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8.11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3일째, 압록강과 북한


▲ 발해 영광탑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3일째를 맞이하여 압록강을 따라 달리며 북한의 모습을 본 후 북한의 현실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벌써 동북아 역사기행 3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집안에서부터 통화, 백산, 림강, 장백을 거쳐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백두산 서편 산문을 통과해 이도백하까지 버스로만 10시간, 거리로는 7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 그야말로 대장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정입니다. 

 

1600여 년 전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을 뒤로하고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장구하게 흘러온 강인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70년 전까지는 남과 북 모두를 감싸 흐르던 그 푸른 강물을 이제는 먼 나라 손님처럼 그 너머에서만 바라볼 수 있음에, 이 경계를 넘어서지 못함에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 북한의 뙈기밭

 

버스 차창 밖으로는 맑고 깨끗한 하늘 아래 손에 닿을 듯 너무나도 가까운 북한 땅이 보입니다. 두 눈에 담기는 저 너머의 풍경이 너무 생생하고 가까워 오히려 여기가 정말 북한 땅이 맞나 하는 이질감이 들 정도입니다. 소를 치는 사람들, 강변에서 빨래하는 아낙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만약 창문을 열고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면 우리네 말로 대답이 돌아왔을지도 모릅니다.

 


▲ 버스 창 밖으로 북한 땅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들 

 

림강의 4도구를 지나면서 보이는 북한의 풍경은 마치 우도의 풍광처럼 약간은 이국적이며 멋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스님께서 들려주시는 북한의 실상을 듣고 나니 원경의 아름다움은 저 멀리 사라지고 근경의 처절함과 고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45도 이상의 경사를 이루는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가 산 정상까지도 뙈기밭으로 경작해야만 했던 상황 속에서 굶주림과의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북한 동포들의 실상이 이제야 마음에 와 닿습니다. 몇날며칠 끼니를 거른 채로 그냥 서있기 조차 힘든 가파른 경사를 올라 괭이질을 하고, 돌을 캐내고, 다시 강가까지 내려와 물을 퍼 올렸을 북한 동포의 전쟁 같은 하루하루가 그려지니 잠시나마 경치에 감탄한 자신이 부끄러워지며, 경치에 감동하던 감수성을 단도리하게 됩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북한은 대동강의 기적이라 불리며 가파른 경제성장을 이루었습니다. 1958년부터 62년까지 대기근을 겪었던 중국의 많은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넘어와 정착한 수만 10만을 넘었었고, 남한에 비해서도 훨씬 잘 사는 나라가 북한이었습니다. 그런 북한이 왜 갑자기 몰락하게 되었는지 스님은 자세히 이야기를 풀어 주었습니다. 

 

“북한은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식량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1953년에 한국 전쟁이 끝나고 북한은 미군 폭격에 의해서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천리마 운동이라고 해서 온 인민이 힘을 합해서 전쟁 복구 작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60년대에 들어오면서 10년 만에 북한은 제3세계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 중에서는 가장 잘 산다고 할 만큼 경제 성장을 했습니다. 세계에서는 대동강의 기적이라고 불릴만큼 발전이 앞섰습니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에 농촌에서 트랙터로 농사를 짓는 기계화를 이미 완성했고요. 모든 시골에 전기가 다 들어가고, 전기로 상수도 시설을 만들고, 중국은 굶어죽는 사람이 있는 정도였는데 압록강과 두만강 변에도 도로를 다 닦았습니다. 남한에 비해서도 훨씬 잘 살았습니다. 그런 북한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첫 번째 문제는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의 중소 분쟁입니다. 중국과 소련 간에 이념 갈등이 생겼어요. 중소 분쟁이 생기니까 북한 정부를 구성하던 사람들 중에는 중국 모택둥의 동북연군 산하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많았고, 또 연해주에서 항일 운동하거나 소련 유학파들도 많았고, 또 국내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박헌영을 주축으로 한 남노당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던 김두봉 부대 등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북한 정부를 구성한 주축 세력이였습니다. 그런데 6.25 전쟁의 실패 책임을 남노당에게 물어서 박헌영과 그 일파가 제거가 되었습니다. 즉 국내파는 다 제거되고 해외파만 남게 되었는데 중소 분쟁이 일어나니까 자신들의 배후가 하나는 중국, 하나는 소련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내부에서 ‘중국 노선이 옳다’, ‘소련 노선이 옳다’ 이렇게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었어요. 이럴 때 김일성 주석이 ‘우리는 중국도 소련도 아니고 우리가 주체이다’ 라고 하면서 주체 사상을 내세우면서 노선 투쟁을 하는 과정에 연안파와 소련파를 종파 분자로 낙인 찍어 모두 숙청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주체 사상이 나오게 된 배경입니다. 정부를 구성하는 다양한 배경의 정치 세력이 있었는데 차례 차례로 숙청이 되면서 김일성의 유일 주체 사상으로 정리가 되고 독재 체제가 강화가 되는 형국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70년대 들어오면서는 한국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과로 북한 경제와 거의 비슷해집니다. 그래서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상대를 제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자 72년도에 남북 간에는 7.4 공동성명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남쪽은 유신 체제를 통해 바로 독재로 가고, 북쪽은 유일 주체 사상을 통해 독재로 전환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서 북한 경제는 60년대 고성장에서 70년대에는 저성장으로 빠져듭니다. 

