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3.17 백일법문 29일째, 경전 강의 3강, 불교사회대학 3강
“날마다 술을 마시는 남편 때문에 힘듭니다”

안녕하세요.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29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경전 강의와 불교사회대학 강의를 하는 날입니다. 정토사회문화회관 주변에도 봄의 기운이 서서히 퍼져옵니다. 겨우내 앙상했던 나뭇가지마다 연둣빛 새순이 돋고, 꽃망울이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따스한 바람에 실려 온 봄소식이 온 세상을 깨우는 듯합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백일법문을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서는 9시부터 사시예불을 했습니다. 잠시 자리 정돈을 한 후 10시 15분이 되자 삼귀의와 반야심경 봉독을 하며 경전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120여 명이 참석했고, 온라인 생방송 반에서는 550여 명이 참석했으며, 해운대법당에서도 17명이 참석하여 총 68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법상에 올랐습니다.

오늘은 경전 강의 세 번째 시간입니다. 스님은 지난 시간에 강의한 금강경 제3분을 다시 요약해서 설명한 후 각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일상생활에서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제삼(第三)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보살 마하살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중생의 종류, 즉 알로 낳는 것, 태로 낳는 것, 습기로 생하는 것, 화하여 생하는 것, 빛이 있는 것, 빛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을 내가 다 완전한 열반에 들게 제도하리라. 이와 같이 한량이 없고 수가 없고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되 실로 제도를 받은 자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일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금강경 제3분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질문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여인은 마음을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모든 중생을 다 완전한 열반에 들게 제도하라. 둘째, 모든 중생을 제도하되 실로 제도를 받은 자가 하나도 없다. 셋째, 만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는 각각 무슨 뜻일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즉문즉설의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남편의 술 문제로 힘들어하는 질문자가 저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날마다 술을 마시는 남편 때문에 너무 힘듭니다

‘남편 때문에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남편이 술을 좋아해서 365일 중에 하루도 술을 안 마시는 날이 없고, 늘 늦게 들어옵니다. 때로는 집에 안 들어오기도 하고요. 들어오면 술주정하며 못살게 굽니다. 절에 가서 기도하면 좋아진다고 해서 불공을 드렸는데 남편한테 변화가 없어요. 친구가 절보다 교회가 더 영험하다고 해서 교회에 가서 기도도 드렸어요. 남편한테 술 귀신이 들었으니 굿을 하면 좋다는 말을 듣고 굿까지 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그분에게 남편이 퇴근하면 매일 술상을 차려주라고 했습니다. 옆에 앉아서 술도 한 잔씩 따라주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게 잘 안되겠으면, 매일 300배씩 절을 하면서 ‘부처님, 우리 남편에게는 술이 보약입니다’ 하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술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든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적어도 내 남편에게만큼은 술이 보약인 겁니다. 보약이란 건 하루도 거르지 말고 먹어야 하잖아요. 저녁마다 술상을 차려주고, 남편이 밖에서 술을 먹고 들어온 날은 해장국을 끓여줘야죠. 자기가 보약을 알아서 챙겨 먹고 들어왔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남편 스스로 챙겨 먹으면 칭찬해 주고, 안 챙겨 먹으면 챙겨주어야 합니다. 이런 말을 듣고 질문자가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다가 다시 설명을 해주니 일단 ‘네,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갑니다.

그런데 열 명하고 이런 대화를 하면, 그중에 몇 명이나 스님이 하라는 대로 할까요? 두세 명 정도라고 보면 됩니다. 질문자 본인이 힘들어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봐 놓고는 제 대답을 별로 귀담아듣지 않아요. 즉문즉설이 끝나고 강연장을 나가면서 스님이 이상한 거 시킨다고 못마땅해하기도 합니다. 보통은 한두 번 해보다가 금방 때려치웁니다. ‘내가 저런 인간한테 뭐 때문에 술상까지 차려 바쳐야 하나?’ 하면서요. 그런저런 위기를 극복하고 스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한 사람은 100일쯤 지나서 저를 다시 찾아옵니다. 100일이 넘어가면 효과가 딱 나타나거든요. 스님이 시키는 대로 했더니 영험이 있다고 좋아서 오는 거예요.

‘스님, 남편이 요즘 집에 일찍 들어오고, 술도 적게 먹고, 사람이 바뀐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요즘 기도를 300배가 아니라 500배씩 합니다. 물론 술상도 잘 차려주고요.’

그 말을 듣고 제가 말했어요.

‘기도를 제대로 안 하고 있네요.’

그랬더니 질문자가 입을 삐죽 내밀면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아닌데요. 저는 기도를 아주 열심히 하는데요. 300배 하다가 이제는 500배 한다니까요.’

