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한국 근대 불교의 중흥조이시고, 민족 독립운동가이신 용성조사님의 열반 85주기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5시에 서울을 출발하여 장수 죽림정사로 향했습니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가운데 산 너머로 해가 떴습니다. 죽림정사로 향하는 길은 봄기운이 완연했습니다.
휴게소에 들러 아침 식사를 한 후 오전 8시가 넘어서 죽림정사에 도착했습니다. 죽림정사는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이시고 이 운동의 막후 기둥이셨던 용성조사님의 탄생 성지에 세워진 절입니다.
스님은 먼저 물빛공원으로 이동하여 백용성 조사 기념관 공사 현장을 둘러보았습니다. 작년 연말에 공사를 착공하여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국가보훈부, 전라북도, 장수군,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가 힘을 합해 연면적 300평 규모의 2층 건물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이어서 죽림정사 도량을 한 바퀴 돌며 보수가 필요한 곳이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 후 교육관으로 가서 용성조사 열반 85주기 기념식을 시작하기 전에 역대 전등 조사들을 기리는 다례재에 참석했습니다.
다례재가 끝나고 요사채로 이동하여 내빈들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최훈식 장수 군수께서 특별히 시간을 내어 죽림정사를 방문해 주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군 행정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군 행정에는 별 문제가 없습니까?”
“군 행정은 둘째치고 나라가 더 걱정입니다. 국가 행정이 마비가 되어 있으니까 지방 행정도 그 영향으로 예산 삭감이 심합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정동영 국회의원이 도착하여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날마다 광화문에 나가서 열심히 집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계속 기각이 나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대통령 탄핵 심판까지 기각이 나면 나라가 큰일 나잖아요.”
“너무 걱정할 것 없어요. 첫째, 대통령 탄핵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기각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러면 균형이 맞게 되는 측면이 있어서 탄핵 반대 세력의 저항감이 낮아지는 측면이 있어요. 그래서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둘째, 대통령 탄핵까지 기각이 되면, 누가 봐도 판결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드니까 민심이 양분되는 게 아니라 하나로 모아지게 됩니다. 그러면 전 국민이 일어나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될 테니까 그것도 걱정할 일이 아니에요. (웃음)
그리고 지금 한국에 대통령이 부재한 상황이 외교상 유리한 측면도 있습니다. 만약 한국에 대통령이 있으면 트럼프 대통령이 계속 양보를 요구할 텐데, 부재한 상황이니까 표적이 안 되고 있어요. 임기 초반에 압박을 강하게 하기 마련인데, 대통령 부재로 그 상황을 피해 가니까 좋은 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뜻대로 되는 것만이 다 좋은 것은 아니에요. 때로는 뜻대로 안 되는 것이 결과적으로 더 좋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노력하되 속으로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스님 말씀을 들으니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네요.”
시국 현안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법회를 시작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내빈들과 함께 행사가 열리는 교육관으로 향했습니다. 10시 정각에 용성조사 열반 85주기 특별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경남지부, 대전충청지부, 광주전라지부 등 인근 지역에서 400여 명이 참석하여 자리를 가득 메워 주었습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 선열에 대해 묵념을 하고, 용성조사님의 행장을 낭독했습니다.
참석한 내빈 소개를 한 후 몇몇 내빈들의 축사를 청해 들었습니다. 정동영 국회의원, 최훈식 장수 군수, 이종섭 장수군의회 의원, 박용근 전라북도 도의회 의원 등 여러분들이 자리를 빛내 기념 축사를 해주었습니다.
이어서 경남지부 회원들이 용성조사님의 열반과 대한민국의 희망을 주제로 '입체 낭독극'을 보여주었습니다. 조사님의 열반송인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를 제목으로 한 낭독극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했습니다.
