 흉내내는 것이 고개 숙여 반(半) 절하면서 손을 발에 대는 거예요. 정식 인사법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발에 대는 것입니다. 

 

사리는 무슨 보석이 아니에요. 부처님을 화장하고 남은 유골을 사리라고 불러요. 우리가 존경해마지않는 부처님의 육신의 한 조각이 남아 있는 겁니다. 

 


▲ 부처님의 진신 사리

 

처음에는 유골을 8군데에 나눠서 모시다가 나중에 아쇼카 왕이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기념탑들을 쌓으면서 그 한 군데 한 군데마다 사리를 넣은 거예요. 사리가 부처님의 징표잖아요. 우리가 외국에 불교를 전할 때도 이 사리를 가져가서 탑을 쌓아야 그게 붓다의 징표가 됩니다. 그래서 모든 불교신앙의 중심은 절이 아니라 탑입니다. 탑 옆에 있는 승당은 그냥 스님들이 사는 집에 불과했어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이제 탑은 그냥 장식물이 되고 불상이 중심이 됐죠. 인도에는 따로 대웅전이라는 것이 없고 탑 안에 그냥 불상을 모셨어요.

 


 

아래쪽을 보면 사리함이 있어요. 원래는 사리가 저 사리함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탑을 처음 발굴했을 때 탑 안에서 저 사리함이 나왔고 그 속에 사리가 들어 있어요. 그런데 보면 사리함이 두 개입니다. 처음에 영국 사람이 발굴했을 때 사리가 발견되어서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인도가 독립하고 나서 더 깊이 파봤더니 아래쪽에서 또 다른 사리함이 나왔어요. 시대에 따라 탑을 덧붙이면서 아마 사리를 구해서 넣었나 봐요.”

 

특히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코 앞에서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니 모두들 믿기지가 않는지 꿈인지 생시인지 여러번 꼬집어 보면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습니다. 2600여 년 전 고통받는 중생들의 행복을 위해 평생을 길에서 살다가신 분의 흔적을 보며 찬탄 공경하는 마음이 절로 일었습니다. 

 

이렇게 불교 유적에 대한 부분만 스님이 자세히 안내를 해준 후 나머지 미술 작품이나 조각품, 신상 등에 대해서는 안내를 하지 않고 그냥 둘러보기만 했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어 1층부터 2층, 3층까지 모든 곳을 꼼꼼히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2층에는 코끼리 상아에 부처님의 일생을 아주 정교하게 새겨놓은 작품이 있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스님도 유심히 살펴보며 이 그림은 부처님의 어떤 모습을 표현한 것인지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 코끼리 상아에 새겨진 부처님의 일생

 


▲ 5비구에서 처음 설법하는 모습

 

이렇게 박물관 관람을 모두 마치고 각자 사는 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델리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버스 안에서 스님은 “공항에 가면 짐 챙기느라 분주하니까 미리 작별 인사를 하겠다”고 하면서 인사를 건넸습니다.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성지순례를 잘 마쳤습니다. 모두들 안녕히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스님의 작별 인사에 모두들 환호를 하며 박수 갈채로 화답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준비와 노고 덕분에 제27차 인도 성지순례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차가 막히지 않아 비교적 여유있게 공항에 도착해서 차분히 짐을 챙긴 후 게이트로 들어갔습니다. 스님은 게이트로 들어가는 대중들 한 명 한 명에게 모두 악수를 건네며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했습니다. 

 


 

스님은 특히 각 차량별 담당 소임을 잘 수행해 준 차장님 3명을 따로 불러 얇고 부드러운 인도 천을 선물했습니다. C팀은 외국에서 오신 분들과 정토회 회원이 아닌 일반인들이 많아 조장과 차장이 특별히 더 수고가 많았습니다. 스텝도 부족해서 차장이 거의 스텝 역할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님은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하나 해야겠다고 해서 선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뜻밖의 선물에 차장님들은 깜짝 놀라하며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대중들이 모두 떠나고 스님은 델리 불자회에서 운영하는 법당으로 향했습니다. 매년 인도 성지순례를 마치면 스님은 델리 불자회에서 마련한 강연회에 참석해 즉문즉설을 해주었는데, 스님과는 아주 오랜 인연을 맺어오고 있는 분들입니다. 법당에 도착하자 델리 불자회 회원 분들이 스님께 환영의 마음을 담아 꽃다발을 건넸습니다.

