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환경재단에서 주최한 그린 토크콘서트에 참석해 ‘기후 변화 시대의환경 그리고 평화'를 주제로 강연했습니다.
오늘도 새벽 4시에 일어나 공동체 대중들보다 일찍 예불과 기도를 마친 스님은 원고 교정 업무를 보다가 7시 30분에 평화재단으로 향했습니다.
▲ 새벽 예불
평화재단에서는 하루 종일 연이어 미팅과 회의를 가졌습니다. 회의를 모두 마치고 오후 5시에는 저녁에 강연을 하기로 한 잠실 롯데 월드타워로 향했습니다.
강연장에 도착하자 오늘 강연을 주최한 환경재단 최열 대표님이 반갑게 스님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 강연 전 스님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최열 대표님
오늘 강연은 평화를 위협하는 기후 변화를 주제로 청중들이 미리 극장 입구에서 스티커 설문과 질문지를 미리 적어낸 후 그 결과를 가지고 강연이 진행되었습니다. 강연 전에 대표님과 오늘 강연의 취지와 진행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은 후 저녁 7시부터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 극장 입구에서 진행된 스티커 설문
저녁 7시가 되자 아나운서 유경미씨의 사회로 600여명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환호와 박수로 그린 토크콘서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환경재단 최열 대표님이 나와서 “기후 변화로 많은 난민들이 생기고 있다”고 하면서 “환경 문제와 평화 문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문제”라고 덧붙이며 오늘 평화재단의 법륜 스님을 초청한 취지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스님이 큰 박수를 받으며 무대로 나오자 사회자는 ‘기후변화’에 대한 스님의 생각을 물으며 여는 이야기를 부탁했습니다. 스님은 기후변화는 쥐가 쥐약을 먹듯이 인간의 무지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이야기하면서 환경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비 중독으로부터 벗어나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20세기 들어와서 환경 문제를 인식하기 전에는 윤리나 가치의 문제를 다룰 때 인간윤리만 생각했지 환경윤리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근대에 와서 물건의 가치를 따질 때 가장 대표적인 것이 노동가치설이죠? 물건을 생산하는데 노동력이 얼마나 들었느냐를 기준으로 물건의 가치를 계산하고 정했습니다. 인간만 생각했지 자연의 생산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러나 이제 환경문제가 제기되면서 인간의 윤리는 전반적으로 새롭게 재검토되어야 합니다. 환경윤리를 바탕으로 한 위의 인간 윤리는 진리라고 할 수 있지만, 환경윤리에 바탕 하지 않은 인간윤리는 허구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은 모든 가치관의 가장 바탕에 환경윤리를 두어야 합니다. 여기에 어긋나면 기독교든 불교든 어떤 종교나 철학사상도 진리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요즘 기후변화 이야기를 많이 하죠? 인류가 멸망에 처할 가능성 있는 위험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대량살상무기로 인한 전쟁이 있어요. 특히 핵무기가 위협이 되고 있죠. 현재 전 세계에 있는 핵무기는 인류를 몇 번이나 전멸시키고도 남을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위험은 전쟁만이 아닙니다. 전염병, 변형 바이러스도 있어요. 광우병, 돼지 인플루엔자, 소위 조류독감이라 부르는 조류 인플루엔자 같은 것들이 이미 나타났어요. 요즘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일어나는 신종 바이러스가 어느 순간에 인류를 전멸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식량위기가 있습니다. 식량이 고갈되어 전멸의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식량위기와도 연관이 됩니다만 기후변화가 있어요.
