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4.28. 백일법문 71일째, 반야심경 2강, 불교사회대학 15강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조건으로 차별할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71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경전 강의와 불교사회대학 강의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경전 강의를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110여 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으로 56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법상에 올랐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반야심경이 설해진 배경과 경전의 제목이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해 배웠고, 오늘은 두 번째 시간으로 반야심경의 첫 번째 구절을 본격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반야심경의 핵심적인 내용이 담긴 첫 구절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모든 고통에서 벗어났느니라.

“여기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바로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입니다. 오온이 공(空)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의미입니다. 다음 문장에서는 이 문장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부연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온(五蘊)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이렇게 다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색(色)입니다.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 첫 번째인 색이 공하다는 사실을 다음 구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상행식도 그러하니라.

원래는 오온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를 각각 다 이렇게 설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색이 공함을 설명하고, 나머지 수·상·행·식에 대해서는 ‘역부여시(亦復如是)’라고 요약해서 설명합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이와 같은 논리로 나머지 네 가지도 모두 공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핵심적인 내용이 이 첫 구절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그 이후의 내용은 이 구절을 해설하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모든 보살과 부처님께서도 이 길을 통해 성불하셨다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래서 반야심경 강의는 전체 경문(經文)을 골고루 다루기보다는 강의의 무게를 첫 줄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정신 작용, 색·수·상·행·식

오온(五蘊)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색(色)’은 무엇일까요? 색은 흔히 물질, 또는 육신을 뜻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만으로 오온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색은 감각 기관을 통해 인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고 아는 것, 듣고 아는 것, 냄새 맡고 아는 것, 맛보고 아는 것, 만져서 아는 것, 생각해서 아는 것, 이 모든 것이 색에 해당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통틀어 색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즉, 색은 감각을 통해 아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수(受)’입니다. 수는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거나 생각할 때 일어나는 ‘기분의 좋고 나쁨’을 의미합니다. 보고 듣는 작용 자체는 색(色)이고, 그때 일어나는 좋거나 나쁜 느낌이 수(受)입니다. 느낌은 볼 때도 일어나고, 들을 때도, 냄새 맡을 때도, 심지어 생각할 때도 일어납니다.

상(想)은 무엇일까요? 상은 기억하고 상상하는 작용입니다. 지금 당장 보고 듣는 것은 색에 해당하지만, 어제 봤던 것을 기억하는 것은 상입니다. 기록된 기억을 기반으로 내일 일어날 일을 추리하거나 상상하는 것 또한 상에 해당합니다. 상(想)은 이미 저장된 정보를 떠올리고 해석하는 정신 작용입니다. 이것은 마치 녹화된 필름을 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다음은 ‘행(行)’입니다. 행은 ‘의지 작용’으로 뭔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해서 ‘가 봐야지!’, ‘말해야지!’ ‘하고 싶다.’, ‘하기 싫다.’와 같은 행위를 유발하는 의지 작용이 모두 행(行)에 해당합니다.

마지막으로 ‘식(識)’입니다. 식은 지금까지 말한 색·수·상·행이라는 정신 작용이 일어나는 근본입니다. 내가 보고 아는 것,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이 모든 것에 작용하는 가장 바탕이 되는 정신 작용입니다. 식이 일어나면 동시에 업식(業識)이 형성됩니다. 즉, 식을 바탕으로 정신 작용이 일어나고 다시 식에 축적되어 반복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식은 모든 작용의 출발이자 동시에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담배 피우는 습관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습관으로 인해 담배 냄새를 맡으면 피우고 싶은 욕망이 일어납니다. 결국 담배를 피우게 되면 그 경험이 식에 누적되어 습관으로 남습니다. 이렇듯 정신 작용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바로 식입니다.

