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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드가야 대탑 참배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께서는 인도 달력으로 새해를 맞이하여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곳을 기념하여 세워진 보드가야 대탑을 참배하신 후 수자타아카데미로 돌아와서 인도JTS 사업에 대해 회의를 하셨습니다.
오늘도 새벽4시에 기상하여 전정각사 법당 안에서 새벽 예불 및 108배 정진을 함께 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인도JTS 활동가들의 우렁찬 염불 소리와 목탁소리가 고요한 둥게스와리의 아침을 깨웁니다.
▲ 새벽 예불
각자 맡은 구역에서 청소를 정성껏 한 후 6시에 다시 법당으로 모여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부처님의 일생과 가르침이 담긴 소심경을 외우며 발우를 펴는데 ‘부처님이 수행하신 바로 이곳에서 소심경을 읊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마음 속에 잔잔한 기쁨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 발우공양
스님께서는 발우공양을 마치고 대중공사 시간이 되자 “주연우님은 이번에 발우공양을 처음 해보는 거예요?” 물으신 후 “네” 라고 하자 “그럼 오늘부터 제가 발우공양 때 읊는 소심경에 대해 매일 강의를 조금씩 해드릴게요”라고 하시며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발우의 의미와 부처님은 왜 걸식을 하셨는가에 대해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발우’라고 할 때 ‘발’자는 인도말 ‘발다나’에서 온 것인데 ‘적당한 양을 담는다’는 뜻입니다. ‘우’자는 그룻 ‘우’자라고 해서 중국말입니다. 두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적당한 양을 담는다는 것의 의미는 수행을 하려면 이 몸이 살아있어야 하잖아요. 살아있기 위한 최소한의 양이 적당한 양입니다. 마음껏 먹는 양이 적당한 양이 아니고요. 몸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음식을 담는 그릇이라는 뜻으로 ‘발우’라고 부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걸식을 해서 밥을 드셨는데 ‘발우’의 의미대로 최소한의 양만 얻어 드셨습니다. 얻어 먹는데 고기를 줄리 만무하잖아요. 그래서 대부분 채식을 하셨지만 채식주의자는 아니였습니다. 왜냐하면 주는 대로 먹는데 채식만 요구할 수는 없잖아요. 계율에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맛에 탐닉하지 말라’는 계율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 와서 ‘고기를 먹지 마라’는 풍속이 생긴 것은 계율이라기 보다는 불교가 브라만교를 흉내내면서 ‘우리가 고귀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데서 전래되어 온 것이 아닌가 싶어요. 원래 브라만은 채식을 하였습니다. 남방불교 계율에는 ‘고기 먹지 마라’, ‘오신채를 먹지 마라’, 이런 계율은 없습니다. 이것은 브라만의 영향을 받은 대승불교의 전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던 우리는 전통을 계승해야 합니다.
그런데 불교가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중국은 걸식을 성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거지 취급을 했거든요. 그래서 중국에 선불교가 들어오면서부터는 절에서 밥을 해먹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밥을 해먹더라도 걸식의 정신은 살리자는 취지로 밥을 얻어먹는 것 같은 발우공양의 예식을 갖추었습니다. 밥을 배분하는 방식은 인도에서 잔칫날에 초대받아 가면 배분해주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음식을 만들더라도 걸식하는 모양을 갖추어서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그래서 발우공양의 가장 중요한 정신은 걸식하는 마음입니다. 수행자들은 걸식을 함으로써 당시 사회제도인 노예 계급에 의지하지 않고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정토회가 월급을 주는 고용을 하지 않고 자원봉사자로써만 생활하는 중요한 이유도 이 걸식의 정신과 같습니다. 이곳 마을의 주민들이나 선생님들이나 모든 사람들이 스님에 대해서 존경을 한다고 하지만 그 존경은 사실은 수행자에 대한 존경이 아닙니다.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 즉 사장으로서의 존경이죠. 자신들에게 월급을 주거나 생활을 도와주는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한국의 정토회에서는 적어도 수행생활에서는 일체 고용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을 갖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노예 계급의 사회 시스템 안에 살으셨지만 걸식함으로 해서 노예가 필요없는 삶을 사셨거든요.
