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4.29. 백일법문 72일째, 정토불교대학 인간 붓다 1강
“부처님의 탄생 이야기는 왜 신비하게 묘사되었을까요?”

안녕하세요.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72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정토불교대학 강의를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뒤 정토불교대학 강의를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정토사회문화회관은 형형색색의 연등으로 환하게 물들었습니다.

오전 10시 15분이 되어 정토불교대학 오전반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지하 대강당에는 140여 명의 입학생이 자리했고, 온라인 생방송 반에는 17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지난 시간을 끝으로 근본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 배우는 ‘실천적 불교 사상’ 과목을 모두 마치고 오늘부터는 ‘인간 붓다’ 과목을 새로 시작했습니다. 삼귀의와 수행문을 함께 읽고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본격적으로 부처님의 일생을 공부하기 전에 부처님이 태어난 당시 인도의 자연환경, 역사, 사회적 배경이 어떠했는지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주제로 공부했습니다. 그 가르침의 핵심은 ‘사람은 괴로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입니다. 부처님은 ‘그렇다. 사람은 괴로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괴로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의 괴로움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리석음을 깨우치면 누구나 괴로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와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론에 대해서 우리는 일곱 차례에 걸쳐 공부했습니다.

왜 붓다의 삶을 알아야 할까요?

이제부터는 실제로 괴로움 없이 살아간 사람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분은 어떤 분이었는지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역사적으로 괴로움 없이 살아간 첫 번째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 법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바로 고타마 싯다르타입니다. 그는 '깨달은 자'라는 의미를 가진 ‘붓다’라고도 불립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삶을 공부하는 이유는 그분도 우리처럼 인간 사회와 역사적 현실 속에서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며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욕하거나 비난하고 협박할 때, 또는 가까운 사람이 죽거나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겼을 때, 부처님은 어떻게 반응하고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셨을까요? 만약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에 부처님이 출현하신다면 어떤 모습일지는 그의 삶을 돌아보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상상하는 신비로운 인물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가지만 어딘가 다른 모습을 지닌 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들을 알기 위해 우리는 부처님의 삶을 구체적으로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에서는 추상적이고 신적인 존재로서의 부처님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한 인간으로서 부처님이 어떻게 고뇌하고, 어떤 어려움에 부딪히며,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화적인 요소를 최대한 걷어내고, 한 인간으로 살아간 부처님의 모습을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강의 제목이 ‘인간 붓다’입니다.

브라만 권위의 몰락과 새로운 질서의 태동

부처님이 출현하셨던 기원전 6세기의 시대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 아소카 대왕이 인도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이 시기는 브라만 문명의 쇠퇴기였습니다. 당시 인도에서는 브라만의 권위가 점차 약화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소수의 아리안 족이 다수의 원주민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고 있었던 시기입니다. 고도로 발달한 철기 문명을 바탕으로 정복 전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대략 300여 개의 나라들이 세워졌습니다. 이들 중에는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섞여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는가 싶더니, 다시 나라들끼리 싸우는 혼란기가 시작됩니다. 큰 나라들은 작은 나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복속시키면서 크고 강한 나라 중심으로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패권이라고 합니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패권 경쟁이 끊임없이 벌어졌습니다. 중국의 역사와 비교하면 춘추 전국 시대와 비슷했습니다.

이후에는 큰 나라들이 작은 나라들을 강제로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저항하면 무력으로 제압해 노예로 삼고, 항복하면 흡수 통합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제국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부처님이 출현하셨던 시대에는 절대 왕정 국가로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이 있었습니다. 다른 큰 나라들도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귀족들의 협의체가 나라를 이끌고 있었고, 그중 한 사람이 왕이라고 불리긴 했지만 절대 왕정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와 로마의 공화정과 비슷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유사한 정치 체제를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경우, 왕이 있었지만 절대 왕정은 아니었어요. 각자 군대를 거느린 다섯 개의 귀족 세력을 오가(五加)라고 하는데, 그들이 모여 한 사람을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신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섯 부족의 촌장이 화백 회의(和白會議)에서 왕을 추대했습니다. 지배 세력 내부의 협의로 이루어진 협의체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에서는 왕이 절대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권력을 차지하려는 경쟁도 치열해졌습니다. 아버지가 오래 살면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고, 형제 수십 명을 죽여 왕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소카 대왕도 형제 아흔아홉 명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형제가 그렇게 많을 수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왕에게는 후궁이 여럿 있었고, 그러다 보니 왕위를 둘러싼 싸움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상인 계급은 각국을 오가며 무역을 통해 거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거대 재벌이 등장한 셈이에요. 크샤트리아 계급은 거대 왕국을 형성하고, 상인 계급은 거대 재벌이 되었지만, 브라만 계급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브라만은 신분상 제일 높은 계급이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이나 부를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브라만들은 주로 종교 의식을 바탕으로 왕과 부자들에게 제사 지내주는 일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브라만의 권위는 점점 약해졌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서로 전쟁을 벌이는 나라들이 모두 같은 브라만 신을 믿고, 같은 브라만 계급이 나서서 기도를 해주는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전쟁에서 이겨도 신의 힘으로 이겼다거나, 기도를 잘해서 이겼다고 말할 수가 없죠. 결국 어느 나라의 군대가 더 강했느냐가 전쟁에서 이기는 이유라는 것을 사람들이 점차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브라만이 기도를 잘해서 전쟁에 이겼다고 여겼지만, 그 믿음이 흔들리면서 브라만의 절대 권위도 함께 무너지기 시작한 거예요. 한마디로 사회가 점점 세속화되어 간 겁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기도보다도 강한 군대와 최신 무기가 필요했고, 그러려면 결국 돈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정치권력은 점차 거부 장자와 결탁하게 됩니다.