 

70년대부터는 사상 투쟁을 많이 벌립니다. 기술보다는 사상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절대 충성을 하는 사람이 대우 받고, 과학자라든지 합리적인 사람들이 밀려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서 북한은 저성장 국면으로 빠지고, 80년대에 들어오면서 남쪽은 더욱 고성장을 하면서 남북 간에 치열한 경쟁이 이뤄집니다. 특히 88년도에는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은 서울을 새로 가꾸었고, 북한도 평양 시내를 서울에 버금가도록 만들기 위해서 과다한 투자를 하게 됩니다. 이런 과잉 투자가 나중에 북한 경제에 큰 타격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김일성 주체 사상을 주장하면서 주체탑, 주체동상 이런 것들을 전국에 건설하고, 사상을 강조하는 등 비경제적인 분야에 많이 투자를 함으로해서 경제가 정체 국면에 들어갔습니다. 

 


 

89년에는 동유럽이 해체되면서 동유럽에 수출하는 상품이 많았는데 수출의 활로가 막혀 버렸습니다. 또 중국이 시장경제화 되면서 사회주의식 물물교환 거래가 모두 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졸지에 무역 상대를 다 잃어버렸지만 미국의 대북 봉쇄 정책으로 인해 자본주의와의 일체 거래도 막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완전히 고립이 되어 버린 겁니다. 북한 경제는 급전직하로 내리막길로 갔습니다. 

 

가장 핵심은 외환 고갈입니다. 무역 거래가 중단되니까 외환이 고갈되고, 외환이 고갈되니까 국가 부도가 나버린 겁니다. 그래서 석유 수입을 못하게 되니까 에너지가 없어서 자동차 운행을 못하고, 발전기도 멈춰버렸어요. 석탄 캐는 탄광은 물을 계속 퍼내면서 일해야 하는데 전기가 공급되지 않으니까 물이 다 차버려서 탄광이 중지되어 버렸고, 무산 철광도 철광석을 자동으로 청진으로 이동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다 중지가 되어 버렸고, 기차도 못 다니고, 즉 전기 공급이 끊기면서 모든 산업이 다 중단되어 버린 겁니다.

 

농업도 비료 생산도 안 되고, 비닐 생산도 안 되고, 농기계 생산도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식량 생산량도 급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식량 생산량이 급격하게 줄어드니까 농민들이 자신들도 먹을 것을 생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잉여 생산량을 정부에 제출할 수가 없게 되고, 정부는 이걸 받아서 노동자에게 공급해야 하는데 노동자들에게도 공급할 식량이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함경도 지역의 노동자들이 식량 배급을 못 받게 되고, 배급을 받아서 먹고 사는 사람이 배급을 못 받으니까 그냥 다 굶어죽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90년대 들어와서 식량이 곤궁해지다가 94년, 95년에 대홍수가 일어나면서 식량 생산량이 더욱 떨어지게 되니까 한 두명 굶어죽는 것이 아니라 대량 아사로 가게 됩니다. 빈부 격차가 있으면 가난한 사람부터 굶어죽을텐데 평등을 유지하다 보니까 집단으로 굶어죽게 된 겁니다. 