신라 시대에는 사찰이 다 노비를 갖고 살았습니다. 부처님처럼 사회의 신분질서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죠. 아무리 유명한 고승이라고 해도 사회의 계급 질서 위에서 학문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지 모든 것을 초월한 수행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에 있는 모든 절도 마찬가지죠. 돈을 주고 노동자를 고용해서 생활하고 있잖아요. 우리가 수행의 원칙을 엄격하게 지킬려면 사람을 고용하면 안됩니다. 누군가에게 월급을 지불하면 그것은 사장이지 수행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인도는 우리의 수행 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병원과 학교를 운영해야 하다보니까 그 원칙을 못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한국에서는 철저하게 원칙을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절에서 노동자에게 인건비를 적게 주면 나쁜 주인이고, 인건비를 많이 주면 좋은 주인이 됩니다. 나쁜 주인과 좋은 주인의 차이만 있지 수행자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인도에 있으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일체 법문을 안하는 이유도 제가 이 사람들에게 수행자로 다가가지 않으면서 불교를 가르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떤 좋은 말을 해도 돈을 주고 그 돈을 받아서 주민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노동자와 주인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 시스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큰 과제입니다.
부처님은 이 시스템에 관계되는 일은 아무리 효율적이라고 해도 하지 않으셨거든요. 부처님이 바라나시로 가기 위해 강가강을 건너실 때 사공에게 “배를 좀 태워주겠는가?”라고 묻자 “네”라고 하면서 “돈을 주십시오” 하자 부처님은 그 배를 타지 않으시고 날아서 건너셨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지난 20여년 동안 제가 이곳 사람들에게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얘기를 했지만 수행법을 잘 얘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직 관계가 도반의 관계로 정립이 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에 이곳에 학교를 세울 때는 돈을 주고 받는 개념은 없었거든요. 마을 사람들도 다 자원봉사로 와서 함께 일을 하고 식량을 가져갔는데, 제가 한국에 다녀오는 사이에 이것을 월급 주는 개념으로 바꿔놓아 버렸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환원시키기가 어려웠어요. 학교를 유지할 때도 100% 자원봉사자로만 운영을 했는데 지금은 학교를 유지하는데 고용된 사람들이 10명 이상 이거든요. 물론 우리 생활을 위해서 고용한 건 아니예요. 우리 생활을 위한 고용은 지금도 절대로 허용될 수 없습니다. 학교와 병원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용인이 되고 있는데, 그러나 적어도 불법을 전파하려면, 그리고 공동체를 유지하려면,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건지가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어디까지를 수행공동체로 하고, 어디까지 자본주의 시스템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요. 적어도 상가 안에는 절대로 자본주의 시스템을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그러면 상가는 대중의 존중을 받는 조직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모든 절이 자본가로 전락했습니다. 공양주, 운전수 모두 고용된 사람들이잖아요. 우리의 모든 목표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기준으로 해서 그 부족함을 반성하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부처님이 걸식을 하신 이유는 그 당시에 노예제 시스템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걸식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음식은 걸식을 하고 옷은 주워서 입고 잠은 나무 밑에서 자지 않는 이상 노예제 시스템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적어도 상가 만큼은 그 시스템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상가는 중생으로부터 존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시스템에 구애받지 않고 살으신 분들이기 때문에 그것만 갖고도 존중받을 만한 존재들이였습니다.”
부처님이 노예제 시스템을 벗어나 걸식을 하셨듯이 정토회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벗어나 자원봉사자로 구성하고 있다는 말씀이 큰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어렵지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 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스님의 깊은 뜻을 배울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발우공양을 마치고 스님께서는 “오늘은 인도 달력으로 신년 초이기 때문에 보드가야 대탑을 참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신 후 “또 푸자 기간이라 운전사도 쉬어야 하니까 가능하면 사람을 고용하지 말고 우리 힘으로 다녀옵시다” 하시면서 대탑까지 걸어서 다녀오자고 제안하셨습니다. 모두들 “네”라고 크게 대답하고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습니다.