용성조사님의 유훈이 동헌 완규조사님에게로, 다시 불심 도문큰스님에게로 이어지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펼쳐지자 큰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낭독극이 끝날 때 배우들이 ‘온겨레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참석한 대중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힘차게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온겨레의 노래는 용성조사님이 작사하시고, 불심 도문 큰스님이 정리하신 곡입니다. 조국의 독립과 불교 중흥에 대한 용성조사님의 확고한 뜻이 노래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다음은 ‘용성조사의 삶, 대한민국의 희망을 말하다’하는 주제로 스님이 기념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용성조사님의 탄생부터 열반까지 평생 동안 해오신 일들을 한 편의 영화를 보듯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석가여래부촉법 제68세, 석가여래계대법 제75세, 조선 불교 중흥률 제6조 이신 용성조사님께서 열반하신 지 8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용성조사는 1864년 음력 5월 8일에 이곳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864년은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대신사가 순교한 해이기도 합니다. 최제우 대신사는 ‘사람이 곧 한울님이다’ 하고 주창하신 분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말이 왜 중요한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시대에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울님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고, 한울님의 아들을 자처한 왕이 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사상이 바로 선천 시대의 사상입니다. 그런 시대에 최제우 대신사는 ‘사람이 곧 한울님이다’ 하고 주창한 겁니다. 그 말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다’ 하는 뜻이기 때문에 왕이 나라의 주인이었던 당시에는 가히 혁명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백성을 현혹시킨다고 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사형을 시켰습니다.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꾼 사람들
그러나 최제우 대신사가 주창한 사람이 곧 이 세상의 주인이며,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사상은 후천개벽의 소식이었고, 이것은 곧 국민 주권 시대인 후천 시대를 불러왔습니다. 선천 시대가 왕이 나라의 주인인 시대라면, 후천 시대는 백성이 나라의 주인인 시대입니다. ‘후천개벽’이라는 말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시대를 열자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후천개벽 사상이 바탕이 되어 동학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동학혁명은 수십만 명의 희생을 치르고 결국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나라의 주인 역할을 하고 있었던 왕과 귀족에 의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다스릴 힘을 잃고 청과 일본을 끌어들였고, 결국 외세에 의해 동학혁명이 실패하게 됩니다.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수십만 명의 주민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왕과 귀족은 권력을 움켜쥐고만 있다가 제 백성이 아닌 외세에 나라를 갖다 바친 꼴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나라를 잃고 맙니다.
용성조사는 이 소식을 듣고 나라의 녹을 먹고사는 삼정승, 육 판서, 팔도감사, 삼백육십 고을의 수령 방백을 다 찾아가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절 인연이 아니라며 아무도 참여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라의 주인을 자처한 그들은 나라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되찾을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귀족이 아닌 평민들이 모여 종교인을 중심으로 3·1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나라를 빼앗긴 해는 1905년입니다. 을사늑약으로 나라를 빼앗기자, 당시 산속에서 수행하던 용성조사님은 급히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임동수 거사의 후원을 받아 중국으로 건너갔고, 임시 정부를 준비하기 위해 당시 상해에서 인삼 무역을 하던 사람들과 연계해서 자금을 축적했습니다. 그리고 1919년에 3·1운동이 들불처럼 번지자 곧바로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설치할 수 있게 지원을 했습니다. 3·1운동은 왕이 주인인 나라가 아닌 백성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국호를 대한제국에서 백성이 주인인 나라인 대한민국으로 정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후천개벽이라는 선조들의 염원이 담긴 이름입니다. ‘한(韓)’은 우리 선조들이 세운 첫 번째 나라인 한(韓) 나라의 이름입니다. 한나라가 분열되어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三韓)이 되었고, 삼한을 하나로 합치자는 것이 신라의 통일 정신인 삼한일통(三韓一統)입니다. 바로 그 삼한을 하나로 합한 새로운 나라가 대한(大韓)입니다. 그래서 청나라로부터 주권을 빼앗겼다가 되찾아 자주국임을 선언할 때 대한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당시에는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는데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용성조사님의 염원을 담아 대한민국이라고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그동안 용성조사님이 보내준 자금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출발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출발할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기여를 한 분이 바로 용성조사님입니다. 1945년에 상해에서 귀국한 백범 김구 선생님이 손병희 선생님 묘소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용성조사님의 영정이 모셔진 대각사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은 용성조사님의 영정 앞에 엎드려서 ‘그동안 용성조사님이 보내준 자금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이 얘기가 그동안 말로만 전해져 내려왔지 증거가 될 만한 자료가 없었는데, 용성조사님의 열반 80주기를 준비하다가 이시영 선생을 비롯한 상해 임시 정부 요원 30여 명이 백범 김구 선생님과 함께 대각사를 방문한 사진이 발견되었습니다.
또 용성조사님은 1930년에 윤봉길 의사에게 삼귀의와 오계를 주고 상해에 있는 김구 선생에게 보내 의거토록 했습니다. 이 사실도 그동안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윤봉길 의사가 불교가 아닌 천도교 신자일지 모른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겨울 일본에서 윤봉길 의사 재판 기록을 조사하던 중에 윤봉길 의사가 종교란에 자기 손으로 불교라고 적은 자료가 나왔습니다.