이렇게 전통 사회의 질서가 붕괴하기 시작했지만, 노예 계급은 계속 증가했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사람들은 본래 노예가 아니었어도 모두 노예 계급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승리한 쪽은 정복한 나라의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아 나눠 가졌어요. 정치적으로는 끊임없이 싸움이 이어졌고, 경제적으로는 거부 장자가 등장하면서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사치와 향락을 즐겼습니다. 성스러운 가치가 점점 사라지고, 윤리와 도덕은 땅에 떨어졌으며, 돈과 권력, 쾌락만이 난무하는 시대로 변해 갔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전통적인 종교와 철학은 더 이상 세상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일이 신의 뜻이라 여겼지만, 사람을 수도 없이 죽이고도 벌받지 않는 왕들을 보며 기존의 철학과 믿음만으로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혼란의 시대에 새로운 길을 연 사람들, 출가 사문의 등장

그래서 새로운 사상가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세상을 설명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며 ‘신흥 사상가’라고 불렸습니다. 브라만은 태어날 때부터 사제 계급이 되었지만, 신흥 사상가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출가 수행자가 되기로 선택했습니다. 집을 떠나 검소하게 먹고 입으며, 당시의 물질적 풍요와 쾌락을 추구하는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흐름이 한편에 있었다면, 해탈을 위해 고행을 추구하는 흐름도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주장과 실천을 하는 무리가 수도 없이 등장했습니다. 이 새로운 사상가들을 ‘사마나(sāmaña)’라고 불렀습니다. 사마나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사문(沙門)’입니다. 이들은 집을 나와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출가 사문’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부처님이 출현하신 당시 인도의 사상가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태어날 때부터 사제 신분이 주어진 브라만 계급입니다. 이들은 전통성을 가진 주류 사상가들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저마다 세상을 이해하는 다양한 주장을 펼치는 신흥 사상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어진 신분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집을 나와 수행의 길을 택한 출가 사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왕이나 거부 장자들은 어느 쪽 사상을 더 따랐을까요? 새로운 시대의 권력자들은 기존의 신분 질서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신흥 사상가들의 사상을 추종했습니다.

중국 역사도 이러한 흐름과 비슷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춘추 시대를 지나 전국 시대로 접어드는 과정에서 철기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그 결과 양쯔강 이남 지역이 개척되었고, 전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큰 나라들이 작은 나라들을 통합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중국 천하는 일곱 개의 나라로 정비되었어요. 이것이 전국 칠웅(戰國七雄)입니다. 이러한 혼란기에 수많은 사상가들이 등장했습니다. 공자와 맹자의 유가, 노자와 장자의 도가, 이사와 상앙의 법가, 순자의 겸양가 등 수많은 사상가들이 사상을 펼치며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한편, 소진과 장의 같은 외교가들은 합종책과 연횡책을 통해 각국의 외교 전략을 주도했습니다. 사상가들은 세 치 혀로 군주를 설득해서 재상이 되는 일이 흔했습니다. 오늘은 거지같이 살다가 내일은 재상이 되기도 하고, 이 나라에서 쫓겨나 저 나라에서 재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상가들은 국가 개념이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인도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붓다가 출연한 것입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붓다가 왜 출가했는지, 사문유관(四門遊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알기 어렵습니다.”

이어서 부처님이 탄생하는 모습을 경전에서 어떻게 기록했는지 설명한 후 강의를 마쳤습니다.

스님이 무대에서 내려오자, 사회자가 학생들에게 수행 연습 과제를 안내했습니다. 학생들은 다음 주까지 수행 연습을 꾸준히 해본 후 다시 만나기로 하고, 조별로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스님은 지하 1층 공양간에서 대중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에는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과 미팅을 했습니다.