일체는 오온이다, 오온은 공하다

그렇다면 오온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 즉 내가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욕망하는 이 모든 작용이 바로 오온입니다. 우리 마음의 작용을 잘 관찰해 보면 이 다섯 가지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동차로 예를 들어 볼게요. 자동차는 움직이기도 하고, 불도 밝히고, 소리도 냅니다. 그러나 자동차를 분해해 보면, 그 안에는 스스로 움직이는 부품도, 소리를 내는 부품도, 빛을 내는 부품도 따로 없습니다. 그저 2만 개의 부품이 조합되어 그런 기능이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라는 것도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작용들이 일어나는 것일 뿐이에요. 작용이 일어나니까 무언가 실체가 있을 것처럼 느껴지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그 안에 어떤 고정된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승 불교에서는 ‘일체가 오온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이미 무아(無我)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오온 자체에 실체가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아(我)는 없지만 오온은 있다.’ 하는 의미로 점차 변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오온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는 실체가 있다.’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예컨대, 물에는 실체가 없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산소와 수소는 실체가 있다고 여긴 거예요. 이런 흐름은 과학에서도 '분자는 실체가 없지만 원자는 실체가 있다.’ 하는 돌턴의 원자설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물리학이 발전하면서 원자도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왜냐하면 핵 변화를 하면 원자의 성질이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원자 역시 더 작은 단위인 소립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결국 ‘오온이 공하다.’ 하는 말은 ‘아(我)’라는 실체가 없고 다만 다섯 가지 작용이 있을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금강경에서 ‘동산(東山)도 아니고 서산(西山)도 아니다.’라고 하니까 ‘그러면 비동비서산(非東非西山)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늘 무엇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법(法)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것은 공(空)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반야심경의 핵심 내용이 담긴 첫 구절에 대해 배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 다음 구절을 배우기로 하고 강의를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하고, 스님은 지하 공양간으로 이동하여 대중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오후 1시에는 북한 전문가가 찾아와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를 어떻게 풀어 가면 좋을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오후 2시에는 강대인 대화문화아카데미 명예 원장과 정성헌 한국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이 평화재단을 찾아와 스님과 미팅을 했습니다. 지난번 미팅에 이어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헌법 개정을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누고 돌아갔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불교사회대학 15강 강의를 했습니다. 현장에는 200여 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수업에는 190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한국 불교의 사회 실천’을 주제로 역사 속에서 한국 불교가 사회 문제 해결에 어떻게 참여해 왔는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먼저 스님이 오늘의 강의 주제를 소개했습니다.

“오늘 강의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사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 그중에서도 특히 성소수자 문제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차별은 철폐해야 하고, 불공정은 시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성별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내가 여자로 태어나야지!’ 하고 선택해서 태어난 게 아니에요. 그런데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다른 대우를 받는다면 명백한 차별입니다. 마찬가지로 흑인으로, 소수 민족으로, 혹은 낮은 계급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이것 역시 모두 차별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종교를 스스로 선택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많은 경우 부모의 신앙을 이어받는 일이 일반적입니다. 이렇게 선택하지 않았거나 선택할 수 없는 조건으로 인해 차별이 발생한다면, 그런 차별은 반드시 철폐되어야 합니다.

한편 ‘차별’과는 성격이 다른 ‘불공정’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사교육을 받지 못해 공부에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경우에는 차별이라기보다는 불공정한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는 객관적인 실력은 비슷하지만, 유학 경험이 없거나 지방 대학 출신이라는 이유로 취업에 불이익을 받는다면 이것 역시 불공정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면접을 볼 때 공정한 채용을 위해 블라인드 면접을 시행하기도 합니다. 출신 지역, 학교, 부모의 사회적 지위 등을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공정성을 높이려는 것입니다.

차별은 철폐해야 하고, 불공정은 시정해야 합니다. 법적으로 차별은 상당 부분 철폐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세계 곳곳에는 문화적으로나 관습적으로 아직 차별이 남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인도 사회에서는 여전히 여성 차별과 계급 차별이 존재합니다. 법으로는 차별을 금지한다고 명문화했지만, 오랜 세월에 거쳐 관습으로 굳어진 문화적인 차별은 시간이 더 걸려야 없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사회적 차별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 장애인에 대한 차별입니다. 과거에는 장애인을 병신이라 비하하고, 단지 ‘보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배제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장애우’라는 표현을 쓰는 등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대우가 점차 개선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소수자 차별, 안락사, 존엄사, 낙태 등 사회적 쟁점이 있는 주제들에 대한 설명을 이어 나갔습니다. 먼저 동성애 차별에 대해 불교는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는지 설명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조건으로 차별할 수 있을까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고 있는 주제는 ‘성소수자’ 문제입니다. 성소수자가 선천적인가, 아니면 후천적이고 병적인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성소수자 문제를 두고 갈등이 있고, 우리 사회 역시 정치적 쟁점으로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특히 보수 기독교 일부에서는 동성애를 신이 창조한 질서에 어긋난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반대합니다. 가톨릭 역시 성소수자에 대해 여전히 보수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계실 때, 많은 토론을 통해서 긍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긴 했지만, 동성애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규정을 바꾸려면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데,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그래도 동성애를 어느 정도 용인하려는 분위기가 생긴 것은 사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만약 게이인 사람이 주님을 찾아와 하느님의 바른 뜻을 구한다면, 내가 누구라고 그들을 심판하겠습니까?’

