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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2일째를 맞이하여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를 안내하며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동북아 역사 대장정 2일째 새벽이 밝았습니다. 낯선 중국 땅에서 처음 보낸 밤이라 피곤했을 텐데도 단 한명도 지각하지 않고 어제 밤 약속한대로 4시 40분까지 버스 탑승을 하고 새벽5시 정각에 송수신기로 들려오는 스님의 아침 인사로 오늘의 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유적을 보러 환인에서 집안으로 고속도로를 이용해서 이동하였습니다. 그런데 고속도로인데도 너무 느려서 이상하다 했는데 스님이 “지난 번 관광버스가 전복된 사고가 났던 지역인데 경찰차가 앞에서 통제를 하고 있어서 서행을 한다” 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버스를 멈춰 세우더니 공안이 들어와 검문을 하기도 해서 뭔가 위험한 지역을 가는 건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일기도 했습니다. 검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구불구불한 국도를 따라 흔들리며 이동을 하였습니다.
▲ 북한의 뙈기밭. 가파픈 절벽까지 뙈기밭으로 만들어져 있는 모습.
그 때 스님이 “지금 오른쪽으로 보이는 강이 압록강이고 강 건너는 북한 땅입니다”라는 말을 하시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북한 땅이 있고, 내 눈앞에 보이는데 직접 갈 수 없다는 분단의 현실이 가슴 아팠습니다. 특히 절벽 꼭대기까지 뙈기밭을 만든 모습을 보고 무변심 법사님은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습니다. 굶주림에 얼마나 몸부림을 쳤던 것일까... 목이 메였습니다.
압록강을 따라 조금 더 가니 오늘의 첫 일정인 국동대혈에 도착하였습니다. 국동대혈은 나라의 동쪽으로 가면 큰 대혈이 있다는 뜻으로 이때 국은 고구려 시대의 국내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국동대혈을 보러 버스에서 내리려는데 갑자기 쏟아지는 비 때문에 우산을 들고 우비를 입느라 출발 준비가 더 분주해졌습니다. 이런 비 걱정도 잠시 조금 걷기 시작하니 신기하게도 비가 멈췄고 이동하기엔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국동대혈에 올라 고구려의 선조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모습을 떠올리며 대한민국에서 온 140명의 청년들도 함께 그 뜻을 기려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국동대혈
1300년 전까지 우리의 조상들이 이곳에 와서 우리가 지금 밟고 있는 이 땅에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는 게 신기하였습니다. 마치 과거와 현재가 연결된 듯 한 오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1300년 전까지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던 조상들은 자신의 후손들의 우리의 땅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땅이 되어 이렇게 찾아와야하는 것을 어떻게 여기실까’ 하는 생각에 빠지며 우리의 역사인데 중국 땅에 있는 것이 아쉽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청년 역사기행단을 위해 간절한 마음을 기울여 발원과 축원을 해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크시고 이 세상에서 가장 밝으신 환인 하느님,
하느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처음 나라를 세우신 환웅 천황님,
환웅 천황님께서 세우신 배달 나라의 건국 이념 홍익인간 재세이화,
환웅 천황님의 건국 이념을 계승한 단군 왕검님,
단군 왕검님께서 신시를 새롭게 하여 세운 조선 나라,
조선 나라를 계승한 해모수님의 부여 나라,
그 뜻을 계승한 고주몽님의 고구려, 온조님의 백제, 박혁거세님의 신라, 김수로님의 가야,
고구려의 뜻을 계승한 대조영님의 발해,
남북으로 흩어진 민족의 뜻을 이은 왕건의 고려,
그 영토와 사람을 계승한 이성계의 조선,
조국이 광복되어 세운진 나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오늘 우리를 있게 한 하느님을 비롯한 조상님들께 삼가 합장하오며 발원하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오도록 나라를 지켜주고 백성을 지켜준 모든 호국 영령들의 은혜에 보답하며 하나된 조국 통일 대한민국을 발원하옵니다. 통일된 우리 나라는 우리만이 아니라 이웃 나라들과 더불어 동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하여 인류 문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될 것을 발원하옵니다.
이곳에 일찍 찾아오지 못하고 고구려 멸망 이후 1300여년 만에 찾아온 것을 참회드리오며 늦게 나마 이렇게 찾아와 인사를 올립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온 130여명 청년들의 이 간절한 발원을 받아들여 주옵소서. 저희들은 그동안 개인의 행복 제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통일을 향해 나아갈 것을 발원하옵니다. 저희들의 이 간절한 발원을 들어 주옵소서.
