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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탑곡수련원에서 직접 기른 배추로 김장한 김치를 선물로 포장하고, 겨울을 날 준비를 하며 하루를 보낸 후 저녁 7시부터는 부산 청년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서울 정토회관에서 새벽 1시에 평화와 통일을 위한 천일 기도 중 100일째 기념법회를 마친 후 새벽 5시에 울산 두북에 도착한 스님은 차안에서 숙면을 취했습니다. 시골에 도착해서 새벽 예불과 천일결사 정진을 마치고 곧바로 아침 식사를 한 후 원고를 교정하다가 햇살이 따뜻해지자 9시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지난주에 밭에서 수확한 배추를 화광 법사님이 인근 지역 정토회에서 온 봉사자들과 함께 김장을 담궜습니다. 스님은 작년에 화광 법사님이 담근 김치를 맛보고서 맛이 좋다며 내년에 실험적으로 더 만들어보고 내후년에는 더 확대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정토표 김치가 처음으로 생산된 첫해가 되는 셈입니다.
▲ 평화재단의 통일 운동을 돕고 있는 사회 인사들에게 선물할 김치 박스들
오전에는 양념이 버무려진 김치들을 스티로폴 박스에 담고, 택배 회사에서 가져갈 수 있게 선물 포장하는 일을 했습니다. 스님은 포장이 잘 된 것과 조금 부족한 것을 구분하고 총 개수를 헤아려본 뒤 어떻게 배달을 할 것인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김치들은 정토회와 평화재단을 위해 도움을 주고 계신 많은 분들에게 선물로 드릴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가을 가뭄으로 배추 생산량이 처음 계획보다 많지 않아 모든 분들에게 드리지는 못하고 평화재단의 통일 운동에 물심양면으로 도운 사회 인사 분들에게만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 법사님들과 함께 텃밭에서 수확한 배추와 무로 김장을 일부 담그었는데 오후에는 이 김치들과 무를 뒤뜰에 묻어 둔 장독에 담는 일을 했습니다.
▲ 가을에 텃밭에 심은 무로 만든 총각 김치
비나 눈이 오면 물이 장독에 들어갈 수 있어서 비닐로 뚜껑을 묶어주고 겨울에 얼지 않도록 뚜껑 위에는 부직포로 살포시 덮어 주었습니다. 내년 봄에 이 장독을 열면 김치가 아주 먹음직스럽게 잘 익어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 땅에 묻은 장독에 김장 김치를 넣고 있는 스님
그리고 창문에 비닐을 쳐서 외풍을 막고, 지난주에 화분에서 국화를 땅으로 옮겨 심어놓은 자리에는 땅이 얼지 않도록 부직포를 덮어주었습니다.
이러저러한 일들을 바쁘게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뒷산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잠시 원고 교정 업무를 보다가 오후 5시가 되어서 강연이 열리는 부산으로 출발했습니다. 퇴근길에 길이 막혀서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까봐 긴장을 하기도 했는데, 다행히 10분 전에 무사히 강연장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 오늘 청년 강연이 열린 부산일보사 대강당
오늘은 청년들을 위한 희망 강연이 열리는 날입니다. 부산시 동구 부산일보사 10층 대강당에는 오후 5시부터 많은 청년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강연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강연이 열리는 부산일보사 대강당은 결혼식장으로도 사용되는지 각 의자마다 리본장식이 되어 있어 분위기를 한층 더 밝게 해주었습니다.
2시간 전부터 친구끼리, 혹은 형제 자매끼리, 또는 부모와 자녀가 함께 강연장 입구에 모여 입장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주위의 권유로 혹은 스님의 책과 즉문즉설을 보고 찾아온 것 같았습니다. 저녁 7시가 되자 준비된 300여 석을 다 메우고도 자리가 부족하여 의자를 빌려와 앉고 그것도 여의치가 않아 사이사이 통로에도 청중들이 자리를 펴고 앉았습니다.
스님 소개 영상이 끝나고 스님이 강연장 뒷문에서 걸어나오자 청년들은 일제히 환호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스님이 무대 위로 오르자 그 환호소리는 더욱 커졌습니다.