 

이 대량아사는 지역적으로는 함경도 쪽의 동부에서 시작해서 서부로, 노동자 계층에서 시작해서 농민 계층으로 확대 되었습니다. 농민들은 농사를 지으니까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식량 생산이 떨어지니까 정부 입장에서는 군인도 먹어야 하고 관리도 먹어야 하니까 농민들이 먹을 양을 남겨 두고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처음에는 10개월치 먹을 것만 남기고 가져가다가 이제는 6개월치 먹을 것만 남기고 가져가게 된 겁니다. 그래서 농민들도 봄이 되어서 굶어 죽게 된 겁니다. 

 

농민들은 죽어라고 일해봐야 먹을 양식도 못 구하니까 집단 농장인 문전옥답에서 농사 짓는 것을 게을리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내고 자기가 개간한 뙈기밭을 만들게 됩니다. 뙈기밭에 옥수수와 콩을 심으면 그건 개인 소유가 되기 때문이죠.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새벽에 올라가서 개간하고, 퇴근하고 밤 늦게 오라가서 가꾼 땅이 뙈기밭입니다. 만약 뙈기밭이 없었다면 북한 주민들은 더 많이 굶어죽었을 겁니다. 그러니 집단 농장에서 짓는 농사는 자기 것이 안되니까 제대로 짓지 않게 되었겠죠. 힘을 비축해 둬야 저녁에 퇴근해 와서 또 뙈기밭에 올라갈 것 아니겠어요? 이렇게 노동력 마저도 농업에 제대로 제공이 안 되니까 식량 생산량은 더욱 떨어지게 된 겁니다. 국가적으로는 더욱 나빠졌지만 개인은 어느 정도 버틸 수가 있게 된 것이죠. 

 

이렇게 해서 북한의 대량 아사는 도시 만이 아니라 농촌으로, 동부 만이 아니라 서부로, 일반 평민 뿐만 아니라 당원에게까지 확대되면서 94년부터 98년까지 일어났습니다. 저는 95년도에 역사기행을 왔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96년도에는 다시 와서 확인하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내 눈 앞에 벌어진 일을 내가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96년부터 북한동포돕기 해야 된다고 정토회에 제안을 했는데 정토회는 정토회관을 짓기 위해 모금도 하고 땅도 구입하고 설계도까지 완성해서 착공하기 직전이였기 때문에 반대가 많았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건물은 올해 못 지으면 내년에 짓고 내년에 못 지으면 10년 후에 지으면 되지만, 사람은 한번 굶어 죽어버리면 다시 못 살리지 않느냐’ 

 

그래도 어렵다고 해서 ‘그럼 나만 나와서 할게’ 했더니 실무자 두명을 붙여주어서 ‘우리민족서로돕기 불교운동본부’를 발족시키고 그해 연말부터 북한동포돕기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다음해 2월에 강원도에 감자가 남아 돌아서 섞는다고 해서 종교단체들이 연합해서 감자 100트럭을 사서 북한에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북한 인도적 지원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매일 전국을 울고 불고 다니면서 강연을 했습니다. 

 

그 때 우파는 ‘군량미를 모으기 위해 식량난을 과장하고 있다. 거기에 좌파들이 부화뇌동하고 있다. 우리가 보낸 식량 총알 되어 돌아온다.’ 이렇게 주장했어요. 그래서 정말 식량 상황이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제가 북한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정부에서 허락을 안 해줘서 못갔어요. 대신 압록강과 두만강을 다니면서 이곳에서 북한 난민들을 만나 자세한 소식을 듣게 된 겁니다. 한 두명 굶어죽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가을 바람에 낙옆 떨어지듯이 대량 아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한국에 와서 아무리 얘기해도 논쟁만 되었고, 그러던 중 97년 하반기에 대통령 선거에 돌입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는 묻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호소하게 되었어요. 미국의 의회, 국무성, CIA 등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또 미국 사람들은 증거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북한에서는 이 문제를 자꾸 숨기니까 

 

98년부터는 미국에서 북한에 인도적 지원이 재개가 되고, 국제 사회가 협력하고, 99년에는 한국 정부도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게 되고, 이러면서 북한의 대량 아사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는 외부에서 지원이 있었던 것이 효과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이미 죽을만큼 죽은 뒤였기 때문입니다.   

