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8.8 동북아 역사기행 7일째, 백암산성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동북아 역사기행 7일째를 맞이하여 고구려의 요동성을 지키는 산성인 백암산성에 오른 후 7일 동안의 역사기행을 마무리하는 강연을 해주었습니다. 

 

지난 8월2일에 심양에서 출발한 동북아 역사기행은 7일 동안 고구려, 발해, 독립운동, 압록강, 백두산, 두만강을 달리고 달려 오늘 백암산성 답사를 끝으로 마치게 됩니다. 오늘도 어김 없이 숙소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난 기행단은 5시에 버스에 올라타 역사기행을 시작했습니다. 지금껏 한 사람도 늦는 사람 없이 정시 출발입니다. 이번 역사기행은 통일의병들이 주축이 되어 참여해서 그런지 뭔가 남다릅니다. 

 

버스에 올라타니 스님은 “잘 주무셨어요?” 하는 인사와 함께 “오늘은 먼 길을 가야 해서 점심을 식당에서 따로 먹을 시간이 없다”며 “새벽 시장에 내려줄테니 아침과 점심 먹을 것을 미리 사 두세요”라고 얘기합니다. 새벽에 비가 살짝 내렸기 때문에 시장에 사람들이 있을까 싶었지만 새벽 5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습니다. 죽, 과일, 빵 등 요기할 것들을 주섬 주섬 챙기고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 길림 새벽 시장 

 

길림에서 심양 근처의 백암산성까지 가는 길은 대략 7시간 정도 걸리는데 버스 안에서의 긴 시간을 활용하여 오늘도 즉문즉설이 진행되었습니다. 스님은 “스님께 묻고 싶은 점, 다른 사람에게 묻고 싶은 점, 역사기행을 통해 느낀 소감, 부르고 싶은 노래, 이 4가지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해보라”고 하면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 버스 안 즉문즉설

 

즐겁게 즉문즉설이 오가는 사이 오후1시가 다 되어서야 백암산성 입구에 당도하였습니다. 

 

송수신기로 스님의 해설을 들으며 남서쪽으로 빙 둘러친 성의 외벽을 돌았습니다. 처음에는 성벽 위를 걷다가 성벽에서 내려와 다시 성벽을 바라보니 그 웅장함에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스님은 성벽을 오르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성의 이곳 저곳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 백암산성

 

“이쪽이 서쪽 성벽입니다. 여기 성벽의 특징은 치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도 있다는 점입니다. 치라는 것은 사실 밖에서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쌓는 것인데, 안에도 치를 쌓은 이유는 아마도 성벽 위에서의 방어 면적을 넓히기 위해서 그런 것 같아요. 

 

치의 간격은 50m~60m 정도 됩니다. 이것을 보면 당시에 화살로 공격할 수 있는 유효 거리가 30m 정도 되지 않았겠나 싶어요. 성벽을 쌓은 돌은 전부 이 산에서 파낸 겁니다. 이 산이 돌산이거든요. 

 


 

저기 지금 발굴하고 있는 곳이 다 병영 자리입니다. 올라가시다 보면 오른쪽에 돌로 빗물을 모으기 위해 바위를 판 자리가 있어요. 병사들의 물 사용을 위해 거기에 빗물을 저장했어요. 저 아래에서 물을 들고 오기가 어렵잖아요. 산성은 반드시 우물을 확보해야 산성이 됩니다. 

 


▲ 빗물을 모으기 위해 바위를 판 자리

 

저기 위에 망대가 보입니까. 망대 주위가 내성입니다. 망대에서 남문까지 남북으로 480m입니다. 동서로는 440m입니다. 외성을 한바퀴 돌면 2km 정도 된다고 볼 수 있어요. 여기는 성벽이 있는데 저쪽 반대편에는 성벽이 없어요. 왜냐하면 저쪽편은 깍아지른 절벽이거든요. 

