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월간정토
밥 먹으려고 출가했니?

이 글의 제목만 보고 처음에는 지헌운 님이 백일출가 기간 동안 먹었던 맛있는 음식이 많이 등장할 거라 예상했습니다. 실제로 군고구마, 호박죽이 들어간 3,000포기의 김장김치 그리고 문경 수련원의 제설 작업을 마치고 먹은 다디단 과자가 그 주인공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마지막에 진짜 주인공이 따로 등장하더군요. 역대급 반전이 있는, 결국 또 감동이 밀려오는 아주 멋진 수행담입니다.

단순하게 살자

생각을 줄이며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평소 생각이 많아서 괴롭기도 했고, 그래서 자괴감이 드는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능력이 출중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살았습니다. 군 제대와 동시에 20대 초반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작된 주야 교대 근무가 버겁게 느껴졌고, 회사의 분위기도 흡사 군대의 악습 혹은 폐습과 닮아서 힘들었습니다. 당시 저는 최저시급 5,250원을 받고 근무했는데, 그런 나날을 당연하게 여기며 지냈습니다. 직장의 처우가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여 타지에 있다는 사실에 그저 즐겁게 직장 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지친 직장 생활 중 알게 된 백일출가

당시에는 ‘젊은 나이에 뭔들 못 하겠나?’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직장 생활에 하루하루 지치고 초췌해지는 제 모습을 볼 때면 일을 하며 버티는 스스로가 자랑스럽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우울한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우연히 인연이 닿아 수원 청년지부장님에게 연락한 것을 시작으로 죽림정사에서 열렸던 만일결사 8-1차 백일기도 입재식에 참가하였습니다. 그 후 초파일 행사, 경주 역사 기행도 다녀왔습니다. 일이 없는 날 주말이면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 수원정토법당에 출퇴근하듯 오가면서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수원청년지부 외에는 소속이 없던 와중 어느 날 갑자기 지부장님이 괴롭다고 하면서 백일출가를 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동요된 저는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무것도 모른 채 오로지 백일출가 안내지만 보고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그동안 다니던 회사 대표님과 면담을 하고 퇴사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입사 후 괴로움과 내면의 갈등 그리고 회사의 불만족스러운 처우 등 그런 불확실하고 두려운 환경 덕분에 백일출가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배 중(지헌운 님)
▲ 만배 중(지헌운 님)

만 배, 혼자가 아닌 함께이기에 가능한

당시 백일출가는 다행히 깨달음의 장 수료 조건만 있어 어렵지 않게 출가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 백일출가는 남자들이 더 많이 떨어진다는 묘수 법사님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 저는 조금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의심치 않던 만 배에서 낙방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깨달음의 장을 함께한 한 도반이 만 배 하기 일주일 전부터 하루에 500배씩 연습하면 수월하다고 알려주셔서 무사히 만 배에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첫날은 4,000배를 하고 둘째 날부터 3,000배씩 해냈습니다. 만 배를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도반들의 힘들어하는 소리, 관음정근 소리가 귀에 들어왔습니다. 절하다가 지칠 때면 만 배 바라지를 해주시는 전 기수 행자님들이 소리 없이 다가와 “다시 한번 해봅니다”라고 쓰인 종이를 내미는 것을 보며 힘을 얻기도 했습니다.

또한 만 배 바라지분들의 정성이 담긴 공양을 받으며 감사한 마음을 새겼습니다. 지금 회상해 보면 감사함에 눈물이 흐를 정도지만 당시에는 감사한 마음과는 달리 눈물이 메말라버린 것처럼 담담했습니다. 만 배를 마친 후 눈물을 흘리고 울부짖는 도반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모두의 도움으로 만 배를 비교적 일찍 마친 저는, 수련원 대강당 고행상을 바라보며 아직 절을 하고 있는 행자님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관음정근을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잘하지 못하는 것을 해야 할 때

하지만 만 배는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속한 23기는 다른 기수에 비해 정진이나 일수행을 많이 한 편이었습니다. 일수행 일정을 제외하고는 항상 입어야 했던 법복이 불편했습니다. 일수행 시간에는 일상복을 입을 수 있다는 생각에 끄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동적인 활동이 더 편하고 좋다는 익숙한 업식에만 쫓아다니는 자신을 보기도 했습니다.