 


▲ 델리 불자회 

 

작년에 법당이 구르가온(Gurgaon) 지역으로 새롭게 이전을 했는데, 스님은 새 법당을 둘러보며 고생했다고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1년 만에 다시 델리를 찾아준 스님께 모두들 삼배로 인사를 올렸습니다. 

 


 

스님은 대중들을 모두 자리에 앉히고 서로 소개를 시켜주었습니다. 특히 델리 불자회 분들은 남편이 한국 기업의 주재원으로 나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닙다. 

 


 

이런 저런 근황을 물어보며 담소를 나누다가 델리 불자회 회원들은 스님 일행이 쉴 수 있게 배려해주며 일찍 법당을 나왔습니다. 

 

이렇게 지난 15일 동안 A팀, B팀, C팀 세 팀으로 나눠 진행된 제27차 인도 성지순례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그동안 성지순례를 함께 하는 마음으로 스님의 하루를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말씀 드립니다. 

 

오늘밤 델리 불자회에서 운영하는 법당에서 하룻밤을 주무신 스님은 내일 한국문화원에서 오전 10시에 인도인들을 위한 즉문즉설 통역 강연을, 오후 1시에 한국 교민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을 연이어 할 예정입니다. 저녁에는 INEB(국제 참여불교 네트워크)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스리랑카로 갑니다.

 

※ 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쉽고 명쾌한 강의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신 분에 한해 법륜 스님과 함께 떠나는 '인도 성지순례'에 우선적으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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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밀

대덕화님의 용기있는 글에 감사합니다. 대덕화님 같은 분께서 목소리르 내주셔야 정토회가 좀 더 나아질 수 있겠지요. \'나를 내려놓는다\'는 가르침을 개인이 자신에게 적용할 때는 겸손과 자기 성찰이 되지만, 다른 이에게 적용할 때는 폭력이 됩니다. 특히 조직에서 그런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하게 되면, 그건 독재가 되기 쉽습니다. 대덕화님의 질문에 대한 법사님의 답변에 저는 솔직히 매우 실망했습니다. 대덕화님도 비슷하게 지적하셨듯이, 그러한 답변 방식은 질문한 자를 인격적으로 덜 성숙한 사람으로 몰아버림으로서 자신의 도덕적 권위를 세우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 상대를 부족한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법사님의 이 답변의 경우가 딱 그렇게 보입니다. 잘 모르시면, 모르신다고 하면 되는 것이고, 아는 만큼 아는 것을 설명해주시거나 해야하는 게 더 현명한 대답일 테인데 매우 방어적으로 \'우리가 뭐 딴데 쓰겠어요, 좋은 데 쓰지.\'라니요. 정토회에서 나쁜데 쓴다고 생각해서 질문하신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반응하셨던 것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정토회에서 비용을 어디 쓰는지 공개할 의무는 없으면, 궁금해하는 사람에게는 알려줄 수도 있는 것이지요. 보시한 사람도 자신이 아낀 돈이 얼마나 보시가 되었는지 알아야 뿌듯하고 자랑스럽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큰 비밀이라도 되는 것인가요? 순례여행참가자들에게는 해당 여행 이후 보시금이 얼마쯤 되는지 알려주시는 제도가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아니면, 여행 가능 사람들에게 매 여행마다 평균적인 보시금이 어느 정도 되었는지, 그래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요새는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기에 하나의 제안을 더 드립니다. 남은 돈이 기부된 경우, 세금공제의 혜택도 받을 수 있게 기부금 영수증을 제공해주시는 것은 어떻까 합니다. 여행가시는 분들 모두가 돈을 쌓아놓고 사시는 분들도 아닐텐데, 회원배려를 위해서라도 여행 후 보시금의 금액을 참가자들에게는 밝혀주시고 그 금액에 대해 기부금 영수증도 발급해주시면 좋지 않을까요? 대부분 종교가 사이비화 되고 타락할 때는 금전부분이 투명하지 않을 때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방어적으로 하시기 보다는 현대 자본주의에 맞는 운영방식을 갖추는 것이 장기적으로 정토회의 정신을 지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2016-09-23 10:21:24

박선희

마치 직접 여행하듯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2년전 성지순례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적게 먹고, 적게 자는 성지순례의 참의미를 깨우쳐 주던 그 때의 감동이 살아납니다,
다시 가고 싶은 성지순례입니다~!

2016-01-29 18:28:39

까나리

가고프다 성지순례

2016-01-29 18:2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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