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4.5.29. 용성진종조사 탄생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

스님께서는 오늘 새벽 1시가 넘어서 서울에 도착하셔서 휴식을 취한 후, 아침 730분부터 종교인 모임에 참석하셨습니다.

     

종교인 모임에서는 세월호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을 위한 진상규명, 재발방지, 재난경고에 대해 국민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사고가 나게 된 우리 사회 전반의 성찰의 몸짓이 다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라는 공감이 컸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대책은 민심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진단이 많았습니다. , 종교인들이 무언가를 한다해도 여야, 진보보수의 진영논리에 갇혀 본심이 왜곡되고 선거전략으로 오해될 수 있으므로 6·4지방선거가 끝난 뒤에 활동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근본적인 사회변화, 국민적 변화, 나라의 변화를 위해서는 위정자들의 민심에 대한 이해, 시대에 대한 이해, 종교인들의 근본적 반성이 같이 이어져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국가적으로는 한미일 군사정보협정의 체결 등이 이런 허약한 틈을 타서 이뤄지는 만큼 현명한 대처와 지혜가 필요한 때라 더 고민하고 돌아봐져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10시에는 65일 용성진종조사 탄생 150주년 기념식과 관련한 회의가 대중부 지도부와 함께 있었고, 12시에는 서울시 교육감에 출마한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님께서 스님께 인사차 방문하셨습니다. 오늘 오후 2시 조계사에서 있는 행사 때문에 잠시 환담을 나누시고는 급히 조계사로 출발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용성진종조사 탄생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참석하셨습니다. 조경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가 사회를 맡아 진행된 이번 심포지엄은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의 격려사와 역사학자 이이화님의 축사에 이어 두 분(허 우성 경희대 철학과 교수, 김순석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의 발표와 네 분(서재영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김 경집 진각대학원 교수, 한 동민 수원박물관 학예팀장, 조 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원)의 토론, 그리고 이어진 질의응답 및 전체토론으로 세 시간여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사단법인 독립운동가 백용성조사 기념사업회 이사장이기도 하신 스님께서는 먼저 특별히 참석해 격려사와 축사를 해주신 자승 총무원장님과 이이화 역사학자 두 분께 감사를 표하신 후 심포지엄의 취지와 의의에 대한 여는 말씀으로 심포지엄의 문을 여셨습니다. 350여명의 청중은  귀를 쫑긋 세우고 진지한 마음으로 함께 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416일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로 많은 목숨, 특히 젊은 학생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사건 발생 후 40여일이 지났지만 온 국민은 눈앞에서 죽어가는 소중한 젊은 목숨들을 지켜보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현실에 대한 무기력감, 자괴감, 분노, 슬픔에서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밖으로는 중국의 부상과 이에 따른 미국의 대중국 견제정책에 의한 일본의 재무장, 그리고  한미일 3국 군사협력이 MOU 체결에까지 이르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미국과 중국사이에서 우리의 국익을 지키기가 점점 어려워져 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19세기 말 한반도를 보는 듯합니다. 밖으로는 열강들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쟁패하고 안으로는 봉건제가 붕괴되면서 위로부터의 개혁인 갑신정변과 아래로부터의 개혁인 동학혁명이 좌절을 겪는 등 내우외환으로 많은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때 시의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해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 강점기에 고통을 겪었지만 독립을 위한 노력의 부족으로 결국 해방 후에는 다시 분단과 6.25전쟁의 비극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한반도 주변정세가 100년 만에 또다시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 국내적으로는 지난 50년 동안의 물질, 물량, 속도를 중시한 성장주의적 삶의 방식이 오늘날 세월호 참사와 같은 사건에서 총체적으로 그 문제점을 드러낸 것이라고 보여 집니다.