뒤늦게 용성조사님의 행적을 증명할 자료들이 속속 나오고는 있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증거들이 묻혀 있습니다. 현재는 도문 큰스님과 동헌 완규조사님 그리고 그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용성조사님의 행적을 밝힐만한 기록을 하나하나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제 와서 굳이 진실을 밝혀 뭐 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우리가 모르던 수많은 분들의 희생과 노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당대 뛰어난 선지식인이었던 용성조사님마저 수많은 행적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데, 하물며 일반 독립운동가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오늘의 대한민국이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는 어려운 시기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한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 과보를 오늘날 우리가 받고 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평생 암울한 시대를 살았지만 늘 희망을 만들어가신 분
1920년에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전승한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 소비에트 연방 자유시로 갔다가, 소위 백군이라는 러시아 왕당파와 홍군이라는 공산당 혁명군과의 갈등에 휘말려서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용성조사님은 3.1운동으로 1919년에 체포되었다가 1921년에 감옥에서 나와 그 소식을 듣고 비밀리에 중국으로 갔습니다. 순종 왕비가 몰래 제공해 준 2만 원과 임동수 거사가 제공해 준 돈으로 당시 북간도라고 불렸던 지금의 조선족 자치주 안도현 봉녕촌과 명월촌에 각각 700 정보(町步)의 땅을 샀습니다. 각각 210만 평에 해당하는 넓은 땅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 독립운동가들과 그의 가족들이 살 수 있도록 했습니다. 1923년 안도현에 항일 독립군이 재건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27년에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그 지역 조선인을 모아서 간도특설대가 설치되었습니다. 용성조사님의 보이지 않는 후원으로 가장 먼저 독립군이 재건되었지만,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는 어려웠던 것입니다. 종교적인 울타리로 위장을 해서 쉽게 꼬투리를 잡히지는 않았지만, 결국 1938년에 내부 첩자에 의해 일망타진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이 용성조사님이 돌아가시는 데에 하나의 큰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용성조사님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근거지를 마련해서 독립운동가를 양성하였고, 상해 임시 정부뿐만 아니라 만주에서 무장 투쟁하는 사람들에게도 재정과 인력을 지원했습니다. 그 암울한 시대를 살고 나서도 돌아가실 때는 ‘앞으로 60년 후에는 대한민국이 다시 일어설 것이다’ 하며 희망을 품으라는 유훈을 남기셨습니다.
작년 한 해 남한과 북한은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몰렸습니다. 지금 밝혀진 많은 사실들을 보면 그때 군사적 충돌 없이 넘어간 것이 정말 하느님이 보우하셨다고 할 만큼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용성조사님의 뜻을 받들어서 6.13 만인대법회를 열었습니다. 우리들의 간절한 염원의 결과는 연말을 기해서 국내외에서 나타났습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고, 국내에서는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는 바람에 전쟁의 위험이 현저히 낮아졌습니다. 물론 그 일들로 인해 국내가 좀 혼란스럽고, 국제 정세도 불안해지긴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위험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안주하고 구경만 하고 있자는 말이 아닙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바탕 위에 우리가 꿈꾸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용성조사님은 1864년에 태어나서 1940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당시는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일 때, 즉 일본이 승승장구할 때였습니다. 살아 계신 동안 한 번도 희망적인 분위기가 없었습니다. 태어날 때는 삼도 민중 봉기가 있었고, 외세가 끊임없이 쳐들어와서 양요가 일어났고, 동학혁명, 청일전쟁, 러일전쟁, 을사늑약, 한일합병 등 계속해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어려운 시기에도 독립운동을 하고, 경전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민중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설득과 대화를 하며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분의 삶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어려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은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나선다고 해서 죽을 일도 없고, 감옥에 갈 일도 없습니다.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위로부터 약간의 비난을 받는 정도라서 크게 손해 보는 일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희망을 품고 전진하기보다 안주해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용성조사 열반일을 맞아 용성조사님의 유훈을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미완의 대한민국을 완성하는 데에 힘을 모아보면 좋겠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가슴에 새기며 사홍서원을 했습니다.
특별 법회를 마친 후 내빈들은 점심 식사를 하러 이동을 하였고, 스님은 현장에 참석
한 대중들과 함께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랜만에 모였는데 대화를 좀 나누고 가자고 요청이 들어왔어요. 내빈들을 접대해야 하는데 양해를 구하고 시간을 내었습니다. 누구든지 손을 들고 질문해 보세요.”
