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서광주지회
저처럼 힘든 사람들에게

이명란 님은 경전대학 진행자와 그룹장을 맡고 있습니다. 이명란 님을 만나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머 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재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 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 서리 저리 내리고’ 이제는 편안히 거울 앞에 서서 희망의 편지를 보내는 이명란 님을 소개합니다.

2024년 하반기 진행자 정일사 회향(뒷줄 왼쪽 두 번째 이명란 님)
▲ 2024년 하반기 진행자 정일사 회향(뒷줄 왼쪽 두 번째 이명란 님)

어두운 집의 융통성 없는 다섯째

저는 가난한 집의 2남 5녀 중 다섯째입니다. 아버지는 몸이 약해 어머니가 가장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농사일뿐 아니라 산에서 벌목하는 산판일과 막노동도 하며 가족을 먹여 살렸습니다. 저는 할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그래서 엄마의 손길을 받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첫째, 둘째, 셋째 언니들은 초등학교나 중학교만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갔습니다. 집에는 주로 할머니, 아버지, 오빠, 저, 남동생,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무섭고 깔끔했습니다. 방바닥에 머리카락 하나라도 떨어져 있거나, 마당에 낙엽이 하나라도 굴러다니면 혼났습니다. 시골 마을이었지만, 동네 어른들조차 우리 집에는 놀러 오지 않았습니다. 집안 분위기는 항상 어두웠습니다.

저는 그런 분위기가 너무 답답했지만, 화목하지 않은 집을 감추고 싶어 학교나 밖에서는 밝게 행동하며 대장 노릇을 했습니다. 아들만 위하는 시대에 딸이 다섯인 집에서 저는 별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말없이 조용하게 인정받으려는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융통성이 없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착한 모범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집 한 번 부리면 누구도 꺾지 못해 ‘돼지 고집’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자만심과 열등감이 심한 아이였습니다.

1982년 오빠 초등학교 졸업식 네 남매(맨 오른쪽 이명란 님)
▲ 1982년 오빠 초등학교 졸업식 네 남매(맨 오른쪽 이명란 님)

아들... 남편, 아버지, 친구, 애인이었던 세상의 전부

19살 때 남편을 만나 20살 때부터 같이 살았습니다. 2년 정도 살다 결혼 하려고 예식장까지 예약했지만, 하지 못했습니다. ‘차남이 장남보다 먼저 결혼할 수 없다.’라고 생각했던 시절로 시댁에서 결혼식을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혼인신고만 하고 딸과 아들을 낳았습니다. 나이가 어렸던 저는 결혼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남편과 싸우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어린 아들이 저를 위로했습니다. 울고 있는 저에게 다가와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 저를 안아주고, 등을 토닥토닥하며 "괜찮아"라고 말했습니다. 정신적으로 아들에게 의지했습니다. 아들이 남편이고 아버지고 친구이고 애인이었기에 살 수 있었습니다. 아들에게 저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아들이 성공해 저의 꿈을 이뤄 주기를 바랐습니다. 친구들과 밖에서 놀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들이 반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기대와 집착이 부담스럽고 감당하기 어려워 저에게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더 세게 끌고 더 세게 집착했습니다.

아들이 아니라 내 문제였구나!

2011년 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 때,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들이 한창 방황하며 밖으로 돌아다니던 시기였습니다. 아이들과의 시비가 몸싸움으로 번졌고, 집단 폭행으로 검찰로 사건이 넘어갔습니다. 한 달여 만에 무혐의로 해결되었지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슴이 탁 막혀 숨을 쉴 수도 없었고, 죽을 것 같은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모든 기대가 무너졌다고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습니다.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저는 아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럴수록 아들에게 더 집착했습니다.

2015년 가족 여행 로마(오른쪽 위 이명란 님)
▲ 2015년 가족 여행 로마(오른쪽 위 이명란 님)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을 다시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지인을 따라 절에 갔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가릴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 절의 주지 스님이 저와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엄마가 문제"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문제지, 내가 무슨 문제가 있겠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주지 스님이 3천 배를 권했습니다. ‘3천 배를 하면 아들이 좋아지나보다, 아들이 바뀌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3천 배를 했습니다. 3천 배를 하며 처음으로 아들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문제임을 알았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집착인 것도 알았고, 저 때문에 아들이 힘들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때부터는 공부를 안 해도, 땡땡이를 쳐도, 학교에서 전화가 와도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사고만 안 치고 졸업만 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은 얼마나 지루하고 답답할까?

