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6.1.31. 인도성지순례 8일째, 쿠시나가르
“부처님이 떠난 뒤,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인도성지순례 여덟째 날입니다. 오늘은 바이샬리를 떠나 쿠시나가르로 향했습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여정을 따라 케사리아탑과 춘다의 공양터,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셨던 카쿠타강을 지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열반당과 부처님의 몸을 화장한 라마바르총을 순례했습니다.

스님은 이른 시간에 일어나 원고를 정리하고 조용히 출발을 준비했습니다. 새벽 4시 30분, 순례단 전원이 차량에 오르자 버스는 바이샬리를 떠나 어둠 속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약 40킬로미터를 달려 새벽 6시 10분에 케사리아탑에 도착했습니다.

탑 주변은 어둠과 짙은 안개에 휩싸여 형체가 잘 분간되지 않았습니다. 스님과 순례단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이동했습니다.

잠시 후, 안개 너머로 탑의 희미한 윤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스님과 순례단은 탑 앞에 이르러 고요한 염불 소리와 함께 탑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탑돌이를 마친 뒤, 스님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케사리아탑을 바라보며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탑은 케사리아탑(Kesaria Stupa)입니다. 이곳은 부처님께서 열반을 예고하신 뒤 바이샬리를 떠나실 때, 끝까지 따라오던 바이샬리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로 발우를 건네주신 곳입니다. 이를 기념해 바이샬리의 릿챠비족이 부처님의 발우를 모셔 와 이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또 다른 설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출가를 결심하고 카필라성을 떠나 일곱 나라를 지나고 아노마 강을 건너 이곳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다고 해요.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자리를 기념해 이 탑을 세웠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탑의 규모를 보면, 아무래도 출가를 기념한 탑이라는 설명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이네요.”(웃음)

순례단은 다시 버스를 타고 약 두 시간가량 이동했습니다. 오전 8시 40분, 쿠시나가르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파바(Pava)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춘다의 공양터는 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순례단은 버스에서 내려 육교를 건넌 뒤 좁은 마을 골목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습니다.

길을 걷던 중, 한 아이의 가방 지퍼가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스님은 다가가 지퍼를 잠가주려 했지만 고장 난 상태였습니다. 스님은 함께 있던 법사님에게 옷핀을 이용해 가방을 잠가주도록 하고, 다시 길을 안내했습니다.

춘다의 공양터 주변은 여느 성지와는 달리 다소 어수선했고, 관리 상태도 좋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그곳에서 순례단과 함께 조용히 탑돌이를 했습니다.

탑돌이를 마친 뒤, 탑 앞에 자리를 잡고 스님은 이곳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여러분이 도착한 이곳은 춘다의 공양터입니다. 당시 이 마을에는 대장장이의 아들 춘다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처님이 자신의 망고원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법문을 들었고, 깊은 감동을 받아 공양을 올리고 싶다고 청했습니다. 부처님은 그 청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부처님은 기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공양을 드신 뒤 심한 복통과 탈수 증세를 보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은 혹시라도 춘다가 죄책감을 느낄까 봐 오히려 그를 위로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춘다를 불러 '여래에게 정각을 이루기 직전에 올린 공양과 열반에 들기 직전에 올린 공양은 그 공덕이 같다'는 말씀으로 춘다를 위로하시고 다시 쿠시나가르를 향해 마지막 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춘다의 마음부터 살피신 것입니다. 그 점에서 이곳 춘다의 공양터를 참배하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춘다의 공양터를 떠나 다음 일정지로 이동하려는데 쿠시나가르 관할 경찰 서장 일행이 나와있었습니다. 스님이 인사를 건넸습니다.

“다른 일들도 많으실 텐데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저희는 스님과 순례단을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순례를 잘 하실 수 있도록 협조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스님은 경찰들과 인사를 나눈 뒤, 순례단과 함께 카쿠타강으로 향했습니다. 이 강은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몸을 씻고 물을 드신 곳으로 전해집니다.

스님은 강가에 내려가 얼굴을 씻고, 강물로 목을 축인 뒤 대중에게 말했습니다.

