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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동북아 역사기행 1차팀을 심양 공항에서 배웅한 뒤 오늘부터 새로 시작하는 동북아 역사기행 2차팀과 함께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홀본산성에 올랐습니다.
오늘 역사기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대중들은 처음 중국에 왔을 때처럼 말끔히 차려 입고 심양공향으로 출발하기 위해 숙소를 나왔습니다. 떠나는 아쉬움이 컸는지 차량별로 단체 사진이라도 한 장 더 남기고 싶어 차량 앞에 모여 있는 대중들을 보고 이번에는 스님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심양 공항에 도착해 통일의병을 주축으로 구성된 역사기행 1차팀을 배웅하며 짐을 부치려 줄을 서 있는 대중들 한 명 한 명에게 스님이 악수를 건냈습니다. 대중들도 7일 동안 잊혀진 민족의 뿌리와 독립운동의 역사, 통일 한국의 희망에 대해 소중한 가르침을 준 스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 통일의병 역사기행팀 배웅
1차팀이 출국 수속을 밟고 모두 들어가자 곧바로 청년들로 구성된 2차팀이 출국장을 나왔습니다.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이 연이어 다시 역사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 청년 역사기행팀을 데리고 심양 공항을 나오고 있는 스님
청년들은 7일 동안 한 몸처럼 지낼 버스에 짐을 차곡차곡 싣고 다소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표정을 지으며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첫 번째로 가볼 역사 유적지인 홀본산성을 향해 떠나며 이어폰 너머로 스님이 환영 인사를 해주자 모두들 법륜 스님이 안내하는 역사 대장정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환호성을 터뜨렸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와서 한 주간 이곳에 있었습니다. 한국은 많이 더웠다면서요? 저는 시원하게 잘 있었습니다.”
▲ 송수신기로 들리는 스님의 환영 인사를 듣고 환호하는 청년들
스님의 환영 인사에 이어 7박8일 동안 역사기행단을 선조들의 숨결이 깃든 역사의 현장으로 안전하게 데려다 줄 운전 기사님들과 실무 담당자 조춘호 선생님에게 열렬한 환호와 함께 감사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버스 안에서 송수신기를 통해 들려온 스님의 첫 번째 강연은 ‘우리가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고조선이나 고구려, 발해의 역사가 단순히 머릿 속 관념으로써 존재하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행동을 유발하기 위한 실질적인 동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상황이 벌어져서 어떤 행동을 할 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하지?’ 하고 의아할 때가 있지요. 그럴 때 그 사람을 비난하고 욕하거나 하는 식으로 대응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사람은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어떤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를 찾으려면 그 사람의 성장 배경을 조사해 보면 돼요.
그것처럼 지금 우리 나라가 처한 현실을 보면 미국과 중국이 패권 경쟁을 점점 해나가는데 우리는 지금 그 사이에서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고, 남북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어서 이것이 다른 사람 좋은 일 시키는 민족적 손실이 있고, 또 국내의 각 정파들이 왜 저렇게 갈등을 할 수 밖에 없고, 또 한국 사람들은 왜 저렇게 밖에 못하는지 등 현재 우리가 처한 남북 갈등, 남한 안의 갈등, 주변국과의 문제 등에 대해서도 한 사람의 성장 배경을 알아가듯이 조사하는 것이 역사입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지식으로 알기 위해 역사기행을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놓여진 이 현실 속에서 지금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고, 미래에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보다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과거의 경험들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향을 잡았다면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행동은 지식을 갖고는 안 나옵니다. 마음에 감동이 있어야 행동이 나옵니다. 교실에 앉아서만 공부하면 아무리 감동적인 것도 지식이 되기 쉽고,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지고 발로 밟으면서 현장에서 공부하게 되면 마음 속에 감동이 오기가 비교적 쉽습니다. 그래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현장에 와서 과거의 유물과 유적을 살펴보면서 역사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한 개인이 왜 이렇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실패하고 성공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겪어온 과거를 알면 되듯이 한국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도 마찬가지라는 말씀에 모두 공감을 표했습니다.
