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30일째 날이고, 정토불교대학 2강 수업을 하는 날입니다. 서울에는 밤새 눈이 소리 없이 내려 쌓이더니, 아침이 되어서도 함박눈이 흩날렸습니다. 겨울의 마지막 인사를 전하듯, 도시 곳곳이 하얗게 물들었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정토불교대학 강의를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정토불교대학은 오전반과 저녁반 2개 과정이 개설되었는데요. 오전 10시 15분에는 오전반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는 180여 명의 입학생들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반에는 170여 명이 접속하고, 해운대 정토법당에서는 25명이 참석하여, 총 370여 명이 정토불교대학 오전반 수업을 들었습니다. 삼귀의와 수행문을 함께 읽고 모두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이 세계의 실제 모습은 어떠한지 설명하면서 연기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괴롭지 않게 살 수 있을까요?
“괴로움은 왜 생길까요? 괴로움의 원인을 규명해 보면 무지(無智)입니다. 이 말은 무지에서 벗어나면 괴로움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럼 우리는 왜 무지해서 괴롭게 사는 걸까요? 괴롭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말이죠. 오늘 강의 주제는 ‘어떤 관점을 갖고 세상을 살면 괴롭지 않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어떻게 알고 있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는 이 세계를 단독자의 집합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대강당에 200명이 있다면 우리 사회는 200명의 사람이 모인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200명은 각각의 독립적인 개체이고, 단독자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이 사회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정신 세계에서는 사람마다 실체를 가진 자아, 즉 아트만(Atman)이 있어서 육신은 늙고 병들어 죽지만 영혼은 영원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질 세계에서는 세상 만물을 구성하는 근본 알맹이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원자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생명 세계에서는 모든 생명에는 종자라는 근본 알맹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이렇게 각각의 실체를 가진 단독자의 집합이 이 세계라고 알고 있습니다.
천하 만물은 서로 연관 맺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관념의 장벽을 깨뜨리고 세상을 봤습니다. 깨달음이란 관념의 장벽을 깨뜨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에 씐 게 벗겨져서 깨달음의 눈으로 보니 이 세상은 개별 존재의 집합이 아니라 전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공간적으로도 연결되어 있고, 시간적으로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 개의 구슬을 바구니에 담아 놓으면 구슬 하나하나가 다 개별적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구슬을 연결한 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구슬 중에 한 개를 집어 들었더니 나머지 구슬도 쭉 딸려 올라왔어요. 보이는 것과 다르게 모든 구슬이 연결되어 있었던 거예요. 이것이 연기입니다.
또한 하나의 구슬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나머지 구슬이 다 비쳐서 보입니다. 하나 속에 전부가 다 들어 있는 모습이에요. 과학에 비유해서 설명하면, 하나의 원자 속에 우주가 들어있고, 그 원자가 모여서 우주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 속에 전체가 들어있다는 연기를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라고 합니다. 끝없이 겹쳐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실제의 세계는 연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연기적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기존의 시각과 달리 보입니다.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모습이 기존의 시각에서는 약육강식으로 보였다면, 연기적 관점에서 보면 서로 어우러져서 생명 현상을 유지해 가는 모습인 거예요. 만약 내 몸의 눈, 손, 발, 입 등이 다 제각각 개별 존재라면 기관들끼리 서로 경쟁이 치열했을 거예요. 식탁 위에 과일이 있다면, 발견은 누가 했습니까? 눈이 했습니다. 그 과일을 가지러 간 것은 발입니다. 발이 열심히 갔지만 과일을 잡은 것은 손입니다. 정작 먹기는 누가 먹나요? 입이 먹습니다. 그럼 각 기관들이 전부 기분이 나쁘잖아요. 각각의 기관이 전부 열심히 일했는데, 먹기는 엉뚱한 입이 먹으니까요. (웃음)
그런데 각각의 기관들이 서로 연결된 하나의 몸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각각의 기관들은 그저 역할 분담을 했을 뿐이에요. 발견은 눈이 하고, 가기는 다리가 가고, 따기는 손이 따고, 먹기는 입이 먹고, 소화는 위와 장이 하고, 저장은 간이 하고, 공급은 혈액이 한 겁니다. 이러한 자연 생태계 현상을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이라는 시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연기된 생명 현상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입으로 먹은 과일은 에너지원이 되어 각 기관으로 분배가 됩니다. 그런데 어느 기관에 분배가 제대로 안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몸 전체가 죽어버리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도 분배가 공평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분배가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역할 분담이 아니라 착취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사회 전체가 붕괴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를 연기적 관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연기법을 아는 자 곧 여래를 본다
불교의 세계관은 연기적 세계관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세상을 개별 존재의 집합으로 보는 시각이 대다수입니다. 연기적 세계관으로 보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연기적 세계관을 일상에서 경험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경험으로 느끼기에는 이 세상이 개별 존재의 집합으로 느껴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교마저도 역사 속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시각으로 돌아가 버린 거예요.