“괜히 저 따라서 하다가 나중에 배 아프다고 하지 마세요. (웃음) 그럼 천천히 강을 보고 오세요.”

스님의 말에 강가에는 다시 한 번 웃음이 번졌습니다.

오전 10시 15분, 순례단은 쿠시나가르에 위치한 캄보디아 절 숙소에 도착해 아침 공양을 했습니다. 공양을 마친 뒤, 스님은 국제국 회원들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외국인 회원들은 순례 기간에 무엇을 먹습니까?”

회원들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밥이요! 저희도 같은 음식 먹고 있습니다.”

“순례 일정을 따라올 만합니까?”

“이제 슬슬 힘이 듭니다. 저희 생각엔 한국인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다른 인종 같아요.”

스님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한국인이 다 그런 건 아닙니다. 세상에는 성(性)이 세 가지 있다고 하죠. 남성, 여성, 그리고 정토회 여성. 우리 정토회 여성들이 정말 대단하죠.”(웃음)

스님의 이야기에 국제국 회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와 웃음으로 화답했습니다. 스님은 성지순례 일정이 외국인 참가자들에게 혹시 벅차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낯선 환경과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모두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스님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공양을 마친 뒤, 순례단은 걸어서 열반당으로 향했습니다. 오전 11시 20분, 마침내 열반당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대중들을 잠시 기다렸다가, 모두가 모이자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한 줄로 열반당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앞서 도착한 스태프들이 열반당 앞에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순례단이 모두 자리에 앉자 스님이 쿠시나가르에 대해 설명해주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이 바로 쿠시나가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곳입니다. 여러분 앞에 보이는 건물 안에는 부처님의 열반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누워서 돌아가실 때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 뒤편에는 이곳이 부처님의 열반지임을 상징하는 사리탑이 있고, 조금 더 뒤쪽에는 기초만 남아 있는 또 하나의 탑이 있는데, 이것은 아난다의 탑이라고 전해져 내려옵니다.

사라쌍수 아래,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누운 자리

부처님 당시 이곳에는 ‘사라’라고 불리는 나무가 숲을 가득 이루고 있었습니다. 인도에서는 '쌀'이라고 부르고, 경전에는 '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리수나 반얀트리는 한 그루가 둥글게 퍼져서 느티나무처럼 넓은 그늘을 만들지만, 사라나무는 폭이 좁고 위로 곧게 자랍니다. 그래서 사라나무 숲에서 자리를 깔려면 자연히 두 그루 사이에 깔게 됩니다. 이것을 '사라쌍수'라고 부릅니다. 사라나무 두 그루 사이에 자리를 깔았다는 뜻입니다. 지금 열반당 앞에 두 그루의 사라나무가 서 있는데, 바로 이런 나무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저 두 그루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저런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고, 그 두 그루 사이에 자리를 깔고 누우셔서 마지막 열반에 드신 것입니다.”

설명이 끝난 뒤, 순례단은 예참을 올리고 경전 독송을 함께했습니다.


열반당 안으로 들어가기 전, 스님은 순례단에게 조용히 안내했습니다.

“이제 열반당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내부 공간은 크지 않지만 500명이 모두 함께 들어가야 합니다. 모두가 참배할 수 있도록 서로 배려해 주시고, 자리를 잡을 때에는 법사님들의 안내를 잘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러면 열반당 안으로 입장하겠습니다.”

순례단은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열반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장엄하게 누워 계신 부처님의 열반상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순례단이 서서히 내부 공간을 채워가자, 석가모니불 정근 소리도 점점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곧 정근을 멈추고, 열반상 앞에서 500명의 순례단이 예불을 올렸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오다, 어느덧 이 자리, 열반상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순례단은 저마다의 감동을 가슴에 담고, 정성스레 예불을 올리고 발원문을 낭독했습니다.


참배를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습니다.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칸타키강을 건너 몇몇 마을을 지나 파바 마을에 이르셨습니다. 그곳의 한 망고나무 아래에 잠시 머무르셨는데, 그 나무의 주인은 춘다라는 대장장이의 아들이었습니다. 대장장이는 수공업자 계층에 속했으며, 역사적으로 수공업자는 대체로 신분이 낮은 하층민에 해당했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춘다 역시 가난한 하층민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지금도 집집마다 망고나무를 몇 그루씩 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남부 지방에서 집집마다 감나무를 심어 두는 것과 비슷한 풍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춘다는 자신의 망고나무 아래에 부처님께서 머무르고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찾아와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순간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부처님과 대중에게 공양을 올리고 싶다고 청했습니다.