 


▲ 뙈기밭 사이로 흘러내린 토사가 삼각지를 이루며 그대로 쌓여 있는 모습. 중장비가 없어서 복구 작업도 요원한 상태. 

 

저는 북한의 뙈기밭을 보면 세계 문화 유산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간이 어느 정도로 할 수 있느냐. 사실 이건 기적이예요. 이렇게까지 사람이 죽지 않고 살려고 애를 썼다는 거잖아요. 여기만 이런 것이 아니라 전 국토가 이렇거든요. 북한이 잘 했다가 아니라 나쁜 짓을 많이 했더라도 거기에 살고 있는 일반 백성들이 저렇게까지 먹고 살려고 애를 쓰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해요? 이념을 떠나서 식량을 지원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저런 놈들은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이 점을 우리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감정이 격해지면 살아있는 사람도 죽이게 되듯이 우리도 ‘그 놈의 새끼들, 왜 주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 북한 주민들의 대량 아사는 우리가 방조한 것과 다름 없습니다.” 

 

북한의 대량 아사는 우리가 방조한 것과 다름 없다는 말씀에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그리고 건물은 올해 못 지으면 내년에 다시 지으면 되지만 사람은 굶어죽으면 다시 살릴 수 없지 않느냐는 말씀은 큰 울림이 되어 계속 뇌리에 남았습니다. 

 

림강의 8도구를 지나고 저 멀리 김형직군이 보입니다. 김형직은 김일성의 아버지인데 이곳은 김일성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유일하게 김일성의 어린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을 세워두었습니다. 한 도시의 이름을 사람의 이름으로 지었다는 것도 신기한데 버젓이 커다란 동상을 도시 한 가운데 세운 것을 직접 눈으로 보니 한 사람을 신격화하며 독재 체제를 유지해나가는 북한이라는 나라가 아직은 멀게만 느껴지기도 합니다.

 

스님이 이야기하는 동안에 압록강을 타고 저 멀리서 나무를 운반하는 뗏목이 내려왔습니다. 정말 장관이였습니다. 오징어처럼 머리가 쭈삣하도록 해서 앞에서 조정을 하면서 내려왔습니다. 스님이 “통일이 되면 사흘 정도 압록강에서 저 뗏목을 타고 내려와보면 참 좋겠죠?” 하고 물으니 청년들은 “네” 라고 대답했습니다. 

 


 


▲ 북한에서 압록강을 통해 나무를 운반하는 뗏목

 

그러자 스님은 “이렇게 좋은 버스 타고 다니는 것도 힘들다고 하면서 뗏목이 과연 타질까?” 하며 웃었습니다. 그리고 “구경하는 사람은 좋지만 저 뗏목 위에서 먹고 살면서 내려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예요. 그래서 이것은 여름에만 볼 수 있어요”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뗏목은 이렇게 일곱 차례에 걸쳐 연달아 내려오면서 연신 탄성을 자아내었습니다. 

 

어른 키보다 조금 더 높은 빽빽한 옥수수 밭을 지나 버스를 타고 4시간을 더 가니 ‘장백조선족자치현’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곳에는 발해 유일의 탑인 ‘영광탑’이 남아 있었습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45도 경사의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서 10분정도 올라가니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영광탑이 드러났습니다. 

 


▲ 영광탑으로 올라가는 계단

 

수학여행 때 눈앞에서 바라보던 신라, 백제의 탑과 같이 내 눈 앞에 실재하는 발해의 탑을 보고나니 발해의 역사가 저 너머 멀고 먼 만주벌판의 것이 아니라 우리 땅 안에서 버젓이 숨 쉬고 있는, 우리의 역사 속의 살아있는 유물이라는 것이 이제야 피부에 와 닿습니다.

 

 

스님은 영광탑 앞에 서서 먼 길을 달려 이곳까지 온 청년 역사기행단을 위해 간절한 마음을 담아 발원과 축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발해 멸망 후 1100여년이 지난 뒤에서야 저희 후손들이 이곳에 찾아와 탑전에서 공양 올리고 예배하옵니다. 조상님들이시여. 저희들을 부디 나무라지 마시고 저희의 이 공양을 받으십시오. 