 


 

여기 보시면 7단까지는 피라미드식으로 쌓아올려서 안정성을 확보하고 그 위에서부터 일직선으로 쌓았죠. 외벽 바깥에는 회를 바릅니다. 회를 발라야 미끌미끌해서 기어오르기 어렵죠. 그리고 여기는 성벽 밖에 한 3m 정도 떨어져서 별로 높지 않은 작은 덧성을 또 주욱 쌓았어요. 해자를 못 만드니까 해자 대신에 덧성을 쌓은 겁니다. 적이 성벽 위로 기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죠. 

 

현재 고구려 성 중에 그 웅장함이 제대로 남아있는 대표적인 성입니다. 국내성도 파손이 너무 많이 되었고, 환도산성도 파손이 많이 된 것을 최근에 새로 복원한 것인데, 이 성은 원래 있던 그대로입니다. 얼마나 돌이 잘 맞물려 있습니까.”

 

돌멩이 하나 하나 마다 선조들의 숨결이 닿아 있을 터입니다. 조심스레 손끝으로 돌멩이를 만져보며 장구한 시간을 느껴봅니다. 스님은 성벽의 웅장한 모습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서서 대중들이 지나가는 순서대로 10여명씩 무리지어 기념 사진을 함께 찍었습니다. 

 


 

백암산성은 집안처럼 유적들이 무리지어 있지 않고 외진 곳에 있어서 혼자서 이곳에 다시 오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 다시 이곳에 와볼까 하는 심정으로 스님의 목소리, 발걸음, 시원한 바람,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더욱 또렷이 집중해 봅니다. 

 

성벽을 오르며 스님은 “우리가 이렇게 성벽을 밟고 다니는 것도 길게 보면 엄청난 파괴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번 올라갔다 내려올 때마다 돌멩이 하나는 굴릴 것 아니겠어요?” 라며 걱정스런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대중들도 조심스레 걸음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망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뻥 뚫린 남서쪽 벌판이 훤히 내려다 보여서 고구려를 향해 접근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보일 듯 전망이 탁 트여 있었습니다. 스님은 망대에 우뚝 서서 주변 사방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이것이 망대예요. 여기 와서 보세요. 사방으로 오는 적을 한눈에 딱 내려다 볼 수 있죠.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요양시가 있는데, 요양이 옛날에 요동성이였어요. 이 성은 요동성을 보호하기 위한 산성이예요. 요동성은 저기 산 보이죠. 저 산 넘어 뒤쪽에 있어요. 

 


▲ 망대에서 바라 본 전경

 

동쪽으로 흐르는 강 이름이 태자하입니다. 이 강은 흘러서 발해만으로 들어 갑니다. 동쪽은 강을 끼고 완전히 절벽이죠. 이 강을 동쪽 해자로 하고, 성벽은 남쪽과 서쪽, 북쪽으로 아주 튼튼하게 쌓았습니다. 주로 서쪽에서 적이 공격을 해 오므로 서쪽 성벽이 가장 두껍습니다. 남쪽은 절벽 위에 성벽이 쌓여져 있고요.” 

 

망대에서 바라 본 풍경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말 절경이였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성을 튼튼하게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성을 지키는 사람도 중요하다며 백암산성과 관련해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성을 몇 년도에 쌓았는지는 기록이 없고요. 547년에 성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리고 549년에 돌궐족 1만명이 침입했는데 함락을 못하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고요. 당태종의 공격으로 요동성을 함락되니까 이곳 성주가 자발적으로 항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시성의 양만춘은 끝까지 저항을 해서 결국 물리쳤죠. 이것을 보면 성을 얼마나 견고하게 쌓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이 성을 지키는 사람이 어떠냐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망대에 올라 탁 트인 시야를 보고 기뻐하는 대중들에게 스님은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마지막날 고구려의 기상을 많이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좀 쫀쫀하게 굴지 마세요. 아이들 성적이 좀 떨어지면 어때요? 아내와 남편에게도 너무 쫀쫀하게 굴지 마세요. 아시겠어요?” 

 


▲ 망대

 

모두들 “예!” 하고 크게 대답했습니다. 백암산성 망대에 올라서 광활한 만주 벌판을 보고 있으니 정말 가슴이 탁 트이면서 그동안 얼마나 작은 것에 연연하며 안절부절 했는지 돌아봐졌습니다. 이제는 통일 한국을 건설하는데 작은 정성이라도 보태어 보는 삶을 살아보겠노라 다짐하며 산성에서 내려왔습니다. 