이 말은 하느님을 믿는 신앙 가진 이가 동성애자라고 해서 하느님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성애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과거 유대교는 ‘유대인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등장하고 나서는 이방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때 유럽에서는 흑인을 인간으로조차 보지 않고 구원도 받을 수 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노예로 부릴 수 있었던 거예요. 『로빈슨 크루소』라는 소설을 보면 아프리카 원주민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흑인 역시 동등하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보게 되었지만, 아직 동성애자에 대해서는 여전히 편견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불교는 성소수자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까요? 불교의 가치관은 자연에 기초합니다.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불교의 가치관입니다. 따라서 동성애가 인위적인 선택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라면, 동성애자라고 해서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개인이 느끼는 성정체성을 이유로 차별받아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차별은 철폐해야 하지만 요구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이유

다만 성전환 수술과 같은 문제는 조금 다릅니다. 성정체성에 맞춰 신체를 변화시키는 것은 단순히 차별 철폐의 문제와는 결이 다릅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욕구를 다 충족시켜야 하는가.’ 하는 불교적 관점에서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고로 얼굴을 다쳐서 성형 수술을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눈을 더 크고 동그랗게 만들거나, 코를 오뚝하게 높이거나, 가슴을 확대하는 등 미용을 목적으로 한 성형 수술은 신체에 대한 집착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성정체성에 따라 신체를 변형하는 것도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차별의 문제와는 구분해서 보아야 합니다.

동성애자의 결혼 문제도 비슷합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차별하거나, 병리적 현상으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일상생활에서 동성 간에 룸메이트로 함께 사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결혼은 오래된 사회적 약속이자 문화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는 사회적 토론을 거쳐야 합니다. 동성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차별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이 보편적으로 용인된 이후에 제도적으로나 법적으로 인정할 것인지를 사회적으로 합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또 하나, 동성 커플의 입양 문제도 논쟁거리입니다. 어른들끼리의 결혼은 사회적 합의로 결정할 수 있지만, 입양은 입양된 아이의 정신적 영향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갔을 때 동성애자 가정에서 왔다는 이유로 겪을 수 있는 사회적 어려움도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성소수자들은 ‘당연히 입양도 허용되어야 하고, 아이들도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요구가 다 수용될 수는 없습니다. 가난해서 과외를 못 받는 사람이 있으니 당장 사교육을 철폐하자고 주장한다고 해서 곧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키가 작은 사람에게 불공정하다고 하니 당장 키 제한을 두는 직업의 기준을 없애자고 주장해도 즉각 폐지되지는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요구와 차별은 구분해서 접근해야 합니다.

동성 결혼이나 입양을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단순히 차별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충분히 토론하고 합의해서 결정해야 할 문제입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학교 진학이나 군 복무, 정치 참여 등이 막힌다면, 그것은 명백한 차별입니다. 이런 차별은 철폐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성 결혼이나 입양 허용은 차별이 아니라 요구에 해당하는 사안입니다. 따라서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수용해 나가야 합니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차별은 철폐되어야 하고, 요구는 사회적 합의를 거쳐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입장입니다.”

이어서 안락사와 존엄사에 대한 설명을 이어 갔습니다.

“안락사란 회복이 불가능한 심각한 질병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투여하는 등의 방식으로 환자 스스로가 죽음을 선택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존엄사는 좁은 의미에서는 안락사의 한 형태입니다. 회복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존엄사도 넓게 보면 안락사의 범주에 포함됩니다.