북녘 동포들 굶주림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고 병듦에서 벗어나고 인권이 개선되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길 발원하며, 남한의 젊은이들도 절망을 딛고 일어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빈부격차 해소되어 모두 다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발원하며, 남북이 하나되는 새로운 나라 통일 한국을 발원하옵니다. 오늘 이 발원하는 젊은이들 모두 건강하고, 이 여행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저희들을 보살펴 주시옵소서.”
스님의 발원을 들으며 ‘선조들은 이렇게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우리들을 어떻게 바라보실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 깊은 곳에서 북받치는 울음이 울컥하고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국동대혈에서 나와 집안에 있는 장수왕릉,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을 보러 이동하였습니다. 이동하면서 이번엔 버스 왼쪽으로 조금 전에 이동하면서 보았던 압록강 넘어 북한 땅이 보였습니다. 해가 나고 날씨가 더워진 탓인지 북한 어린이들이 물가로 나와 물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을 보며 ‘북한 아이들도 물놀이 하는 것은 우리와 똑같구나’ 하는 생각의 한편으로는 멀리서 봐도 너무 마른 아이들의 모습에 일정 중에 조금만 배가 고파도 틈틈이 맛있는 간식을 챙겨먹는 우리들이 미안해지기도 했습니다. 버스 안에서 북한의 마른 아이들, 나무는 다 베어버리고 없는 민둥산, 검은 연기를 내 뿜고 있는 시멘트 공장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 북한의 시멘트 공장
다음은 장군총을 보았습니다. 그 웅장함은 책과 영상자료로 봐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그 위엄은 더 대단하였습니다. 역사기행을 온 우리들의 추억을 배려해 스님은 조별로 사진 촬영을 함께 해주셨습니다. 햇빛이 강렬함에도 늘 한결같은 미소를 지어주시는 스님의 편안한 마음에 장군총에 대한 추억이 더 편안하게 남을 것 같습니다.
▲ 장군총에서 조별 기념 사진
무덤을 만드는데 사용한 돌이 여기에서 20km 떨어진 우리가 지나온 도로를 개발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게 신기하고 유적의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개발로 알게 되었다는 게 엉뚱하기도 했습니다. 1600년 전 만주 땅에서의 고구려의 위엄과 위대함이 그 유적의 규모로도 크게 다가왔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위대한 유적이 잘 관리하고 보전되고 있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쉬웠습니다.
이어서 조춘호 선생님과 이승용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 순서로 둘러보았습니다.
▲ 광개토대왕비
▲ 광개토대왕릉
가장 안타까운 것은 광개토대왕릉은 장군총과 달리 절반 이상 무너져 내렸는데 이것은 무덤 속에 사용한 돌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광개토대왕은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으면서 무덤을 만들 때 미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튼튼한 강돌을 넣은 게 아니라 주변 산돌을 넣어서 오랜시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것이라고 합니다. 무너져 내린 무덤을 보며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집안 무덤에 있는 고구려 무덤 중 벽화가 발견된 무덤은 30곳 정도 된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공개된 5회분5호묘로 이동하여 직접 무덤 속으로 들어가서 벽화를 보았습니다.
▲ 5회분 5호묘로 들어가는 길
조춘호 선생님의 후레쉬를 비춰가며 상세히 설명을 해주었고, 늘 말로만 하던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모습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땡볕을 걸어다니다가 지하 무덤으로 들어오니 거대한 냉장고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시원함이 느껴져서 기다리고 있는 시간마저 행복했습니다.
무덤 앞에 있는 박물관으로 이동하여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스님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벽화를 한 장 한 장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 고구려의 벽화를 중국식으로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느 부분에서 틀렸고 어떤 부분에선 일리가 있는지도 짚어주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청년들의 ‘아!’ 하고 외치는 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 5회분 벽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스님
“원래 고구려 무덤은 돌로 쌓아서 덮개를 덮은 적석총입니다. 이 무덤이 점점 커져서 장군총에 오면 무덤이 7층까지 올라갑니다. 여기에 무덤실은 5층에 배치가 됩니다. 이렇게 무덤실은 주로 지상에 있었는데 어떤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점점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지하로 내려가면서도 석실은 그대로 가져갔기 때문에 위치만 바꾼 것 밖에 아니였어요. 그러면서 나타난 것이 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초기 벽화는 주로 생활상을 그렸어요. 후기 벽화로 갈수록 불교 영향을 받아서 연꽃을 그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신도를 많이 그렸습니다. 오늘 들어가본 5호묘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후기 것임을 알 수 있죠. 여기에 전시된 것들은 생활도가 많아요.”