스님은 강연에 앞서 즉문즉설이 무엇인지, 부처님이 원래 설법하셨던 방법에 대하여 경전에 기록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재미있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의 길로 가기 위한 방법인 사성제와 중도, 팔정도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을 한 후 불교는 쉽고 생활 속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즉문즉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먼저 하고, 그 중 의문이 들거나 고뇌가 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우리 이야기를 먼저 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원인들을 규명해 가다 보면 어떤 해결의 실마리를 찾거나, 그보다 더 좋은 경우는 마치 꿈을 깨듯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구나’ 하게 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즉, 문제 삼았는데 알고 보니 문제가 아니다 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애인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어서 속상해 했는데 대화를 하다 보면 ‘그 사람이 비켜주니 다른 사람을 또 만날 수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잘 된 일이네’ 이렇게 돼요.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다가 쓸모없다고 갖다버린 것을 쓰레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쓰레기가 곧 요긴한 거름이에요. 똥을 오물로 보면 버려야 할 대상이고, 거름으로 보면 취해야 할 대상입니다. 여러분들은 똥을 오물로 보는 경험밖에 없지만 저는 똥을 거름이라고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친구네 가서 놀다가도 똥이나 오줌이 마려우면 일단 집으로 가서 똥을 누고 다시 친구네로 갔어요. (웃음)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좋은 일이 되기도 하고 나쁜 일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본래 없다, 즉 좋은 일이니 나쁜 일이니 하는 것은 자기 보기 나름이라고 하셨어요. 이걸 일체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라고 말합니다.
이런 즉문즉설은 부처님이 2600년 전에 원래 설법하신 방식이에요. 깨달음을 얻는 가장 중요한 진리를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 해서 사성제(四聖諦)라고 합니다. 그 사성제의 첫째는 사물의 현상, 즉 실제의 모습을 먼저 보라는 겁니다. 그게 ‘고(苦)’, 괴로움입니다. 둘째, 그 현상의 원인을 규명하라고 해요. 그것을 ‘집(集)’이라 합니다. 셋째, 그 원인이 소멸하면 그 현상이 소멸한다는 사실을 직시해라. 그것을 ‘멸(滅)’이라고 해요. 마지막으로, 그 원인을 소멸시킬 방법을 찾아서 실천해라. 이것을 ‘도(道)’라고 합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가 네 가지 거룩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시키는 실천 방법은 어디에도 치우치면 안 됩니다. 그걸 ‘중도(中道)’라고 해요. 화살이 과녁을 맞추듯 딱 적중해야 합니다. 중도가 곧 ‘정도(正道)’입니다. 그 ‘정도’에는 8가지가 있다고 해서 ‘팔정도(八正道)’라고 합니다.
붓다가 최초로 한 설법은 ‘중도’, ‘사성제’, ‘팔정도’ 이것뿐입니다. 사실은 중도나 사성제, 팔정도라는 표현도 쓰지 않으셨어요. 사람이 찾아와서 물으면 이런 원리에 의해서 그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부처님이 숲에서 명상하고 있을 때 청년 30여 명이 헐레벌떡 오더니 방금 어떤 여자가 도망가는 걸 못 봤냐고 물었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친한 친구들이 각자의 애인과 함께 나들이를 왔는데 한 명만 애인이 없어서 유녀, 즉 기생을 1일 애인으로 삼아서 왔다는 거예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놀다가 다들 취해서 잠들었는데, 깨어보니 지니고 있던 패물과 귀한 보석이 싹 없어지고 그 여자도 안 보인다는 거예요. 그 여자가 패물을 훔쳐 달아나면서 틀림없이 이 앞을 지나갔을 테니 어느 쪽으로 가는지 보셨냐는 거예요. 그 때 부처님께서 ‘젊은이들이여, 잃어버린 재물을 찾는 게 중요합니까?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는 게 중요합니까?’ 이렇게 질문을 던졌어요. ‘그야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게 더 중요하죠’라고 하니까 부처님께서 ‘그렇다면 여기 앉으십시오’라고 해서 설법을 하셨어요. 소위 요즘 말로 하면 자아 상실, 즉 자기를 잃어버리고 쾌락에 빠져 흥청망청 살던 청년들이 그 설법을 듣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래서 설법을 들은 30명이 다 출가를 해버렸어요.