일체의 장을 시작으로 일수행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매일 빠짐없이 해야 하는 정진과 법사님과의 시간도 있었습니다. 수련을 경험하면서 일이 힘들어 고되었고, 몸이 아프기도 했지만, 같은 기수 행자님들과 서로 말하지 않아도 함께라서 즐겁게, 때로는 같이 분별하며 하루하루 보냈습니다.

백일출가 상반기에 생활 팀장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소임을 하면서 회사 다닐 때 생긴 업식과 동시에 유년기에 자라온 환경에서 얻어진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습니다. 매일 오전에는 팀장 회의에 참여하면서 업무 진척에 대해 어제는 어디까지 진행되었고, 오늘의 계획은 어떻게 될지에 대한 요약과 발표를 했습니다. 평소 언변이 좋지 못했던 저는 열등감에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입방 중, 이 좋은 기회에 한번 연습해보자는 마음가짐으로 말을 잘 못하고 버벅거려도 그 순간을 즐겼습니다.

묘수 법사님과 함께(오른쪽이 지헌운 님)
▲ 묘수 법사님과 함께(오른쪽이 지헌운 님)

실수해도 괜찮아

첫 소임은 만 배 후 방석피를 관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요사채에 있는 세탁기를 여러 대 돌리고, 다림질은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이리저리 수첩을 들고 다니며 도량을 돌아다녔습니다. 몸은 고생스러웠으나 마음은 편안했습니다. 평소에도 몸으로 활동하는 일을 즐겨하는 편이라 소임 덕분에 도량을 신나게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행자님들은 대부분 저보다 연장자였고, 생활 경험이 많은 분들로 저의 안내에 잘 따라주셨고 일도 수월하게 해내셨습니다.

평소 쇠톱질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무 톱은 처음이라 생각처럼 일이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나무 톱을 잘못 사용하여 밀었을 때 힘을 주고, 당길 때는 힘을 빼면서 나무를 잘랐습니다. 나무 톱에 익숙하지 않아서 함께 일수행을 하는 도반에 비해서 비효율적으로 하였습니다. 지금도 나무 톱만 보면 당시 기억이 회상되어 부끄럽기만 합니다.

가을 기수라 날이 쌀쌀해지니 도량 내 방풍 작업을 했습니다. 일명 뽁뽁이라고 하는 버블랩으로 문틈 사이에 들어오는 바람을 막는 작업입니다. 대강당, 요사채 등 곳곳을 재단하고 비닐로 고정하였습니다. 그렇게 방풍 작업을 하면서 실수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제 생각대로 열심히 작업을 했는데, 결과는 비효율적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공동체 대중은 그런 저의 실수까지도 따뜻하게 보듬어주셨습니다. 돌아보면 수련하면서 많은 배려를 받은 것 같아서 실수는 했어도 행복했던 기억입니다.

소임을 하며 부딪힌 경계

백일출가 수련이 절반쯤 진행되었을 때 생활 팀장 소임이 끝났습니다. 소임을 내려놓으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나의 일을 뺏긴 것 같은 기분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공양간에서의 소임을 열심히 했습니다. 아침 발우공양과 공양바라지 그리고 매 끼니 설거지까지 하루 대부분을 공양간에서 보냈습니다. 공양팀 소임을 하면서 몸이 고되니까 괜히 짜증 나고 하기 싫은 마음이 올라올 때도 있었습니다. 특히 점심, 저녁 공양물이 ‘자극적이다’라는 말이 나오면 시무룩해지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요리에 취미가 있어 이왕 맡은 김에 흥미롭게 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맛있게 만들고, 버리는 재료 없이 알뜰하게 공양물을 준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일 수행 중(왼쪽에서 세 번째가 지헌운 님)
▲ 일 수행 중(왼쪽에서 세 번째가 지헌운 님)

소박한 행복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던 백일출가

겨울철에 접어들어 몇 년 만에 다시 넉가래와 송풍기 플라스틱 대빗자루를 들고 수련사무실을 시작으로 신축 해우소 세면장을 지나 대웅전까지 신나게 제설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행자님들과 다 함께 도량 제설 후 눈사람을 만들고 실수로(?) 던져진 눈을 시작으로 눈싸움도 했습니다. 제설하고 난 뒤 실내에 모여서 나누어 먹던 다디단 과자의 맛은 일품이었습니다. 당시 공양 시간에 나오던 후식도 다른 행자님들에게 드리고 공양 시간에도 일부러 늦게 도착할 만큼 먹을 것에 탐닉하지 않던 저에게도 심금을 울리는 맛이었습니다.