 


 

성을 다 내려와 다시 마을을 빠져 나가는 길에는 다시 한 번 백암산성을 먼 발치서 볼 수 있었습니다. 깍아진 절벽을 한쪽 성벽으로 하고, 평지에 닿는 부분까지 외성이 둘러쳐져 있어 산성의 윤곽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그 크기와 웅장한 자태에 광할한 대륙을 지배하던 옛 고구려인의 웅장한 기상과 스케일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 멀리서 본 백암산성의 모습

 

백암산성을 끝으로 역사기행의 모든 일정을 마친 기행단을 위해 스님은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지 “심양으로 들어가는 길에 요동성을 한 반퀴 둘러보면서 가자”고 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스님은 “저기 오른쪽이 요동성이예요” 라고 알려주었습니다. 

 


▲ 고구려 당시 요동성이 위치했던 요양시. 

 

심양 시내에 있는 숙소에 도착한 기행단은 짐을 모두 내리고 내일부터 이 버스를 다시 이용하게 될 청년 역사기행팀을 위해 버스 안을 깨끗이 청소했습니다. 짐을 숙소에 풀고 곧바로 강당에 모인 대중들을 위해 스님은 “수고 많으셨다”고 격려해 주면서 7일 동안의 역사기행을 마무리하는 정리 강연을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먼저 기행 일정이 너무 빡빡했다고 하면서 혹시 빨리 움직이라고 재촉한 것이 상처가 되었거나, 개인 사진 찍자고 했는데 응해주지 않아서 서운했을 수 있다며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면서 독립군은 원래 쫓겨다니며 싸우는 것이라며 모두 웃고 넘어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여행은 좀 한가해야 하는데, 좀 빠듯했죠?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원래 독립군이 쫓겨 다니지 한가하게 다니겠습니까? 쫓겨 다니는 가운데서 마음을 한가하게 가져야 되는 거겠죠.” (웃음) 

 

원래 오늘 계획은 박물관에 가서 요하 문명의 유물을 보면서 전체 마무리를 할 계획이었는데 박물관을 이전하는 관계로 아쉽게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스님은 이런 아쉬움을 잠깐 언급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소중하다고 강조하면서 마지막 정리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유물과 유적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발로 밟아 볼 수 있으면서도 우리 민족의 기상을 갖고 있는 나라가 바로 고구려와 발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장에 와서 내 눈으로 이것을 확인하면서 도대체 이 문명은 어디서 왔고 어떻게 계승이 되어 갔느냐를 살펴보았죠. 

 

고구려의 문명은 부여를 계승했고, 부여는 단군 조선을 계승했고, 단군 조선은 배달 나라를 계승했고, 배달 나라는 자기의 연원을 환인의 한나라에 두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거슬러 올라가서 뿌리를 찾았고, 그 다음에 이 고구려와 발해의 문명은 어떻게 이어져 내려갔는가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문명이 내려가다가 끊긴 부분이 발해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제대로 이어가야 할 과제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지만 그 뿌리가 없는 문명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신라 문명입니다. 신라는 무엇을 계승했다고 하는 뿌리가 단절되었다면 발해는 후손이 단절된 경우입니다. 그 두 나라의 가교 역할을 한, 즉 위로도 잇고 아래로도 이어주는 것이 고려입니다. 그래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함으로 해서 후손이 없는 발해와 조상이 없는 신라를 건너뛰어 다 포함해 버렸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라도 잇고 발해도 이었습니다. 신라와 발해가 남북국 시대를 형성했지만 하나는 후손은 있는데 조상이 없고, 하나는 조상은 있는데 후손이 없는 이 간극을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하면서 이어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조선으로 이어지고 상해 임시정부로 이어져서 오늘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갈라졌는데, 여기서 또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하나는 후손이 없고 하나는 뿌리가 없는 이런 일이 또 발생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고려가 후손이 없는 발해와 조상이 없는 신라가 갖는 한계를 서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는 말씀에 모두 공감을 했지만, 마지막에 지금의 남북도 그런 위기에 처해 있다는 말씀은 큰 경종으로 들렸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역사 의식과 민족사관을 제대로 갖는 것은 지금 당면한 남북의 통일 문제를 풀어가는 올바른 해법을 제시해 줄 수 있고 미래의 희망을 만들어가는 일이 됨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통일의 문제를 다루려면 결국은 대한민국이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는 문제인데, 대한민국의 뿌리를 찾아가보면 장대한 민족사의 뿌리로서 연결되기에는 약간 부족함이 남아있습니다. 만약에 이것만 이어 가게 되면 우리의 역사적인 정통성이 위축되고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의 침략시기에 독립투쟁을 했던 부분을 그래도 비교적 많이 계승한 북한의 역사를 민족사에서 제외시킬 게 아니라 이것을 우리의 역사 일부로 받아들여주는 역사 의식이 필요합니다. 현실적으로는 대한민국이 이 문제를 중심에 놓고 풀어야 되지만 결국 북한을 포용해서 북한의 역사도 껴안아줘야 우리 역사의 상처를 치유해 낼 수 있습니다.