그러면서 스님은 전시된 벽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여기 벽화를 보시면 머리가 소머리로 그려져 있죠. 소머리로 되어 있으니까 이것은 고구려에 있었던 ‘우가’를 표현한 겁니다. 5가 아시죠? 마가, 우가, 저가, 구가, 양가라는 다섯 개의 부족이 있었어요. 각 부족은 거의 독립되어 있었어요. 군대도 다 따로 가지고 있었고요. 고구려는 일종의 연방 국가 같은 것이였어요. 나중에 각 부족은 왕권이 점점 강화되면서 다섯 부서의 장관과 같은 위상을 갖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다섯 개의 지방자치와 같은 연방 국가였다가 점점 중앙 정부의 각부 책임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임금도 이 5가가 합의해서 뽑았습니다. 이것은 신라의 화백 제도와도 같습니다. 우리 나라는 이렇게 초기에 연방 형식을 갖추고 있었어요.
이 ‘우가’는 고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 시기에는 농업을 담당했습니다. 식량과 농업을 담당하는 부서가 ‘우가’였는데 이 우가 출신 중에 단군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왕의 아들이 건실하면 그대로 왕이 되지면 왕이 아들이 없으면 5가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을 선택해서 뽑았던 것이죠. 그리고 왕의 아들이 여러명 있어도 맞이가 시원치 않으면 또 의논을 해야 합니다.
이 벽화는 ‘우가’를 표현한 그림이라고 보면 되는데 밑에 ‘신농씨’라고 적혀 있죠. 이것은 중국식 해석입니다. 중국에서는 농업의 신을 신농씨라고 합니다. 중국 역사에서 농업을 처음으로 시작한 신이 신농씨입니다. 그래서 이 벽화를 신농씨라고 표현했지만 이 벽화는 중국의 그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고구려의 우가를 표현한 그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신농씨도 배달나라 출신입니다. 선진 문명인 배달 나라의 일부가 중국 쪽으로 내려가서 처음으로 농사 짓는 방법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신이 된 거예요. 우리 나라 사람 중에 일본에 가서 신 된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일본에 처음으로 호미를 전했다면 일본에서 호미 신이 됩니다...”
큰 유적 뿐 아니라 그 속에 그려진 벽화의 의미까지 다 알고 계신 스님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 상세하게 그 내용들을 다 알고 계실까?’ 라고 옆에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공부를 많이 하셔서 그럴 것’ 이라는 친구도 있고, ‘워낙 직관력이 뛰어나신 분이니깐 바로 아시는 것’ 이라는 친구도 있고, ‘우리 역사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스님은 옆에 있던 종합 생활도에 대해 특별히 중요성을 강조하며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서 봐야할 것은 왼쪽 아래쪽에 있는 이 그림입니다. 이 나무는 신단수입니다. 여기 신단수 아래에 동굴이 하나 있죠. 동굴 안을 자세히 보시면 곰이 한 마리 앉아 있어요. 호랑이는 동굴 밖에 있는데 화살을 맞고 있어요. 이 그림은 단군 설화와 내용이 똑같습니다.
단군 설화를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비판이 있는데, 일연은 12세기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벽화는 5세기 벽화예요. 그러니까 단군 설화는 민족 전통적으로 주욱 내려온 이야기니까 여기에 그림으로 그린 것이죠.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한 후 사료가 유실한 상태에서 일부 자료를 보고 일연이 그것을 요약해서 기술했던 것이죠.
토착 세력은 다 자기 부족의 상징이 있습니다. 곰을 섬기는 부족, 호랑이를 상징물로 여기는 부족, 각 부족이 있었어요. 그런데 선진 문명을 가진 이주민이 오니까 토착 세력과 이주민이 서로 사이좋게 협력하기도 했지만 저항하는 경우도 있었겠죠. 단군 설화를 보면 호랑이족은 저항을 했다고 볼 수 있고, 곰족은 서로 협력했고 특히 결혼 동맹을 맺었다고 볼 수 있죠. 고구려 건국에서도 보면 고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제일 먼저 합병한 나라가 송양국이거든요. 전쟁을 해서 합병한 것이 아니고 합의해서 합병을 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초기에는 반드시 송양국의 공주를 왕후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2대 유리왕의 부인도 송양국의 공주였습니다. 첫 부인이 결혼하고 2년 안에 죽자 다시 송양국의 둘째 딸을 왕후로 데려옵니다. 이처럼 선진 이주민 세력인 환웅족과 토착 세력인 웅족이 결혼 동맹을 맺었고 그 사이에 난 아들이 단군 왕검인 것입니다.”
