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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30분부터 역삼 1동 문화센터에서 평화재단 평화교육원에서 주최하는 ‘엄마수업’ 강의가 있었습니다.
무한경쟁으로 몰리는 학생들의 정신적 피폐함이나 학교폭력, 우울증, 청소년 자살 등이 사회문제로 커지고 있고, 자녀들과의 갈등을 호소하는 엄마들의 고민도 더욱 깊어지고 있는 때,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는 부제를 달아, 엄마들을 대상으로 한 ‘엄마수업’이라는 강좌가 마련되었습니다. 오늘은 그 첫강의가 있는 날로, 부지런히 집안 일을 마치고 급하게 강의장으로 찾아온 200여명의 젊은 엄마들의 발걸음으로 강의장은 부산하면서도 기대에 찬 모습이었습니다.
강의 전 요술당나귀의 사전공연으로 참가한 분들을 가볍고 신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오늘 참가하신 분들이 다들 엄마들인지 물으면서 ‘엄마수업’ 책이 나온 지 2년이 지났다면서 책을 통해서 이야기를 다 했지만 그래도 좀 더 깊은 이야기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이 자리를 마련했다고 하시면서 강연을 시작하셨습니다.
“결혼은 다 큰 성인들끼리 서로가 좋아 사랑을 하고, 대등하게 약속을 하는 것이기에 바로 내일 이혼을 해도 됩니다. 죄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와 엄마는 서로가 원한 것이 아니라 어른인 여러분들이 일방적으로 선택한 겁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냥 어떻게 보면 강제로 관계가 만들어지고, 관계 속에 편입된 것이기에 엄마의 일방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이 무겁습니다. 이 관계는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만 18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여자로서의 아내는 어쩌면 약한 존재일 수도 있고 남편과는 대등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만, 아이의 엄마로서는 무한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자의 권리와 엄마의 책임을 비교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여자의 권리와 엄마의 책임 사이에서 종종 혼돈이 되는 것 같습니다. 여자로서 일을 하고, 출세를 하고 남자와 대등하게 하는 것은 전혀 상관없지만. 엄마라는 위치는 아이와의 관계로서 맺어지는 것이기에 그 무한 책임을 지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여자의 권리가 엄마의 책임보다 앞서기 때문에 아이들이 엄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아이들은 심리적인 불안, 상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엄마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는 생물적인 어미의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사회학적 의미에서의 엄마의 역할입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살펴보면 닭은 사람에 비해 약한 존재입니다. 사람이 가까이 가면 도망갑니다. 그런데 닭이 알을 품을 때나, 작은 병아리를 데리고 다닐 때 사람이 가까이 오면 어미닭은 도망을 가지 않고 깃털을 바짝 세워 덤빕니다. 병아리를 보호하기 위한 생물학적인 어미의 본능입니다. 생명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데는 개체 보존의 본능과 종족보존의 본능, 두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생명도 죽음 앞에서는 살려고 저항합니다. 이게 개체 보존의 본능입니다. 또 하나의 본능은 종족 보존의 본능입니다. 종족을 지속적으로 이 세상에 남기고 싶어 하는 본능으로 자연 상태에서 주로 암컷에게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됩니다.
자연생태계에서 어미는 자기의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도 새끼를 보호하려는 본능이 있는데 이것은 윤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릴 때는 어미가 발로 풀숲이나 쓰레기를 헤집어 주면 새끼는 따라 다니면서 먹게 됩니다. 그런데 일정하게 크면 어미하고 새끼는 같이 안 다닙니다. 남남이 됩니다. 한 때는 자신의 새끼였지만 때가 되면 병아리를 잡아서 죽여도 아무 관여하지 않습니다. 이게 생명의 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아이가 어릴 때 어미의 역할은 목숨을 바쳐서 아이를 보호해야 하지만 아이가 성인이 되면 완전히 정을 끊어 독립적으로 살아가게 해줘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원리입니다. 생명의 원리에 따라 본다면 아이에 대한 보호는 어미의 전적인 책임입니다. 그러니 남자인 수컷이 도와주면 좋지만 반드시 도와줘야 할 책임이 있는 건 아닙니다. (웃음)
그러므로 남편이 없어서 애를 제대로 못키웠다는 말은 생물학적으로는 맞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혼자서 아이를 나아도 당연히 떳떳하게 잘 키워야 합니다.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은 유명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자립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어미의 자식 사랑의 최종 목표는 어떤 직업을 갖게 하는 게 아니라 자립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 생태계에서는 누구나 다 자립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사회는 그 기한이 점점 길어지고 있습니다. 예전 노예제나 농경사회에서는 12살이나 15살이면 성인이 되고 독립을 하게 됩니다. 지금은 18살 넘은 아이가 자립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이 잘못이 아니고 전적으로 엄마의 잘못입니다. 자립 할 수 있도록 키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는 아이를 목숨을 걸고 보살펴야 한다면 아이가 자라면서는 점점 어미가 물러나줘야 하는 것이고 성인 되면 완전히 남남으로 독립된 인간으로 존중해 줘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벌써 못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아이를 지켜줘야 할 어릴 때는 제대로 아이를 보살피지 못하고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어미의 책임을 방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치관을 논할 때는 항상 가장 바탕에 깔아야 하는 것은 생태 윤리입니다. 자연 생태계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는 것을 바닥에 깔고 더 나은 인간 윤리를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생태 윤리에 거스르는 인간 윤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동물보다도 더 큰 고통을 겪고 사는 것입니다.