윤회한다는 것은 결국 개별적인 자아가 있어야 한다는 거잖아요. 개별적인 자아가 있다고 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아설에 어긋나니까 불성이라는 이름으로 아트만의 역할을 대신 한다든지 해서 계속 또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서 대체를 하는 겁니다. 복을 받고 싶은데 복을 받으려면 기존의 가르침에서 무언가 바뀌어야만 하잖아요. 무언가를 바꾸어서 말이 되게끔 논리를 만드는 겁니다. 명백하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조차 그 테두리만 놔두고 속을 조금씩 바꾸다 보니 오늘날 불교가 이렇게 변질이 된 거예요.
부처님은 ‘인간의 존재는 아트만이 아닌 오온(五蘊)의 집합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자가 단독자가 아닌 소립자의 결합이듯이 인간 존재는 다섯 가지 오온의 결합이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즉 아설(我設)이 아닌 무아설(無我設)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온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가 개별 존재라고 생각하면 이것은 다시 아설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아설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오온 각각은 불변한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온이 공하다면 오온을 구성하는 각각도 다 공하다는 뜻입니다. 즉, 오온에 실체가 있다고 인정하면 불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는 표현 다음에 수상행식(受想行識)도 그러하다고 하여 ‘수상행식 역부여시(受想行識 亦復如是)’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 배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용이 변질되어 아설로 돌아가 버리니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비판을 제기한 것이 반야심경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발견한 실제의 세상은 연기되어 있었습니다. 연기되어 있으니 영원한 것도 없고, 단독적인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무상과 무아입니다. 연기법을 알면 여래를 본다는 말은 연기법을 깨달으면 곧 괴로움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즉 무상과 무아를 깨달으면 괴로움이 없는 열반적정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 가르침을 요약한 삼법인(三法印)입니다.”
이어서 우리는 이 세계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설명하면서 십이처, 십팔계, 오온 등 불교에서 설명하는 정신 작용에 대해 이야기하고 2강 강의를 마쳤습니다.
법문이 끝나자 사회자가 학생들에게 수행 연습 과제를 알려주었습니다. 정토불교대학은 직접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매 수업마다 수행 연습 과제가 주어집니다. 다음 주까지 수행 연습을 부지런히 한 후 다시 만나기로 하고 조별로 마음 나누기를 이어나갔습니다.
스님은 지하 1층 공양간에서 대중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오후 4시 30분에는 스님이 부탄을 답사할 때 함께 동행하여 통역 봉사를 해주고 있는 린첸다와 님의 가족이 찾아와서 스님께 인사를 했습니다.
스님은 린첸다와 님의 아들에게 장난감 자동차를 선물했습니다.
지난 1월에 스님이 부탄을 답사할 때 린첸다와 님이 통역 봉사를 하느라 둘째 아이 출산 직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스님은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지난번에 부탄을 답사하느라 출산 직후에 린첸다와 님이 옆에 없어서 미안해요.” (웃음)
아내 분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건데요. 스님 덕분에 신랑이 더 자랑스러워졌어요. 오히려 저희가 복을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마워요.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요. 보통은 남편이 봉사를 하면 아내가 반대를 하고, 아내가 봉사를 하면 남편이 반대를 하고, 자식이 봉사를 하면 부모가 반대를 하거든요. 무슨 돈이 벌리는 일도 아닌데 바쁘게 다니냐고 문제 제기를 합니다.
