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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문미숙 님이 백일출가 동안 분별심을 느꼈던 구체적인 사건들이 소개됩니다. 도반의 만 배 의혹부터 함께 생활하는 도반들의 기상 패턴, 설거지 방식 등에 시비 분별한 상황이 참 재밌습니다. 이내 돌이켜보면 '나라도 이런 마음이 들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냥 웃지만은 못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이른바 '탄 고구마 사건'이라 생각됩니다. 도대체 편집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신가요? 그럼, 이제 이 글을 읽을 준비가 다 된 겁니다.
만 배 2일 차 오후, 7,000배 정도 진행된 시점인 것 같다. 노스님께서 내 등을 어루만지며 “잘하고 있습니다”라며 낮은 목소리로 격려하셨다. 그 순간 머리를 처박고 있던 나의 가슴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평상시 300배, 500배 정도는 식은 죽 먹기처럼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만 배는 달랐다. 만 배를 하며 수백 가지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동안 내 자신을 ‘겸손하지, 배려심 많지, 솔선수범하지’ 하며 꽤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 배를 하며 해체된 내 모습은 고집 세고, 잘난 척하면서 내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이었다. 직장에서 헌신적인 직원처럼 보였지만 실은 다른 사람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믿지 못해서, 못한다는 소리 못해서 밤새워 직접 해버리던 성향 탓이었다.
만 배를 하면서부터 분별이 작열했다. 말로만 듣던 도반의 만 배 의혹. 분명 나보다 절하는 속도가 느렸고 중간 휴식도 많이 누리는 것으로 보이던 도반이 나보다 먼저 만 배를 끝냈다고 진행팀 측에 통보하는 것을 보며, 그 도반이 만 배를 다 한 게 아니라며 혼자 의혹을 품으며 분별하였다. 지금 돌아봐도 웃음이 나오는 그때의 내 상태는 철저히 나를 보자던 입방 때 마음과 다르게 매 순간 바깥을 시비분별하고 있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개인 잠자리를 정리하고, 해우소에 다녀와 법복을 갖춰 입은 뒤 4시 20분까지 대웅전에 착석하여 예불 준비해야 하는 일정은, 하루를 시작하면서 당면하는 첫 번째 과제이자 하루 중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새벽 4시 이전에 잠에서 깨고 해우소에 가고 싶은 신호가 오더라도, 4시 정각에 기상하기로 한 규칙 때문에 그대로 누워서 시간을 기다리는 나와 달리, 4시 전에 이미 기상하여 어둠 속에서 이부자리 정리까지 다 끝내고 앉아 있는 도반을 보며 또 시비 분별하였다.
사회에서는 느리다는 소리를 안 들었는데, 백출 동기 중 유난히 손 빠른 도반 2명이 있어 상대적으로 나는 느린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근데 손 느린 나는 손 빠른 이들이 헹구어 엎어둔 공양간 식기를 보면 대충 한다는 분별심을 냈다. 소임은 대충 하는 듯하고 개인 정비를 한다든지, 정해진 시간 전에 일을 마무리 짓고 다음 일정을 준비하는 모습들이 시종 내 눈에는 분별 거리였다. 특별히 분별심이 일게 하는 한 도반은 독선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매일매일 분별심을 내던 어느 날 가볍게 내어놓는 연습을 해보고 싶었다. 소임 시간을 일찍 끝내고 개인 정비하는 도반에게 “규칙을 어기는 것 아니냐?”며 내 생각을 내어놓았다. 그러자 그 도반에게 “상관 말라. 알아서 할 테니”라는 싸늘한 답이 돌아왔다. 저녁 나누기 때도 유독 주장이 강한 도반에 대해 ‘왜 저러나?’ 하며 불편하게 또는 한심하게 바라봤던 것 같다.
하지만 평소 느긋해 보이는 나의 행동이 나누기에서 손 빠른 도반들에게 분별감으로 대두되었고, 평생 내가 말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는데 여기서 나는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내가 모르던 나의 모습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24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수련을 거듭할수록 점점 상대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 이해는 상대를 편안히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회향을 20일 정도 앞둔 시점에는 함께하는 일 수행이나 저녁 나누기에서 억지처럼 느껴지는 도반의 주장, 언행들이 귀엽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의 강한 어조에 내가 흔들리지 않고 평온하게 ‘그의 마음은 그렇구나, 그의 생각은 그렇구나’ 하고 바라봐졌다. 수행의 힘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내가 편안해지듯 그들도 나를 편안해하는 것 같아 감사했다. 이렇게 도반과의 연대감은 또 깊어졌다.
평소 주장이 강한 도반과 공양 당번을 하게 되었다. 그는 고라니 밭에서 수확한 고구마를 삶아 내겠다고 했고, 나는 조리 찬을 만들기로 했다. 도반은 고구마를 대충 씻어 삶기 시작하는데 흙을 깔끔하게 씻어내지 않는 것에 나는 또 꽂혀버렸다. 평소 고구마를 껍질째 먹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나에게 흙이 덜 씻긴 고구마가 시비의 대상이 된 것이다.
‘상관 말자’ 하고 내 할 일에 집중하는데 고구마 타는 냄새가 났다. 화구 가스불을 끄고 그에게 상황을 알렸다. 그러자 도반은 고구마 솥에 찬물을 확~ 끼얹은 뒤 뚜껑을 닫았고, 나는 고구마에 탄내가 배기 때문에 솥을 바꾸어 쪄야 한다고 참견하고 싶은 마음, 불편한 마음이 계속 올라왔다. 하지만, 평소 간섭받기 싫어하는 도반이었고 공양 준비에 쫓기는 마음도 있어 고구마 찌는 문제에 대해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공양 준비를 끝냈다.