요즘도 이런 일이 좀 생기면 좋겠는데, 아직 제가 부처님만큼 안 돼서 그런지 아무리 설법을 해도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따라오는 사람이 도무지 없고 박수만 칩니다. (청년들 모두 웃으며 박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불법은 너무너무 쉬울 뿐더러 다 우리의 생활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무지를 깨달아서 행복의 세계, 자유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파본 뒤에 진료를 받는 것도 좋지만 미리 예방한다면 훨씬 좋겠죠. 그런데 인생은 그게 잘 안 됩니다. 치통으로 고생하며 치과 다니다 보면 ‘평소에 치아 관리를 잘 해야겠다’ 하고, 허리 다쳐서 병원 치료 받다 보면 ‘미리 조심할 걸’하고 후회하잖아요. 항상 우리는 실패를 하고 다시 또 일이 닥친 뒤에야 후회하고 정신차리기를 반복합니다. 한 번만 실패하고 정신차리는 것만 해도 굉장히 양호한 사람입니다. ‘부처님, 하나님, 이것만 해결되면 제가 다시는 이러지 않겠습니다’ 하고 다짐하지만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되풀이하잖아요. 술 마시는 사람들이 그래요. 저녁에 마시고, 아침에 일어나서 속 쓰리고 힘들면 ‘다시는 안 마시겠다’ 해놓고 저녁이 되면 또 마십니다. 이렇게 반복하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 사이클에서 못 벗어납니다. 한두 번 실수하는 것은 괜찮아요. 실수를 통해서 ‘아, 이것은 나쁘구나. 이것은 나에게 손해구나’ 하고 깨달아서 그 윤회로부터 벗어나버려야 합니다. 그게 해탈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늘 반복하잖아요.
불법의 이치라는 것은 ‘불교’라고 특별히 이름 지을 필요도 없는 보편성입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적용되며, 어떤 사람도 차별하지 않고, 믿음이 불교인지 기독교인지 이런 것도 따지지 않는 보편적 진리입니다. 게다가 그 진리는 매우 쉽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떠난 하늘이나 산속이 아니라 우리가 고뇌하고 의문을 갖는 지금 여기에 진리의 길이 있습니다. 이런 특징을 갖고 있으니 오늘 함께 해봅시다. 단순히 인생 상담하는 게 아니라, 그 질문을 예로 삼아 우리가 함께 진리의 길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질문자들 손들어 보세요.”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 편안하고 재미있는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무거웠던 머리가 가벼워지고, 복잡하던 머리가 시원해진 기분입니다.
총 6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첫 번째 질문자는 권위적인 직장상사와 트러블이 생겨 내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잘 지낼 수 있는지 물었고, 두 번째 질문자는 대학 2학년생이었는데 학교 생활과 동아리 생활을 하며 아르바이트까지 하니 너무 바쁜 듯하여 동아리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는데 이제는 시간이 많이 남다보니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아 이를 특별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질문하였고 세 번째 질문자는 삼수를 성공한 수험생이지만 더 좋은 대학을 가고 싶어 사수를 하고 싶은데 반대하는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을 해야하는지 질문하였습니다.
네 번째 질문자는 아버지와 함께 화목한 가정에서 살고 싶은데 아버지가 이를 받아주질 않아 어떻게 해야하는지 질문하였고, 다섯 번째 질문자는 올해 공무원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발령 대기 중인데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회생활에 임해야 하는지 질문하였고,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질문자는 통일은 언제 되며 통일이 되면 우리가 더 잘 살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하였습니다.
매 질문마다 스님은 질문자가 이해하기 쉽게 답해 주었습니다. 스님의 재미있는 비유는 틈틈이 큰 웃음을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첫 번째 질문자가 물었던 권위적인 직장 상사에 대한 고민이 가장 많은 웃음을 주었습니다.
질문을 하기 전에 스님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얘기를 인터넷에서 읽었다며 식사를 잘 챙겨 드시라고 오히려 스님을 다그치는 질문자의 모습에 청중들도 시작부터 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냉정하고 권위적인 직장상사와 트러블이 많습니다. 다른 직장동료들은 다 저를 좋아하지만 유독 상사만 저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말을 험하게 하세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사소한 일로도 꾸중이 심해 화가 납니다. 상사에게 대들면 제가 손해니까 그 자리에서는 웃으며 넘기지만 집에 가면 계속 생각나고, 스님 법문을 들으며 자고 일어나면 좀 낫다가도 출근해서 상사를 보면 다시 짜증이 나는 일이 반복됩니다.
이런 성격을 좀 고쳐보고자 심리학 관련 책도 많이 읽었는데 어릴 때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 그런 권위적인 사람이나 상사에게 큰 거부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실제로 아버지는 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았고 어머니더러 무식하다고 구박도 많이 하셨어요. 그런 아버지를 미워했다가 ‘직장생활하면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이해하기 시작했지만, 지금도 친정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구박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예전의 마음이 다시 올라옵니다.