청년 역사기행팀은 중국으로 떠나오기 바로 전 날에도 조원들끼리 모여 자신의 인생 그래프를 그리고, 살면서 가장 슬펐던 일, 가장 기뻤던 일에 대해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처음에는 이국에서 자나 깨나 항상 붙어 있어야 할 사람들이니 더 친해지라고 그러나보다 하고 시작했었는데, 막상 사람들의 과거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래서 저 사람이 그런 말을 했구나, 저런 행동을 했구나’ 하고 조원들 한 명 한 명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의 역사를 알아가면서 다른 이를 좀 더 포용할 수 있듯이 나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양에서 환인으로 가는 버스 안. 스님은 홀본산성에 도착하기 전에 공부를 좀 하고 가자며 우리 나라의 9천년 역사를 대략적으로 개괄해 주면서 이와 결을 달리하는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개괄적으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우리 나라 어느 시대 때 중국은 어느 시대였고, 중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 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호 비교를 해보니 역사적 사건들이 더욱 명료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점심 식사로 옥수수를 먹고 처음 도착한 곳은 홀본산성 기념관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고구려인들이 남긴 여러 유물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고구려인들이 지위 높은 이의 무덤을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고구려인들은 무덤을 만들 때 표면이 둥그렇게 마모된 강돌만 사용했다고 합니다. 강돌은 오랜 세월 물에 쓸려나가 더 이상 깎여나갈 부분이 없을 정도로 단단한 부분만 남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데 산돌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강돌과 산돌이 따로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 둘의 특성이 다르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습니다.
고구려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호전적이고 싸워 이기는 기술에만 능하다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물에 들어가 강돌을 골라냈을 먼 옛날의 사람들도 떠오르고, 그 먼 옛날에 벌써 과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었던 선조에 대한 경이감도 들었습니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생각인지 발 아래 유리판 아래 맨들맨들한 광택을 빛내고 있는 강돌 무덤 유적을 발로 쓸어보며 한참을 그 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 고구려의 첫 수도 홀본산성의 웅장함
기념관을 나와 셔틀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한 언덕을 올라갔습니다. 버스에서 내려서는 가파른 돌계단을 하염없이 걸으며 홀본산성으로 올라갔습니다. 날씨가 화창해서 홀본산성은 저 멀리서도 아주 선명하게 그 위용을 드러내었습니다.
계단을 오르기 전 간단히 기념 촬영을 한 후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 홀본 산성에 오르기 전 비석 앞에서 기념 촬영
길고 긴 계단을 보며 가방을 왜 들고 나와 짐을 더했는지 모르겠다며 자책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 정도 거리면 적이 제대로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아군에 투항했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비가 막 오고 난 직후라서 한결 시원한 날씨였는데도 땀이 흘러 옷을 적셨습니다. 귓전에는 법륜 스님이 이렇게 길이 닦이기 전 운좋게 경비병만 이용할 수 있었던 케이블 카를 타고 홀본산성 유적지로 올랐던 사연을 유머러스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의 얘기를 들으며 웃다가 한참을 걷다보니 드디어 홀본산성에 도착했습니다. 판판한 평지에 둘러 앉아 법륜 스님의 말씀을 듣다보니 거짓말처럼 바람이 시원하고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마치 도를 구하기 위해 산자락에서 수학하는 제자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스님은 고주몽이 이곳에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 설화에 대해 이야기해 주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스님의 역사 강의를 듣고 내려오는 길에 몇 가지 유적지를 더 보았는데, 그 중 고구려인들의 온돌을 사용한 옛 집 터가 기억에 남습니다. 조춘호 선생님이 온돌은 우리 문화권만 가지고 있는 유일무이한 자산이라고 이야기 하시면서, 북방민족과 남방민족의 성향 차이를 말해 주었습니다. 북방민족은 ‘빨리 빨리’가 입에 붙은 민족이고 그래서 말을 타는 기마 문화가 발달되었고, 반대로 좀 늦더라도 편하게 가고 싶은 성향의 남방 민족은 수레를 발달시켰다는 말씀에 다들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능선이 거의 끝나가는 지점에서 ‘점장대’ 가 나타났습니다. 점장대는 장수가 주변의 지형 지세를 내다보며 병사들을 총 지휘하거나 적의 동정을 살피는 곳입니다. 점장대에 우뚝 서서 산 아래를 내다보니 큰 호수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호수는 위에서 내려보면 마치 용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중국 사람들이 환용호라 부르며 무척 좋아한다고 합니다. 멋진 풍광에 감탄을 하고 있는데, 알고 보니 호수가 생기기 전에는 이곳에 수많은 고구려 무덤과 유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환인댐이 생기면서 모두 수장이 되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 홀본산성의 점장대에서 바라본 풍경
다시 산 정상 부위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 동쪽 성벽을 따라 걸었습니다. 동쪽 성벽은 절벽으로 된 자연 성벽과 돌로 쌓아 올린 인공 성벽이 번갈아 가며 함께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동쪽 성문에 다다르자 스님이 이곳 성문의 특징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 동쪽 성문
“이곳은 동쪽 성문입니다. 성벽이 이렇게 꺾어진 곳에 문을 내었는데 이것을 공(工)자형 성문이라고 합니다. 공자형 성문은 민자형 성문보다 여기저기서 공격할 수 있어서 성문을 방어하기에 아주 좋습니다. 옹자형 성문이 좋지만 산세 지형상 옹자형 성문을 쌓기가 어려우니까 공저향 성문을 쌓은 겁니다.”