한 친구는 스님의 벽화 설명 중에서 마지막에 설명해 준 종합생활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합니다. 벽화 왼쪽 아래에 아주 조그맣게 그린 부분을 찾아내면서 이 속에서 우리 단군 신화 이야기가 들어있지 않느냐라고 설명해주신 게 대단하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신단수 아래에 웅크린 곰을 보기 위해 우르르 모여들었고 곰을 알아 보지 못한 친구들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자 스님은 “곰이 안 보이는 사람은 업장이 두터워서 그렇다”며 농담을 던졌습니다. 단군 이야기는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임이 벽화로 증명된 것을 알게 된 이 순간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시원했던 5회분5호묘 벽화 냉장고에서 빠져나와 다음으로 간 곳은 환도산성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평지성인 국내성에 있다가 외적의 침입시 방어를 위해 환도산성을 지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나무와 풀에 묻혀 잘 드러나지 않았다고 했는데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발굴 작업을 진행해 지금의 형태를 갖추고 있고 직접 가 보니 지금도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습니다.
▲ 환도산성 남문 앞에서 전체 기념사진
환도산성에 올라서 아래를 내려다 보기도 하고, 아래에 내려와 발굴된 산성하 무덤떼를 하나씩 둘러보며 아래에서 환도산성 위를 올려다 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에 환도산성을 올려다 보았을 때 지는 해가 환도산성 너머 산에 늬엿늬엿 걸린 모습은 잊지 못할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해주었습니다.
▲ 산성하 무덤떼에서 바라본 환도 산성
산성하 무덤떼에서는 전체 일행이 바닥에 주저 앉아 조용히 사방을 둘러본 후 잠시 명상을 하는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머릿 속에는 산성을 쌓고 나라를 지키려고 부단히 애를 쓰던 고구려인들의 모습이 한 편의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 산성하 무덤떼에 앉아 잠시 명상의 시간
다음은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국내성을 둘러보았습니다. 국내성이라고 해서 궁궐을 상상하며 한껏 기대감을 갖고 갔는데 중국인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 가운데에 성벽 터가 조금 남아있는게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이대로 방치해둔 것에 대해 또 다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 국내성
국내성 북쪽 성벽에서 시작하여 서쪽 성벽이 끝날 때까지 걸으면서 성벽을 유심히 살펴보는 우리 일행을 중국인들은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중국인들은 운동하고 밥먹고 휴식하고 걸어다니는 일상 거리인데 우리들에게는 선조들이 남긴 소중한 유산인 것이죠.
서쪽 성벽을 돌고 남쪽 성벽이 시작되면서부터 통구하와 압록강도 함께 합해졌습니다. 압록강을 따라 걸으면서는 이승용 국장님으로부터 좋은벗들이 96년부터 북한동포돕기 운동과 통일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 국내성의 남쪽 성벽을 따라 압록강변을 거닐며
저녁 식사는 압록강변에 위치한 조선족 식당에서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한 후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법륜 스님의 역사 강의였습니다.
강의 내용은 고구려의 시작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고구려는 북부여를 계승한 나라이고, 고구려 역사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 부여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면서 “우리 역사에서 부여, 발해에 대해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면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고구려가 425년 동안 수도로 정한 곳입니다. 환웅의 배달 문명을 계승한 나라가 단군의 조선 나라이고, 그 조선 나라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고 하면서 세운 나라가 고구려입니다. 이것이 다물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배달의 문명을 계승했고, 조선의 문명을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배달 나라와 조선 나라에 대해 여러 가지 회의적인 시각이 있었지만 고구려를 보면서 우리는 고구려가 이 문명을 계승한 동북아의 독특한 민족임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고구려가 마치 창조한 것으로 말해진 것들도 그 이전을 알게 되면서 계승했다고 표현을 하게 된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의 비석에도 ‘북부여의 후손이고, 북부여로부터 말을 타고 남으로 내려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기에 보면 해모수가 ‘나는 단군의 후예로서 단군의 조선 나라를 계승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여는 조선보다 조금 더 북쪽에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부여라고 불리우는 현이 있습니다. 고구려 시대에도 천리장성 중에 부여성이 있었습니다. 이 부여에서 고주몽은 남쪽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여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발해가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의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부여입니다. 부여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어요. 이것은 발해와 부여 모두 지금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한반도가 아닌 저 동북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물 사상에 의해서 고조선으로부터 고구려로 바로 이어진 것이 아니고 그 중간에 부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여와 고구려를 하나로 봐야 합니다. 부여 고구려 시대라고 말할 수 있겠죠.