어떤 마음을 가져야 이런저런 말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당당한 제가 되어 권위적인 상사와도 문제없이 직장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직장 상사가 어떤 말을 주로 하기에 문제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봐요.”
“제가 보기엔 괜찮은 것 같은데도 ‘더 완벽을 기해라’ 라고 합니다.”
“완벽을 기하라는 말이 뭐가 잘못됐어요?”
“너무 사소한 걸 갖고 완벽을 기하라고 하니까요.”
“사소한 게 뭔지 구체적으로 말해보라니까요.”
“기안 같은 것도 좀 더 완벽하게 하라고 하시고... 잘 모르겠습니다. 성격이 난폭한 것 같아요.”
“미워하는 건 좋은데, 미워할 만한지 아닌지 우리가 지금 함께 알아보자는 거잖아요. ‘완벽을 기해라’ 이 말 자체는 미워할 대상이 아니에요.”
“‘이거도 모르냐’라고 무시하는 듯한 말도 많이 합니다.”
“그럼 질문자는 그걸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던 것 같습니다.” (모두 웃음)
“그러면 ‘이것도 모르냐’고 말할 수 있죠. 저도 즉문즉설 하면서 과학 이야기를 했을 때 여러분이 잘 못 알아들으면 ‘내 강연을 들으려면 적어도 중학교는 나와야 하는데 이렇게 초등학생보다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 강연에 오면 어떡하느냐’고 해요. 그 말은 ‘어떻게 대학 나온 사람들이 이것도 모르냐’라는 말이에요.”
“좀 더 부드럽게 표현할 수도 있잖습니까.” (청중 웃음)
“그럼 ‘아이고, 이 ㄴ-ㅕ-ㄴ아’ 라고 하면 부드럽고 ‘아이고, 이 년아’ 하면 욕이에요?”
“욕은 안 하세요.”
“저는 그저께 질문자가 하도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미쳤다’고 했습니다. (청중 웃음) 그래도 못 알아들어서 나중에는 ‘어리석은 년’이라는 표현까지 썼어요. 그랬더니 어떻게 ‘년’이라는 표현을 쓰냐는 항의가 들어왔어요. 이렇게 반응이 달라요. ‘좀 정신 차려라’ 이렇게 몇 번씩 말해도 안 되니까 극단적인 표현으로 자극을 준 거예요.
그걸 보고 어떤 사람은 ‘스님이 애정을 가지고 저렇게까지 하면서 깨우쳐주려고 하는구나. 그걸 알아서 이제 좀 그만하지’ 하는데, 어떤 사람은 답답한 나머지 자기가 나서서 ‘그만해!’라고 소리쳤어요. 그래서 제가 소리친 사람에게 그랬습니다. ‘당신도 질문 한번 해보세요. 당신은 그럼 깨칠 줄 알아요? 옆에서 들으면 금방 알 것 같지만 당사자는 못 깨달아요. 얼마나 답답하면 여기까지 와서 이 많은 청중 앞에서 핀잔 받아가며 질문하겠어요? 그러니까 좀 기다리세요.’
그러면 또 반응이 다양합니다. 첫째,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그냥 넘어가지, 그걸 무엇 때문에 자꾸 하느냐’ 이런 사람이 있고, 둘째, ‘깨우쳐주려고 스님이 저렇게까지 자비하게 애쓰시는구나’ 이런 사람이 있고, 셋째, ‘아니, 저 중이 저 사람을 언제 봤다고 저렇게 욕을 하는 거야?’ 이러는 사람도 있어요. (청중 웃음) 이렇게 사람마다 개념이 다릅니다. 질문자는 세 번째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질문자의 상사는 그런 욕도 안 한다면서 뭐가 불만이에요?”
“욕은 안 하지만 무시하는 말을 하십니다.”
“‘이것도 모르냐’는 말이 무시하는 말이에요?”
“그 밖에도 이것저것 많은데 기억이 안 납니다.” (질문자 웃음)
“질문자가 말한 건 ‘확실히 해라’, ‘이것도 모르냐’라는 두 가지였어요. 질문자가 별로 확실히 하지 않아서 ‘확실히 해라’라고 했고, 몰랐으니까 ‘이것도 모르냐’라고 한 거잖아요. (청중 웃음)
또 이야기해보세요. 우리가 다 듣고 진짜 나쁘다고 할 만한 걸 하나라도 찾아볼게요. 생각해보니 없죠?”