공양에 등장한 탄 고구마를 보고 도반들이 반색하였다. 옹기종기 모여 군고구마 맛이 나는 고구마라며 탄 고구마 껍질을 벗겨가며 맛있게들 먹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불편한 마음을 안고 있던 나는 피식 웃음이 나면서 마음이 환해지는 걸 느꼈다. 내가 시비 분별한 과정을 모르는 도반들이 특별하고 맛있게 쪄진 고구마로 행복한 공양 시간이 되는 것을 지켜보며 옳다고 주장할 것도, 이것이 정답이라고 고집할 것이 없음을 체득하는 순간이었다.
백일출가 생활은 일단 몸이 고달픈 일상이다. 새벽 4시 기상을 시작으로 밤 9시 반 취침까지 단 1분의 여유도 없이 일 수행과 더불어 정진과 학습의 연속이다. 개인 소임은 주기적으로 바뀌는데, 나는 쓰레기 분리수거장 정리 소임과 걸레 세탁 소임이 버거웠다. 쓰레기 분리수거장 정리 소임은 종이상자의 철 핀을 제거하고 종이상자를 끈으로 묶어 쌓아 올리는 것인데 혼자 하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이렇게 소임에 몰두하다 보면 다음 일정을 놓쳐 허둥대기가 일쑤였다. 그리고, 하루이틀을 건너뛴 걸레 세탁 소임 때는 걸레 양이 많아 200m 거리의 건조장까지 두 번을 들고 날라야 했다. 저녁 예불 시간에 늦지 않도록 소임을 마무리하려면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힘에 부치는 걸레 바구니를 들고 계단을 뛰어오르고 다시 경사로를 뛰어올라야 했다. 이런 한계에 부딪히는 일을 하면서 어머니의 힘들었을 생계형 육체노동이 가슴으로 다가왔다.
지난 40년간 기복 불교로 시작된 어머니의 종교관이 자식들에게 막무가내식으로 전법 된 듯 느껴졌다. 성불한 보살로 인정받는 어머니지만, 함께 생활하며 곁에서 본 어머니의 모습은 자애로우신 듯하면서도 욕심과 고집이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져 어머니의 전법이 먹히질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의 종교관에 대한 반발심이 더해져 지난 40년간 당신의 고통스러웠을 삶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자식으로서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걸 극한의 일 수행을 하며 눈물로 돌이킬 수 있었다. 백일출가 기간 중 참회와 감사기도를 하며 어머니의 종교관과 가치관을 편안히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회향 문화제 준비 과정에서도, 회향 후 정토인으로 살아갈 미래 설계에서도 나는 들떠 있었다. 별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 밤나무길을 걸으면서 새로 태어난 마음의 고향이며 친정집 같은 수련원을 그리워할 거라며…. 종이상자 한 박스에 개인 물건들을 정리하여 속세 집으로 소포를 보낸 후 집으로 돌아갔다.
3,000배 정진과 법사님과의 면담을 위해 다시 수련원으로 향하던 때, 직장에서 유독 나에게 의지를 많이 하던 후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수련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후배와의 긴 통화는 나의 회향을 머뭇거리게 했다. 지금 속세로 돌아가서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인생 2막을 시작하면 내 수행력으로는 대번에 후배처럼 불평불만이 넘치는 수준으로 돌아갈 게 뻔해 보였다. 상황만 바뀌었지, 스스로 바뀌지 않았으니, 이전의 괴로움이 새로운 괴로움이 되어 윤회하는 후배의 상황이 나를 다시 돌아보게 하였다. 결국 재입재를 결심하고 2박 3일용 개인용품만 소지한 채 수련원에 그대로 남았다.
백일출가 기간 생활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요사채에서 생활하다가 명상원에서 특별수련을 하기도 한다. 두북수련원이 태풍 피해를 보았을 때는 복구작업에 투입되기도 하고, 봉화수련원의 들깨 수확에 투입이 되기도 했다. 이때 소지품은 법복, 개인 발우, 일 수행복, 속옷, 세면도구, 개인 침낭이 전부이다. 이동 안내를 받으면 순식간에 개인 준비물을 배낭 하나에 넣고 단체로 이동하는데, 그야말로 봇짐 하나 메고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수행자라는 것을 잊을 만하면 상기하게 해주었다.
배낭 하나에 들어가는 만큼의 개인 물품만으로도 어디서든 걸림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이 매번 나를 설레게 했다. 예전처럼 돈을 많이 벌지 못하니 자연스레 검소한 생활을 하게 되고, 스무 살이 넘은 딸과도 정신적 물질적 분리가 되어 더욱 자유롭다.
어린 시절 어렴풋이나마 품었던, 세상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인생 후반전에 들어 부처님 법안에서 실현해 보려 한다. 배낭 하나 메고 가볍게 부처님 가신 길을 좇겠다는 마음을 낸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다. 주특기인 의료 분야라도 좋고, 아니라도 상관없다. 어디든 어떤 분야든 모두를 이롭게 하는데 잘 쓰이기를 발원하며 오늘도 새벽 정진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글_문미숙(44기 백일출가)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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