▲ 걸어서 수자타아카데미에서 보드가야 대탑으로 향하는 길
아침 7시20분에 수자타아카데미를 출발한 스님 일행은 전정각산 아래의 두르가푸르, 방갈비가, 만코시힐, 모라탈 마을을 지나 부처님이 고행을 그만두고 네이란자라강에서 목욕을 하시다가 쓰러지셨다고 하는 곳에 세워진 탑터를 먼발치서 보면서 수자타 마을을 지나갔습니다. 논두렁길을 걷다 보니 수자타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고 하는 곳에 세워진 탑과, 수자타의 집터에 세워진 탑을 먼발치서 볼 수 있었습니다.
▲ 부처님께서 쓰러지셨다고 하는 네이란자라강
그리고 인도정토회가 명상센터 부지로 구입해 놓은 곳 앞에서 잠시 휴식을 하였습니다. 이곳에 명상센터가 지어지면 참 좋을텐데 아직은 여력이 없어서 부지만 구입해 놓은채 계속 시간이 흘러가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 뒤에 담벼락으로 둘러쳐진 부분이 인도정토회의 명상센터 부지
▲ 논두렁길
구불구불한 논두렁 길이 끝나자 보드가야로 넘어가는 긴 다리가 나타나고, 저 멀리 뾰족하게 ?은 보드가야 대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 다리가 나타나자 왼쪽편에 뽀족하게 생긴 대탑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오전 10시 쯤에 보드가야 대탑에 도착한 스님 일행은 대탑 앞에 서서 사시예불을 올렸습니다. 3월의 뜨거운 뙤양볕이 내리비쳤지만 모두들 아랑곳하지 않고 정성껏 새해 맞이 기도를 했습니다. 사시예불을 올리며 스님께서는 인도JTS 활동가들을 위해 발원과 축원을 함께 해주셨습니다.
▲ 보드가야 대탑 앞에서 사시예불
“2015년 인도의 새해를 맞이하여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마가다국의 보드가야 대탑을 참배하며 발원하옵나니 저희의 발원을 성취되게 하옵소서.
저희 대중 일동은 전정각산 산하 전정각사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자원봉사하는 정토행자들로서 가난한 이의 복전이 되고자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병든 이에게는 약품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배움의 터를 제공하는 등 가난하고 괴로운 이를 돕기 위하여 이와 같이 보살행을 하고 있으니, 이들 대중들의 수행정진을 제불보살님들은 증명하여 주옵시고, 이들 행자들의 발원이 성취되고 수행정진이 깊어지고, 보살피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행복하도록 천룡팔부 신중님들은 옹호하여 주옵소서.
▲ 새해를 맞이하여 인도JTS 활동가들을 위해 축원을 해주시는 스님
이와 같이 수행정진하는 동안 모두 건강하고 심신이 강건하여 세운 원이 성취될 때까지 물러서지 않는 불퇴전의 용기로 용맹정진 하기를 발원하옵나니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과 대원본존 지장보살님께서는 본래 서원 어기지 마시고 이들 행자들을 잘 보살피고 옹호하여 주옵소서.
이와 같이 정초에 부처님이 성도한 마하보디 수투파를 참배하고 발원한 인연 공덕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오니 일체 중생들 모두 이고득락 하게 하옵시고, 이 모든 공덕 먼저 돌아가신 조상 영가님들께 회향하오니 유주무주 모든 고혼들 왕생극락 하게 하옵소서.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스님의 간절한 발원과 축원을 들으니 더욱더 마음이 모아지고 기운이 솟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스님께서 직접 축원을 해주셨으니 올 한해는 정말로 인도JTS 활동가들 모두가 부지런히 수행정진 하는 보람찬 한해가 될 것 같습니다.
대탑 주위에는 태국, 스리랑카, 티벳에서 오신 스님들과 불자들이 많이 있어서 스님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탑 남쪽 편에 인적이 드문 나무 그늘 아래로 이동해 앉았습니다. 스님께서는 이곳에 처음 와본 9기 행자님들을 위해 보드가야 대탑에 대한 설명과 부처님의 수행, 성도와 교화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셨습니다.