“사람이 다 완벽할 수는 없잖아요. 직장 상사가 그렇게 이야기하시면 ‘너는 아냐?’ 이런 생각이 들어요.” (청중 웃음)
“질문자 같은 사람이 깨달음의 장에 오면 어떤지 알아요? 깨달음의 장에 오는 사람은 자기가 깨우치러 온 거니까 제가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그런데 발끈해서 오히려 저에게 반발하는 경우가 있어요. 자기가 깨우치러 와놓고 법륜 스님을 깨우치려 드는 거예요.
그것처럼 질문자는 지금 부하직원임에도 불구하고 상사 노릇을 하려 들고 있어요. ‘네가 잘못했다’ 하니까 ‘그러는 너는 잘 하냐?’ 이렇게 받아치잖아요. 이해는 돼요. 부모님이 일찍 들어오라고 하면 ‘늦어서 죄송합니다’라고 대답하는 아이들은 별로 없습니다. 인상 쓰면서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려요. 문을 쾅 닫을 때 아이는 속으로 ‘너나 빨리 들어와라’ 이러는 거예요. (청중 웃음)
잘못했다고 야단칠 때 쾅 닫고 들어가는 건 ‘그러는 너는? 너나 잘 해라’ 이런 마음의 표현이에요. 문을 닫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잠가버리는 건 듣기 싫다는 소리예요. 따라 들어와서 두 번 물을까 봐 잠가버리는 겁니다. 어릴 때는 이렇게 하는데, 자기가 부모님보다 덩치도 커지고 힘이 세지면 대들어요. 힘이 약할 때는 말을 안 하고 피하지만요.
질문자도 지금 힘이 약하니까 앞에서 바로 싸우지는 못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을 하는 거예요. 아버지한테 했던 걸 그대로 하고 있어요. 아까 심리학 책 보고 배웠다지만 실천이 하나도 안 되는 거예요.”
“직장 상사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습니다.”
“직장에 붙어 있어야 하니까 그렇겠지요. 그러니까 이제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확실히 해라’하면 ‘네, 다음에 확실히 하겠습니다’ 하고, ‘그것도 모르냐’ 하면 ‘네, 몰랐습니다. 앞으로 알겠습니다’ 하면 되죠. 그게 사실이잖아요. 아니면 이런 소리 하는 사람과는 같이 못 지내겠다 하면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나오면 되잖아요. 안 맞으면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나오는 게 제일 좋은데 못 나오잖아요.
첫째, 질문자는 밥 먹고 살아야 하니 직장을 그만두지 못합니다. 둘째, 자기가 못 그만두면 상사를 잘라버리면 되는데 질문자는 상사를 자를 능력이 안 돼요. 셋째, 그러면 상사의 성질머리를 고치면 되는데 질문자에게는 그걸 고칠 능력도 없어요. 어차피 그만두지도 못하고 고치지도 못하고 있어야 한다면 괴로워하면서 있는 게 나아요? 괴로워하지 않으면서 있는 게 나아요?”
“괴로워하지 않는 거요.”
“괴로워하지 않으면서 거기 있으려면 남은 길이 하나잖아요. 제가 하는 말을 ‘상사가 말하면 무조건 거기 있어라’ 이렇게 오해하면 안 돼요. 내가 선택할 수 있으면 그만두면 됩니다. 그런데 내가 그만둘 수 없어요. 그러면 상대를 바꾸면 되는데 바꿀 능력도 나에게 없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계속 그런 말투를 쓸 텐데 나는 계속 거기서 살아야 해요. 그래서 지금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면 남은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스트레스를 받고 사는 길과 안 받고 사는 길이 있어요. 내가 상사의 말을 가지고 시비하면 스트레스를 받고 살고, 그걸 그냥 그 사람 성격이고 말투라고 받아들이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삽니다. 또 그 말이 사실이기도 하잖아요. (청중 웃음) 그러니 ‘이것도 모르냐’ 하면 ‘네, 몰랐습니다’ 하고, ‘확실히 해라’ 하면 ‘확실히 하겠습니다’ 하고 그냥 받아주면 되죠. 그런데 다른 직원한테는 안 그러고 질문자한테만 그래요?”
“네.”
“한 사람한테만 유독 다르게 구는 걸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애정이 좀 있다는 거예요.” (청중 웃음)
“저도 그 상사를 좋아합니다. 유부남과 유부녀 사이니 오해는 마시고요.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고 좋아하는데 직설적인 화법은 힘들어요.”