 


 

과연 이것을 우리가 해낼 만한 포용성이 있겠느냐. 또 그만한 역사 의식이 있겠느냐. 또 과거를 돌아봤을 때 신라와 발해가 겪었던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할 만큼 미래를 보고 이 문제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니면 현재 당면한 남북 간의 적대적인 이것만 보고 문제를 풀겠느냐 이런 문제죠. 그래서 남북은 현재 상태라면 따로 따로 오랜 기간 흘러갈 가능성이 높고, 또 통합을 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통합이 되느냐에 따라서 뭔가 결손이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통합이 되도록 해야 될 당면 과제가 있고, 통합만 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 통합이 상승효과를 가져 올 수 있는, 즉 민족사를 온전히 계승할 수 있는 그런 통합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남한의 정치 지도자가 얼마 만큼 또는 국민들이 얼마나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느냐 이런 문제죠. 

 

그래서 과거의 역사를 보면서 민족사관을 제대로 정립하는 것은 과거의 뿌리를 찾는 것 뿐만 아니라 미래의 희망을 만들어 가는 데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고려인들이 그런 역사의식이 없었다면 서희의 담판은 꿈도 꿀 수가 없는 일인데, 바로 그런 역사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서희의 담판이 승리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역사 의식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깊이 와닿았습니다. 더군다나 지난 7일 동안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면서 그 중요성을 더욱 체감했기에 스님의 말씀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배달 문명과 단군 조선 문명을 함께 살펴보았던 것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과거 환인 하느님의 한나라라고 하는 것은 꼭 우리 나라의 시작이라고 볼 수 없지만 우리 민족의 연원이고 원류라고 볼 수 있겠죠. 우리 민족의 시작은 하늘이 처음 열렸다고 하는 신시 개천, 즉 배달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배달 나라를 온전하게 계승한 것이, 즉 신시를 새롭게 하고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건국이념으로 재정립한 것이 단군의 조선 나라입니다. 이런 배달 나라와 조선 나라의 문명 수준은 발생 연대로나 문명의 수준으로나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라고 하는 곳들의 문명 수준 보다 앞섰으면 앞섰지 뒤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역사로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것을 증거 할 수는 없지 않느냐 했지만 그것은 바로 요하 문명의 유적이 발견되면서 해결되었습니다.  

 


 