동쪽 성문을 지나 조금 더 걸으니 곧바로 남쪽 성벽과 성문이 나타났습니다.
▲ 남쪽 성벽과 성문
“여기도 성벽이 하나 있는데 이건 남쪽 성벽입니다. 여기는 성문을 만들었다기 보다는 지나가는 통로 정도를 만든 것 같아요. 이것이 남문입니다. 보통 담장을 쌓으면 돌 하나가 떨어지면 우르르 무너지는데 돌을 맞물리게 쌓아서 하나가 떨어져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개이빨식으로 성벽을 쌓았어요.“
이렇게 홀본산성을 모두 둘러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길을 내려왔습니다. 공기가 맑고 시원한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참가자들이 쉬이 체력을 잃지 않도록 고려한 배려가 느껴지는 저녁 식사를 맛있게 먹고 환인 시내에 위치한 숙소로 들어왔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법륜 스님의 ‘민족의 시원’에 대한 역사 강의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조선, 단군, 홍익인간’의 단편적인 국사 지식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의 진정한 시원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시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뿌리는 세 나라로 내려왔는데 환인의 한나라는 우리 나라라고 하기 보다는 우리 나라의 뿌리에 해당합니다. 그럼 배달 나라는 우리 나라이긴 한데 혈통적으로는 선진 문명 종족이 이주해 와서 세운 나라이지 토착 세력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주민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서 토착세력이 왕이 된 것이 단군입니다. 그러니 단군은 혈통적으로도 진정으로 우리 민족의 시조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겁니다.
이렇게 9천년 전의 한나라, 6천년 전의 배달나라, 4천3백년 전의 조선 나라가 우리 민족의 뿌리입니다. 지금부터 약 2300년 전에 부여가 시작되기 전까지에 해당하죠. 이 발달된 문명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고기’입니다. 환웅 시대와 단군 시대의 옛날 이야기를 기록했다고 해서 ‘환단고기’가 됩니다. 단군 시대에 들어오면 지금 한글의 원형인 38자모의 가림토 문자가 이미 사용이 됩니다. 세종대왕은 옛날에 쓰던 가림토 문자를 보고 그 중에 28개를 갖고 우리말을 기록하도록 한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주시경 선생이 24개로 다시 만든 것이죠.
여기까지만 배워도 긴가 민가 할 수 있는데 이것의 유물이 발견된 곳이 있습니다. 요녕성 서쪽에 조양시가 있고 그 아래 객좌와 능원에 이 유물이 분포되어 있고, 외몽고 자치구의 접경 지대에 있는 큰 도시가 적봉시인데 여기에 홍산 문화라고 불리우는 유물이 대단위로 발견되었습니다.
중국의 천하제일 용이 나온 것이 5천년 정도 되는데 이 지역에서 7천년 전의 용이 출토되었습니다. 또 7천년 전의 마을이 발견되는 등 여기서 나온 유적들이 요녕성 박물관에 일부 전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면 ‘아, 우리 선조들의 문명이구나’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피라미드의 왕릉과 성곽을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축성술은 독특하고, 무덤도 이 지역 어떤 민족도 갖고 있지 않은 독특한 피라미드식 돌무지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위의 누구도 없는 고구려의 창조물이 무덤과 성곽인데, 그 무덤과 성곽의 연원이 지금으로부터 5천년 전부터 이미 이 지역에 있습니다. 그러니 고구려는 배달의 문명을 계승했다는 점이 유물적으로 확실합니다.