“그런데 상사가 관심이 없으면 이런 말을 아예 안 해요. 다른 사람에게는 안 하면서 유독 질문자에게만 한다는 것은 애정을 표현하는 부산 사람들의 말투입니다. 저도 울산 사람이니까 경상도 사람들의 말투를 알잖아요. 저희 고향 친구들끼리 하는 말을 보면 이래요. ‘내일 우리집에 놀러와라’ 하면 ‘그래, 갈게’ 하면 될 걸 ‘가면 뭐 주는데?’ 합니다. (청중 웃음)
한번은 모임에 한 친구가 늦게 왔어요. ‘늦어서 미안하다’ 이러면 서울 사람들은 보통 ‘오는 데 길이 막혔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경상도 친구들은 절대로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자식, 나는 너 오다가 죽은 줄 알았다’ 이래요. (청중 웃음)
말투가 그렇다 보니 서울 여성들이 경상도 남편을 만나면 이런 것 때문에 엄청나게 상처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대화하는 말투인데도 오해를 사는 거예요.
제가 서울에서 강연을 마치고 12월 31일 밤 12시가 다 되어 정토회관에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법당에 들어가 보니 실무자들이 뭔가 한창 작업을 하고 있어요. 연말정산 작업인 줄은 나중에 알았는데, 제가 ‘12시가 다 되었는데 잠도 안 자고 뭐 하냐?’ 이래서 청년들이 엄청나게들 상처받았다고 해요. 뭐 하는지 보면 알지 않냐는 거예요. 질문자처럼 반응한 거죠. ‘보면 모르냐? 우리가 지금 놀고 있냐? 작업하고 있지 않느냐’ 이런 뜻입니다. ‘아이고, 밤늦게 수고한다. 뭐라도 좀 먹었냐?’ 이렇게 이야기해야 할 텐데, 우리 경상도 사람들은 수고한다고 대놓고 말하면 몸에 거머리가 기어가는 것 같아요. (모두 웃음)
그런 말이 잘 안 나오니까 ‘아직도 안 자고 뭐 하냐?’ 이러는 게 말버릇이에요. 어릴 때부터 그런 말투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무런 악의 없이 나름 잘 한다고 말 붙이는 게 그렇습니다. 그럴 때 ‘연말정산하고 있습니다’ 하면 ‘아, 그러냐?’라고 또 말해주지 않습니다. ‘좀 일찍 일찍 하지, 그걸 꼭 또 연말 다 되어서 하냐?’ 이럽니다. 스님이 좋아 보여도 같이 한번 살아보면 그 상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청중 웃음)
오늘도 새벽 1시에 서울을 출발해서 새벽 5시에 울산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제가 서울에서 차에 타자마자 잠이 들어서 울산에 도착할 때까지 안 깨고 계속 잤어요. 평소에는 중간에 휴게소 들러서 기지개도 켜고 화장실도 다녀와서 다시 잘 텐데, 오늘은 아예 한 번도 안 깨고 깊이 잠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운전하시는 분더러 ‘아이고, 오랜만에 잘 잤다’ 이러니까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워서 천천히 왔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이고, 수고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결국 네가 운전 잘 했다는 이야기구나’ 했더니 ‘그게 아니고요, 길이 미끄러워서 천천히 왔습니다’ 이래요. 그래서 제가 ‘평소에도 그렇게 운전했으면 내가 항상 잘 잤을 거 아니냐’라고 했어요. (모두 웃음)
왜 평소에는 그렇게 천천히 운전을 안 하느냐고 구박한 것처럼 들리지요? 아닙니다. 이게 ‘밤길 운전하는데 정말 수고했다’는 제 대화방식이에요. 저와 비교해보면 상사가 그래도 좀 낫죠?”
“비슷비슷한데 진짜 싫습니다. 칭찬을 안 합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법륜 스님은 왜 좋아해요? 밤마다 들으면서 잘 정도로 좋아한다면서요. 상사와 법륜 스님 단 둘이 놓고 비교해보면 분명히 그 사람의 말버릇이 더 나을 거예요. 그 사람보다 더 나쁜 법륜 스님도 내가 좋아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을 좋아하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요.