아기가 뱃속에 있는데 엄마가 슬퍼하거나 미워하거나 심리가 불안하면 어떻게 될까요? 심리적 불안이 아이에게까지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아기 가진 엄마는 초상집에도 못 가게 합니다. 초상집에 가면 다들 슬프기 때문에 엄마가 슬프면 아이한테 해롭기 때문입니다. 잔인하거나 미운 마음을 내게 그 마음이 같이 따라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이가 육신은 엄마 아빠의 절반씩을 닮습니다. 그런데 정신적인 것은 엄마의 정신건강 , 심리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유전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엄마의 심리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임신초기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되면 아기의 생성에 장애가 되게 됩니다. 아이가 어릴 때는 모른다고 함부로 하고 커서는 조심을 하는데 이것은 거꾸로 된 행동입니다. 아이를 임신해서 낳고 3살때까지가 절대적으로 엄마의 영향이 큽니다. 이때가 컴퓨터의 기본 프로그램이 깔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기 엄마가 되면 외부환경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해야 하는데 마음이 편안한 것이 최고의 보호법입니다. 아기 아빠가 된 남자가 아기한테 직접 잘하는 방법은 아기 엄마한테 잘하는 것이 결국은 아기에게 잘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편안하고 행복하지 않으면 아이 또한 편하지 않고불행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할머니도 직접 손자에게 잘하는 것보다 아기 엄마, 즉 며느리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잘한다는 것은 심리적인 안정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산한 이후에는 신체적인 것은 잘 먹이기만 하면 잘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것은 세 살때까지가 입력된 정보가 각인되는 시기입니다. 바깥의 정보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각인 작용이 일어납니다. 사고의 모체, 심리의 모체인 자아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90%는 거의 엄마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는 엄마가 한국 사람이면 아이도 한국 사람이 되고, 애를 낳자마자 돼지우리에서 키우면 돼지정신 수준의 자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늑대 소녀의 경우도 늑대와 함께 자랐기 때문에 인간사회로 데리고 와서 훈련을 해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세 살때까지 사람 사이에 있다가 4살 때 숲에서 잃어버려서 거의 짐승하고 같이 살았다고 한다면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타잔입니다.
인류학적으로는 기른 자가 엄마입니다. 그래서 아이 엄마가 편해야 아이가 편안한 심성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두 부부가 행복하고 맘이 편안한 것이 핵심입니다. 모든 것이 아이가 우선 되어야 합니다. 아이가 밤 12시가 되어 울어도 안아서 달래고, 똥을 싸도 아무 짜증없이 치우고 전적으로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아이에게 양심으로 자리잡는 것입니다. 무한한 자비심은 엄마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물에게는 없습니다. 아이를 남에게 맡겨놓고 직장에 가려고 하는 것은 아기보다는 지위와 돈을 우선시 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엄마의 절대적 신뢰를 받지 못해서 커서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직장을 가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아기를 업고 직장에도 다니고 아기를 업고 뭘 하더라도 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엄마는 항상 아기가 우선이어야 합니다.