그해는 극심한 가뭄이 든 해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가난한 춘다가 수백 명에 이르는 대중에게 공양을 올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그해를 기록한 다른 경전들을 살펴보아도 수백 명 규모의 대중공양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직 암나팔리의 공양이 있었을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춘다의 공양 청을 허락하셨습니다. 춘다가 돌아간 뒤 아난다는 부처님께 공양을 허락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춘다에게는 그럴 만한 여건이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춘다가 능히 공양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하셨습니다.

열반을 앞두고 드신 마지막 공양

이튿날 아침, 공양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말을 듣고 대중이 춘다의 집에 가 보니 정말로 공양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음식에 대해 경전에는 ‘딱딱하고 부드럽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딱딱한 음식도 있고 부드러운 음식도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지금도 공양을 할 때 집주인이 음식을 차례로 나누어 줍니다. 먼저 밥을 담고, 그다음 채소를 올리며, 마지막으로 달이라 불린 콩 요리를 덜어 줍니다. 그런데 그 공양 가운데 ‘스카라맛다바’라는 음식이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음식을 받으신 뒤 춘다에게 이 음식은 대중에게 주지 말고 땅에 묻으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도 소화할 수 없는 음식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공양을 마친 뒤 부처님께서는 춘다를 위해 설법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후 아난다를 부르며 배가 아프다고 하셨고, 다시 길을 떠나려다 심한 통증을 느끼는 듯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얼마 가지 못해 잠시 쉬어 가자고 하신 뒤 설사를 하셨는데, 피가 섞여 나왔다고 전해집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급성 식중독 증상에 해당합니다.

원인은 그 스카라맛다바라는 음식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스카라’는 이 지역 고대어로 돼지를 뜻합니다. 이 때문에 서양 학자들 가운데는 그것이 돼지고기였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그해는 극심한 가뭄이 든 해였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대중공양으로 올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스카라맛다바가 정확히 어떤 음식이었는지는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벵골 지역을 여행하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곳에서는 토란을 ‘맛다바’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스카라맛다바는 돼지 토란, 즉 야생 토란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야생 토란은 인도와 같은 열대 지역에 흔히 자생하는 식물로, 독성이 있어 반드시 삶아 물에 담가 독을 제거한 뒤 먹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드신 음식은 이러한 독성이 충분히 제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 춘다와 같은 하층민들은 평소 이런 야생식물을 먹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미 몸이 적응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부처님은 왜 죽음의 문턱에서 춘다를 위로하셨을까요?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심한 설사를 하신 뒤 자리에 누우셨습니다. 그리고 아난다에게 춘다의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아난다는 춘다가 몹시 괴로워하고 있으며, 대중 사이에서는 춘다의 공양은 공덕이 없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수행자들이라 노골적인 비난 대신 점잖게 표현했을 뿐, 사실상 춘다의 공양 때문에 부처님께서 위독해졌다는 뜻이었습니다. 춘다는 정성을 다해 공양을 올렸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춘다를 불러 곁에 앉게 하시고,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공덕이 있는 공양이 무엇인지 아는가. 가장 큰 공덕이 있는 공양은 여래에게 올리는 공양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공덕이 있는 공양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여래가 무상정등각을 이루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드신 공양이고, 다른 하나는 여래가 열반에 들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드신 공양이다.’