이런 것들 중 가장 현실적으로 가까운 것은 제가 볼 때는 기후 변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유적들을 보면 고대에 굉장히 발달했던 문명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고대에는 그 지역이 사람이 살기에 적당했다는 뜻이에요. 결국은 환경 파괴로 인해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그 문명이 종말을 맞았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문명은 한 군데에서만 계속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럽 문명의 시원은 이집트 문명이에요. 그 이집트 문명의 세력이 약해진 원인 중에는 환경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문명이 이집트의 변방이었던 에게로, 에게의 변방인 그리스로, 그리스의 변방인 로마로, 로마의 변방인 유럽으로 차례차례 이동했어요. 지금은 유럽의 변방인 미국으로 이동했지요. 이렇게 이동하는 것을 그냥 하나의 세력 이동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문명이 쇠락하는 데는 반드시 환경적인 문제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인류 문명의 위기에는 다른 어떤 것보다 기후 변화, 소위 환경 위기가 가장 큰 요인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기후변화는 요즘 일어난 변화일까요? 아닙니다. 지구의 45억 년 역사를 보면 수없이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있었던 기후변화는 오늘날의 기후변화와는 달리 자연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만든 게 아니었어요. 예를 들어 지구 온난화가 일어난다면 그에 맞지 않는 기존의 생명체는 멸종하고 그에 맞게 적응해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가 번성하게 되지요. 이런 식으로 번성하던 종이 소멸하고 새로운 종이 나타나기도 하고, 오랫동안 소수였던 종이 갑자기 번성하기도 하며 기후변화는 수없이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지구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환경변화가 일어나서 현재의 이 환경에 적응하고 있던 인간이 멸종하고 다른 종이 번성하는 것은 특별히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볼 때는 위기이지만 지구적 차원에서 볼 때는 그냥 지구 변화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의 환경 변화가 자연적이지 않다는 점에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환경의 변화가 와서 우리가 거기에 적응해 가는 것은 자연의 순리에 들어가지만, 우리가 더 잘 살려고 노력했는데 오히려 그 노력이 기후변화를 불러오고 그로 인해 우리가 멸종하거나 멸망하는 쪽으로 간다면 이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이라고 말할 수 있잖아요. 너무 배가 고파서 쓰레기통을 뒤지던 쥐가 접시에 담긴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발견했어요. 웬 떡이냐 하고 먹었더니 배가 아파서 데굴데굴 구르며 죽게 되었어요. 쥐가 왜 죽게 되었어요? 음식 안에 쥐약이 들어 있어서 그렇지요. 그렇다면 쥐가 쥐약을 먹고 죽게 된 원인이 뭘까요?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쥐약 먹고 죽도록 정해져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안 믿어서 벌 받은 걸까요? 쥐의 생년월일시 사주가 딱 이 순간 쥐약을 먹고 죽도록 되어 있었을까요?
쥐는 쥐약이 든 줄을 모르고 먹었습니다. 즉 몰랐다는 게 핵심입니다. 쥐가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니고 다만 그 음식에 쥐약이 든 줄 몰랐다는 무지(無知) 때문에 죽게 된 것입니다. 무지가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의 원인입니다. 몰라서 생긴 일이에요.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일까요? 쥐가 쥐약을 먹으려 할 때 ‘거기 쥐약 들었다!’ 이렇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아무리 그 음식의 냄새가 좋고 색이 고와도 안 먹습니다. 음식을 먹는 이유는 살려고 하는 것인데 죽으려고 먹을 리가 없어요. 그러니 ‘먹어라,’ ‘먹지 마라’ 말할 필요가 없어요. ‘거기 쥐약 들었다’고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쥐가 이렇게 애원해요. ‘조금만 먹으면 안 될까요? 배가 너무 고픈데요. 빛깔이 너무 좋은데요. 진짜 먹으면 죽을까요?’ 사실 이런 이야기 자체가 별 필요 없어요. 열 번, 스무 번 사정을 해도 ‘거기 쥐약 들었다’라고만 말해주면 되는 것이죠.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할까요? 쥐가 살려고 먹었는데 죽게 되듯 지금 우리가 잘 살려고 하는 일들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잘 사는 것, 발전의 기준이 뭐예요? 많이 생산해서 많이 소비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들 하잖아요. 1인당 콜라 소비량이 얼마냐, 1인당 전기 소비량이 얼마냐, 병실 1개당 몇 명이 입원할 수 있느냐, 이렇게 소비를 기준으로 해서 잘 사느냐 못 사느냐를 따집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물건을 하나 사줘도 아이가 먼저 하는 말이 ‘엄마, 이거 얼마짜리야?’ 하잖아요. 이 소비주의를 저는 소비중독이라고 불러요. 우리는 소비를 향해서 내달리고 있습니다. 많이 생산해서 많이 소비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 한은 계속 대량생산할 수밖에 없고, 대량폐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량생산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원 고갈의 문제에 부딪힐 테고, 대량폐기를 계속하다 보면 결국은 환경오염이 심각해져 환경의 변화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어요. 지금의 기후변화가 자연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소비중독, 과잉소비로 인해 발생하는 현상이라면 이는 쥐가 쥐약을 먹는 것과 똑같지 않냐는 말입니다.