요하 문명에는 고구려 무덤의 원형인 돌로 쌓은 거대한 피라미드가 가장 많이 남아있고, 고구려 유적은 1500~1600년이 지나면서 많이 파괴 되었는데 하물며 이것은 5000~6000년 전의 것이니까 어떻겠어요? 피라미드처럼 남아 있기는 어렵겠죠. 그러나 발굴을 몇 개 했을 때의 그 규모는 돌로 쌓은 7층 적석총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산성에 대해서는 석성을 쌓는 고구려 성곽의 독특함이 있는데, 이와 똑같지 않지만 성산자 산성이라고 하는데 산성의 흔적이 5천년 전 것이 남아있고, 또 적봉시 가까운 곳에 있는 큰 댐 때문에 많이 파괴가 되긴 했지만 치의 기본 형태를 가진 것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서 이것은 그냥 석기시대의 수준 갖고는 그런 규모의 무덤이나 성을 쌓을 수도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상당히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권력이 결집된 고대 국가의 형태를 이루어야만 이것은 가능합니다. 거기서 출토된 유물 중에서 특히 옥기는 그 정교함이 세계를 놀라게 할 정도입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우리는 배달 문명과 단군 조선의 문명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스님은 선비족의 연나라,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도 고조선의 구성원으로 품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며 역사를 보는 더 큰 시야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명은 마치 아리안족이 서쪽으로 간 서아리안과 동쪽으로 간 동아리아인이 있듯이 오늘의 유럽인이 있고, 서쪽인 하북성 쪽으로 내려간 집단은 은허라고 하는 곳에 수도를 정하고 은나라를 세워서 청동기 문명을 찬란하게 꽃피웠고, 이것은 중국 문명의 일부가 현재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일파가 동쪽으로 이동해 온 것이 요동 지역이죠. 그리고 그 일파가 약간 북쪽으로 올라간 것이 있는데, 북쪽으로 올라간 부여에 대해서는 조금 더 연구가 되어야 될 문제입니다. 역사적으로 단군을 계승했다고 하지만 문명의 이동 과정으로 볼 때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지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갈 일은 사실 없거든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가 인류학적으로 추정해 본다면 오히려 토착 세력의 일파가 단군 문명을 받아들이고 강성해져서 단군 조선의 혼란기에 단군을 계승했다고 보는 게 맞지 않겠나 싶어요. 

 


 

그들이 남하 해서 내려온 것이 고구려라면, 그것이 동쪽으로 내려간 것이 동부여가 됩니다. 그래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비석에도 주몽이 말을 타고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거든요. 어쨌든 이렇게 해서 서쪽으로 간 것은 은나라이고, 은나라가 멸망하고 중산국이라는 나라를 그 후에 재건해서 북경 근방에서 상당기간 존속한 그런 흔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후대가 끊겨 버렸어요. 그래서 우리 역사로 계승해서 계속 못 가고 중국의 역사 일부로 편재가 되었죠. 

 

다만 그 활동 지역인 북경 근처에는 우리 민족의 아래에 있던 선비족이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를 건국하고, 진나라에 멸망했다가 남북조 시대에 또 일어나 연나라를 만듭니다. 소수 민족으로 있던 나라 중에 가장 먼저 독립해서 제국을 구성한 게 선비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은나라, 중상국, 그리고 선비족의 연나라 이렇게 이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이 고조선의 영토 중 서쪽 일부를 한사군이 점령하게 되면서 원래 본거지에 내려와서 동쪽으로 이동해 온 것이 후기 고조선이고, 후기 고조선 중에 약간 북쪽에서 일어나서 이것을 계승한 것이 부여입니다. 그러나 부여가 고조선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는 의식이 적었기 때문에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의 후예인 고두막이 의병을 일으켜서 다물군을 조직해 한의 침략을 막아내고 부여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한 것이 북부여이고, 동쪽으로 이주시킨 게 동부여가 됐어요, 여기서 북부여와 동부여가 갈라지고, 주몽은 북부여의 후예라고 하지만 살기는 동부여에 살다가 다시 쫓겨나서 북부여로 와서 고구려를 건국한 것입니다. 주몽은 다물군에 참여했는데, 북부여를 계승했다는 것은 곧 다물 정신을 계승했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고구려는 조선 나라의 영토를 다 차지한 것이 아니라 그 영역에다가 한사군이 점령했던 영역의 일부와 새롭게 동쪽으로 확대해서 토착 세력이 차지하고 있는 많은 부족들을 정복해서 대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여기에 초기에는 위나라와 부딪혀서 관구검의 침입이 있었고, 그 다음에 연나라가 일어나서 연나라와 부딪힌 것이 모용왕의 침입입니다. 