한국어를 부탄어로 바로 통역하는 것도 필요한데, 특별히 린첸다와 님이 필요한 이유는 린첸 님이 젬강 출신이잖아요. 시골 사람들은 영어를 할 줄 모를 뿐만 아니라 부탄어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한국어를 영어로, 영어를 다시 부탄어로, 부탄어를 다시 젬강어로 통역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린첸다와 님이 한국어를 곧바로 젬강어로 통역을 해주니까 아주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종교적으로 얘기하면 마치 부처님이 저를 위해 린첸다와 님을 준비해 두었다가 저한테 보내주신 사람처럼 그렇게 저를 찾아왔어요. 부탄에서 한국에 오는 것도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고, 한국에서 서로 만나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저랑 만나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가족들이 반대하지 않고 지지해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인연이 되려고 하니까 이렇게 인연이 되네요.” (웃음)
장모님도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스님께서 큰일 하시는데 사위가 도움이 되면 저희가 기쁘죠.”
스님은 부탄 지속 가능한 개발 사업을 시작하게 된 배경과 현재 진행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 후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어서 오후 5시부터는 린첸다와 님의 통역으로 부탄 정부 관계자들과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본 프로젝트 사업을 어떻게 진행할지 온라인으로 회의를 했습니다. 참가자 소개를 하고 스님과 부탄 내각 장관님의 인사말을 들은 후 안건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왕실 부비서실장인 님처링 님은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시범 사업을 해본 결과 취약 계층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메인 프로젝트는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스님께서 오지 마을까지 직접 답사를 다 하셨고, 마을 사람들까지 다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했습니다. 다른 단체에서는 해본 적이 없는 굉장히 독특한 방식이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스님과 JTS의 모든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지난 1년 동안은 시범 사업을 진행하였고, 올해 7월부터는 지속 가능한 개발 사업의 메인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시범 사업을 진행한 것에 대한 경과 보고를 한 후 앞으로 메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한 운영 위원회 구성, 역할 분담, 예산 관리, 사업 보고 등 전반적인 사항에 대해 스님이 제안을 했습니다. 그리고 부탄 정부 관리자들의 의견을 수렴했습니다.
1시간 30분 동안 논의하고 운영 방안에 대해 합의를 한 후 마지막으로 스님이 메인 프로젝트 진행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부탄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메인 프로젝트의 기간은 1차 사업으로 대략 3년 정도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1차 사업의 주된 목표는 주민들의 생활 개선입니다. 첫째, 주거 개선입니다. 집안 내부를 수리하는 일과 집 없는 사람에게 집을 새로 지어주는 일입니다. 둘째, 농수로 개선입니다. 셋째, 식수 개선입니다. 넷째, 도로 보수입니다. 다섯째,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밭에 울타리를 치는 일입니다. 여섯째, 교육 시설 개선입니다. 일곱째, 보건의료 지원입니다. 여덟째, 자연환경 보호입니다. 아홉째, 전통문화 보존입니다. 이런 사업들을 통해 향후 3년 동안 주민들의 생활을 개선해 나가고자 합니다.
1차 사업을 완료하여 평가를 한 뒤에 2차 사업에 대한 계획을 세우려고 합니다. 2차 사업의 주된 목표는 주민들의 소득 증대입니다. 1차 사업을 하는 중에 2차 사업을 위한 시범 사업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예산을 추가로 편성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틀이 잡혔기 때문에 제가 할 일은 어느 정도 끝났고요. 앞으로의 일은 이제 여러분들이 해나가야 합니다. 이 일이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회의를 마무리하며 부탄 정부의 내각 장관님이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기획 담당관, 행정관 등 공무원들은 마을 주민들이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JTS 활동을 잘 지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트롱사와 젬강의 공무원들은 우리가 법륜스님을 만난 것은 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6월에 스님이 부탄을 방문할 때 메인 프로젝트에 대한 MOU 협약을 체결하기로 하고 논의를 마쳤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정토불교대학 저녁반 2강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지하 대강당에는 직장을 마치고 달려온 190여 명의 입학생들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반에는 340여 명이 접속하고, 해운대 정토법당에는 10여 명이 참석하여, 총 540여 명이 정토불교대학 저녁반 과정에 입학했습니다. 삼귀의와 수행문을 함께 읽고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오전반 강연처럼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에 대해 설명한 후 불교에서는 인간의 인식 작용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 지에 대해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
“실제의 세상은 모든 것이 연기되어 있지만 우리는 개별 존재의 집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는 연기적 존재로 인식하지 못하는 걸까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니다
첫째, 우리가 경험하는 시공간의 한계 때문에 착각을 하게 됩니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시공간의 한계에서 생긴 착각입니다. 우리가 지구 밖으로 나가보면 확실히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겠죠. 그러나 지구 안에 있는 한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해도 우리의 인식 세계에서는 해가 뜨고 지는 거예요. 지구가 자전을 하는 것인데, 내가 지구 표면에 붙어 있다 보니 시각이 이런 착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착각이 보편화되면 그것이 진실이 됩니다.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다수가 되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혹세무민 하는 나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할 때는, 감각을 통해 알게 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해서 아는 것, 이것을 ‘오감(五感)’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들어온 정보를 뇌의 신경 회로를 통해 서로 연결시키게 되면 어떤 원리를 알게 됩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것과는 다른 작용입니다. 그것은 머리로 생각해서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보고 아는 것에 더해 생각해서 아는 것까지 포함하면 우리 몸에는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이 있습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고 합니다.