 

저희 대중 일동은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환인 하느님, 환웅 천왕님, 단군 왕검님, 해모수님, 고주몽님, 대조영님을 비롯한 민족의 원류를 쫓아 그 발자취를 찾아다니며 학습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거슬러 백두산에 올라 천지 신명님들께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가 정착되기를, 더 이상 남북이 갈등과 대립을 벗어나 서로 협력하고 마침내는 하나 되어 통일되기를 기원하며 이렇게 간절히 발원하옵나니 제불 보살님들께서는 저희의 이 간절한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소서. 

 


 

오늘 압록강 상류를 거슬러 오면서, 건너편 북녘 산하를 보면서, 동포들의 굶주림의 고통을 늦게 나마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고, 저렇게 살기 위하여 서 있기도 힘든 저 비탈에서 땅을 뒤지고 곡식을 심는 등 그 아픔을 저희들은 몰랐습니다. 곁에 있어도 알지 못하면 없던 일이 되듯이 저희들 살기가 바빠 동포의 아픔을 외면한 그 큰 죄를 이렇게 늦게 나마 참회하오니 저희의 이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300만이나 되는 동포들이 굶주리고 병들어 죽었고, 그 와중에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으며 온갖 인권 침해를 받는 수모를 겼었지만, 저희들이 그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저희의 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참회하며 지금이라도 이제 다시는 이런 아픔이 생겨나지 않도록 남북이 과거의 원한을 잊고 서로 화해하고 협력하여 통일의 그날이 오도록 저희 청년 대중들 모두 정성을 다할 것을 발원하옵나니 제불 보살님들은 저희의 이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륭팔부 신중님들과 조상 영가님들께서는 저희의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 

 


 

또한 오늘 이렇게 발해의 영광탑을 참배하고 불공 올린 인연 공덕으로 이 젊은이들 행복하고 건강하고 슬기롭고 자신들이 세운 원들이 성취될 수 있도록 해주시옵고, 또한 이 여행이 무사히 끝날 수 있도록 천지 신명님들이시여 이들을 돌보고 옹호하여 주시옵소서.”

 

스님께서 하시는 발원 속에서 1100년 만에 찾아온 후손으로서의 죄송함이 느껴지며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잊어버리면 곧 잃어버리는 것인데 잊어버리지 않도록,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는 마음이 일게 됩니다. 

 