그래도 마음은 ‘아들이 대학을 나왔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수능 시험 날, 절에 가 수능 시간에 맞춰 기도했습니다. 1교시 중간쯤 지났는데, 시간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엎드려 있는데 너무 지루했습니다. 참고 참으며 ‘우리 아들 대학 가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들을 위해 기도하는 나도 이렇게 지루하고 힘든데, 아들의 마음은 어떨까? 아들에게 흰 것은 종이, 검은 것은 글씨일 텐데, 이 긴 시간 동안 얼마나 지루하고 답답할까?’ 그 순간 아들에게 집착을 놓았습니다. ‘네가 시험을 보다 나와도, 시험을 못 봐도 상관없다.’라는 마음이 들어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냥 잤습니다. 그때 진심으로 아들을 이해했습니다. 아들 문제를 졸업하고 지금은 원만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2025년 2월 불교대학 홍보
▲ 2025년 2월 불교대학 홍보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처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었을 때,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라는 말이 충격이었습니다. 살면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도 이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5년 정도 절에 다니면서 마음이 편해지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었습니다. 힘들었던 내가 편안해졌듯 ‘나처럼 힘든 사람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라는 마음도 있었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머뭇거리고 있을 때, 남편이 인터넷으로 정토회 불교대학에 입학 신청을 했습니다. 2016년, 남편 덕분에 정토회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아버지,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아버지는 몸무게가 50kg 정도였습니다. 특별히 아프지는 않았지만, 체력이 약해 조금 일해도 일주일씩 누워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저희 남매들이 떠들거나 이야기 나누는 것조차 참지 못했습니다. 저희 남매들은 집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끼리 말할 때는 눈을 깜빡깜빡하거나 뒤에서 소리 없이 입을 뻐금거렸습니다. 저는 시키는 대로 해서 맞지 않았지만, 남동생과 여동생은 많이 맞았습니다. 여동생의 이마와 다리에는 아버지에게 맞은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는 할머니, 고모들, 작은아버지들과 몇 년 동안 갈등을 겪었습니다. 술 마시면 가슴을 치며 ‘내 탓이다. 내 탓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할머니 생신을 맞아 서울에서 내려온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와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욱한 아버지는 옆에 있던 농약을 마셨습니다. 어떤 조치도 할 수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정말 많은 시간 동안 저를 짓눌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항상 술 마시고, 가정을 힘들게 하는 장본인이다. 아버지가 없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돌아가시고 나니 ‘아버지도 정말 힘들게 살았구나, 가족 중 누구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한마디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구나.’라는 마음에 몇십 년 동안 괴로웠습니다.

2024년 9월 으뜸절 실천활동(뒷줄 왼쪽 두 번째 이명란 님)
▲ 2024년 9월 으뜸절 실천활동(뒷줄 왼쪽 두 번째 이명란 님)

이 괴로움도 부처님 법 만나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탁 놓으면 된다.’라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했습니다. 어느 순간 ‘이것도 죽음의 한 방법이구나. 아버지는 그렇게 살다 그런 선택을 했을 뿐이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 죽음 또한 아버지가 선택한 방법이었구나.’라고 받아들이니 인정할 수 있었고, 인정하니 가벼워졌습니다.

남편, 당신에게 꼭 갚아주리라.

남편은 둘째지만, 직장을 다녀 시댁의 생활을 책임졌습니다. 공부하는 시아주버님의 뒷바라지와 고등학생이던 막내 시동생의 대학교 학비도 우리가 부담했습니다. 시댁의 모든 대소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은 모든 것을 제게 떠넘기고, 자신은 회사 동료나 친구들과 술 마시고 새벽에 들어올 때가 많았습니다. 결혼 초기에는 술 마시고 들어와 살림을 부수거나 저를 때린 적도 있습니다. 저는 반항도 하지 않고, 도망도 가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으로 다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아침밥을 차려 주었습니다.

2024년 9월 경전대학 학생들과 JTS거리 캠패인(왼쪽 끝 이명란 님)
▲ 2024년 9월 경전대학 학생들과 JTS거리 캠패인(왼쪽 끝 이명란 님)

겉으로는 무서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속으로는 ‘너는 인간도 아니다. 내가 착해서 참는 거다.’라며 무시했습니다. 남편을 미워하고 원망하며 ‘당신에게 꼭 갚으리라. 내가 꼭 복수하고 죽겠다.’라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20대 때부터 화병이 생겼습니다. 위장병으로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많았고, 이석증으로 계속 아팠습니다.

살아만 있어도 감사합니다.

2001년 남편이 순천에서 광주로 발령이 났습니다. 이혼할 수 없었는데, 남편과 떨어져 살 수 있으니 너무 좋았습니다. 하늘이 제게 기회를 준 것 같았습니다. 남편이 광주의 사택으로 간 지 4일쯤 된 날이었습니다. 자려고 불을 끄니 딸과 아들이 울었습니다. 저는 날아갈 듯 기뻐 노래를 부르며 살고 있는데 아이들이 울다니, 의아했습니다. "왜 우느냐?"라고 물으니 "아빠가 보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이 죽고 없으면 아빠가 보고 싶어 우는 아이들에게 아빠를 보여줄 수 없겠구나. 내게는 원수 같은 남편이지만, 아이들에게는 너무 보고 싶은 아빠였습니다. 그 순간 남편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남편을 온전한 내 남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2024년 3월 불교대학 학생들과 환경실천활동(왼쪽 두 번째 이명란 님)
▲ 2024년 3월 불교대학 학생들과 환경실천활동(왼쪽 두 번째 이명란 님)