사실 이런 연명 치료는 불교적 관점에서는 반생명적 행위로 여겨집니다. 살아 있는 생명을 함부로 죽이는 것이 반생명적인 것처럼, 이미 자연의 섭리로 생명이 끝난 상태인데도 산소 호흡기를 하거나, 목이나 배꼽에 구멍을 뚫어 생명을 유지하는 것 역시 반생명적인 행위로 봅니다. 얼마 전에 한 노보살님이 의식 없이 누워 계시는 상황에서 연명 치료를 계속할 건지 중단할 건지를 두고 가족들이 고민하는 일이 있었어요. 저에게 상담을 요청해서 ‘링거를 맞거나 산소 호흡기를 착용하는 정도는 괜찮지만, 목이나 배꼽에 구멍을 뚫고 연명 치료를 하는 건 안 하는 게 좋겠다.’ 이렇게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가족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는 연명 치료 중단을 결정하기가 쉽지는 않아요. 그래도 우리 사회는 연명 치료를 가능하면 안 하는 방향으로 하자는 사회적 합의에 많이 도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맞게 법을 고쳐 나가는 일이 남았습니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생명을 끊는 행위를 자살이라고 합니다. 이건 누가 말릴 수 없는 일이죠. 대부분 몰래 실행해 버리니까요. 그러나 자살은 살인 행위에 해당합니다. 단지 처벌할 수 없을 뿐이죠. 남을 죽인 경우에는 범인이 살아 있으니까 처벌할 수 있지만, 자기가 자기를 죽이면 처벌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도 본질적으로는 살인 행위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자살로 인해 가족들이 받는 정신적 충격은 타살로 인한 고통보다 더 클 수 있습니다. 가족 중 누군가가 자살했을 때 남은 가족들이 받는 정서적 피해가 훨씬 깊다는 점에서 자살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안락사와 존엄사, 생명 존중과 자기 결정권 사이에서 본 불교적 관점

그런데 백 살이 넘은 어떤 사람이 더는 살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살고 싶은 의욕도 없고, 인생을 충분히 살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런데 안 죽으니까 계속 살아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는 거예요. 실제로 호주의 한 유명한 학자가 100세가 넘은 나이에 ‘나는 이제 삶을 마치고 싶다. 편안하게 죽게 해 달라.’ 이렇게 요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호주에서는 이것이 법률상 허용되지 않아서 결국 스위스로 가서 안락사를 택한 사례입니다. 이외에도 통증이 극심해서 본인이 요청해서 안락사를 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 제삼자인 의사나 누군가가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적극적 안락사라고 합니다. 반면, 의사는 단지 약을 처방해 주고, 환자가 스스로 주사기 등을 이용해 생을 마감하는 것을 소극적 안락사라고 합니다. 이러한 형태의 안락사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점차 허용되는 경우가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안락사는 궁극적으로 ‘자기 신체에 대한 자기 결정권’의 문제입니다. 불교적 가치관에서는 내가 타인의 생명을 해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자기 자신의 생명을 헌신하는 것은 불교 경전에서 용인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실제로 도를 구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선택은 오히려 미화되기도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실제로 육체적 질병으로 인해 극심한 통증 속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례가 경전에 일부 등장합니다. 그런 사례들에 대해 부처님께서 옳다거나 그르다는 판단을 내리신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부처님께서 현장에 찾아오셔서 주변 사람들을 위로하고, 장례를 함께 치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처럼 불교 경전에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 생명을 끊어서는 안 된다.’ 하는 식의 단호한 금지 명령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안락사도 일정 부분 허용될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 부작용도 따릅니다. 예를 들면, 남편이 아내를 간호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안락사라는 이름으로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겠죠. 실제로 현실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내가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는데, 남편이 10년 넘게 간병하다가 지쳐서, 혹은 그 반대로 아내가 남편을 간호하다가, 혹은 자식이 부모를 간병하다가 살인을 저지르거나 동반 자살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첫째, 간병이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둘째, 의료비가 지나치게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안락사는 자칫 합법적 살인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심리적 압박입니다. 어떤 사람은 본인의 선택이라며 안락사를 요청하지만, 실제로는 가족의 눈치를 보거나 압박을 받아 결정을 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겉으로는 자의적 결정처럼 보여도 사실상 타의에 의한 것일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신중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안락사나 존엄사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의 위원회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사 혼자 결정하기도 어렵고, 가족이 결정하기에도 부담이 큽니다. 따라서 의료인, 종교인, 사회학자 등 사회적 식견이 있는 인사들로 위원회를 구성해서 환자의 요청을 심사해야 합니다. 위원회는 환자의 요청을 접수한 뒤, 현재의 건강 상태, 살아가기 어려운 사정, 가족의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합니다. 그 결과 안락사를 허용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시행하고, 산소 호흡기를 제거하는 등의 조치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특정 개인이 단독으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공공 기관의 판단에 따라 제도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시스템이 우리 사회에 빨리 도입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낙태를 어떻게 볼 것인지 설명했습니다.