환경을 변화시킨 이유는 더 잘 살기 위해서였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일정한 도를 넘어서니까 환경을 파괴하고, 우리 삶의 터전을 우리 스스로 망가뜨려서 결국 우리를 파탄과 공멸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을 안 믿어서도 아니고, 전생의 죄 때문도 아니고, 사주팔자가 나빠서도 아니고, 우리가 어리석어서 그런 거예요. 큰 비가 오거나 가뭄이 드는 등의 자연재해가 우리의 생존에 위협이 된다는 한 면만 봤지, 자연이 우리의 삶의 터전이란는 사실은 놓쳐버렸어요. 자연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니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 위험에 대처를 하려고 자연을 변형시키는 소위 개발을 했어요. 지난 수천 년 동안에는 개발을 해도 인간이 자연을 변형시키는 정도에 비해 자연이 갖는 복원력이 더 강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기계를 통한 인간의 자연개발능력이 자연의 복원력을 앞서게 되니까 결국은 파괴를 하게 되었어요. 우리 생존의 토대를 결국 우리 스스로 붕괴시킨 셈입니다. 여기서 오는 문제가 환경문제입니다.
근원적인 해결책으로는 결국 소비를 줄여야 합니다. 소비를 통해서 행복, 기쁨, 만족, 성공 같은 걸 느끼는데 소비를 줄이라고 하니까 문제가 됩니다. 행복을 줄이라는 소리와 마찬가지니까요. 그러니 소비주의에서 다른 것으로 삶의 가치를 전환해주어야 합니다. 술 마시거나 담배 피우거나 마약 해서 기분 좋은 것은 이해는 되지만, 그것은 장기적으로 보면 자기 건강을 해치고 파멸로 이끕니다. 지금의 소비지향적인 문화, GDP를 기준으로 계산해서 발전 정도를 이야기하는 이것은 결국은 지속가능한 문명이 아닙니다. 50년 갈지 100년 갈지는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지만, 시기의 차이는 있어도 일정한 한계점에 다다를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이미 이 문명의 종말이 예정된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때가 되면 공멸하는, 지금까지 지구상의 다른 생명들이 걸어온 길을 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어리석음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가 소비를 조금 줄이면 종말까지의 기간이 좀 연장될 테고, 개발 정도를 지구의 복원력 안으로 조정하게 되면 우리의 문명도 지속가능해지겠지요. 이건 우리의 선택이에요. 아무리 배가 고프고 음식이 먹음직스러워 보여도 쥐약이 든 음식이라면 먹지 말아야 합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끼리 이야기하다 보면 더 좋은 담배가 있죠? 술도 그래요. 서양 영화에 보면 마약도 더 좋은 마약과 저급 마약을 따집니다. 중독된 사람에게는 그 안에서 좋은 게 있고 나쁜 게 있습니다. 그러나 중독 안 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좋은 마약도 하지 않느니만 못하고, 아무리 좋은 담배를 피워도 안 피우느니만 못하고, 아무리 좋은 술을 마셔도 안 마시느니만 못해요. 여러분들이 지금 명품 따지고 뭐 따지는 소비, 오늘날의 소비문명은 마약 중독과 하등 차이가 없습니다. 이 소비중독을 우리가 과연 벗어날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담배 피우던 사람이 담배 끊고, 마약 하던 사람이 마약 끊고도 얼마든지 생을 아름답게 살 수 있어요. 그러나 당사자들은 그거 끊으면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다고 해요. 그것처럼 오늘 인류가 이 소비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새 길을 여는 것이 결국 문명의 전환으로 이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인류가 직면한 환경 위기의 근본 원인은 소비 중독이고, 적게 쓰는 것이 행복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켜서 소비를 줄여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였습니다.