▲ 보드가야 대탑 옆에서 부처님의 일생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계신 스님
“부처님께서는 카필라바스투에서 출가하신 후 남동쪽으로 내려오셔서 라즈길(왕사성)에 이르러 스승을 찾아 정진을 하셨습니다. 그 스승의 경지까지 이르렀지만 그 경지가 해탈의 경지가 아님을 아시고 스승 곁을 떠나서 이곳 가야 근교의 둥게스와리에 오셔서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용맹정진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시자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셨습니다. 세속에 있으면서는 욕구를 쫓아 갔고, 출가해서는 욕구를 억압하는데 급급했음을 자각하고, 쾌락과 고행을 떠난 제3의 길 ‘중도’를 발견하시고 전정각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강가에서 목욕을 하시고 쓰러지셔서 떠내려 가다가 나뭇가지를 잡고 강변으로 기어올라와 있는데 소에게서 우유를 짜러 나온 ‘수자타’ 라는 소녀가 그 쓰러진 그 수행자를 보고 우유에 쌀을 갈아 넣은 유미죽을 만들어서 공양 올리자 부처님께서는 다시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강을 넘어오셔서 이곳에 있는 큰 보리수 나무 아래에 앉으셔서 마지막 정진을 하셨어요. 마침 풀을 베고 있던 목동에게 길상초를 얻으셔서 한아름 깔고 49일 동안의 용맹정진 후에 마왕의 유혹을 물리치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인도 달력으로 2월 보름에 성도한 것으로 전해져 내려 오고 있습니다.
성도 후에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나무 아래의 그 자리에 앉아서 일주일 간 깨달음의 기쁨을 만끽하셨고, 두 번째 주에는 앉았던 보리수 나무를 응시하면서 일주일 간 정진을 하셨어요. 세 번째 주에는 열아홉 발자욱을 왔다갔다 하면서 행선을 하셨습니다. 네 번째 주는 가만히 앉아 있는데 몸에서 빛이 나는 방광을 하셨어요. 다섯 번째 주는 어떤 바라문이 지나가다가 부처님을 만나서 “이 세상에서 제일 고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니 부처님께서 “마음이 청정한 자가 가장 고귀합니다” 했더니 그 바라문이 “흥” 하고 콧방귀를 끼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여섯 번째 주는 이 지역에 홍수가 나서 이곳이 다 물에 잠겼나 봐요. 일주일 내내 비가 쏟아져서 큰 용왕이 부처님 몸을 보호했다고 해요. 일곱째 주에는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데 두 명의 상인이 지나가다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서 성도 후 처음으로 식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이 좋은 법을 혼자 간직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나눠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으셨어요. 그러나 이 법이 너무나 미묘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쉽게 알아듣기가 어렵다고 보신 것 같아요. 당시에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이 있고 유한한 인간은 그 무한한 신에게 제사를 지내서 복을 구하는 것이 모든 신앙 형태였어요. 그러나 부처님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나 밖의 어떤 특별한 존재가 없다. 그런데 왜 인간은 이렇게 고뇌하는가. 이것은 무지에 의해 형성된 까르마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이 무지를 타파하게 되면 모든 고뇌에서 벗어난다” 라고 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설도 부정되고 인간계급설도 부정되고 제사를 지내는 종교의식도 다 필요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남녀의 평등, 계급의 평등을 말씀하셨고, 오직 수행정진을 통해서 해탈하는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지금은 불교마저도 불법을 버리고 다 종교화 되어 버렸는데, 그 당시에 이것을 듣고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은 어려운 일이였어요. 깨닫는 것도 어렵지만 이것을 남에게 얘기를 하게 되면 더 저항을 받게 되니까, 경전에서는 마왕이 “법을 설하지 말고 혼자 열반에 들어라” 하고 유혹하는 장면이 나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범천이 “그렇지 않다.