“낙태 문제도 앞에서 언급한 쟁점들과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상담을 해 보면, 낙태를 한 여성에게 죄책감을 과도하게 심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종교가 너무 엄격하게 죄책감을 심어 주죠. 제가 지방의 어느 절에 가 보니 ‘당신의 아기가 지옥에서 울고 있어요.’ 하는 문구가 절 앞에 붙어 있었어요. 이런 문구는 여성들에게 심리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줍니다. 그래서 낙태한 아이를 천도하기 위해 절을 찾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천도는 일종의 위로일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돈벌이에 이용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낙태를 하지 않도록 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한 면도 있지만, 낙태한 사람에게 엄청난 죄책감을 심어 주는 부작용도 있는 것입니다.

낙태를 바라보는 불교적 관점과 사회적 해법

낙태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동거 중의 임신, 성폭행에 의한 임신, 또는 양육할 경제적 여건이 안 되는 경우 등 이유는 매우 다양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유로 임신이 되었든 태어나는 아이에게는 어떠한 잘못도 없습니다. 아이는 부모가 결혼했든 안 했든, 혹은 인공 수정이든 강제적인 상황이든, 생물학적으로 수정이 이루어진 결과로 태어나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도덕적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거나 ‘미혼모의 아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낙인을 찍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차별은 반드시 철폐되어야 합니다. 그 부모가 어떤 조건에 놓여 있었든 그것은 부모의 문제일 뿐 아이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사회적 차별을 없애고 아이를 양육하는 부담을 사회 전체가 나누어 갖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특히 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오늘날 이와 관련한 사회적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생물학적으로 성년이 된 16세 이상의 청소년이 아이를 낳았다면, 낙태보다는 출산을 우선하도록 권장하면서, 그 청소년이 정상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사회가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것입니다. 출산한 청소년이 직접 양육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산모와 아이 사이의 법적 관계를 단절할 수 있는 제도도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야 산모도 정상적인 생활을 지속할 수 있고, 아이 역시 입양 등을 통해 안정된 환경에서 자라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아이를 키우는 책임을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책임으로 인식해 나간다면, ‘낙태를 허용할 것이냐, 금지할 것이냐’ 하는 법적 논의를 넘어서 보다 근본적인 해법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이런 낙태 문제에 대해 가톨릭을 비롯한 일부 종교에서는 철저하게 금지하는 입장입니다. 불교 역시 불살생이라는 계율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생명을 존중하여 태어난 인연을 이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여성의 자기 신체에 대한 결정권이라는 측면에서는 산모의 의사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양측 주장에 모두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종교적 주장이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그 주장 자체가 과연 과학적이고 객관적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출산하도록 하되, 출산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여성에게 불필요한 죄책감을 주지 않도록 하는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사회적으로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들을 불교적 관점에서 어떻게 볼 것인지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왜 남을 도와야 하는가’를 주제로 불교와 복지 실천, 자비의 사회화, 구호의 원칙, 자원봉사에 대해 배우기로 하고 강연을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마음 나누기를 하였고, 스님은 정토회관으로 돌아와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72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주간반 정토불교대학 9강 수업을 하고, 저녁에는 저녁반 정토불교대학 9강 수업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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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한문으로 축약해서 쓰여있어 이해하기 어려운 반야심경, 스님의 해설,설법에 공부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5-05-01 12:35:27

정 명

스님이 말씀하신 안락사, 낙태에 대한 사회적인 시스템 구축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

2025-05-01 10:24:33

하니

감사합니다

2025-05-01 09: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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