이어서 사회자가 첫 번째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 번째 질문과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극장 입구에서 스티커 설문이 진행되었는데 청중들이 반응한 결과를 보면서 사회자가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 기후 변화와 평화에 대해 질문한 첫번째 설문조사 결과
“시리아 꼬마 난민 쿠르디의 죽음, 당신은 무엇이 원인이라 생각하는가?”
“전쟁 때문이다 vs 기후변화 때문이다”
대부분 전쟁 때문이라고 스티커를 붙였습니다. 스님은 당장의 원인을 찾는다면 전쟁 때문이겠지만 결국 전쟁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농민들의 도시로의 이주 등 기후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설문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 식량 고갈과 평화에 대해 질문한 두번째 설문조사 결과
“우리 동네 마트에 먹을거리 코너가 사라진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하겠는가?”
“사재기라도 한다 vs 나만의 텃밭을 가꾸겠다”
청중들은 대부분 ‘나만의 텃밭을 가꾸겠다’에 한 표를 던졌습니다. 스님은 청중들의 응답에 대해 “여러분들은 상당히 예리하신 것 같다”고 칭찬하면서 대답을 이어갔습니다.
“사람들이 성인(聖人)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먼저 사재기를 해야죠. (청중 웃음) 사재기라 하면 표현이 좀 그렇지만, 일단은 물건을 구입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구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재기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줍니다. 식량이 부족한데 서로 가지려 들면 식량이 부족해서 굶어죽기 전에 서로 싸우다가 죽어요. 식량위기가 도래하면 실제로 굶어죽는 사람보다는 서로 식량을 차지하려고 싸우다가 전쟁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을 수 있어요. 그래서 사재기는 문제의 근원적 해결책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상당히 예리하시네요. (청중 웃음)
텃밭 가꾸기 문제는 첫째, 식량위기에 대비한 자구책의 하나로 즉 식량안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식량문제는 양의 문제 뿐만 아니라 질의 문제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음식을 대충 절반만 먹고 버리고 있어요. 우리가 옛날처럼 먹고 살면 대한민국 인구 전체를 먹여 살리는데 800만 톤에서 1,000만 톤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지금 소비량이 1,800만 톤이니까 과소비지요.
이 과소비의 핵심은 두 종류예요. 하나는 이렇게 음식을 먹고 남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원인이 있습니다. 바로 고기 먹는 거예요. 옛날에는 소나 돼지나 닭이나 다 산에 가서 풀 뜯어먹는 가축이었어요. 가축 먹이는 것과 인간의 식량은 관계가 없었습니다. 가축을 키움으로써 오히려 식량에 도움이 되었어요. 그런데 현재 육류 소비량이 너무 많고, 부드러운 맛에 집착해 따지다 보니 가축을 사료를 먹여서 사육합니다. 공장에서 물건 생산하듯 가두어놓고 고기를 생산하는데, 예를 들자면 옥수수를 소나 돼지에게 5킬로그램을 먹여야 살코기가 1킬로그램 늘어납니다. 밥 1킬로그램 먹는다고 몸무게가 바로 1킬로그램 늘어나지 않죠? 소고기 1킬로그램을 먹는 것은 옥수수 5킬로그램을 먹는 것과 같은 거예요. 여러분들이 육식의 비중이 높을수록 여러분들의 식량소비는 어마어마하게 많아지는 것입니다. ‘저는 조금 먹는데요.’ 이래도 본인이 생각하는 소비량과 실제 소비량은 차이가 아주 커요. 지금 한국에서 소비되는 1,800만톤의 식량 중 다수는 사료로 소비되는 거예요. 소만 우리나라 소지 소가 먹는 옥수수는 미국산입니다. 미국에서 먹여서 고기를 들여오나, 옥수수를 들여와서 여기서 먹이나 사실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렇게 육류를 많이 먹는 식생활 때문에 세계 식량 수요가 크게 늘어났어요. 인구 증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래서 식생활을 바꾸지 않으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식량 수요를 충족하려니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늘려야겠지요. 그러자니 화학비료와 농약을 많이 쓸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생산되는 식품의 질이 떨어집니다. 탄수화물이나 지방 함량만 높아지지 다양한 미량원소 함량은 낮아져요. 그래서 비만이 심해집니다. 옛날에는 빼빼 말라도 힘들이 좋았는데, 요즘은 덩치가 큰데도 힘이 하나도 없잖아요. 건강에 안 좋죠.