일체는 십이처이다
눈이 있어도 빛이 없으면 안 보입니다. 모양이나 빛깔이 있어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각각의 감각 기관에는 그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모양이나 빛깔을 보고 알고, 소리를 듣고 알고, 냄새를 맡고 알고, 맛을 보고 알고, 손으로 만져보고 알고, 머리로 생각해 보고 아는 그 대상을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라고 합니다.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 이 두 가지가 만나서 우리가 말하는 ‘안다’ 하는 작용이 일어나는 거예요.
우리가 말하는 세계는 곧 우리가 아는 세계입니다. 즉, 우리가 아는 세계는 있는 것이고, 우리가 모르는 세계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이 세계는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 12개의 조합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일체를 ‘십이처(十二處)’라고 합니다.
둘째, 업식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십이처만 갖고는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서로 다르게 인식할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 컵이 있습니다. ‘이 컵이 큽니까, 작습니까?’ 하고 물으면, 어떤 사람은 크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작다고 합니다.
컵이 큰지 작은지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컵 뚜껑과 비교하면 컵이 큽니다. 마이크하고 비교하면 컵은 작습니다. 그렇다면 이 컵은 큰 것입니까, 작은 것입니까? 여기서 ‘크다’, ‘작다’하는 것은 존재에서 온 것이 아니고 인식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물건과 비교해서 ‘크다’, ‘작다’ 하는 인식이 생긴 것이지 존재 자체가 크거나 작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크다’, ‘작다’ 하는 것이 존재 자체에서 생겼다면 이 컵은 크면 큰 것이고 작으면 작은 것이지 어떤 때는 컸다가 어떤 때는 작았다가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크다, 작다, 새것, 헌것, 비싸다, 싸다, 깨끗하다, 더럽다, 길다, 짧다, 넓다, 좁다 등 온갖 표현은 모두 존재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 인식에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인식의 문제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 컵이 어떻게 작은 거냐? 눈으로 보면 몰라?’ 하고 자기가 본 것이 옳다고 하죠. 이것은 마치 내가 색깔이 있는 안경을 끼고 벽면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빨간 안경을 꼈느냐 파란 안경을 꼈느냐에 따라 벽의 색이 달라 보입니다. 그런데 안경을 끼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본 색깔만이 진짜라고 여깁니다. ‘붉은색이라 붉다고 하는 것이고, 파란색이라 파랗다고 하는데 뭐가 문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벽이 붉다’, ‘벽이 파랗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고 ‘내 눈에는 붉게 보입니다’, ‘내 눈에는 파랗게 보입니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저에게는 이렇게 들렸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집에 가면 ‘법륜 스님이 이렇게 말했어’라고 말하면 안 되고 ‘법륜 스님의 말이 나에게는 이렇게 들렸어’라고 말해야 정확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어도 사람마다 인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사안을 봐도 사람마다 다 달리 봅니다. 요즘 대통령 탄핵 심판에 대해서도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다 생각이 다른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인식의 차이는 업식(業識)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업식이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과 지식이 모두 없어지지 않고 머릿속에 쌓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업식이 새로운 인식을 할 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끼고 있는 안경의 색깔이 노란색이면, 그것이 사물을 볼 때 영향을 주어 나도 모르게 세상을 노랗게 인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업식이 다 다릅니다. 각각 색깔이 다른 안경을 끼고 있어요. 그런데 안경을 한번 벗어본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말할까요? ‘내 눈에는 노랗게 보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안경을 벗어보지 않은 사람은 어떨까요? ‘저 벽은 노랗습니다’ 이렇게만 주장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직 업식의 안경을 벗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눈에는 이상한 것 같은데 자기는 자기가 옳다고 주장합니다.