아무에게나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악의는 없다는 걸 우선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 상사가 잘했다는 게 아닙니다. 저도 제 말투를 변명하려고 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다만 그 사람이 그렇게 생긴 걸 질문자가 어떡하겠어요. 고칠 수가 없잖아요. 그 사람의 말투가 그럴 뿐이고 꼭 나를 괴롭히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질문자가 아까 이야기한 대로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약간 거부반응이 있다 보니 그게 자기도 모르게 연상되면서 격렬한 반응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 그걸 자기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중요합니다. 관심이 있어서 그런다고 좋게 해석하세요.
그러면 ‘그런 관심은 싫으니 꺼 다오’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겠죠. 그런데 그 사람은 관심이 있으니 그걸 또 어떡하겠어요? 앞으로 그 사람을 법륜 스님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청중 웃음) 이야기해보니까 법륜 스님보다 낫잖아요.”
“예. 세뇌를 해보겠습니다.”
“세뇌할 필요 없어요. 세뇌를 한다는 건 앞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잖아요. 지금 질문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별 일 아니네’ 하고 아는 거예요. ‘별 일 아닌데 내가 좀 민감하구나. 왜 민감할까? 아, 내가 어릴 때 이러저러한 경험이 있어서 민감하구나.’ 하고 알아야 해요. 세뇌한다는 건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인데 내가 좋은 사람으로 보려고 억지로 노력한다는 뜻이잖아요. 나쁜 걸 어떻게 좋다고 해요?
그 사람은 그냥 자기 식대로 사는 사람일 뿐입니다.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냥 자기 생각, 자기 말버릇대로 자기 인생을 사는 것뿐이에요. 질문자는 산에 가서 다람쥐를 보고 ‘천천히 다니지, 뭘 저리 급하게 돌아다니냐’라고 시비하는 것과 같아요. (청중 웃음) 다람쥐는 그냥 자기 식대로 사는 거예요. 다람쥐가 보기 싫으면 산에 안 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산에는 가야 하고, 다람쥐더러 ‘뛰지 마라’ 한다고 다람쥐가 고쳐지지도 않아요. 그래서 산에 다녀올 때마다 다람쥐 때문에 산에 못 가겠다고 화내는 꼴이에요. (질문자 웃음)
그냥 다람쥐는 자기 나름대로 살도록 두고 나는 내 할 일을 하면 됩니다. 상사를 다람쥐 보듯 하고, 말을 하면 그냥 받아주세요. ‘확실하게 좀 해라’ 하면 ‘네’ 하고 대답하면 돼요. ‘확실하게 한다 해놓고 왜 안 했냐?’ 이러면 ‘죄송합니다, 다음에 잘 할게요’ 하고, ‘잘 한다고 말만 해놓고 왜 자꾸 그러냐?’ 하면 ‘죄송합니다, 다음에 잘 할게요’ 이러면 돼요. 제가 보기에는 ‘확실하게 해라’라고 하는 말은 그 사람의 말투에요. 확실하게 해도 확실하게 하라고 할 거고, 안 해도 확실하게 하라고 할 거예요. (청중 웃음) ‘이것도 모르냐’ 이 말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알겠습니다’라고 해주면 돼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청중 박수)
“저도 오늘 깨달은 게 굉장히 많아요. 지금 저와 함께 사는 공동체 식구들이 다른 데 가서 제 문제로 이렇게 상담을 하지 않겠어요? ‘밖에서는 존경받는 스님인데 이런 사람인 줄은 다들 모릅니다. 자기는 실컷 자놓고 밤새 한숨도 안자고 열심히 운전해서 온 제게 수고했다는 말은커녕 진작 잘 하지 그랬냐는 소리나 하니 이렇게는 못 살겠습니다.’ 이럴 거예요. 질문자가 저를 깨우쳐주려고 화현해서 온 보살 같아요.” (모두 큰 웃음)
이번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정말 계속 웃음을 터뜨리느라 배꼽이 아플 정도였습니다. 너무나 적나라한 비유에 스님의 답변이 가슴에 콕콕 와닿았습니다. 상대를 고치려고 하지 말고 상대를 이해하고 수용하면 나에게 좋다는 말씀을 비현실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이 방법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치고 나니 2시간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비우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오늘 강연은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오늘의 대화 내용을 갈무리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힘든 이유도 잘 살펴보면 문제가 아닌 것을 계속 문제 삼아서 그런 것일 수 있다며 어떤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강조하면서 강연을 마쳤습니다.
“재미있었어요?”
“예!”