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지만 그래도 이 좋은 법을 만나면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하고 권청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법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두 분의 스승을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 분들은 이미 돌아가시고 없었어요. 다음으로 생각한 것이 전정각산 아래에서 자신과 함께 정진했던 다섯 도반들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옛 친구들과 깨달음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여기서 보름 동안 걸어가셔서 바라나시 근교의 사르나트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섯 도반들 다음으로 구리가 장자의 아들인 야사 비구를 교화하고 그 친구들 55인을 교화해서 총 60명을 모아 놓고 “나는 모든 신과 인간의 굴레로부터 벗어났다. 너희들도 해탈을 얻었다. 자, 이제 전법의 길을 떠나거라” 하는 전법 선언을 하시고 이곳 가야로 오셨습니다. 우루벨라 가섭과 500명의 제자들을 교화하고, 나디 가섭과 300명의 제자들, 가야 가섭과 200명의 제자들까지 총 1000명을 교화해서 가야산에서 탐진치 삼독의 불을 꺼라는 설법을 하셨습니다. 자신들이 신성시하는 불을 섬기던 제사 도구들을 다 강에 버리자 부처님께서 “너희들은 이제 불을 섬기는 것은 버렸다. 그러나 마음 속에 탐진치 삼독의 불은 아직 꺼지지 않고 타고 있으니 그 불을 꺼라” 고 하는 불의 설법을 가야산에서 하셨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가 있는 곳은 부처님이 6년간 수행한 자리이고, 이곳은 성도한 자리이고, 우루벨라 가섭과 나디 가섭과 가야 가섭이 있었던 곳은 교화한 자리입니다. 그 1000명이 교화되었기 때문에 왕사성으로 들어갔을 때 빔비사라왕을 교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는 수행, 성도, 교화 세 개의 성지가 다 있는 곳입니다. 대부분 성도한 자리인 이곳만 보고 가는데 이것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성도한 자리가 소중하지만 실제로 부처님의 모든 수행은 전정각산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곳도 무척 중요합니다. 물론 성도한 자리도 정말 소중하고요.
그래서 저희가 신년초에 이곳에 와서 참배를 한 것입니다. 오늘 참배를 했으니까 내일부터는 각자 업무를 맡아서 열심히 일을 합시다. 이 기운을 받아서 올해 1년 동안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500여명의 대중들을 이끌고 성지순례 안내를 해주시는 스님께서 오늘은 10명 남짓한 젊은 청년들을 위해서 성지 안내를 해주셨습니다. 한명이든 오백명이든 정성을 다해 이야기해주시는 스님의 모습을 보며 ‘스님께서는 항상 지금 여기에 깨어있으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스님의 설명을 다 듣고, 다함께 대탑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어서 스님께서는 부처님께서 성도 후에 7주 동안 머무셨다고 표시되어 있는 곳을 하나 하나 안내해 주셨습니다. “이곳은 두 번째 주에 보리수 나무를 응시했던 곳이예요”, “이곳은 세 번째 주에 열아홉 발자욱을 행선하신 곳이예요” 등 스님의 안내를 들으며 대탑 주위를 모두 둘러 보았습니다.
▲ 부처님께서 성도 후 세 번째 주에 열아홉 발자욱을 행선하셨다는 곳
특히 오늘은 태국에서 많은 스님들이 오셔서 한줄로 차례대로 줄지어 대탑을 참배하고 가시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였습니다. 한가지 색깔의 가사와 가방을 깔끔하게 맞춰 입고 행선을 하셨는데 스님께서는 “태국에도 아직 이런 좋은 스님들이 많이 있으시네” 하시며 관심있게 지켜보셨습니다.
▲ 줄을 맞춰 행선을 하시는 태국 스님들
대탑을 참배하고 나서는 주위의 식당가로 가서 국수와 수제비, 볶음밥, 만두를 함께 먹었습니다. 그리고 인도JTS에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1년 전에 회향을 한 김정준님과 정수진님이 얼마전부터 가야에 머물고 있어서 오늘 스님께서 보드가야에 오신다는 소식을 스님의 하루를 통해 읽고 인사를 하러 찾아왔습니다.
▲ 점심 식사
스님께서는 식사를 함께 하면서 또 보드가야에서 수자타아카데미로 들어오는 길에 김정준님과 최근 가야 인근 지역의 변화된 모습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 가야의 변화된 최근 모습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있는 김정준님
그리고 수자타아카데미로 다시 들어가는 길에는 부처님께서 바라나시에서 전법 선언을 한 후 가야로 돌아와서 나디 가섭을 교화한 곳이라고 추정되는 유적지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지금은 힌두교 유적지로 이용되고 있었지만 스님께서는 “경전 기록과 지도 상의 위치로 보면 여기가 아마도 나디 가섭이 수행하던 곳인 것 같다” 고 알려주셨습니다.