지금 현재로 보니까 고구려가 처음부터 강성했던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고, 동부여와 고구려의 경쟁에서 고구려가 이기게 되면서 그 정통성을 이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동부여는 만만한 나라는 아니였습니다. 고구려 문자 명왕 때인 6세기까지 유지가 되었습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있을 때도 부여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6세기 초까지 삼국 시대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오국 시대였습니다. 남쪽에 가야가 있었고, 북쪽에 부여가 있었기 때문에 삼국에 두 나라를 포함시켜야 합니다. 6세기에 들어와서야 가야가 신라에 합병이 되었고, 6세기에 들어와서야 부여가 고구려에 합병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삼국이 유지된 것은 6세기와 7세기에 한 160년 정도 밖에 안 됩니다.”
이어서 스님은 고구려의 성장과 쇠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특히 신라가 어떻게 급격히 성장할 수 있었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고구려는 북위와 화친을 맺으면서 서북 쪽이 안정이 되고 그러자 장수왕은 주력군을 백제 공격에 사용하여 백제를 남쪽으로 밀어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태평성대가 오래가면 항상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 사람들이 사치하기 시작하고, 둘째, 부정부패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셋째, 왕위 쟁탈전이 생기면서 내부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겉으로는 영토도 크고 힘도 있었지만 내부는 점점 취약해져 가게 됩니다.
이때 신라는 5세기 때까지만 해도 가야의 침공을 받고 망할 지경이 되어서 광개토대왕에게 부탁해서 5만 군사의 지원을 받아 겨우 나라를 유지했는데 6세기에 접어들면서 법흥왕 때 율령을 선포하고 불교를 공인합니다. 불교를 공인한 이유는 가야와 합병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가야는 원래부터 불교 국가였어요. 왜냐하면 김수로왕의 부인이 인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삼국 가운데 철저하게 불교를 금지한 국가가 신라였습니다. 옛날로 치면 가야와 신라는 철천지 원수였지만 거꾸로 개혁 개방 정책을 하면서 신라가 강성해지고 가야는 점점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가야를 침공하기 보다는 합의 통일을 했습니다. 국명은 신라로 하기로 하되 대신에 신라가 가야를 포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첫째, 가야인들의 신앙을 신라가 수용해야 된다고 해서 불교를 공인한 것입니다. 신라 안에서도 반대가 심했지만 이차돈 같은 젊은 사람이 반대를 해서 결국 한 사람이 죽고 사회 분위기가 바뀌면서 불교가 공인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신라도 가야와의 통합이 쉬운 일은 아니였어요. 둘째, 가야의 왕족을 신라의 왕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즉 가야 귀족들의 신분 보장을 해주었습니다. 이것을 지금의 남북 관계에 비유를 하면 불교를 공인한 것은 공산주의의 합법적인 활동을 허용한 것과 같습니다. 가야의 귀족을 신라의 귀족으로 받아들인 것은 북한의 장성을 통합군의 장성으로 임명한 것과 같습니다. 또한 함경북도의 도지사를 통합된 나라에서도 도지사의 자리를 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가야가 이런 통합 신라와의 합의 통합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신라 중심으로 통일을 하려고 했으니까 이렇게 가야를 포용한 것이겠죠. 그렇다면 지금 남한이 남한 중심으로 통일을 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그대로 두려면 북한을 포용해줘야겠지요? 그런데 지금의 남한은 이 정도의 포용 정책을 할 수 있나요? 이 정도를 못하면 북한이 수용을 안 하겠죠. 죽기 살기로 저항을 하겠죠. 지금 남북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강자가 약자를 포용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신라는 가야와의 통합을 통해 갑자기 성장을 하게 됩니다. 인재도 두배로 늘어났고, 가야의 앞선 철기 문명을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생산량이 늘어나고, 무기가 개발이 되고, 그래서 진흥왕이 나제 동맹을 맺어서 고구려를 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자 고구려는 한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신라는 함흥, 원산까지 밀고 올라갑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북방도 막아야 하고 남쪽도 막아야 하고 두 개의 전쟁을 할 여력이 도저히 안 되었던 겁니다.