정토회 공동체에 들어와 오랫동안 회계 업무를 맡아 봉사하다가 회향한 이미경 님이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삼배로 스님에게 인사를 한 후 그동안의 안부를 나누었습니다.

“정토회에서 살았던 경험 덕분에 밖에서도 잘 살고 있습니다. 예전에 들었던 스님 법문이 어떤 뜻이었는지 이제 와서 깨닫는 게 많습니다.”

“30년이나 살았으니 정토회에서 청춘을 다 보냈죠. 먹고사는 건 어떻게 해결하고 있어요?”

“일하다가 얼마 전에 일자리를 잃어서 다시 구하고 있습니다. 실업 수당도 나오고, 내년에는 노령 연금도 나옵니다.”

“정토회에서는 돈을 안 받고도 일했는데, 밖에서는 돈을 주는데 못할 일이 어디 있겠어요?” (웃음)

“맞습니다. 정토회에서 산 공덕으로 가볍게 살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도 이제 연세가 많으시니 건강을 좀 챙기면서 사셔야죠.”

“무슨 건강을 챙기면서 살아요? 그냥 일할 수 있을 때까지 하다가 죽는 거죠.”

“아무튼 감사드립니다. 스님 가르침 덕분에 잘 살고 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저녁에는 영상팀 봉사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저녁 식사를 사 주었습니다. 백일법문 기간 동안 매일 촬영을 하고 있어서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정토불교대학 저녁반 8강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지하 대강당에는 직장을 마치고 달려온 150여 명의 입학생이 자리했고, 온라인 생방송 반에는 34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삼귀의와 수행문을 함께 읽고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오전 강의처럼 부처님이 살던 당시 인도의 자연 조건, 역사, 문화를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탄생에 대해 설명한 후 전생담이 경전에 기록된 배경과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부처님의 출생을 묘사한 경전의 기록을 보면 단순히 ‘어느 날 어디에서 태어났다.’라고만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의 모습이 아주 신비롭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태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잉태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 잉태 또한 경전 속에서는 신비로운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잉태 이전의 이야기까지 등장합니다. 그것을 전생담이라고 합니다.

부처님 탄생 이야기는 왜 신비하게 묘사되었을까요?

그렇다면 이런 부처님의 일생을 도대체 누가, 언제 기록한 걸까요? 이것은 부처님이 살아 계실 당시가 아니라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거의 1000년 가까이 흐른 뒤에야 기록된 것입니다. 이미 부처가 된 이후에 그의 일생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출생을 비롯한 여러 일화가 신비롭게 묘사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기록들이 좀 황당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내용을 전부 사실로 믿으면 종교가 되고, 반대로 전부 거짓이라며 무시하면 무신론자가 됩니다. 우리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중도적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러한 신비로운 묘사가 무엇을 상징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 여부를 따질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생애를 기록한다는 일은 일종의 문학적 기술 작업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들이 상징적 언어를 통해 감정을 전달하듯, 경전 속 이야기 역시 그 상징이 담고 있는 의미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 오신 날과 같은 종교 행사를 생각해 보면 이러한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오히려 스토리로써 강한 문화적 힘을 발휘합니다. 스토리가 있어야 사람들이 재미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불교에는 부처를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이 존재합니다. 첫째, 한 인간이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기 불교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부처님은 전생부터 끊임없이 수행해 왔으며, 이생에서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승 불교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부처님은 본래부터 부처였으며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나투어 이 세상에 나타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승 불교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불교는 주로 대승 불교에 속하기 때문에 부처님을 신처럼 묘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본래부터 부처였던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나고 자란 이야기 자체가 중심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불자들은 오히려 부처님의 일생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토회에서 공부하는 불타관(佛陀觀)은 초기 불교의 관점입니다. 즉, 부처님은 본래부터 부처였던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나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었다는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은 본래부터 부처였다는 관점은 불교가 종교화되면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선불교에서 깨달아서 부처가 되었다고 하면서 다시 초기 불교의 관점으로 돌아오게 되죠.