한 시간 동안 다섯 명이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어릴 때 왕따를 당한 이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일이 어려워졌다며 어떻게 극복하면 좋을지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왕따를 당한 후 미움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에 힘듭니다
“저는 중학교 때 1년간 왕따를 당했습니다. 그 이후로 사람들과 관계 맺는 일이 어렵습니다. 회사나 정토회에서 여자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면 긴장이 됩니다. 그렇다고 혼자 있으면 또 외톨이처럼 느껴집니다. 상대가 기분이 안 좋으면 마치 제 탓 같아서 자책하고 후회가 됩니다. 사람들에게 미움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다독여야 할까요? 그리고 어떤 기도문으로 기도하면 좋을까요?”
“그것은 트라우마라는 일종의 병입니다. 먼저 정신 건강 의학과에 가서 치료 받는 게 우선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그냥 병을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교통사고로 한쪽 팔을 잃었다고 합시다. 첫째, 병원에 가서 고치든지, 못 고치면 의수라도 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또 하나의 길은 팔이 하나 없는 것을 그냥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팔이 두 개인 사람들을 보며 ‘나는 왜 모자라지?’ 하는 생각을 하지 말고, ‘팔이 하나라도 있는 게 정말 다행이다. 두 개 다 없으면 어쩔 뻔했나?’ 이렇게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것처럼 안 죽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입니까. 왕따를 좀 당하면 어때요?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지면 그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남이 나를 쳐다보거나 상대가 화를 낼 때 내 책임인 것처럼 느껴진다면 ‘아, 이것은 내가 가진 병이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됩니다. ‘또 병이 도지네.’ 이렇게 내가 안고 있는 병을 인정하고 살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제가 8살, 14살이 된 딸이 둘 있습니다. 두 아이 모두 친구 관계를 맺는 걸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큰 애는 너무 힘들어해서 현재 학교도 자퇴한 상태입니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너무 미안합니다. ‘내가 이래서 아이들이 이렇게 된 건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 것 같다가 아니라, 내가 그래서 아이들이 그렇게 된 거예요.”
“제가 이 문제를 극복해야 아이들도 잘 살아갈 것 같습니다.”
“내가 지금 팔이 하나 없는 상태인데 ‘극복해야지’ 하면서 팔이 새로 생기길 바란다고 생기겠어요? 없는 건 없는 줄 알아야 합니다. 첫째, 아이들이 그런 상태가 된 건 엄마의 영향이 맞아요. 하지만 질문자가 나쁜 의도로 그런 건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 나는 키가 작습니다. 그래서 아이들도 키가 작아요. 그 책임은 나한테 있죠. 그렇다고 내가 죄를 지은 건 아니잖아요. 나는 피부가 까맣습니다. 아이는 하얬으면 좋겠는데 까맣다면 내 책임이죠. 그래도 그게 죄는 아니잖아요. 나로부터 생긴 일은 맞지만, 그게 죄는 아닙니다. 내가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보니 아이를 키울 때 무의식 중에 심리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수는 있어요. 그렇다고 내가 아이들을 나쁘게 하려고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만약 팔이 하나 없고, 눈이 안 보이고, 귀도 안 들리는 상태인데 결혼했다고 합시다. 그러다 보니 아이도 눈이 안 보이게 됐어요. 내 영향은 맞아요. 그렇다고 내가 죄를 지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첫째, 심리 치료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아이들도 치료 받을 수 있는 데까지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치료가 안 된다면, 그 상태를 받아들여야 해요.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죽을 때까지 환자로 살아가는 겁니다. 정상이란 게 따로 없습니다. 내가 팔이 하나가 없으면, 팔이 하나 없는 지금의 내가 곧 정상입니다. 10년 전에는 팔이 두 개 있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지금은 팔이 하나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나는 지금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면서 지금 상태를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관점이 전환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주식을 만 원 주고 샀는데 5천 원으로 떨어졌다고 합시다. 그러면 기준을 이제 5천 원으로 바꿔야 해요. 5천 원에서 6천 원이 되면 천 원 오른 것이 되고, 4천 원이 되면 천 원이 떨어진 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계속 만 원을 기준으로 삼으면 10년 내내 적자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것처럼 기준은 내가 정하는 것입니다. 눈이 두 개인 것이 정상이었는데, 다쳐서 눈이 하나가 되었으면 이제는 눈 하나가 정상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기준을 지금 상태에 맞춰 바꿔야 해요.
질문자도 치료해서 나아질 수 있을 만큼 노력하되, 더 이상 치료가 안 되면 지금의 나를 기준으로 새로 기준을 설정해야 합니다. 지금 내 상태가 다시 기준이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100이고 우리 아이는 80이라면, 우리 아이는 80부터 시작하면 돼요. 그런데 자꾸 엄마가 100이라는 기준을 들이대니까 아이가 학교 가는 게 부담이 되고 힘들어지는 겁니다.