한 사람은 신이 있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신이 없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신이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밤새도록 토론해도 끝이 안 납니다. 그런데 이 문제의 답은 간단합니다. ‘이 사람은 신이 있다고 믿네’, ‘저 사람은 신이 없다고 믿네’ 이렇게 바라보면 됩니다. 그것처럼 ‘이 사람의 눈에는 벽이 노랗게 보이네’, ‘저 사람의 눈에는 빨갛게 보이네’ 이렇게 표현해야지 ‘저 벽은 노랗다’, ‘저 벽은 빨갛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벽은 그저 벽일 뿐인데, 어떤 사람은 노랗게, 어떤 사람은 빨갛게 보는 거예요. 이 컵은 그냥 컵일 뿐인데, 어떤 사람은 크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작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체는 십팔계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것에는 모두 업식이 깔려 있어요. 사물의 크고 작음을 인식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업식이 드러나는 것은 기분의 좋고 나쁨이에요. 한국 사람들은 된장찌개를 끓이는 냄새를 맡고 ‘구수하다’, ‘군침이 돈다’ 하는데, 외국 사람들은 ‘역겹다’, ‘구역질 난다’ 이렇게 말합니다. 다 각자의 업식이 작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십이처에 식(識)을 추가해야 합니다. 뭔가를 볼 때는 눈, 모양과 빛깔, 두 가지만 작용하는 게 아니라 여기에 식이라는 필터의 작용까지 감안해야 합니다. 안(眼), 색(色), 안식(眼識), 이렇게 세 가지가 작용하여 내가 뭔가를 보게 되는 거예요. 인식 기관인 육근(六根), 인식 대상인 육경(六境), 과거의 경험이 쌓여서 작용하는 육식(六識), 이렇게 18개가 결합해서 내가 무언가를 인식하게 됩니다. 이것이 십팔계(十八界)입니다.
일체가 십팔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각자의 인식에 따라 모두 조금씩 다릅니다. 백 프로 다르다는 것은 아니에요.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습니다. 똑같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음식을 가지고도 한 사람은 짜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싱겁다고 하죠. 어떤 사람은 벽지를 빨갛게 발라 놓고 좋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은 그걸 보고 촌스럽다고 합니다. 하나의 현상을 가지고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이 세상의 온갖 분별이 여기에서 일어납니다.
누가 옳고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를 뿐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관점과 믿음은 그냥 인정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죠. 내 것은 옳고, 남의 것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저 다를 뿐이에요.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갈 수 있으면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나와 다른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존중입니다. 작다면 작은 대로, 크다면 큰 대로, 붉다면 붉은 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 존중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남의 뜻을 존중해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존중은 상대를 떠받든다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 위에 이해가 있습니다. 이해는 그 사람이 옳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바라보는 것이 이해입니다. 인정하고 이해하면 마음속에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정을 하는 것부터 어렵죠. 설령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이해하는 것은 더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정과 이해야말로 객관적 사실입니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에요.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서로 다르다는 것만이 사실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우리가 가진 많은 의문이 풀립니다. 여러분이 남편이든 아내든 상사든 타인을 볼 때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다’ 하고 바라보게 되면 능히 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이해관계가 다르고, 믿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인식 체계가 다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바탕 위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누가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두고 자꾸 맞고 틀림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온갖 시비분별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많은 오류와 무지의 근본이 됩니다. 우리들 각자가 인식하는 것에서 오류가 발생하고, 우리의 괴로움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오류가 어디에서 발생했는 지를 알면 괴로움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사회자가 학생들에게 수행 연습 과제를 알려준 후 사홍서원으로 2강 수업을 마쳤습니다.
학생들은 조별로 모여 자기소개 시간을 갖고, 마음 나누기를 하였습니다. 스님은 서울 정토회관으로 다시 돌아와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31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한 후 정토사회문화회관 3층 설법전에서 주간반 수행 법회를 하고, 오후에는 평화재단 연구 세미나에 참석하고 기획 위원들과 회의를 한 후, 저녁에는 저녁반 수행법회를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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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환
혼자 보기 아까운 법문....감사합니다.
2025-03-21 18:08:27
보리상
내게는 내가 인식하고 아는 세상만이 있을뿐입니다 세상의 주인이되어 내세상을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다른사람의 세상도 있음을 알아 이해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