이런데서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이 다 중국에서 왔다고 하면서 중국 문명의 아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같은 이웃에 있지만 중국과 우리는 인종적으로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는 북방 몽골리안이고 중국은 남방 몽골리안입니다. 언어 문화적으로 우리는 우랄알타이어족이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대부분 차이나티벳어족입니다.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문명의 원류가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우리의 선진 문명이 언제부터 중국보다 뒤쳐지기 시작했느냐. 지금부터 약 2천년 전이예요. 3천년 전부터 중국에 주나라가 들어오면서 고조선 중기와 문명의 수준이 비슷해졌어요. 왜 이렇게 되었냐? 우리는 청동기 문명이 굉장히 발달했고 청동기 문명에 안주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철기를 생활화시키면서 양자강 이남을 개발하고 생산량을 급격히 늘여갔습니다. 그러면서 문명의 전이가 일어났습니다. 마치 요즘 미국이 중국보다 월등히 앞서다가 세력이 비슷해지다가 중국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중국으로부터 침공을 받았습니다. 한나라 군대가 침입해서 우리의 영토를 일부 차지한 것이 한사군입니다.
그래서 이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자고 일어난 것이 다물군이고, 이 다물군의 정신으로 건국한 나라가 고구려입니다. 중국의 한나라 이후, 고조선의 멸망 이후에는 계속 문명이 중국 쪽에서 우리 쪽으로 흘러들어왔지 우리 쪽에서 중국 쪽으로 흘러 들어간 예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역사를 2천년 만으로만 규정하니까 중국 문명을 계속 받아들인 역사가 되어 버립니다. 중국으로부터의 이런 문명적 열등의식을 극복하려면 상고사, 즉 민족의 뿌리에 대한 것이 공부가 되어야 하고, 이것이 되면 이제 여러분들은 적어도 고대사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열등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역사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역사를 우리가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잊어버렸다는 겁니다. 모르면 없는 것이 되는 거죠. 이런데서 우리가 이번 역사기행을 하는 이유는 그냥 책상 앞에 앉아서 고조선 얘기를 한다면 여러분들은 그저 신화를 듣는 것 같을 거예요. 그러나 여기 와서 고구려의 성곽을 발로 밟고 무덤을 보면 틀림없는 현실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런데 이것이 어디서 왔느냐?’ 하면서 계속 올라가면 민족의 뿌리를 찾게 됩니다. 그것은 배달 문명의 시작이고, 현재 우리의 뿌리에 해당합니다.
오늘은 홀본산성과 같이 지형 지세가 굉장한 것을 보았다면 여기에 기초해서 내일은 고구려의 유물과 유적을 충분히 둘러보고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해 보겠습니다.”
한국 외부에서도 한국이 중국 문화권이라고 말하고, 한국인들조차도 그런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역사를 뿌리부터 알게 되면 어느 때는 우리도 중국에게 문화를 전달했고, 어느 때는 중국도 우리에게 문화를 전달하는 상황이 있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알게 된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항상 중국 또는 다른 강대국에 대해 어느 정도의 열등감을 가지고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시각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루에 여러 유적지를 둘러보며 많은 설명을 듣기 때문에 사람마다 유독 마음에 다가왔던 부분이 다를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오늘은 3~4명의 조원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했던 것이 홀본산성에서 본 비류수입니다.
환인댐이 세워지면서 과거 고구려인들의 유물과 유적들이 통째로 수장된 모습을 높은 산 위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자신들의 유적이었으면 그렇게 취급했겠냐며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물에 잠긴 그 모습이 경치 그 자체로는 너무 아름다워 한숨이 나왔다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또 다른 친구는 홀본산성을 내려오면서 본 우물터와 천지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습니다. 우물터 근처 나무에 붉은 색 천이 화려하게 매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고구려 유적과는 상관없는 한인들의 문화라고 합니다. 우물터에는 그 붉은 색 천들과 색을 맞추듯이 화려한 색의 비단 잉어들이 살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우물터에 동전을 던져놓는 통에 잉어들이 동전 독을 피해 외딴 곳에 모여 뻐끔대는 모습이 마음 아팠다고 합니다. 산을 내려오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차 제대로 보지 못 하고 지나가기 쉬운데 이 친구들은 작은 생명도 눈여겨 보고 공감해 주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별 마음나누기를 마치면서 청년 동북아 역사 대장정의 1일차 일정도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도 어떤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될지 기대가 됩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 오늘 현장 스케치는 남현진님이, 사진 촬영은 권성준, 변지민님이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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