그리고 영광탑 앞에서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어서 영광탑 앞에서 바라보이는 북한 혜산시를 바라보며 이승용 선생님으로부터 좋은벗들의 난민 구호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곳 ‘장백조선족자치현’은 또한 북한에서 넘어오기는 쉬우나 경비가 삼엄하고 주변 도시로의 교통로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북한 난민들이 열이면 열, 다시 북한으로 붙잡혀 들어가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90년대 후반 북한의 대량아사로 인해 탈북한 동포들의 가장 처참했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곳이지요. 스님께서 굶주림을 피해 이곳을 건너온 동포들을 돕기 위해 하셨던 수많은 일들을 듣고 나니 나만의 풍족함만을 쫓아 달려온 시간들이 죄스러워지고 앞으로 내가 동포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힘들고 모두가 하기 꺼려하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내가 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백두산을 향해 4시간 여 정도를 더 달려 백두산 중턱의 서편 산문 입구에 있는 강원도 식당에 도착했고, 그 이름과 걸맞게 지금까지 중 가장 우리 입맛에 맞는 얼큰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저녁식사가 후 모두가 진심으로 즐겼던 노래 장기자랑을 끝내고 스님의 <북한사회 · 북한사람> 강연을 들었습니다.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에서 백두산을 향해서 끝없이 올라와서 백두산의 남편과 서편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잠은 백두산 북편에 가서 잘 예정입니다. 지금 우리는 백두산의 몸 속을 달리고 있습니다. 내일 백두산 천지에 오른다는 것은 백두산의 얼굴을 본다는 뜻이 되겠죠. 백두산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단순한 산이 아니라 민족의 신앙입니다. 내일 백두산 천지에 올라보면 왜 우리 조상들이 민족 정기의 표상으로 삼았는지 아마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압록강을 따라오면서 북한을 보았습니다. 북한이 왜 식량난을 겪게 되었는지는 앞서 말씀드렸고, 저희들은 그동안 많은 활동을 해오면서 북한 주민들의 생존권 해결, 인권 개선도 결국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해결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자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대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어느 나라든 다 마찬가지겠죠. 그렇기 때문에 북한은 인민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체제 유지가 우선이기 때문에 인민의 생존권과 인권에 아랑곳하지 않고 핵무기를 개발하고 민중의 고통도 외면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북의 긴장을 완화해야지만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저도 미국에 찾아가서 한반도의 평화 문제를 간절히 호소했고, 특히 2005년 9.19 합의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쪽 대표가 합의가 있자 마자 바로 메일을 보내서 스님의 고견이 합의를 이끄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9.19 합의가 문제를 합리적으로 푸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닌가 해서 희망을 가졌는데 이 합리성 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한국에서도 정권이 바뀌고 남북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파탄에 이른 정도가 아니라 전쟁 위기에 내몰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또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동아시아 전략으로 미일 동맹을 굳건히 하면서 거기에 한국을 참여시키기 위한 한미일 군사 동맹을 요구하고 있어서 지금 한국은 굉장히 어려운 국면에 놓여 있습니다. 만약에 한미일 군사 동맹에 참여하게 되면 통일이 물건너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중국과의 긴장이 고조됨으로 해서 한국 경제는 그렇지 않아도 정체 국면인데 바로 마이너스 국면으로 전환할 수 밖에 없는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지혜롭게 풀어갈 것인가. 이것이 과제입니다. 여러분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개인의 취직 문제나 결혼, 연애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제는 정체 국면에서 붕괴 국면으로 나아갈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첫째, 최소한 우리가 피땀으로 이뤄놓은 인명과 재산을 훼손하지는 말아야 겠다. 즉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은 없어야 되겠다 하는 우리들의 안전을 위한 우리들의 각오가 필요합니다. 

 

둘째, 전쟁이 없는 것은 임시적 해결책이지 본질적 해결책은 아닙니다. 결국 완전환 평화를 가져오는 길은 통일입니다. 현재의 손실을 잃지 않는 것이 평화이지 미래의 이익까지 담보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미래의 이익을 담보하려면 우리는 통일로 나아가야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통일로 나아갈 것인가?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선 주변에 있는 4강들이 한반도의 통일이 자신들에게 손해인지 이익인지 불확실해 합니다. 그래서 주변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통일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결국 당사자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당사자 중에서는 북한이 적극적으로 나서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북한은 현재 통일을 추진할 만한 역량이 안 됩니다. 그래서 북한이 통일을 주도하길 바랄 수가 없습니다. 결국 통일을 주도할 만한 세력은 남한입니다. 남한은 통일을 하겠다고 결심을 하면 통일을 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역량, 국제사회에서의 외교력이 어느 정도는 됩니다. 그래서 남한 사회 안에 통일 지향적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이 통일의 첫 단계입니다. 

 


 

 

그렇다면 남한이 중심이 된 통일을 하려면 북한이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북한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북한이 동의하는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것은 포용 정책입니다. 북한 주민들은 생존권의 위협을 받고 있으니까 통일이 되면 생존권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경제적인 지원을 해야 하고, 북한의 지배 세력들은 통일이 되면 자신의 신분이 계속 유지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신분의 보장을 해줘야 됩니다. 그래서 미리 인도적 지원이나 경제 협력을 통해서 북한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 남한 안에서 진보 세력의 정치 활동을 인정하게 해줘서 통일이 된 후에 북한도 자신들의 정치적 활동이 자유롭게 보장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전에 남한의 헌법에 규정해 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남한 사회 안에 북한을 포용할 수 있는 변화가 있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한미 동맹이 이제는 자주적 입장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즉 한반도의 통일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의 이익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고 미국이 우리를 도와라 해야 합니다. 그 외에 나머지 세계의 문제에 있어서는 미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일에 우리가 협조하겠다고 해야 합니다. 미국의 이익에 의해서 분단 고착화도 가능한 것이 된다면, 또 한일 간에 식민지 침략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한일 군사정보협력을 하라고 강요한다면 이것은 종속적 한미 동맹입니다. 