“(질문했던 청년들을 웃으며 바라본 후) 아까는 죽는다더니 ‘예’ 하고 웃네요. 서두에 이야기했다시피 문제가 있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있지만 사실은 잘 살펴보면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문제 아닌 걸 자꾸 문제 삼아서 해결하려 드니 힘든 거예요. 문제 아닌 줄을 알면 사실은 아무 힘들 게 없어요. 상사가 뭐라고 하면 ‘별 것 아니다, 말버릇이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게 한 방법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남이 나에게 한 말은 그 사람의 스트레스가 담긴 쓰레기와 같은 말이니 받는 즉시 버려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엄마가 버린 쓰레기봉지, 아빠가 버린 쓰레기봉지, 상사가 버린 쓰레기봉지, 선생님이 버린 쓰레기봉지를 끌어안고 삽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사람들이 나한테 쓰레기봉지를 던져줄 때도 있어요. 받자마자 그냥 버리면 될 텐데 그걸 다 끌어 모아 안고 다니면서 ‘아빠는 이런 쓰레기를 주었고, 엄마는 이런 쓰레기를 주었고, 선생님은 이런 걸 주었잖아’ 하고 우는 게 우리 인생이에요. 참 똑똑하죠? (모두 웃음)
그러니 남이 과거에 준 쓰레기봉지를 안고 다니지 마세요. 물론 과자봉지를 주면 좋겠지만 좋은 건 자기가 가지게 마련이에요. 더러운 것을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버려버리면 되지, 그걸 갖고 ‘왜 이걸 주었냐’고 시비할 필요는 없어요. 시비하면 내 인생이 그 사람의 쓰레기통밖에 되지 않아요. 그러니 좀 현명해져야 합니다. 그렇게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청중 박수)
청중의 뜨거운 박수가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준 쓰레기봉지를 계속 안고 살고 있다는 말씀이 오래도록 가슴에 큰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삼수 성공 후 사수를 준비한다는 질문자에게 스님의 말씀을 듣고 어떤 생각과 마음이 들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굉장히 만족스럽다”며 밝은 표정으로 답해주었습니다. 이 분은 사수하는 문제로 갈등하고 있는 아버지와 함께 강연장을 찾았는데, 아버지에게도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스님께서 제가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다 해주셨다”며 아주 기쁜 표정을 지었습니다.
곧 이어 스님의 책 사인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어떤 청년은 “스님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라며 무척 설레어 하면서 사인을 받았습니다. 스님 뒤에 서서 포즈를 취하기도 하면서 스님께 감사 인사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어떤 청년은 사인을 해주는 스님에게 “제 이름도 써주면 안 되요?” 라고 요청했는데, 스님은 “니 이름은 니가 써야지” 라며 웃으셨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늙은 청년 중에는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해 주려고 한다며 스님책 여러 권을 손에 쥐고 있는 분들도 보였습니다.
사인회가 끝난 후 스님은 자원봉사자들에게 수고 많았다며 일일이 악수를 건네며 용기를 북돋아주었고 함께하는 사진 촬영에도 환한 웃음으로 응해주었습니다.
▲ 오늘 강연을 준비한 부산 청년정토회 자원봉사자들
청년 희망강연이여서 봉사자들도 모두 청년들이였고, 그래서 그런지 젊은 청춘의 패기와 열정이 가득했던 강연이었던 것 같습니다. 강연을 준비한 청년 자원봉사자들도 그리고 청중들도 모두 가슴에 행복 씨앗 하나씩을 품고 강연장을 나설 수 있었던 즐겁고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부산일보사에서 나온 스님은 곧바로 울산 두북으로 향했습니다.
밤 11시가 넘어서 두북에 도착해서는 오전에 선물 포장한 김장 김치 박스 중에서 플라스틱 통에 담겨서 택배가 안 되는 것들만 따로 모아서 봉고차에 싣는 일을 했습니다. 차에 실린 선물용 김치통들은 행자원에서 온 행자님 두 분이 내일 새벽부터 가가호호 방문해서 직접 배달을 할 예정입니다.
▲ 선물용 김치 박스들을 직접 배달하기 위해 봉고차에 실었습니다.
내일은 오랜 만에 강연이 없는 날입니다. 이제 2015년 즉문즉설 강연도 단 두 번만을 남겨놓고 있네요. 내일은 필리핀JTS 이원주 대표님 부부가 두북을 찾아와서 경주 남산 산행을 다녀올 예정입니다. 스님도 강연이 없는 틈을 타 오랜만에 여유 시간을 보내며 산책도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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