▲ 부처님께서 성도 직후 교화한 나디 가섭의 수행터에 세워진 탑
나디 가섭의 탑 앞에는 커다란 반얀트리가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서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습니다.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니까 그늘과 그늘 아닌 곳의 온도차가 매우 컸습니다.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일어서서 수자타아카데미로 향했습니다.
오후3시 무렵 수자타아카데미에 도착한 스님 일행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내일 인도인 스텝들과 함께 떠날 봄소풍을 준비를 함께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한국에서 온 이메일과 원고를 체크하시면서 업무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저녁7시부터는 인도JTS 활동가들과 함께 사업논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3월21일까지 스님과 함께하는 일정에 대해 꼼꼼하게 다시 점검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마을 개발을 어떻게 할지, 학교 운영을 어떻게 할지 등에 대해서 스님께서 생각하시는 구상을 들려주셨습니다.
“앞으로 행자들이 많이 들어오게 될텐데 대중들이 더 많아질 경우에 대비해서 건물 전체에서 대중방을 어디에 새로 마련하는 것이 좋을지 연구가 좀 되어야 합니다. 제일 좋기는 기숙사로 옮겨가면 부엌 시설도 넓고 좋은데, 이곳 게스트하우스 내의 창고 자리는 여름에 습기가 차고 물이 새는 문제가 있거든요. 한번 체크를 해보세요. 기숙사 곳곳을 둘러보고 공간 사용을 어떻게 할지 연구가 필요합니다.
▲ 인도JTS 사업논의
그리고, 학교 안에 정원을 어떻게 정비할 것인지, 나무를 베거나 심거나 내부 정비를 어떻게 할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학교 외벽에 부처님의 일생이나 전정각산 고행과 관련된 그림과 경전 문구를 어떻게 그릴지 정하면 좋을 것 같고요. 또 학교 정문 옆에 불교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게를 어떻게 낼지 방안을 정해야 할 것 같아요. 그 다음에 학교 뒤쪽에 땅 구입을 어떻게 할지 살펴봐야 합니다.
장기적으로는 인도인 스텝들의 집을 지어주자는 제안도 있었는데, 젊은 스텝들은 월급을 많이 못주는 대신에 아예 집을 괜찮게 지어주는 것도 검토가 필요할 것 같아요. 자원봉사 선생님들을 아예 생활비를 지급해주는 시스템으로 가게 될 경우 생계를 평생 보장해줘야 하는 문제가 되어서 간단한 문제는 아니예요. 공동체로 가야 하거든요. 꼭 출가해서 들어오는 공동체가 아니라 결혼해서도 공동체로 지낼 수 있도록, 그래서 교사의 부인들도 유치원 선생을 하든가 일정한 역할을 하게 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아요. 아니면 교사의 부인들이 직업을 가질 수 있게 해서 오히려 교사의 부인들이 약간의 수입을 갖고 교사들은 봉사자로 참여할 수 있게 한다든지, 이렇게 우리의 전체 사업이 갖는 공동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일단 마을 인구 현황이 담긴 카드 발급 문제는 빠른 시일 내에 마무리를 지어야 합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마을마다 총 여섯가지 부류를 조직해야 합니다. 첫번째는 우선 35세 미만의 결혼해서 애기가 있는 남자들을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고요. 그 나이의 아기 엄마들을 부녀회로 조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15세에서 25세 사이에 2차 결혼을 아직 하지 않은 애기를 갖지 않은 남자와 여자들을 각각 조직해야 합니다. 세 번재는 35세 이상 50세 미만의 장년 조직이 남자와 여자 각각 필요합니다. 이렇게 여섯 개의 조직을 각 조직마다 최소 10명 정도씩 한 마을에 총 60명을 조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먼저 조직하면 앞으로 마을금고와 공동구매를 본격적으로 진행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총 15개 마을에 60명씩 조직을 하면 총 900명이 됩니다. 이렇게 1000명 정도가 조직이 되면 1000명의 필요성에 따르는 건축 자재든 공산품이든 제사 음식이든 공동구매해서 배분해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릇계중’처럼 조직 단위로 그 연령대에 맞는 필요 물품들이 있다면 공동 사용 물품을 지원해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택 조합을 구성하게 되면 이들이 다 주택조합원이 될 수 있습니다. 기본설계는 같이 하지만 추가로 더 필요한 것은 자기들이 내게 하든가 용자를 내어 주든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동네마다 우물을 열 집 마다 파주기 위해서는 몇 년 계획을 세워 어떻게 하자는 등 이런 설계들을 주욱 해나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의논을 상시적으로 하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현재의 마을 리더들은 영향력이 없잖아요. 이렇게 실질적으로 생활에 관계된 것을 풀어나가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요.