남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2018년 초, 경전대학을 졸업할 즈음이었습니다. 50대 중반이 된 남편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혼을 결심할 수 없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해본 적도 없고, 몸도 좋지 않아 생활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혼은 언제든 할 수 있는데, 자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혼하면 더 힘들어질 것이 뻔했습니다. 정말 나를 위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언니와 한 도반은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난 것은 네 탓도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3년 정도 남편을 위해 기도해 보자.’라고 마음먹었습니다. ‘3년을 기도하고 여전히 남편이 밉다면 그때 이혼을 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새벽마다 천일결사 정진과 40분 명상을 했습니다. ‘남편에게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되든 안 되든 하루도 빠지지 않고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고, 다정한 말도 한 적이 없습니다. 1년 지나 남편에 대한 미운 마음과 ‘남편이 나에게 이런 상처를 줬었지.’라는 마음이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3년 지나 ‘같아 살아도 되겠다.’라는 결론이 났습니다. 돌아보면 욱하는 마음으로 이혼하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다.

스스로 서고자 하니

기도를 계속하니 ‘지금처럼 계속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아야 할까?’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나는 자립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50이 되도록 남편 눈치만 보며 살았는데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 인생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도록, 먼저 ‘홀로서기 해야겠다’라고 마음먹었습니다. 전법 활동가가 무엇을 하는지 잘 몰랐지만, 이것을 하면 스스로 설 수 있을 것 같아 2022년 전법활동가 교육을 신청했습니다. 컴퓨터는 전원을 켜고 끄는 것만 할 수 있고, 평생 전업주부로 살았고, 사람들 앞에서 말해 본 적도 없고, 밖에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등등 여러 가지 생각으로 두려웠습니다.

2024년 3월 불교대학 학생들과 환경실천활동 (가운데 이명란 님)
▲ 2024년 3월 불교대학 학생들과 환경실천활동 (가운데 이명란 님)

그래도 했습니다. 말할 때 심장이 쿵쾅거리고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습니다. 불교대학을 처음 진행할 때 학생들이 느낄 정도로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지난 2년 동안 불교대학, 경전대학 진행자를 하니 점점 자신감이 생기고 재미있습니다.

처음에는 이야기를 못 하던 학생이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이야기를 꺼내 놓고, 나누기를 통해 치유되며 밝아지는 모습을 보면 감사합니다. “불교대학, 경전대학 공부를 통해 마음이 편해졌다, 덕분에 졸업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라는 학생들의 말을 들을 때 뿌듯합니다. 저처럼 힘든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 감사합니다.

꽃도 사람도 참 예쁘구나!

변한 것이 참 많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위가 좋아졌습니다. 음식을 잘 먹지 못해 탈이 나기도 하지만, 스트레스로 인한 위경련은 없어지고 응급실에 갈 일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조그마한 일도 너무 심각했는데 이제는 ‘무슨 일이 생겨도 별일 아니다.’라며 가볍게 받아들일 때가 많습니다. 예전에는 옆에 남편이 있어야 하고, 아들이 있어야 했는데 지금은 없어도 마음이 허전하거나 불안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꽃이 예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을 보면 장점보다 단점을 발견하고 단점을 말했습니다. 부정적인 것을 먼저 느꼈습니다. 마음에 미움이 사라지니 세상이 달리 보였습니다. 마음을 바꾸니 꽃도 예쁘게 보이고, 사람들의 말과 행동도 예쁘게 보입니다. 부정적인 면만 보다 긍정적인 면을 볼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2015년 가족 여행 로마
▲ 2015년 가족 여행 로마

2년 전 명예퇴직을 한 남편은 제가 정토회 활동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제가 바빠 같이 시간을 보내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남편에게 그냥 감사합니다. 운전 못 하는 저를 실천 활동 장소에 태워주는 사람도 남편이고, 제가 돈 벌러 가지 않고 봉사할 수 있는 것도 남편의 덕분입니다. 제가 말을 잘 못하고 화난 것처럼 말해 남편이 상처받는다고 합니다. 많이 고쳤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남편에게 무의식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딱딱하고 직설적인 제 말투로 남편이 상처받지 않도록 ‘웃으며 부드럽게 말하기’가 저의 수행 과제입니다.

처음 불법을 만나 가졌던 마음으로 서원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인터뷰에 같이 참석한 짝꿍 리포터는 계속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 남편, 아들의 이야기가 저랑 많이 닮았어요. 저는 지금도 눈물이 나고 서럽고 속상해요. 얼마나 아팠을까요? 이렇게 담담하게 자기 얘기를 나눌 수 있다니 얼마나 단단한 분일까요?” 깊은 나누기를 전해 준 이명란 님께 감사합니다.

글_서기남 희망리포터 (서울제주지부 양천지회)
편집_최미영 (국제지부 아태지회)

전체댓글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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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

고맙습니다

2025-03-29 08:14:52

강물

만만챦게 살아온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어려움들 잘 극복해 주셔서 감사한마음입니다

2025-03-29 06:41:02

이승금

흑흑 감동입니다
제 고민은 고민은 아니었음을 ..
멋진 진행자님 이셨다는걸 알기에 더욱 감사드립니다

2025-03-27 16: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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