부처님께서 무상정등각을 이루기 전에 마지막으로 드신 공양은 수자타가 올린 공양이었습니다. 그리고 열반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드신 공양은 춘다가 올린 공양이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춘다의 공양이 부처님의 죽음과 연관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춘다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기 전 마지막 공양을 올린 사람입니다. 이 두 관점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부처님의 이 말씀으로 인해 춘다는 비난받을 존재가 아니라, 가장 큰 공덕을 지은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보통은 독이 있는 줄 알면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모르고 먹었더라도 이상을 느끼면 토해 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죽음에 이르면서도, 그 공양을 올린 이를 염려하고 위로하며 오히려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 분은 부처님 한 분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자타의 공양은 수자타를 위대하게 만들었고, 춘다의 공양은 부처님의 위대한 인격을 드러내는 일화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제자 유다를 강하게 비난합니다. 자칫하면 춘다 역시 그런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춘다의 공양을 가장 큰 공덕이 있는 공양으로 기립니다. 그래서 훗날 이 일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우고, ‘춘다의 공양’을 전해 오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 떠난 뒤,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까요?

부처님께서는 이제 열반에 들기 위해 이곳 사라쌍수 아래에 자리를 펴고 누우셨습니다. 그때 아난다가 대중을 대표해 질문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늘 부처님을 의지하며 수행해 왔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우리는 앞으로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걱정하지 마라. 여래가 없는 세상에서 의지해야 할 것이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이 바로 사념처다.’

사념처란 네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신념처(身念處, Kayanupassana)입니다. 몸을 있는 그대로 관하는 것입니다. 몸은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허물어질 존재이기에,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이를 한문으로는 ‘관신부정’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수념처(受念處, Vedananupassana)입니다.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하면 그것이 곧 괴로움임을 알게 됩니다. 이를 ‘관수시고’라고 합니다. 셋째는 심념처(心念處, Cittanupassana)입니다. 마음을 관해 보면 끊임없이 변하고 요동칩니다. 이를 ‘관심무상’이라 합니다. 넷째는 법념처(法念處, Dhammanupassana)입니다. 법을 관하면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를 ‘관법무아’라고 합니다. 이러한 통찰에 기초해 나온 수행법이 바로 위빠사나의 핵심인 사념처관입니다. 아난다는 다시 질문했습니다.

‘우리는 늘 부처님을 생각하며 수행해 왔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걱정하지 마라. 여래가 없는 세상에서는 사성지를 생각하라.’

사성지란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 도를 이루신 곳, 처음으로 법을 설하신 곳, 그리고 열반에 드신 곳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실 때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무엇을 깨달으셨는지, 설법의 핵심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열반에 드실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늘 되새기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바른 수행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난다는 또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우리는 늘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해 왔는데,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누구를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까?’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가르침인 경과 율을 스승으로 삼아라.’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있다면 부처님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항상 함께 있는 것과 같고,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부처님 곁에 있다 해도 부처님을 모르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절을 짓고 불상을 만드는 형식이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계위사(以戒爲師)’, 곧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는 가르침이라 합니다.

세월은 덧없다, 부지런히 정진하라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할지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합니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수행자는 그런 걱정을 하지 마라. 그것은 재가 신자들이 그들의 풍속대로 할 것이다.’

부처님의 장례는 이곳 쿠시나가르의 말라족이 그들의 풍속에 따라 치렀습니다. 당시 말라족 사회에서는 카스트가 중요했고, 부처님은 왕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왕족에 맞는 장례법으로 화장을 했습니다. 이는 불교식 장례가 아니라,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열반에 드셨을 당시 그 지역 사람들이 따르던 세속의 풍속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는 장례 형식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자신의 장례조차 수행자들이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재가 신자의 장례까지 스님들이 세심히 챙기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많은 사찰이 장례와 천도재 수입으로 운영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원래는 한 사람씩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려 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몰려와 가족 단위로 대여섯 명씩 나누어 인사를 드리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렇게 해도 한밤중이 되어서야 모두 돌아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다 돌아간 뒤, 부처님은 마치 꺼져가는 등불처럼 기력이 쇠해 보이셨습니다. 아난다는 ‘이제 부처님께서 편안히 열반에 드시도록 우리도 물러납시다.’라고 말했고, 대중이 자리를 비운 뒤 부처님은 조용히 누워 계셨습니다. 그때 지팡이를 짚은 한 노인이 찾아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수바드라였습니다. 그는 이교도였기 때문에 부처님이라는 호칭 대신 ‘고타마를 만나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고타마를 만나야 하겠다.’

‘안 됩니다.’