그래도 부족하니까 다음으로는 유전자를 변형시킵니다. 유전자 조작 식품은 사람에게 나중에 어떤 돌연변이를 일으킬지 아직은 평가가 안 됩니다. 옛날에 프레온가스가 냉매제로 쓰일 때는 무색무취라고 해서 신의 가스라고 찬양받았어요. 그런데 50년 지나고 보니까 프레온가스가 오존층 파괴의 주범이라고 해서 사용이 금지되었잖아요. 이런 건 그 피해가 언제쯤 표면으로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우리는 소를 한 마리 잡으면 족발도 먹고 꼬리곰탕도 해먹고 껍데기도 그을려 먹지만, 미국에서는 살코기만 베어내고 나머지는 폐기합니다. 그 폐기하는 양이 너무 많다 보니 다시 기계에 집어넣고 갈아서 사료로 만들어 소에게 먹입니다. 소에게 소고기를 먹이니까 소가 어떻게 안 미치겠어요? 이 동물성 사료가 광우병의 원인입니다. 또 돼지를 밀실에서 꼼짝 못하게 가둬놓고 사육하니까 신종 인플루엔자가 생겨요. 닭 키우는데 한번 가보세요. 참으로 비생태적, 반생명적입니다. 잡아먹을 땐 먹더라도 살아 있을 때는 생명답게 고통 없이 살게 해줘야 할 텐데 극심한 고통 속에서 살게 만들어요. 그러니 스트레스가 엄청납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에 독성이 나오잖아요. 물고기 양식장도 가보면 그래요.
부드러운 맛을 찾고 또 그것을 많이 먹고 싶어 하는 욕구가 결국은 우리가 먹는 음식의 질을 떨어뜨리는 거예요. 그래서 안전한 식품을 구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절대적인 식량의 부족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식량이 있다 해도 그 식품의 질이 갈수록 떨어지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건강을 해친다면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으려는 지금의 노력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좀 극단적이지만 이런 주장을 하고 싶어요. 모든 인간은 성년이 되면 대통령이든 스님이든 목사든 아무리 바빠도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생산하도록 제도를 바꿔보면 어떨까요? (청중들 박수와 웃음)
자기가 먹을 것이라면 농약을 안 치거나, 치더라도 적게 치겠죠. 비료도 치기 전에 생각해보고 조절하겠죠. 식품 안전성 문제는 돈 중심으로 가다 보니 생기는 문제거든요. 소비자인 우리가 생각할 때는 ‘식품을 왜 그렇게 만드느냐’ 하지만 생산하는 농민 입장에서는 식품이 아니라 돈벌이잖아요. 농약을 많이 치든 비료를 많이 치든 그걸 팔아서 돈으로 바꾸는 환금이 더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에 식품의 질을 믿을 수 없게 된 거예요. 요즘 원산지 따지고 뭐 한다고 난리지만 아무리 이런 걸 따져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자기가 생산해서 자기가 먹는 것보다 더 안전한 건 없어요.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텃밭을 모든 사람에게 가꾸도록 하는 시스템이 어떻겠냐는 겁니다. 청와대에도 화단 좀 파내고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두 시간씩 돌보게 하고, 아파트 단지 안에도 반드시 가구당 개인 텃밭을 준다든지 하는 식으로요. 이러면 우선 육체노동을 하니까 운동이 되지요. 그리고 생산을 직접 해봐야 음식의 소중함을 자각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쌀을 운반하다가 바닥에 떨어뜨렸다고 해봐요. 생산한 농민은 떨어진 쌀을 반드시 줍거나 빗자루로 쓸어담습니다. 그런데 생산에 관계하지 않은 사람은 그냥 버리고 갑니다. 생산한 사람은 그 한 알 한 알에 얼마나 큰 노동력이 들었는지 알기 때문에 ‘돈으로 따져서 다 모아봤자 천원어치밖에 안 된다’ 이렇게 계산을 하지 않아요. 이런 가치관의 정립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키울 때 계속 소비적 관점에서만 키우지 말고 생산활동에 참가하게 하고 생산과정을 보게도 해야 해요. 그러면 굳이 ‘아껴라’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요. 저절로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끼게 되는 겁니다. 텃밭 확대에는 그런 효과도 있어요.