청년회 조직은 크리켓 대회를 한다든지 축구 시합을 한다든지 해서 활성화 할 수 있는데, 두 개 마을 당 1개 정도의 축구장을 빈터에 마련해 주면 좋을 것 같아요. 개인이 쓰는 게 아니라 청년회에서 관리하도록 하면 되거든요. 여자들은 그 나이에 글 모르는 사람들이 있으면 가르쳐주고요.
미리 조사를 해서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못 올라가는 아이들은 두 가지 길이 있는데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기술 노동 훈련을 시켜줘야 하고, 공부는 좀 하는데 집이 가난해서 진학을 못한다면 사무직 노동 훈련을 할 수 있게 해주고요. 그래서 컴퓨터를 구비해서 사무 교육과 청소하고 심부름 하는 행정 업무를 보조할 수 있는 훈련을 좀 시켜주면 좋을 것 같아요. 1~2년 간 학교와 병원에서 근무하게 하면서 교육을 시켜주고 약간의 용돈도 주면서 장기적으로 취직을 시켜줄 수 있게 해준다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인도가 앞으로 발전을 하게 되면 전화도 받고 서류 정리도 해주는 사무 보조자들에 대한 수요가 굉장히 많아질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미리 교육을 시켜놓아서 ‘우리 아이들을 데려가면 일을 잘한다’ 하는 소문이 나도록 훈련을 시키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요.
초등학교는 정부 학교가 있으니까 앞으로는 유치원을 강화시켜야 할 것 같아요. 유치원 교육과 시설을 보완하고, 건물 리모델링을 하고, 유치원 선생을 더 보완해서 문맹 퇴치를 하고, 초등학교는 대부분 가까이에 있는 정부학교로 기본 배치를 하고, 자그디스푸르와 두르가푸르, 방갈비가, 세 군데 마을만 수자타아카데미에서 관장하고요. 중학교는 확실하게 직업학교로 전환을 하고요.
다른 하나는 아예 리더를 키우는 고급학교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 컴퓨터도 가르쳐주는 등 가야에서 괜찮은 사립학교가 되도록 하는 방법도 있어요. 다른 지역에서 오는 아이들은 숫제 학비를 받고 입학을 시키고요. 우리 마을 출신들은 시험을 쳐서 성적이 되면 장학금을 줘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하고요. 선생님도 시간 강사들을 다 불러서 영어나 외국어 등을 제대로 가르치게 하고 강의료를 주는 방법도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술체육학교로 만들면 어떨까 싶어요. 철저하게 춤, 노래, 무용, 체육 이런 것만 전문적으로 가르쳐서 아이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 하면 좋겠어요. 어차피 대학에 못갈바에야 이런 기능이라도 있는 것이 낫잖아요. 필요하다면 상카시아나 가야에서 행사 있을 때 공연도 하고, 태권도를 강화하거나 축구도 마을별로 리그를 만들고 강팀을 하나 만들어서 대회에 내보낼 수 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굉장히 강하게 자라서 체육을 하면 오히려 괜찮을 것 같아요. 아이들이 기를 못펴고 사는데 유명한 선수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선 자긍심을 가질 수 있잖아요. 이렇게 예체능계로 학교를 만들고, 마을 사이에 규격 축구장을 만들어줄 수도 있습니다. 인도 전통 예술을 잘 가르쳐서 전세계로 공연도 하고요. 아이들이 춤에 재미를 붙여서 죽기 살기로 연습하면 한국의 K-POP 못지 않게 될 수도 있어요. (웃음)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미리 조사를 해서 성적이 나쁘면 일반 학교를 보내면 안되고 기술 노동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또 학습능력은 있는데 집이 가난해서 상급학교로 진학을 못한다고 한다면 이런 아이들은 바로 직업학교를 보내면 좋습니다. 그렇게 해서 15살이 되면 바로 취직을 시키면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잘 할 수 있는 걸 가르쳐야 하거든요. 우리 아이들은 인문계 공부는 안 될 것 같아요. 공부는 내내 가르쳐봐야 어차피 공무원 시험을 쳐서 합격해도 뒷돈을 줘야 하기 때문에 공무원이 될 수가 없으니까 다 룸펜이 되거든요. 