스님한테 고맙다고 말하려고 왔다가 기도를 제대로 안 한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진 겁니다. 그러다 100일쯤 더 지나면 또 찾아옵니다.

‘스님, 영험이고 뭐고 다 없어졌습니다. 이 인간이 또 매일 술 먹고 늦게 들어와요. 기도하는 보람이 없어요. 이제 그만할래요.’

‘제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습니까? 질문자는 기도를 제대로 안 한다고 했죠?

‘스님, 저는 열심히 기도했어요.’

‘질문자는 절을 한 것이지, 기도를 한 게 아닙니다.’

이 대화 속에 금강경 제3분의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질문자는 남편이 자기 뜻대로 바뀌기를 바라며 기도를 한 거예요. 이것이 보통 불교 신자들이 기도하는 목적이고, 복을 구하는 방법이고,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면 기도가 영험이 있다고 하고, 안 되면 영험이 없다고 합니다. 그동안 본인의 힘만으로는 남편을 바꿀 수 없고, 이곳저곳 가 봐도 안 되니까 저한테까지 찾아온 거예요. 그런데 스님이 정반대로 방법을 바꿔보게 한 겁니다. 남편은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기어코 하는 사람이니까 반대로 생각해 보라고 한 거예요. 즉 ‘하지 말라’ 하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질문자는 그동안 자기 방식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스님 말대로 해보니 딱 효과가 나타났어요. 이유는 모르지만 아무튼 남편이 조금 변했고, 기적이 일어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던 겁니다.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어서 찾아왔는데, 정작 스님은 기도를 제대로 안 했다고 말한 겁니다.

스님이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질문자가 중생심에서 비롯된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상황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원하는 대로 되면 좋고, 안 되면 괴롭습니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된다 해도 좋기만 하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원하는 일이 이루어진 것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경우도 허다하죠. 그리고 원하는 만큼 다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괴로움이 따릅니다. 이렇게 즐거움과 괴로움은 윤회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에 매달리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내가 괴로움 없이 살 수 있습니까?’ 하는 말은 나를 구제해 달라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관점을 바꿔서 ‘도움받으려 하지 않고 도와주며 살아라’, ‘이해받으려 하지 말고 이해하며 살아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구제해 달라는 사람에게 오히려 ‘먼저 내가 도와주겠다는 마음을 내라’ 하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것처럼 남편이 술을 먹지 않도록 하고 싶어서 찾아온 사람에게 스님은 오히려 ‘남편에게는 술이 보약입니다’ 하고 생각을 바꿔보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술을 먹지 말라 한다고 남편이 그 말을 듣습니까? 반대로 술을 먹으라 한다고 해서 평소보다 술을 더 먹을까요? 여기서 문제는 질문자가 자꾸 ‘내가 술을 먹지 말라고 하면 남편이 술을 안 먹을 거고, 내가 술을 먹으라고 하면 남편이 술을 더 먹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사람은 다 자기 식대로 살지, 남의 말은 잘 안 듣습니다. 아내가 먹으라고 하든, 먹지 말라고 하든, 남편은 자기 마실 만큼 술을 마십니다. 일시적으로 잠깐은 아내 말을 듣는 것 같을 거예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금방 자기 하던 대로 돌아갑니다.

내가 남편에게 술을 먹지 말라고 했을 때 그가 술을 안 먹으면 내가 기분이 좋을 것이고, 그가 술을 먹으면 내가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런데 반대로 술을 먹으라고 해보면 어떨까요? 내가 술을 먹으라고 했는데 남편이 술을 먹으면 내 말을 잘 듣는 것이 되니까 좋고, 술을 안 먹으면 남편이 술을 안 먹어서 좋은 거예요. 상대가 내 요구를 들어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생각을 바꿔서 해결되는 방법도 있어요. 술을 먹는 사람한테 술을 먹지 말라고 하니까 갈등이 생기지, 반대로 술을 먹으라고 하면 아무 문제가 없어져요. (웃음)

그러니 굳이 절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 생각만 딱 바꾸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겁니다. 한 생각을 못 바꾸니까 술이 보약이라는 기도문을 준 거예요. 술이 독이지 어떻게 약이겠습니까. 그래서 앞에 ‘우리 남편에게는’ 하고 전제가 붙습니다. ‘우리 남편에게는 술이 보약입니다’ 이렇게 기도문을 준 거예요. 우리 남편에게는 왜 술이 약일까요? 남편은 뭔가 답답한 일이 있는 겁니다. 답답함을 계속 참으면 숨이 막혀 죽습니다. 남편은 살고 싶어서 술을 먹는 거예요. 답답한 이야기를 아내에게 해봤자 싸움밖에 안 되니까 술을 먹고 숨통을 틔워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술은 독이지만 약이라고 생각하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 남편에게는 진짜로 술이 약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약을 약인 줄 아는 것이 진실을 아는 것입니다.