     

이제 우리는 양보다 질을, 물질보다는 사람과 생명을, 성장보다는 안전을 중시하는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야한다는 강력한 시대적 요구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행한 사건을 계기로 국론을 통합하여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기보다는 오히려 국론 분열이 심화되는 듯한 양상입니다. 한반도 주변정세 또한 통일은 커녕 평화를 지키기조차 어려워지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과거 100년 전 조선조말 일제시기에 시대의 부름에 응답해 고뇌하고 온몸을 내던져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신 백용성조사의 행적과 사상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여러 시사점들을 줄 것으로 믿습니다.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면서도 불교의 지성화, 불교의 생활화와 대중화를 위해 헌신하시고, 시대의 과제에 눈떠 민중의 아픔에 함께 하신 조사의 삶을 조명해, 그 뜻을 어떻게 오늘에 살릴 것인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분의 삶에서 부족했던 부분은 채우고 긍정적인 부분은 계승 발전시켜 이 시대에 어떻게 수행정진할 것인지, 나아가 어떻게 사회를 위해 실천할 것인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이어 발표와 토론, 질의응답이 끝나고 이어진 닫는 말씀에서 스님께서는 토론의 내용을 정리하심과 동시에 느낀 바를 술회하셨습니다.

 

토론을 들으며 앞으로 이런 학술세미나를 통해 용성조사의 행적과 사상에 대해 좀 더 지속적인 연구와 발표가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실제 용성스님과 대중이 알고 있는 용성스님 사이의 간격이 너무 큰 것 같습니다. 이는 연구자들의 책임이라기보다는 불교계와 후학, 후손들의 책임이겠지요. 저도 스승이신 불심도문스님께서 용성스님 알리기에 평생 노력하셨고 저에게도 여러 번 당부하셨는데도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불교사적인 입장에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와 토론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리고 그 과정에서 미화된 것은 걸러내는 비판적 토론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비판보다는 스님의 행적을 알리는 데 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보입니다.”

     

그리고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제기되고 있는 용성스님의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에 대한 학자들의 논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모든 일에는 드러난 부분 이외에 드러나지 않은 숨은 사실들이 있습니다. 이를 굳이 들추어낼 필요는 없겠지요. 보살행은 남에게 보여지기 위해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역사에서 정사로 채택되지 못하더라도 진실을 드러내 주는 것은 명예만을 추구하는 풍조를 개선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용성조사와 손병희선생은 오랜 인연이 있었습니다. 용성스님의 스승이신 혜월스님께서 손병희선생의 스승이신 최제우선생을 6개월 이상 남원 덕밀암 은적당에 숨겨드렸고 그 기간 동안에 천도교의 여러 경전이 집필되고 두 분 사이에 많은 지적 교류를 나누셨습니다. 그로 인해 혜월스님은 승적이 박탈되고 가택연금까지 당하셨지요. 그런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용성조사와 손병희 선생 사이에는 드러나지 않은 깊은 교류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윤봉길 의사와 용성조사의 제자인 임철호 선생이 친구 사이였다는 것을 안다면 용성조사가 윤봉길 의사를 김구 주석에게 보냈다는 기록에 대해 황당하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활자로 기록되지 않은 여러 구전 사실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이렇게 정리하시며 연구자들에게 보다 적극적인 연구를 당부하셨습니다. 또 용성조사께서 일본 불교지도자와의 교류등에 대해 용성스님의 반일 독립사상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일본 불교라는 이유로 무조건 반대한다면 이는 출가 승려로서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일본 불교가 정법에 어긋나 있었던 부분에 대해 비판하고 반대해서 바른 길을 가신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승려는 일반적인 애국자와 다릅니다. 승려결혼 문제는 일본불교라서이기에 앞서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반대를 분명히 하신 것이지요.”