 

결국 우리 민족의 중심 지역은 고조선 이후로 지금의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요서 지역에서 동쪽으로 더 치우쳐서 왔고, 서쪽으로 내려간 건 망했고, 본거지 영역은 다른 민족인 선비족이 차지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가 발해로 계승될 때는 또 동쪽으로 옮겨가서 토착세력인 흑수말갈까지 흡수해서 대제국 건설하기는 하지만, 백제는 남쪽으로 내려오고 신라가 부흥하면서 민족의 중심은 원 출발지에서 더 동쪽으로 치우치고 더 남쪽으로 점점 이동해 가는 이런 우리 민족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거지였던 이 지역에 힘의 공백이 생겼죠. 그 빈자리에 다시 일어난 것이 거란족입니다. 고구려 아래에 있던 거란족이 고구려 멸망 후에 발해에 약간 소속되어 있다가 그 빈자리에서 일어나서 요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말갈족은 고구려의 후예들과 연합을 해서 발해를 세웠다면, 거란족은 거기서 빠져나와 있다가 독립된 나라인 요를 건국하였고, 발해가 멸망하고 결국 말갈족도 여진족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다시 일어난 게 금나라입니다. 여진족들은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발해 멸망을 통해 고구려의 계승이 끊어지고, 남하해 내려온 백제가 신라에 통합되어 신라가 되고, 이 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결국은 중심지가 한반도로 국한이 되는 벌어지게 됩니다. 즉, 신라 시대에는 신라는 반도에 있지만 발해는 대륙에 있었는데 발해가 멸망하면서 결국 반도만 갖게 되고, 함께 발해를 유지했던 말갈족들이 여진족이 되어 금나라를 건국하면서 우리의 본 영토인 고조선의 옛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북방에 있던 몽골이 다시 일어나서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복속시키고 중국의 남송까지 정복해서 대제국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몽골족의 원나라가 일어났고, 그 전에 여진족의 금나라, 그 전에 거란족의 요나라, 훌쩍 더 뛰어서 그 전에는 선비족의 연나라가 일어났는데, 이런 나라들은 다 고조선의 민족 구성원들입니다. 소위 말하면 토착 세력에 속합니다. 이 배달나라와 고조선의 사람들은 선진 문명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예요. 여기에 토착해 있던 세력들이 이 문명을 전수받아서 동북아 대륙에서 차례차례로 제국을 건설해 나가게 되고, 소위 문명의 출발인 우리는 반도 남쪽으로 밀려 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나라들을 자꾸 중국이라고 말하는 것은 맞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됨으로 해서 우리 역사는 쪼그라 들고 중국의 역사는 자꾸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현재 모든 동북아 역사가 다 중국 역사의 일부가 되는 현상을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어요. 

 

거기다 고려를 계승한 조선은 자발적 사대를 했습니다. 고려는 민족 의식은 있었는데 힘이 부족했어요. 고려는 동북아에 있는 민족들이 강성해지면서 그 원을 성취하지 못했다면, 조선은 북방 민족이 아닌 한족인 중국에 대해 자발적 사대를 함으로 해서 우리 민족의 정기가 왜곡되었습니다. 이것은 일제의 침략을 받으면서 더 왜곡이 되고, 최근에는 서양문명이 들어오면서 민족의 정기 측면에서는 더욱더 위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스님은 우리가 역사기행을 하는 이유를 다시 강조하면서 시대적 과제인 통일을 향해 책임을 다하는 자세를 가져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물질적인 문명의 기술은 지금의 정도까지 회복을 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국력은 신라나 발해 멸망 이후 천년 만에 가장 좋아진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좋아진 상태가 지속되겠느냐? 아닙니다. 지속될 수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롤 모델로 삼은 미국이 점점 정체 국면에 들어 후퇴하고 있고, 또 중간 모델로 삼은 일본도 지금 정체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뒤따라 정체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래도 자기 토대를 갖고 있는데 우리는 최근에 중국의 경제 성장에 의해서 10년 넘은 정체를 겨우 면하고 경제 성장이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이 만약 저성장으로 가게 되면 우리는 바로 후퇴로 갈 위험이 굉장히 높습니다. 거기다가 미중의 경쟁에서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으로 우리가 편재되면 현재의 남한만 지키는 안보는 가능할지 몰라도 통일도 어려워지고 경제 성장도 굉장히 어려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에 가능했기 때문에 미래에도 계속 잘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만약 조금만 잘하면, 즉 이러한 성장을 좀 더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사실 통일이 없이는 불가능해요. 

