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경전대학 진행자를 맡은 경주지회 윤영희 님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편안하게 내어놓았습니다. 인터뷰 날짜를 정하기 위해서 연락했을 때 ‘정토행자의 하루’에 실릴 자격이 없다며 더 성장한 후 인터뷰를 하겠다며 사양했습니다. 수행담을 들어보니 지금 모습 그대로 자격이 충분한 정토행자입니다. 괴로움이 없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수행하는 윤영희 님의 이야기 들려 드립니다.
경상남도 하늘 첫 동네인 거창 산골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부모님, 언니 둘, 여동생, 저 이렇게 여섯이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갑자기 다른 곳으로 이사 갔습니다. 아버지는 젊은 여자를 데려왔고 어린 나이에 ‘우리 집에서 일 해주는 아줌마인가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태어난 이복동생이 하나, 둘 늘어 총 다섯의 이복동생이 생겼습니다. 어머니는 여동생을 데리고 대구에 나가 따로 살았습니다.
철이 든 사춘기 시절 방학 때 대구로 나가 어머니를 만나면 너무나 불쌍했고 아버지는 죽도록 미웠습니다. 불쌍한 어머니가 제게 상처였습니다. 좀 더 커서는 어머니도 미웠습니다. ‘자식도 포기하고 자신의 권리도 못 찾고 어떻게 저렇게 바보로 살 수 있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희생하며 착하게 살지는 못하겠다. 절대 어머니처럼 저렇게는 안 살겠다.’라고 다짐했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어머니를 이해하고 덜 미워했지만,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미웠습니다. 늘 부모님을 미워하고 원망하며 괴로워하니 아는 동생이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알려 주었습니다. 법문이 좋아 아침 운동하며 꼬박 2년간 들었습니다. 〈깨달음의 장〉1 이야기를 듣고는 스스로 법당에 찾아가 참여 방법을 물었습니다.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깨달음의 장을 다녀오고서는 천일결사2, 인도 성지순례 등 하라는 것은 모두 했습니다.
처음 기도할 땐 “아버지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안 나왔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며 행복했던 기억이 하나도 없는데, 정말 미워 죽겠는데 어떻게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답답했습니다. 한 백일 정도 기도하니 눈물이 없던 제가 눈물을 흘리며 가슴이 아픈 걸 느꼈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키워줘서 내가 있었구나’라고 느끼니 미안하고 죄스럽고 고맙기만 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미워하면 너희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냐”라며 늘 미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엄마는 하늘에 있는 천사야?”라며 빈정댔던 제가 어머니에게 감사 기도를 하면서 ‘어머니도 어쩔 수 없었겠구나. 어머니가 바보처럼 부족한 사람이 아니고 지혜로운 거였구나’라는 걸 늦게야 알았습니다.
남편과는 연애결혼을 했습니다. 남편이 너무너무 사랑한다고 해서 ‘그럼 그냥 하지 뭐’ 하며 결혼했는데 남편의 사랑은 집착이었습니다. 모임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직장에 출근해서도 하루에 전화를 스무 통씩 했습니다. 남편이 밥 먹는 것도 걷는 것도 미웠습니다. 잘못한 것 없어도, 이유 없이 남편이 미웠고 집착까지 하니 더 미웠습니다. 숨통이 막혀서 정말 못 살겠다 싶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느그 아빠가 어쩌고저쩌고”하면 딸들은 “우리 아빠인데 엄마는 아빠를 왜 그렇게 나쁘게 얘기하냐”고 했습니다. 아빠를 미워하는 엄마로 인해 아이들이 상처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남편 욕을 할 땐 딸들이 남편 편을 드는 것 같았는데 제가 남편을 싫어하니 딸들도 아빠를 싫어했습니다. ‘아이들 앞에서는 미워하는 내색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라는 후회에 딸들에게 미안하다고 했지만, 딸들은 듣기 싫어했습니다.
수행하면서 자책하는 마음이 줄고 저 자신에게 당당해지니 “내가 다 해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라고 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딸들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엄마보다 당당한 엄마가 훨씬 좋다고 했습니다.
천일결사 기도를 하며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이 드니까, 미운 마음이 드는 남편에게도 감사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 기도가 잘 안 되었습니다. 남편은 같이 살아서인지 미움이 잘 가시지 않았습니다. 남편에 대한 미움이 크니 300배를 3년 했습니다. 3년간 계속했는데도 미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남편은 잔소리가 많았습니다. 그때 대꾸를 하면 싸움이 났습니다. 남편이 잔소리할 때 말하지 않으려고 남편이 퇴근할 때가 되면 입에 물을 머금었습니다. 물을 입에 물고 대답을 안 하니 남편은 혼자 잔소리하다 그만두었습니다. 그렇게 3일을 하니 잔소리가 조금 줄었습니다.
남편 세 살 때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기도하며 ‘남편이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고 커서 사랑에 집착하는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따라다니며 종일 잔소리를 하는 시어머니를 닮은 남편을 조금 더 이해했고 ‘저 사람을 내가 안아줘야겠다’라고 마음먹었습니다.
한 번은 남편에게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고 툭 내뱉었습니다. 남편이 엄청 화를 냈습니다. “나도 모르게 말이 그렇게 나와서 내가 입을 꿰매야겠다”라고 했더니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정말 미안하다는 말이 안 나왔는데 수행하다 보니 사과도 바로 합니다. 남편이 미울 땐 ‘생활비 따박따박 주고 옆에서 같이 살아주는 게 무척 감사하다’라고 마음속으로 되새깁니다.
‘내가 주인이다’라는 마음이 별로 없었고 누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며 스스로 앞에 나서서 하지는 않았습니다. 창의력이 없어 스스로 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뭐든 잘하는 것 같아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고 ‘컴퓨터 사용을 잘 못 해서 내게 일을 안 시키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나쁘고 하기 싫은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통일특별위원회 행복학교가 처음 생겼을 땐 아무것도 모르겠고, 어떻게 하라고 시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든 걸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습니다. 행복학교 진행자 소임을 하며 혼자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며 행복시민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그 경험이 ‘나도 잘하는구나. 안 시켜줘서 그렇지 나도 할 수 있구나’라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봉사할 때도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내가 주인이지’하며 앞서서 합니다. 설거지든 청소든 눈에 보이는 대로 하고, 쓰일 일이 있는지 살피며 합니다.
저에게 정토회는 터닝포인트입니다. 인생을 확 바꿔놓았고 정토회 아니었으면 과연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찔합니다. 정토회를 만나기 전에는 사치도 좀 하고 화장도 진하게 했습니다. 친구와 다니면서 옷 사고, 맛있는 거 먹고, 커피 마시고, 파크 골프도 하고 그게 일과였습니다. 수행하며 자연스레 그런 습관이 사라졌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건 아니지만 돈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지혜를 얻었다. 마음이 부자라 어딜 가도 떳떳하고 꿀리지 않는다. 시간만 있으면 어떤 법문도, 강좌도 들을 수 있다. 하고 싶은 봉사는 어디든 열려 있다.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 아니면 다음 달에, 또 기회가 온다.’ 이런 생각으로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 행복합니다.
윤영희 님과의 인터뷰를 마치면서 저는 ‘아직 갈 길이 멀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년 넘게 정토회 활동과 수행을 하면서 다져진 마음의 힘을 보았습니다. 저도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가보겠습니다.
글_김선화 희망리포터(광주전라지부 광주지회)
편집_곽정란(대구경북지부 구미지회)
전체댓글 20
전체 댓글 보기정토행자의 하루 ‘경주지회’의 다른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