수많은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가 나온 이유

그렇다면 부처님의 전생담을 기록한 경전은 어떤 관점에 서 있는 것일까요? 바로 소승 불교의 불타관에 해당합니다. 소승 불교의 관점에서 기록된 경전들은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들이 매우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이러한 전생 이야기를 모은 경전을 자타카(Jataka), 한문으로는 본생담(本生譚)이라고 합니다. 총 547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 독립적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전생에 수행자, 코끼리, 원숭이, 황금 사슴 등으로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전생 이야기가 생겨났을까요? 여러분도 배웠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연기법,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삼법인, 오온 등 많은 교리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리는 당시 글자를 모르는 일반 대중에게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솝 우화처럼 재미있고 상징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불교 사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게 된 것이죠.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살을 내어준 수행자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전생에 수행자로 태어나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수행을 하고 있는데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살려 줬어요. 그러자 뒤따라온 매가 ‘그 비둘기는 나의 먹이이니 내놓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수행자가 주지 않자, 매가 ‘당신은 왜 하나만 알고 다른 하나는 모릅니까? 비둘기 목숨은 중요하고 매의 목숨은 중요하지 않습니까?’ 하고 항의했어요. 이 말에 수행자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고 묻자, 매가 ‘나는 오늘 저녁 한 끼 먹을거리가 필요합니다. 비둘기 몸무게만큼의 살코기를 주면 비둘기를 포기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수행자는 자신의 살을 베어 매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즉, 하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몸을 희생한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자타카에 547가지나 전해지고 있는 거예요.

사슴 한 마리의 자비가 세상을 바꾼 이야기

또 다른 예로 ‘황금 사슴’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전생에 황금빛 사슴으로 태어나셨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왕은 사슴 고기를 즐겨 먹으며 매일 사냥을 나갔고, 매일 사슴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사슴들은 활을 피해 도망가다 다섯 마리 이상이 다치기도 했고, 매일 불안에 떨며 살아야 했어요. 그러자 사슴 무리의 왕인 황금 사슴이 인간들의 왕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매일 사슴 한 마리를 활로 쏴서 죽이니 우리가 도망치다 많은 사슴들이 놀라고 다칩니다. 우리가 순번을 정해 매일 한 마리씩 스스로 잡히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슴들은 자기 순번이 올 때까지 편안하게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왕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사슴들도 당분간은 평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차례가 된 암사슴이 슬퍼하고 있어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죽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뱃속에 새끼를 품고 있어 이 새끼를 낳고 나서 죽고 싶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슴 왕은 순번을 바꾸어 주려 했지만, 그러면 다른 사슴이 하루 먼저 죽게 되는 셈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사슴 왕은 자신이 대신 죽으려고 왕의 요리사에게 갔습니다. 요리사가 이것을 왕에게 보고했고, 왕이 깊이 감동하여 말했습니다.

‘사람도 이처럼 의로운 이가 드문데, 사슴이 이렇다니! 오늘은 사슴 고기를 먹지 않겠다.’ 하고 황금 사슴을 살려 주었습니다. 하지만 사슴 왕은 돌아가지 않고 말했습니다.

‘저는 오늘 운 좋게 살았지만, 내일이면 또 다른 사슴이 죽을 것입니다.’

이에 왕은 ‘앞으로 사슴 사냥은 하지 않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모든 사슴이 살아남게 되었잖아요. 그런데도 사슴 왕은 머뭇거리며 떠나지 않았습니다. 왕이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합니다.

‘사슴 고기를 안 드신다면 다른 짐승 고기를 드실 테지요. 그러면 그 짐승들은 또 어떻게 됩니까?’

왕은 ‘앞으로 다른 짐승 고기도 먹지 않겠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사슴 왕이 다시 묻습니다.

‘그럼 새 고기는요?’

‘앞으로 새도 먹지 않겠다.’

‘물고기는요?’

‘좋다, 물고기도 먹지 않겠다.’

이렇게 해서 왕은 결국 모든 살생과 육식을 금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단순한 우화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자기만 살자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희생과 더불어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추구하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사원의 벽에 벽화로 그려지고, 조각으로 새겨져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알고 유적지를 방문하면 그 그림과 조각에 담긴 의미가 보이게 됩니다. 이처럼 부처님이라는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전생담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이러한 이야기들을 단순히 사실이냐 아니냐의 관점으로만 보지 말고, 그 안에 얼마나 깊은 가르침과 교훈이 담겨 있는지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부처님의 일생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전에 당시 사회의 조건과 역사적 배경에 대해 배웠습니다. 다음 주에는 청년 싯다르타의 고뇌를 주제로 부처님의 청년 시절에 대해 배우기로 하고 8강 수업을 마쳤습니다.

이어서 사회자가 학생들에게 수행 연습 과제를 알려준 후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스님은 서울 정토회관으로 돌아와 일과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73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주간반 수행법회 생방송을 하고, 오후에는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과 미팅을 한 후, 저녁에는 저녁반 수행법회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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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

스님 법문을 들으며 좁았던 시각이 열립니다. 마음이 트이니 가볍고 걸림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2025-05-02 09:37:40

묘향심

감사합니다. 스님의 가르침대로 사니까 나날이 행복합니다.

2025-05-02 08:27:01

견오행

늘 함께 합니다.감사합니다.()()()

2025-05-02 08: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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