그 다음으로 주말 노동을 통해 생산적 여가를 보낼 수 있어요. 요즘 주5일제 근무로 이틀 놀잖아요. 그 주말에 굳이 안 가는 자전거 타고, 제자리에서 뛰고, 괜히 무거운 쇠뭉치 들었다 놨다 하지 말고요. (청중 웃음)
굴러가는 자전거 타고 밭에 가서 일하면 어떨까요? 낭비하는 노동으로 보내는 대신 직접 노동해서 생산활동을 하는 것으로 생산적 여가를 보내보자는 겁니다. 왜 우리는 모든 여가를 낭비적으로 쓸까요? 생산적으로도 쓸 수 있어요. 이렇게 생각을 획기적으로 바꾼다면 우리는 작은 것으로부터도 우리의 생존과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리 종교적 수행을 많이 하고 훈련을 한 사람도 식량이 부족해지고 배가 고프면 싸우게 됩니다. 평화라는 것은 ‘평화, 평화’ 하고 이야기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 평화가 이루어지려면 첫째, 그 바탕에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되어야 해요. 두 번째로, 생존이 보장돼도 상대적 빈부격차가 너무 크면 불만이 생깁니다. 먹고 살만 한데도 우리가 지금 행복하지 않잖아요. 한국이 국가 GDP순으로 세계 13위, 1인당 GDP 순으로 27위인가 한다는데 행복도는 117위입니다. 먹고 살 만한데 이렇게 행복도가 떨어지고 불만이 많다는 것은 상대적 빈곤, 즉 빈부격차가 너무 크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제도적인 개선도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수행을 통해서 극복하는 방식도 있죠. 주로 제가 하는 건 개인적인 방법이에요. ‘남 보지 말고 자기 자신만 봐라’ 이런 걸 제가 주로 합니다만, 제도적으로는 이 격차를 줄여줘야 해요. 지금 양극화가 줄어들기는커녕 갈수록 커지고만 있습니다. 멈춰지지도 않아요. 고성장을 할 때는 빈부격차가 생기더라도 어쨌든 내 것도 늘어났는데, 지금은 성장이 멈췄잖아요. 그런데 빈부격차가 생긴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GDP 상승률이 지금 연 2~3퍼센트라는데 재벌은 1년에 10퍼센트대로 성장한다면 그건 재벌이 우리들 것을 가져갔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냥 빈부격차만 늘어난 게 아니라 다수 국민의 실질적 소득이 오히려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그러니 자꾸 불안해지죠. 지금 당장 못 먹고 사는 건 아닌데도 뭔가 불안하고 불만이 생기는 겁니다. 자살률이 세계 1위라는 것은 현재 불만도가 높다는 뜻이고, 출산율이 최저라는 것은 미래에도 불안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수치들은 다 우리의 무의식을 반영해서 나타나는 것이거든요.
국민의 행복도를 높이려면 성장만 갖고는 안 되고, 분배를 조정해줘야 합니다. 그래서 지난 대통령 선거의 제1 이슈가 뭐였어요? 경제민주화였죠. 경제민주화라는 게 빈부격차를 좀 줄이자는 거잖아요. 그리고 복지사회, 즉 최저생계비를 보장하는 안전망을 구축하자는 것이잖아요. 이 문제는 앞으로 계속 제기될 거예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의 양이 아무리 늘어도 상대적 빈곤이 있으면 행복도 문제는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도적 개혁도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제도만 바꾸면 되느냐? 안 돼요. 만약 제가 이 사람에게는 1만원 주고 저 사람에게는 10만원을 주면 1만원 받은 사람은 기분이 나빠지지요. 그러니 돈을 주더라도 각각 3만원, 5만원을 주면 불만이 조금은 줄어들어요. 그래도 아직 3만원 받은 사람은 기분이 나쁘겠지만요. (청중들 웃음)
그러니 여기에는 개인의 수행적인 관점도 필요합니다. 자기가 만원 얻은 것을 생각해야지 남이 얼마를 얻었는지를 왜 자꾸 생각하느냐는 거죠. 그러나 수행적 관점만 너무 이야기하면 사회의 모순을 외면하는 셈이 됩니다. 병 주고 약 주는 거예요. 병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어놓고 계속 치료하는 꼴이에요.