‘괜찮아. 엄마도 상처를 갖고 있지만 잘 살잖아. 결혼도 하고, 너희 둘도 낳고 잘 키웠잖아. 걱정 마.’
이렇게 긍정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아이들에게도 긍정적으로 말해주어야 합니다. ‘엄마가 죽을죄를 지었다. 나 때문에 너도 이렇게 됐다’ 이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 키가 작으면 아이의 키가 작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속상해하면 ‘괜찮아. 엄마도 키가 작지만 잘 살고 있잖아’ 이렇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키가 크면 좋겠지만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나요? 이런 관점에서 아이들을 봐야 합니다.
제가 올해 나이가 73세입니다. 그런데 계속 20대 시절만 생각하면서 ‘그때는 산도 잘 올라갔는데’, ‘그때는 눈도 밝았는데’, ‘그때는 목소리도 좋았는데’ 하면서 과거를 그리워하며 산다면 현재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70대의 내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 걸어 다닐 수 있어서 다행이다’, ‘목소리가 이 정도라도 나오니까 다행이다’ 이렇게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늘 과거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열등감 속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스님, 기도를 할 때 명심할 수 있는 기도문 하나만 주세요.”
“지금 이대로 좋습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스님과 대중이 오프라인 공간에서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대중들은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모둠별로 마음 나누기 하고 함께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도시락을 먹은 후에는 죽림정사 도량 곳곳에서 울력도 했습니다.
스님은 내빈들이 기다리고 있는 요사채로 이동하여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먼저 용성조사 기념관 건립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고 계신 전라북도와 장수군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나라가 혼란스러운데 국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모로 애쓰고 있는 정동영 의원에게도 격려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내빈들을 배웅한 후 곧바로 오후 1시 30분부터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이사회를 시작했습니다. 회의에서는 2024년도 사업 보고와 결산을 마무리하고, 2025년도 사업 계획과 예산안을 함께 검토한 후 폐회했습니다.
“네, 다른 건의 사항이나 토의할 내용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우리 군의원님과 이사님, 그리고 유수스님께서 백용성조사 기념관 실무를 거의 전담하다시피 수고해 주셨는데, 다 같이 박수 한번 칩시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사회를 마치고 스님이 우려되는 점을 하나 덧붙였습니다.
“제가 전국을 다니며 현장들을 살펴보았는데,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습니다. 최근 전국적으로 체육 시설이든 기념관이든 건물이 너무 과잉으로 지어져서, 지자체들이 유지 관리 비용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설악산에서부터 동해안을 따라 거제도까지 주요 관광지, 해수욕장, 온천장을 다녀봤더니 제대로 운영되는 시설이 30%밖에 안 됩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시설을 추가적으로 지을 때 사회적 변화와 트렌드를 신중히 고려해서 접근해야겠습니다.”
이어서 2시 30분에는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총회를 했습니다. 온라인으로도 많은 회원들이 참석했습니다. 방금 전 이사회에서 의결한 내용을 보고하고, 회원들의 의견을 수렴한 후 총회를 마쳤습니다.
스님은 오후 3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점심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공양간 봉사자들이 식어버린 밥과 국을 다시 데워 주었습니다. 스님은 대접에 밥과 나물을 조금씩 덜어 비빈 후 빠르게 식사를 마쳤습니다.
오후 3시 30분에 죽림정사를 출발하여 서울로 향했습니다. 고속도로 위를 3시간을 달려 오후 6시가 넘어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했습니다. 저녁에는 실내에서 업무를 보고 원고 교정을 한 후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36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3층 설법전에서 경전 강의 5강을 하고, 저녁에는 지하 대강당에서 불교사회대학 5강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6
임영현
선조들의 피와 땀 덕분에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2025-03-28 16:45:38
정광명
지금 이대로 바랄것이 없습니다
스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2025-03-28 09:31:11
굴뚝연기
[ᆢ석가여래부촉법 제68세, 석가여래계대법 제75세, 조선 불교 중흥률 제6조 이신 용성조사님ᆢ][지금의 조선족 자치주 안도현 봉녕촌과 명월촌에 각각 700 정보(町步)의 땅을 샀습니다.ᆢ그 땅에 독립운동가들과 그의 가족들이 살 수 있도록ᆢ결국 1938년에 내부 첩자에 의해 일망타진당하고ᆢ]일제감시땜에.용성스님의 행적들을 다불태워 흔적이없음이 안타깝습니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