 

대한민국의 국가 목표가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불분명합니다. 외교에 있어서 최우선 과제도 이것이 통일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생각해야 하고, 안보, 국방 문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첫째,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북한 주민들의 생존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 둘째, 북한 주민들의 인권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 셋째, 남북 간에는 정치적 이념이 달라도 과거사에 대해 화해를 하고 교류와 협력이 증대되어야 한다는 것과 남북 간의 경제 협력은 상호 이익이 된다는 것, 넷째, 여기서 더 나아가서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는 것, 그래서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통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에게도 이익일 뿐만 아니라 북한 주민들의 생존권도 가장 빨리 보장하는 길이 되고, 북한 주민들의 인권 개선도 가장 빨리 되는 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젊은 여러분들이 조금 더 각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반도의 완전한 평화를 위한 해결책은 결국 ‘통일’뿐이며 통일에 유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통일을 위한 ‘마음’을 다시 다잡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스님의 열정적인 강연에 청년들은 뜨거운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스님의 법문이 끝나고 다시 버스에 올라 숙소로 가는 길에 올려다본 백두산의 밤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잊혀 지지 않습니다.

 

이 백두산의 밤하늘을 이제는 언제든지, 어느 경로로든지 와서 한없이 바라볼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원합니다. 

 

내일은 백두산 천지에 오른 후 비룡폭포, 소천지, 녹연담, 지하산림을 차례대로 둘러본 후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을 고스란히 느껴볼 예정입니다. 오후에는 잊혀진 역사 발해의 땅으로 넘어가 대조영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곳이라고 하는 동모산으로 향합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 오늘 현장 스케치는 조희정님이, 사진 촬영은 권성준님이 해주셨습니다. 

전체댓글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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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나네요 감동입니다! &lt;&lt;...‘그럼 나만 나와서 할게’ 했더니 실무자 두명을 붙여주어서 ‘우리민족서로돕기 불교운동본부’를 발족시키고 그해 연말부터 북한동포돕기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다음해 2월에 강원도에 감자가 남아 돌아서 섞는다고 해서 종교단체들이 연합해서 감자 100트럭을 사서 북한에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북한 인도적 지원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매일 전국을 울고 불고 다니면서 강연을 했습니다. &gt;&gt;<br />&lt;&lt;...그래서 정말 식량 상황이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제가 북한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정부에서 허락을 안 해줘서 못갔어요. 대신 압록강과 두만강을 다니면서 이곳에서 북한 난민들을 만나 자세한 소식을 듣게 된 겁니다.&gt;&gt;&lt;&lt;..그래서 한국에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호소하게 되었어요. 미국의 의회, 국무성, CIA 등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또 미국 사람들은 증거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북한에서는 이 문제를 자꾸 숨기니까 98년부터는 미국에서 북한에 인도적 지원이 재개가 되고, 국제 사회가 협력하고, 99년에는 한국 정부도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게 되고, 이러면서 북한의 대량 아사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는 외부에서 지원이 있었던 것이 효과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이미 죽을만큼 죽은 뒤였기 때문입니다. &gt;&gt; <br />&lt;&lt;저도 미국에 찾아가서 한반도의 평화 문제를 간절히 호소했고, 특히 2005년 9.19 합의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쪽 대표가 합의가 있자 마자 바로 메일을 보내서 스님의 고견이 합의를 이끄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9.19 합의가 문제를 합리적으로 푸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닌가 해서 희망을 가졌는데 이 합리성 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한국에서도 정권이 바뀌고 남북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파탄에 이른 정도가 아니라 전쟁 위기에 내몰릴 정도가 되었습니다.&gt;&gt; <br />

2015-08-22 05:50:23

하지연

스님께서 통일을 위해 애쓰시는 마음 가슴에 와닿습니다 북한의 뙈기밭을 보니 지난날들이 새로이 되새겨집니다 통일을위해 이렇게 애쓰시는 스님의 건강을 빕니다~~ 눈물나도록 감사합니다

2015-08-16 12:34:33

이학립

감사합니다 스케치하고 사진올리고 바쁘신 일정에도 이렇게 소식을 전해주시니 덕분에 앉아서 역사탐방하고 있네요.

2015-08-14 23:4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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