‘나는 꼭 만나야 한다.’

‘지금은 어렵습니다. 이제 숨을 거두시기 직전이니 조용히 하셔야 합니다.’

‘아니다. 내가 꼭 물어볼 게 있다. 고타마가 열반에 들면, 내가 물어볼 사람이 없어진다.’

문밖에서 이런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이 소리를 들으신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걱정하지 마라. 그를 들여보내라. 그는 나를 귀찮게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물어볼 것이 있어서 온 것이다.’

수바드라는 들어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고타마여, 이 세상에는 수많은 스승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것이 옳다고 말하고, 또 다른 이는 그건 틀렸다고 말합니다. 도무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고타마는 그들 가운데 누가 옳고 누가 틀린지 아십니까? 그들이 모두 틀렸습니까? 그렇다면 바른길은 무엇입니까?’

부처님이 숨이 넘어가는 순간인데도 그는 자신의 의문을 장황하게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수바드라여, 나는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사람의 마음에 탐욕이 있고, 성냄이 있고, 어리석음이 있다면, 그가 어떤 말을 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여덟 가지 바른 길, 곧 팔정도를 설하셨습니다. 남이 무슨 말을 하느냐를 따지기보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바르게 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수바드라는 즉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출가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승단에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이교도가 출가하려면 곧바로 계를 주지 않고, 석 달 동안 공동체와 함께 지내며 대중의 동의를 얻어야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수바드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석 달이 아니라 삼 년을 기다리라 해도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대중을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문이 있으면 지금 물어라. 내가 열반한 뒤에 ’그때 물어볼걸‘ 하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지금 무엇이든 물어라.’

그러나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세 번이나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친구가 친구에게 묻듯이 편안하게 물어라.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래도 질문이 없자, 아난다가 대신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미 많은 법을 설하셨고, 우리는 그 법을 이해했습니다. 더 이상 의문은 없고, 앞으로 정진하여 증득할 일만 남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지막 유훈을 남기셨습니다.

‘아난다여,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여래의 몸은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 있으리라. 세월은 덧없다. 부지런히 정진하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이 말씀을 남기신 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 마지막 모습은 특별하지 않았고, 그저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일상의 모습이었습니다.”

법문이 끝난 후, 순례단은 열반당 안에서 자유롭게 참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떤 이는 사진을 찍었고, 어떤 이는 한쪽에서 조용히 정진에 몰두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다시 열반상 앞으로 나아가 두 손을 모아 참배했습니다.

스님은 열반당 경내를 천천히 둘러본 후 그곳에서 정진하고 있는 수행자들에게 다가가 조용히 보시금을 건넸습니다.

열반당 참배를 마치고 2시 30분에 라마바르총으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은 부처님의 육신이 화장된 자리였습니다.


순례단이 라마바르총 앞에 모두 자리를 잡자, 스님은 부처님의 사리가 어떻게 나뉘고 지켜져 왔는지, 그리고 그 선택 속에 담긴 평화의 의미를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도착한 이곳은 라마바르총, 또는 라마바르 수트파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부처님을 화장한 장소, 즉 부처님의 장례가 치러진 곳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에서 부처님을 화장했을 때 그을음 하나 없이 아주 깨끗하게 타서 뼈만 남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땅에서 저절로 물이 솟아나 장작불을 모두 껐고, 이후 그 유골을 수습했다고 전해집니다.

사리를 둘러싼 갈등, 전쟁 대신 평화를 선택하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다는 소식이 퍼지자, 여러 나라와 부족들이 부처님의 사리를 모셔 가 자신의 나라에 기념탑을 세우겠다며 이곳으로 몰려왔습니다. 카필라바스투의 석가족은 ‘부처님은 우리 종족이니 우리가 모셔야 한다’고 했고, 꼴리족은 ‘부처님은 우리의 외손이니 우리가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아자타삿투 왕은 자기 나라에서 모셔야 한다고 했고, 바이샬리의 리차비족 역시 자신들이 모셔야 한다고 나섰습니다. 이곳 쿠시나가르의 말라족도 ‘부처님을 화장한 우리가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사리를 모시겠다고 나서면서 다툼이 커졌고,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분위기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때 도나 바라문이 나서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평생 마음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를 설하신 분입니다. 그런 부처님을 공경한다면서, 사리를 모시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제가 공평하게 여덟 몫으로 나누겠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에 동의했고, 여덟 부족은 각각 사리를 나누어 가져가 자기 나라에 탑을 세웠습니다. 도나 바라문은 사리를 나눈 사람이 사리를 가질 수는 없다고 여겨, 사리 대신 사리를 담았던 항아리를 가져가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후 또 한 부족이 찾아와, 부처님을 화장하고 남은 재를 가져가 탑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을 기리는 원형탑은 모두 열 기가 세워졌습니다. 사리탑 여덟 기, 항아리 탑 한 기, 재 탑 한 기입니다.