11월 초순 수련원에서는 외부 봉사자분들과 수련원 상주 대중 전체가 모여 김장합니다. 배추가 3,000포기 정도였는데, 저는 그렇게 많은 배추는 태어나서 처음 봤습니다. 김장 울력을 하면서 염장된 배추를 수레로 옮기는 일을 했습니다. 오전 일찍부터 시작한 김장이라 해가 뜨기 전까지는 몹시 추워서 일이 고되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짬을 내어 쉬는 시간에 도반들과 옹기종기 모여 군고구마를 먹었는데 정말 꿀맛이었습니다. 저는 식탐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모든 기억이 음식으로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사실 식탐이 대단했나 봅니다. 배추를 전부 옮기고, 공양간 뒤에서 늙은 호박으로 죽을 쑤고 그 죽을 이용해 김장김치 버무릴 양념을 젓는 일을 했습니다. 회향한 지금도 김장할 때면 젓갈 대신에 호박죽을 이용한 수련원 특제 김치 양념이 떠오릅니다.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중에 김장할 기회가 있다면 다시 한번 만들고 싶습니다. 울력을 하면서 곳곳에 숨어 있던 소박한 행복을 느끼게 해준 시간이 참 소중합니다.

나를 알아가는 힘

백일출가 수련을 통해 인생의 방향성을 새로 제시받고, 회향 후에도 이어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백일출가를 통해 저의 내면을 더 알아갈 수 있었고 마음을 내는 방법, 마음을 내려놓는 방법 등 저를 책망하기보다는 마음을 받아주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무엇보다도 저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을 쓰는 방법을 배우니 엉켜있던 내면의 고민거리가 저절로 풀리는 상쾌한 기분이 듭니다. 또 일상에서 부딪히며 겪게 되는 고민은 한 달에 한 번 문경 수련원 파견 복귀 프로그램에서 법사님과의 일문일답을 통해 점검받는 시간을 갖습니다.

23기 백일출가 수료식(셋째 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지헌운 님)
▲ 23기 백일출가 수료식(셋째 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지헌운 님)

수행자라는 정체성

먹고사는 일에 쩔쩔매던 지난날을 되돌아봅니다. 백일출가를 결심했던 과거의 저를 가만히 떠올려 봅니다. 한 끼 밥을 먹기 위해 힘든 직장 생활을 버티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를 괴롭히던 그 시절의 저를 봅니다. 회향을 한 후, 일상에서 경계에 부딪힐 때면 저에게 묻습니다. ‘너, 고작 밥 먹으려고 백일출가 했니?’ 백일출가를 경험하며 저는 스스로 수행자라는 자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먹고사는 일에 급급하기보다 수행자라는 각성이 이루어진 후 삶의 방향은 달랐습니다. 경쟁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혼자서만 잘사는 법을 추구하기보다는 함께 잘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백일출가 수련 경험과 회향 후 정토회 활동은 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자산과도 같습니다. 마음이 가벼워지고, 무슨 일이든 흔쾌히 할 수 있게 된 변화된 저의 모습에 만족합니다. 올바른 삶의 방향과 가치관을 찾을 수 있었던 백일출가 경험을 자양분 삼아 앞으로도 수행자로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이 글은 <월간정토> 2024년 8월호에 수록된 백일출가 수행담입니다.

글_지헌운(23기 백일출가)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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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17

0/200

최영미

잘 읽었습니다
내 삶을 돌아보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2025-02-13 09:15:15

김영수

살면서 쉽게 하지 못할 경험을 하셨네요.
대견하고 이쁘십니다.

2025-02-12 09:03:43

실비아

백일출가 경험이 자양분이 되었군요 ~~ 함께사는 수행자가 되시길 응원합니다

2025-02-10 16: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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