 

통일은 어떻게 보면 돈이 드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새로운 투자처가 생기기 때문에 미국의 서부 개척처럼 이것은 당분간 성장의 동력이 됩니다. 투자는 돈이 부족하면 빌려서 투자하면 됩니다. 소비는 돈을 빌려서 하면 안 되지만 투자는 돈을 빌려도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 갖고는 안 돼요. 그래서 창조성이 사실은 핵심인데, 우리가 이러한 성장의 동력을 좀 유지하면서 대대적인 혁신을 해서 전체적인 창조성을 키우는 이런 사회 개혁을 해줘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해 놓은 여기에서 주저앉기에는 좀 아깝지 않냐. 이것을 더 끌고 나갈 수 있는 우리의 비전을 마련할 수 있는데, 그 첫 단계가 통일이고, 두 번째 단계가 동아시아 공동체이고, 세 번째 단계가 그것을 기초로 세계 문명의 중심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백 년의 계획을 우리가 설정해 볼 수 있습니다. 

 

가능성이 있느냐? 가능성이 있습니다. 필리핀이 이런 계획을 세우면 가능하냐? 그건 안 됩니다. 옛날에 우리가 이런 가능성을 세우면 되었느냐? 안 됩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 기회를 잘 살리면 그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정말로 우리가 우리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지금 조금만 노력하면 됩니다. 그러나 다들 개인생활에 빠져있고 분열해 있고 이런 것은 좀 안타까운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의 출발이 되는 통일을 첫 발로 내디더야 되고, 그 통일의 첫 발을 내딛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좀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즉, 남한만 어떻게 잘 하겠다 하는 이런 의식이 아니라 남한을 잘 지켜내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북한까지 포함해서 전 민족적인 전체 이익을 어떻게 지켜내고 확장할 거냐 이런 의식이 있어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난 70년 역사는 남한 지키기에 급급한 사고에 젖어 있기 때문에 민족 전체의 이익을 보는 관점이 부족합니다. 

 

또 너무 이웃과 싸우는 배타적 민족주의는 세계 문명의 조류와 안 맞습니다. 이웃 나라도 이익이 되고 평화도 공유하고 이익도 공유하는 그런 의미에 있어서의 열린 민족주의적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정체성은 갖되 다른 이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민족의식이 아주 부재하거나 아니면 아예 배타적 민족의식으로 주장합니다. 그래서  세계인이 봤을 때는 인류의 보편성에 떨어지는 주장을 하거나 아예 자기 아이덴티티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극복을 해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역사 기행을 하는 이유는 여행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얘기를 우리가 한국에서 앉아서 한다면 지식으로는 다가올지 몰라도 마음에 다가오기는 어렵고, 마음에 다가오지 않으면 행동은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는 결국 행동하자는 것인데, 행동을 하려면 마음이 동해야 되고, 마음이 동하려면 현장에서 보고 느꼈을 때 사람의 마음이 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돈을 들이고 아까운 시간을 내어서 역사기행을 하는 이유는 이렇게라도 우리가 방향을 잡아서 몸부림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시대에 책임을 다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일을 도모하는 건 사람이 하지만 뜻을 이루는 건 하늘이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역사 속에서 늘 후회하게 됩니다. 차 가고 손들기 식의 이런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먹는 것도 좀 부실하고, 자는 것도 부실하고, 시간에 쫓기기도 하고, 오늘 같은 날은 오줌도 제대로 못 누고요... (대중들 웃음) 이런 목표로 기행을 했다는 말을 다시 한번 드리면서 전체 일정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까지 정성을 기울여 바른 관점을 잡아주시는 스님께 대중들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이어서 역사기행을 통해 느낀 점을 정리해보는 소감문 작성 시간을 가졌습니다. 조별로 소감문을 함께 읽고 들으며 서로의 느낀 점을 공유하고 나니 역사기행을 더욱 풍성해진 느낌입니다. 