     

이렇게 오해가 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관점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용성스님과 만해스님을 비교한 논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불교의 지성화, 대중화, 생활화는 용성스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정토회의 표어가 바른 불교, 쉬운 불교, 생활불교인데, 용성스님의 불교개혁의 기치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용성스님께서는 그만큼 시대를 앞서가신 분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사상은 현대적인 관점으로 보아도 새로울 만큼 혁명적입니다. 만해가 스님인가 아닌가에 대해 논란이 있었는데, 만해 스님께서 초기에 불교사전을 편찬하시고 불교유신론을 집필하시는 등 불교의 개혁과 대중화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하셨지만, 말년에 그분이 하신 사회, 독립운동은 불교를 기반으로 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분은 독립을 위해서라면 승려라는 형식까지도 내던질 분이셨지요. 하지만, 용성스님께서는 불교를 기반으로 승려의 본분 안에서 비폭력적 방법으로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한 용성스님이 조계사 대웅전 앞에 사리탑을 세운 시기가 인도의 유명한 다르마빨라 스님의 한국 방문시기와 일치하는 점, 대각회가 마하보디 소사이어티와 이름이 같다는 점, 그리고 스님의 유훈에 인도의 5대 성지를 가꾸어라라고 하신 부분이 있는데, 이것을 보면 용성스님이 국제적인 교류를 갖고 있었다고 판단됩니다. 이런 점에서 용성스님과 간디와의 비교연구도 가능하겠지요.

     

현재 용성스님의 사상에 대한 연구가 사회운동가적인 측면이나 불교사적인 측면 모두 답보상태입니다. 공식적인 사료에만 의존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구술사료, 논쟁의 소지가 있는 자료라 하더라고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용성스님이 만드신 의식집을 보면 현재 우리 조계종에서도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혁명적이고 앞선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이런 부분도 앞으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용성스님의 독립운동 역시 불교사상을 기반으로 한 것이니만큼 함께 연구가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발표해주신 여러분들의 수고에 감사드리고 부족한 부분은 내년에 더 깊이 있는 연구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이렇게 학자들에게 주문과 기대를 표하신 후 마무리 인사와 함께 닫는 말씀을 마치셨습니다.

     

2시부터 530분까지 긴 시간 동안 청중들도 자리를 뜨지 않고 학자들과 스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사회를 맡은 조경택 교수님은 지금껏 수많은 심포지엄에 참가했지만, 오늘처럼 청중들이 이렇게 집중해서 경청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며 청중들의 열기에서 받은 큰 감동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오늘 심포지엄은 정토회의 주부 자원활동가들이 지난 3개월 전부터 준비한 행사입니다. 자원활동가들의 힘으로 이런 전문적인 학술 행사를 치러냈다는 점에서 정토회 내부적으로도 뜻깊은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는 심포지엄을 마치시고 저녁에는 평화재단으로 돌아오셔서 기획회의를 하시고 밤늦게 정토회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내일은 부천, 수원에서 희망세상 만들기 강연이 있습니다.

전체댓글 7

0/200

^^^^

사회를 맡으셨던 분,고려대 철학과 교수님으로 기억하는데요..윗부분에 성함(조성택)과 글의 끝부분의 성함이(조경택) 다릅니다~오타 수정좀 부탁드려요..핵심있는 글,잘 읽었습니다^^

2014-06-01 00:01:03

보광거사

세간에 용성스님이 소극적으로 활동했다는 일부 잘못된 견해가 있었는데 이 심포지움으로 그 부분이 바로 잡혀져서 정말 다행입니다.

2014-05-31 13:11:55

일주동로

백용성이 겁을 먹고 일제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것도 많지 않았나? 조선독립이 절대적이라면 승려라는 형식도 당연히 버릴수 있어야 한다. 백용성의 연약한 행동도 똑바로 짚어야 한다. 만해 한용운 스님과 뜻을 함께 했던 후배그룹 김법린 스님이나 효당 최범술 스님 모두 일과 수행을 잘했던 분이다. 천년에 한분 날까말까한 만해당용운 큰스님도 마찬가지다.수행을 결코 망각하지 않았다.조선의 독립을 하루빨리 쟁취하기위해일제에 대해 최일선에서 강력한 저항을 했고 백용성은 소극적으로 대처해 나간것에 지나지 않았다.

2014-05-31 11:43:37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