남편에게는 술이 약이니 잘 먹어야 되겠죠? 이전 같으면 왜 술 먹고 들어오느냐고 싸울 텐데, 이제는 약을 알아서 먹고 오니 고마운 일이 됩니다. ‘어서 와요. 오늘도 힘들었죠? 한잔하고 왔네요’ 하면서 혹시 술을 안 먹고 온 날은 집에서 술상을 차려주세요. 그러면 남편이 술을 먹어도 아무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남편이 술을 먹든 안 먹든 내 생각을 바꾸면 벌써 내 문제는 해결된 거예요. 내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남편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스트레스 중에 제일 큰 게 부인에게서 받는 스트레스입니다. 그런데 부인이 주는 스트레스가 없어지니 남편의 스트레스가 줄어듭니다. 스트레스가 줄어드니 술도 적게 먹게 되는 겁니다. 시간이 흐르면 밖에서 술 먹는 것보다 집에 가서 술을 먹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부인이 잔소리하니까 밖으로 나돌았지만, 부인이 술도 주고 잔소리도 안 하고 칭찬도 해주는데 굳이 밖에서 돈 써가며 술을 먹을 이유가 없죠. 그러니까 부인이 보기에도 남편이 변한 겁니다. ‘드디어 기도에 영험이 나타난 건가? 스님 말씀대로 해보니 진짜 용하다’ 이런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스님한테 찾아와서 남편이 바뀌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면서 감사 인사를 한 겁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기도를 제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바뀐 것을 좋아하면 그것은 수행이 아니에요. 처음에 남편에게 술을 먹지 말라고 할 때는 남편이 술을 먹어서 괴로웠어요. 그런데 지금은 남편이 술을 안 먹으니 기분이 좋아진 겁니다. 이것은 괴로움과 즐거움이 돌고 도는 것일 뿐입니다. 고락이 윤회하는 것은 중생계입니다. 질문자가 300배를 하다가 기분이 좋아서 500배를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다리 운동을 한 것이지 수행을 한 게 아니에요.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니 괴로움은 필연적으로 따르게 됩니다.

질문자가 500배를 한 이유가 뭘까요? 남편이 술 마시는 게 줄어드니까 기분이 좋았겠죠. 그래서 남편이 좀 더 빨리, 좀 더 많이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 거예요. 그런 마음으로 절을 늘렸는데, 남편은 자기가 원하는 만큼 변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전혀 안 변한다는 전제에서 조금 바뀌었을 때는 엄청나게 기분이 좋았죠. 남편이 조금 변한다 싶으니 더 욕심을 내서 절을 500배씩 했는데 남편이 안 바뀌니까 다시 스트레스를 받게 된 거예요. 내가 괴로우니 다시 남편한테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당신 요새 술 좀 안 먹더니 또 먹는다’ 하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죠. 이것이 바로 고락(苦樂)이 윤회하는 모습입니다.

첫째, 도움받으려 하지 말고 도와주겠다는 마음을 내라

여기에서 핵심은 마음을 항복받기 위해서 오히려 마음을 거꾸로 내라는 것입니다. 정토회에서 하는 천일결사 수행법 중에서 ‘수행자의 자세’를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이해받으려 하지 않고 이해하며 살겠습니다. 도움받으려 하지 않고 도와주며 살겠습니다…’

마음을 항복받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이렇게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바꾼다고만 해서 모든 괴로움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단계가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게 되면 ‘내가 도움을 줬다’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내가 기도해서 남편이 바뀌었다든지, 내가 도와줘서 저 사람이 살았다든지, 이런 마음이 생기면 어떤가요? 내가 도움을 준 사람이 인사를 안 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내가 너를 돕는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노고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생기는 겁니다.