엄마가 아기를 낳아서 3살까지 키우는 건 남자가 군대에 가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사회적 인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는 3년간 유급 휴가를 줘야 합니다. 만약 재정적인 문제로 3년 유급휴가가 어렵다면 1년 유급휴가에 2년간은 무급휴가를 줘야 합니다. 이도 어렵다면 3년 무급휴가에 아기를 낳으면 가산점을 주고 돌아오면 승진에 유리하도록 해줘야 합니다. 만약 이도 어렵다면 아기를 업고서 일을 하고 아기가 울면 일을 하다가도 민원인에게 ‘잠시 기다리세요’ 하고 아이를 돌보는 문화가 정착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가 잘 성장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일이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체적인 사회분위기가 아기가 우선시 되는 문화가 되어야 합니다. 아기를 낳지 않는 사람은 앞으로 세금도 많이 내게 해서 아기를 키우는 사람의 재정을 충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이는 네살부터 따라 배우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는 아이가 부지런하길 원하면 엄마가 부지런해야 하고, 아이가 공손하기를 원하면 엄마가 공손해야 하고 아이가 공부하기를 원하면 엄마가 책을 봐야 합니다. 그런데 엄마는 하지 않으면서 아이에게 강요하게 되면 아이는 심리적인 억압이 일어나고 이것은 저항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엄마는 늦으면서 아이에게 일찍 오라고 하면 아이는 속으로 ‘지는?’하며 심리적 억압이 생기고 반발심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에게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아버지가 술 먹고 주정하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가 커서 술주정을 하게 되면 ‘저거 지 애비 닮았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는 반드시 엄마를 닮습니다. 아이가 커서 술주정을 하는 것은 아버지를 닮아서가 아니라 술주정하는 아버지를 보고 엄마가 싫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편이 술주정을 하더라도 엄마가 별일 아닌 듯이 넘어가거나 편하게 받아들이고 아이의 등 두드리고 재우면 무슨 일이 일어도 아이는 그런 아버지 모습을 닮지 않습니다.
남편이 잘해주면 말할 것도 없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잘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의 책임을 남편과 나눌 수는 없습니다. 주위 환경이 힘들어도 엄마가 막아주면 아이는 영향을 받지 않게 됩니다. 내 아이이기 때문에 엄마가 편안함을 유지하여 아이를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사춘기는 어른으로 되어가는 시기이니까 시행착오를 지켜봐줘야 합니다. 다음에 18살이 넘어 성년이 되면 한사람으로 존경해줘야 하고 간섭하면 안됩니다. 집안에 일이 있으면 한 멤버로 인정해서 함께 의논해야 합니다. 성년이 되면 간섭도 하지 않고 지원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한사람의 어른으로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4개의 단계별로 대응을 해서 아이를 키워 18살이 넘으면 여러분의 책임을 다했기 때문에 이후에는 여러분의 인생을 살면 됩니다.
내가 원하는 아이를 만들려면 내가 그렇게 살면 됩니다. 아이의 단계별 성질에 따라 대응하면 됩니다. 3살까지는 목숨을 바쳐서 보살펴야 하고 초등학교때는 아이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고 사춘기때는 지켜봐줘야 하고 성인이 되면 정을 끊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순서대로 커 가서 성년이 되는 것입니다.
아기를 가진 사람은 엄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이의 성장에 맞게끔 역할을 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엄마는 자기감정을 자기가 조절해야 합니다. 아이를 위해서 나의 슬픔과 아픔을 내가 감싸안고 아이가 잘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엄마는 아이들과 싸우면 안됩니다. 아이는 심리적으로 싸우는 사람은 친구라고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춘기가 되면 엄마에게 대들고 싸우게 됩니다. 아이들과 왜 싸웁니까? 아이가 밥을 안먹겠다고 하면 ‘그래 너 좋은대로 해라’하면서 밥을 주지 않고 같이 굶어버리는 것입니다. 공부 안하겠다고 하면 ‘그래 그럼 같이 일이나 하자’고 해서 청소를 하거나 하면 됩니다. 아이가 길을 가다가 떼를 쓰며 가지 않겠다고 하면 웃으면서 ‘그래그래 가기 싫으니? 그럼 있어라.’하고 가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아이가 어른이 되어도 엄마에게 대들지 않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폭행하거나 죽이거나 할 때 제일 불행한 사람은 폭행한 그 자식입니다. 그런 자식을 부모가 만들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자식과 싸워서는 안됩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전지전능한 신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수준이 안되는 것은 알아요.(웃음) 그러나 아이에게는 엄마가 세상의 전부이고 신인 것입니다. 전지전능한 엄마가 시도때도 없이 화내고 싸우면 안됩니다.
아이는 엄마가 자연스럽게 살아가면 저절로 사람이 됩니다. 커가는 순서에 맞게 아이를 대우해 주면 됩니다.”라며 스님께서는 각 단계별로 아이 키우는 법을 자세히 알려주면서 엄마로 돌아가기를 당부하셨습니다.
강연이후에 평화재단으로 와서 3개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11시가 넘어서야 모든 모임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내일은 의정부 강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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