이제부터는 탑이 세워진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부처님 열반 후 약 200년이 지나, 아쇼카 왕이 인도를 통일하고 부처님의 제자가 된 뒤, 부처님의 행적을 따라 순례하며 곳곳에 기념탑을 세웠습니다. 이때 아쇼카 왕은 단순히 탑만 세운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흔적을 봉안하기 위해 기존의 여덟 사리탑 가운데 일곱 기를 헐어 그 안의 사리 일부를 꺼내 기념탑에 봉안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꼴리족이 세운 랑그람 사리탑만은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이 탑을 지키는 용왕이 나타나 ‘내가 부처님의 사리를 잘 모시고 있는데, 네가 나보다 더 잘 모실 수 있겠느냐?’라며 탑을 허무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내일 우리가 가려는 곳이 바로 그 탑입니다. 제 생각에는, 랑그람 사리탑은 물에 둘러싸여 섬처럼 된 지형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지형상 뱀이 많았을 수도 있고, 여러 이유로 사람이 쉽게 손을 대지 못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도굴꾼들이 탑에 손을 대기만 하면 벼락을 맞아 죽거나 중병에 걸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사람들은 이 탑에 손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발굴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탑을 보호하기 위해 공포를 조성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이런 이유로 처음에는 여덟 기의 사리 원형탑이 있었지만, 그중 일곱 기에서만 사리 일부가 기념탑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한 기는 그대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남방불교에서는 절을 지을 때 사리탑이 중심이 됩니다. 사리탑을 가운데 두고, 그 주변에 요사를 배치합니다. 반면 대승불교에서는 불상이 중심이 됩니다. 탑이 절 한가운데 서 있더라도, 불상이 모셔진 대웅전이 중심 공간이 됩니다. 그러나 남방불교에서는 불상이 아니라 부처님의 사리탑이 사원의 중심 역할을 합니다.”

이어서 순례단은 지난 1년 사이 고인이 되신 정토행자들을 비롯하여 각자의 인연을 떠올리며 영가 천도 의식을 올렸습니다.


천도의식을 마친 뒤, 모두 함께 사홍서원을 외우며 라마바르총 참배를 마쳤습니다.

참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스님은 숙소 앞까지 호위를 해준 경찰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하루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들어가셔서 쉬세요.”

“네, 알겠습니다. 내일은 네팔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새벽 2시에 이동할 예정이에요. 나오지 않아도 됩니다.”

“아닙니다. 내일 새벽에 뵙겠습니다. 국경까지 모시겠습니다.”

스님은 오후 5시에 숙소에 도착해 저녁 공양을 하고 원고를 교정한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새벽 2시에 기상해 오전 6시에 국경을 넘어 네팔로 향할 예정입니다. 열반을 지나 다시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자리, 룸비니를 향해 길을 나섭니다.


2026 3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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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식

“보통은 독이 있는 줄 알면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모르고 먹었더라도 이상을 느끼면 토해 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죽음에 이르면서도, 그 공양을 올린 이를 염려하고 위로하며 오히려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 분은 부처님 한 분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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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과 중생의 차이를 잘 나타내는 일화입니다.

2026-02-03 06:48:25

이년옥

춘다의 공양을 위대하게 만드신 부처님~순례단의 한사람이 되어 법문을 들은듯합니다~고맙습니다

2026-02-03 06:45:52

정의웅

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

2026-02-03 06:4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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