공부을 안 가르쳤으면 그냥 노동해서 밥 먹고 살텐데 수자타아카데미 나와서 대학까지 나왔는데 취직은 안되고 농사도 안짓고 룸펜이 되어서 마누라 애만 먹이고, 또 소비 수준은 높아져서 핸드폰도 가져야 하고, 자전거도 가져야 하고 이러니까 골칫거리가 됩니다. 물론 열명 중에 한두명은 잘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체 마을을 살려야 되기 때문에 이런 방식은 옳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유치원 선생은 앞으로 부녀회에서 맡아도 됩니다. 이제 부녀회에도 수자타아카데미를 졸업한 사람들이 많아졌잖아요. 그래서 유치원 선생은 동네에 시집 와 있는 ?은 여성들에게 맡기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학교나 고등학교 나와서 시집 안 가고 집에 있는 여자 아이들을 모두 유치원 선생으로 맡겨도 됩니다.
직업학교는 실제로 주민들을 위한 것이고, 예술학교는 장기적으로 둥게스와리를 대외적으로 알리고 사람들에게 자긍심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고급학교는 하나의 브랜드 이미지인 간판 역할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급학교의 이미지가 좋아지면 직업학교도 이미지가 좋아지게 되는 것이거든요. 유치원 운영만 잘 하면 이제 우리가 굳이 초등학교 운영은 안해도 될 것 같아요. 또 정부가 계속 학교를 짓고 하니까 굳이 중복된 투자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어요.
그리고 출가한 사미승들을 받아서 사미 학교를 기숙사에 겸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필요하면 건축을 더하는 것도 검토해야 하고요. 그러나 현재 있는 시설만 갖고도 지금 얘기한 것은 다 가능할 것 같아요. 초등학교를 모두 정부학교로 보내면 교실이 많이 남거든요.
이렇게 20년 후에 인도가 어떻게 변할지를 예측하고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굶어죽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글 모르는 사람들 가르쳐주었다는 것은 20년 후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20년 후에는 인도 사회 전체가 다 문맹퇴치가 될 것이거든요.
문맹 퇴치를 위한 교육은 유치원에 초점을 맞춰주고, 초등학교는 정부학교로 역할을 넘겨주고, 수자타아카데미는 예술학교와 고급학교로 조금 더 가르쳐주는 학교로 전환하고, 중학교는 직업학교로 만들고요. 운전이든 컴퓨터든 자전거든 중학교 때 배워야 몸에 익숙해집니다. 나이 들어서 배우면 몸에 익지는 않습니다. 공부는 어학이나 기술 같은 실용적인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이런 큰 틀에서 고민을 더 해보면 좋겠다 싶습니다.”
이렇게 2시간 30분 동안의 사업논의를 통해 마을개발과 학교 운영에 대한 큰 틀의 방향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이렇게 큰 방향을 일러주시자 각 담당자들은 그에 맞춰서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조금씩 공감대를 만들어 갔습니다. 스님께서는 앞으로 마을 리더들, 학교 교사들과 미팅을 더 가지시면서 실제로는 어떻게 가능할지 더 검토해 보시기로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업논의를 마치니 밤9시가 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내일 인도인 교사들과 라즈길 소풍을 가는데 코스를 어떻게 잡을지 구글 지도를 보며 더 논의를 하신 후 최종 코스를 확정짓고 오늘 일정을 마치셨습니다.
내일은 인도인 교사들과 함께 라즈길로 소풍을 다녀올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 때에 배워야 합니다. JTS가 인도 둥게스와리 아이들을 위해 펼치고 있는 기아, 질병, 문맹 퇴치 활동에 함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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