 


▲ 소감문 작성

 

자연스럽게 저녁 식사가 나오면서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해 지고, 스님은 “역사기행 실무를 맡아 준 조춘호 선생님께 소감을 들어보자”고 하며 송수신기를 넘겼습니다. 조 선생님은 “서먹서먹했던 얼굴이 벌써 정이 들었다” 며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이치”라며 시원섭섭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남북 통일”을 외치며 건배 제의를 하자, 대중들은 많은 뜨거운 박수와 환호를 보내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어서 각 차량을 담당한 차장들이 나와 기행단을 오지 시골마을 구석구석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준 운전 기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운전 기사들은 부끄러워서 앞에 나오지 못했고 조 선생님이 대신 선물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조별로 소감나누기를 한 후 추천된 소감문을 한 명씩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통일의병 교육을 받고 역사기행에 참가한 한 분은 밀림의 생명력을 느끼게 해 준 백두산 전경과 물속을 걷고 부서진 나무 다리를 건너며 독립군이 되어 본 청산리 전투터의 기억을 말하며 “일상으로 돌아가면 화내고 절망하기 보다는 통일을 위해 작은 기여라도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소감문 발표

 

또 어떤 분은 “황하 문명보다 2천년 앞선 요하 문명을 이야기해 준 스님의 역사 강의는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해준 가슴 뛰는 감동의 시간이었다”고 하고, 어떤 분은 “선비족의 연나라,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를 고조선의 구성원으로 품어 안자는 스님의 창의적인 역사관을 듣고 말할 수 없이 벅차 올랐다”고 소감을 나눠주었고, 또 어떤 분은 “좋은벗들의 난민 구호 활동 이야기를 듣고, 끊임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을 보면서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는 북한 동포들이 떠올라 목이 메어졌다”며 울먹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알려주려고 한 스님의 자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며 감사의 마음을 표했습니다.  

 

소감문이 한줄씩 읽어내려갈 때마다 대중들은 지난 7일 동안 함께한 시간들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고, 때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소감문 발표 후에는 해당 조의 사람들이 함께 나와 역사기행을 통해 느낀 점을 노래와 율동으로 표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7일 동안 금새 친해졌는지 조별로 기발한 아이디어로 노래를 개사하거나 율동을 준비해 와서 모두를 웃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특히 이번 역사기행을 통해  통일에 대한 열망이 무르익었는지 통일을 주제로 개사한 노래를 많이 불렀습니다. 

 


 


 

조별 발표를 모두 마치고 밤 9시가 되어 오늘 마지막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대중들은 그동안 역사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느라 조별로 대화를 많이 나눠보지 못했는데 삼삼 오오 모여서 조금 더 회포를 푸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역사기행의 마지막 밤이 저물었습니다. 

 

내일 역사기행단은 숙소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심양 공항으로 이동해 한국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그리고 스님은 계속 중국에 남아서 이번에는 청년 역사기행팀을 맞이해 다시 역사기행 안내를 시작합니다. 내일부터는 청년들과 함께하는 역사기행 소식을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체댓글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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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영자

정말 대단하신거같아요.소개로 유튜브에서 즉문즉설만듣다가 이런내용을 보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학교다닐땐 공부에 급급해 역사에 흥미를 가지지못했는데 나중에보니 역사를 바로아는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한일이라생각이되고 궁금해지기시작해서인지 이내용들이 정말 와닿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바로알고 통일이 되는것이 그렇게 좋은것은 아니라는생각만 가지고있었는데 다시 생각을해보게되는 시간이었습니다

2015-09-06 14:05:51

^^^^

방대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알게되어 안타깝기도 뿌듯하기도 합니다!백암산성도 참 이쁘구요^^스님 애 많이 쓰셨네요ㅠㅠ

2015-08-18 08:40:52

현광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br />한반도의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더 한층 굳건하게 하여<br />우리 대에서 남북 평화적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간곡히 기도합니다<br />험난한 기행길 스님과 대중일행 모두가 고생하셨습니다.<br />고맙습니다

2015-08-13 17: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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