그러니 이 두 가지를 같이 해야 합니다. 환경문제도 그래요. 제도적으로도 바꿔줘야 하고, 소비중독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의 노력도 같이 해야 합니다. 개인의 노력과 공동체 전체의 집단적 노력, 이 두 가지를 같이 해야 문제가 풀리지 한 쪽만 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는 주로 모든 것을 개인 문제로 치우쳐서 이야기하고, 사회운동가들은 모든 게 사회 문제라고 봐서 투쟁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지금 우리 사회가 양 극단으로 치우치는데, 둘 다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소비를 줄여나가는 개인의 노력과 제도를 개선하는 사회적인 노력을 함께 해나가야 하는 말씀에 청중들도 모두 공감을 표하며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육식을 줄이고, 텃밭 가꾸는 작은 운동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가보면 어떡겠냐는 제안에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습니다.
그러나 사회자가 “방금 전에도 삼겹살을 먹고 왔고, 고기를 적게 먹는 건 좀 힘들 것 같다”고 하자 스님이 “고기 많이 먹으면 건강에도 안 좋아요” 라고 대답해 사회자는 “그럼 한번 노력해 보겠습니다”며 적극적인 의지를 표현해 청중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기도 했습니다.
▲ 스님의 답변을 듣고 적극적인 환경 실천 의지를 말하는 유경미 아나운서
마지막으로 “지금 당신의 어깨를 무겁게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으로 극장 입구에서 미리 받아 놓은 질문지들을 유리함에서 무작위로 꺼내 질문하는 즉문즉설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총 3명의 질문을 추가로 더 받을 수 있었습니다. 30대 주부는 애기는 두 명만 낳아라, 집에 물건을 사지 마라, 등 사소한 것까지 간섭하는 시어머니가 무섭다며 질문했고, 20대 여성 분은 취직할 수 있을지, 아이를 키울 수 있을지, 집을 살 수 있을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어깨를 무겁게 한다며 질문했고, 직장을 다녀야 해서 20개월 된 아이를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있다는 여성 분은 내가 내 아이를 키울 수 없는 현실에 죄책감이 들고 용기가 나지 않다고 질문했습니다. 스님은 각각의 질문에 대해 개인적인 처방과 사회적인 처방 양쪽에 대해 균형있는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 즉문즉설 시간
청중들은 재미있고 감동있게 명쾌한 답변을 들려준 스님에게 다시 한 번 큰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질문한 분들 모두에게 스님은 직접 사인한 책을 선물했습니다.
극장을 빠져나가는 청중들에게 스님은 입구에 서서 환한 웃음으로 배웅도 해주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스님과 사진을 찍으려고 아우성이었지만 공간과 시간의 제약으로 모두 응해주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청중들 중에 스님이 잠시 학원 선생을 할 때 제자였던 분이 한 분 있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제자인 분은 무척 반가워 했는데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스님에 대한 존경심은 그대로인 것 같았습니다.
▲ 학원 선생을 할 때 제자였던 분과의 조우
마지막으로 오늘 강연을 준비한 환경재단 스텝들과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최열 대표님은 바쁜 와중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시간을 내어준 스님에게 거듭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 환경재단 스텝들과 함께
스님은 환경재단 스텝들 모두에게 “수고 하셨어요”라고 가볍게 인사를 한 후 롯데 월드타워 건물을 빠져나왔습니다. 극장을 대여해서 그런지 정시에 강연을 마쳐서 서울 정토회관에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인 9시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집무실에서 업무를 조금 더 보다가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노원구청 2층 대강당에서 ‘즉문즉설과 통일이야기’를 주제로 노원구민들을 위한 강연이 있을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5
전체 댓글 보기스님의하루 최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