어쨌든 신라가 단시간 내에 갑자기 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가야와의 합의 통합 때문이였습니다. 신라는 가야에게 조금 양보했지만 얻은 것은 열배를 더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남북한도 합의 통일을 하게 되면 통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체까지 만들어나가게 되면 엄청난 이익을 얻게 됩니다. 유라시아로 확장해 나갈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북한 개발을 하기 위해서 돈이 조금 드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나아가서 신라는 통일이라는 계획을 세워 놓고 통일을 한 것이 아니고 국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다가 결과적으로 통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목표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대륙을 차지하겠다는 생각도 전혀 없어서 통일을 했다는 장점도 있지만 반대로 대륙을 잃어버린 한계가 있었죠. 물론 잃어버린 것은 아니죠. 발해가 다시 생겼으니까요.
고구려 멸망 후 30년만에 북방 영토에는 발해, 즉 대진국이 일어났죠. 그래서 고구려와 백제가 망했다는 의미에서는 삼국 통일이지만 실제로는 삼국 통일이라기 보다는 신라와 발해라는 이국 시대라고 볼 수 있죠. 이때 또 재미있는 점은 고구려를 잃고 나라를 되찾고자 한 부흥군과 신라군이 합동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와 신라는 철천지 원수였지만 그 보다 더 큰 원수가 당나라였습니다.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쫓아내기 위해서는 고구려 부흥군이 신라군과 연합해서 가장 활발하게 싸웠던 것입니다. 신라는 무기와 물자를 대고 실제 인력은 고구려군이 전면에 나서 싸워서 결국 당나라군을 한반도 안에서 쫓아내게 됩니다.
고구려의 영토 일부를 신라가 차지했지만 그것은 반도 안에 불과했고, 실제로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는 발해가 회복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삼국통일이라기 보다는 북발해와 남신라라고 하는 이국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의 기운은 발해로 그 역사적 전통성이 계승되었기 때문에 환단고기에 신라는 언급을 안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다음에 대진국이 나옵니다. 발해 사람들은 자기들을 발해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자신들의 나라를 진국이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고구려는 후대로는 발해로 계승이 되었습니다.”
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한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한반도 동쪽 아래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던 신라가 짧은 시간에 어떻게 비약적 성장을 할 수 있었는지는 많은 시사점을 주었습니다. 특히 신라가 가야를 포용해서 합의 통일을 한 것에서 분단 국가인 우리가 독일 통일이라는 외국의 사례만 보고 통일의 방안을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경험 속에서도 보고 배울 점이 많다는 사실은 아주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렇게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오국시대의 방대한 역사를 단 2시간 만의 강의로 우리 청년들의 눈높이에 맞춰 적절히 비유로 강의를 해준 스님이 더 대단해 보였습니다. 에어컨도 잘 안 나오고 2시간 내내 서서 열정적으로 강의해주는 스님 앞에서 체력적 한계와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무거운 눈꺼풀과 씨름하는 우리들이 많이 부끄럽기까지 했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조별로 모여 마음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은 집안에 있는 고구려의 거대한 유적지를 돌아보며 느낀 점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체력적인 소모가 커서 많이들 지쳐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제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여러 명의 친구들이 환도산성 아래에서 산성을 올려다 보며 바라본 해질녘 풍경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보았던 초록색 중 가장 아름다웠던 색이었다고 이야기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 조별 마음 나누기 시간
그리고 책에서만 보던 장군총,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을 실제로 보니 그 거대함에 놀라웠고 한편으로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한 현실에서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식사 전에 압록강변에서 바라본 북한의 모습이 불빛 하나 없는 암흑이었던 것과 달리 이곳 중국은 알록달록한 불빛으로 휘향찬란한 것을 보면서 북한을 껴안지 못하고 있는 우리 남한의 현실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고 했습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압록강변을 따라 북한의 모습을 보면서 북한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볼 예정입니다. 어떤 모습을 보게 되고 그 속에서 무엇을 느끼게 될지 기대하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 합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 오늘 스케치는 김양숙님이, 사진 촬영은 권성준, 변지민님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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