둘째, 도움을 주고 나서 바라는 마음을 갖지 마라

얻으려는 마음을 가지면 어리석은 중생이고, 베푸는 마음을 가지면 현명한 중생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바꿔서 베푸는 것만으로는 괴로움에서 절반 정도만 벗어났다고 볼 수 있어요. 남한테 베푼 것이 없이도 상대에게 바라는 게 중생인데, 자기가 뭔가 베풀었다면 당연히 상대에게 바라는 게 생기겠지요. 그래서 두 번째 단계가 도움을 주고 나서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라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때 내가 베푼 행위에 대한 흔적이 없습니다. 흔적이 없다는 것은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아서 아무런 찌꺼기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새가 허공을 날아갈 때 흔적을 남기지 않듯이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 제3분의 내용이 ‘모든 중생을 제도하되 실로 제도를 받은 자가 하나도 없다’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관점을 가져야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을 완전히 항복받는 길입니다. 첫 번째 단계인 마음을 바꾸는 것에 머물면 안 되고, 바라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는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단계도 못 넘고 있죠. 설령 첫 번째 단계를 넘어서 불교 신자가 되거나 출가해서 공동체에 들어오기까지 하지만, 대부분 두 번째 단계를 못 넘게 됩니다. 즉 중생의 뿌리가 안 뽑힌 거예요.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나는 베풀지 않으면서 받기만 바란다면 합리적이지가 않습니다. 모두가 얻겠다고만 하고 주겠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어요? ‘주는 것이 잘 받는 방법이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현명한 사람이에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하는 속담도 있잖아요. 그런데 이 방법도 잘 살펴보면 내가 더 잘 받기 위해서 주는 마음을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둘의 차이는 하나는 안 주면서 받기만 하겠다는 속셈이고, 다른 하나는 적어도 주는 만큼은 받겠다는 셈법입니다. 하나는 안 주고받겠다는 것이고, 하나는 주고 나서 받겠다는 것이니까, 준다는 측면에서는 천지 차이라고 볼 수 있지만, 둘 다 받겠다는 데에는 차이가 없어요. 내가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베풀면 보상을 받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하지만 그만큼 미움도 비례해서 커집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베푼 만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길 뿐만 아니라 이자까지 쳐서 받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셋째, 너와 나를 구분 지으면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이 마음의 뿌리가 바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입니다. 네 가지를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하면 그 뜻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한문으로 번역된 대로만 그 뜻을 해석하면 비교적 이해가 쉽습니다. 첫째, 아상(我相)은 나와 세상을 구분해서 ‘이것이 나다’ 하는 생각입니다. 둘째, 인상(人相)은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생각입니다. 사람도 동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넓은 범위에서는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을 구분 짓는 것이고, 가장 좁은 범위로는 가족과 가족 아닌 것을 구분 짓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족’이라는 말은 우리 가족과 남의 가족을 구분 짓는 것이고,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를 구분 짓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중심으로 ‘우리 가족’부터 시작해서 ‘우리 인류’까지 점점 확장해서 구분하는 것이 인상입니다. 셋째, 중생상(壽者相)은 중생과 중생 아닌 것을 구분하는 생각입니다. 중생이란 사람뿐 아니라 짐승들과 천상의 신까지 포함합니다. 그래서 ‘중생이다’ 하는 것도 일종의 울타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넷째, 수자상(壽者相)입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생명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는 그것이 식물이든 세균이든 수명이 있어서 생로병사 합니다. 생명이라는 울타리를 치고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을 구분 짓는 것이 수자상입니다. 더 확대하면 존재와 비존재, 즉 ‘있다’와 ‘없다’를 구분 짓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 지으면 아상,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을 구분 지으면 인상, 중생과 중생 아닌 것을 구분 지으면 중생상,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을 구분 지으면 수자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분 짓는 마음이 있으면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는 연기법에서 보면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단독자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경계를 긋는 것이지 사실 모든 존재는 어떠한 경계도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실제 모습입니다.

가장 자연스럽고 쉬운 길

자연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새가 열매를 좀 쪼아 먹었다고 해서 열매가 ‘새야, 너는 내 덕분에 살지?’ 이런 생각을 할까요? 새가 열매를 먹고 그 씨를 여기저기 뿌렸다고 해서 ‘나무야, 내가 너를 엄청나게 번식시켰지?’ 이런 생각을 안 하잖아요. 또한 소가 풀을 뜯어 먹고 똥을 누면 그게 거름이 되어서 또 다른 풀이 자랍니다. 자연은 이렇게 서로 돕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과정의 어떤 지점을 딱 잘라서 보면, 하나는 주고 다른 하나는 받은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짧게 보면 주고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다만 순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상은 연기되어서 순환하는 것이고, 다만 이동하고 변화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가지기 때문에 실상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또 이해한다고 해도 막상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이치는 쉽습니다. ‘자연스럽다’ 하는 말이 쉽다는 뜻이잖아요. 담배를 피우는 게 자연스러워요? 안 피우는 게 자연스러워요? 담배를 안 피우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즉, 담배를 안 피우는 게 제일 쉽습니다. 담배를 피우려면 여러 가지로 힘이 들잖아요. 돈도 있어야 되고, 담배 사러 가야 되고, 불도 붙여서 피워야 하고, 이렇게 일이 복잡합니다. 그런데 담배에 중독이 된 사람은 어떨까요? 오히려 담배를 안 피우는 게 더 어렵습니다. 마치 우리가 담배에 중독되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오히려 더 어렵게 느껴지는 상태에 있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쉬운 길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금강경 제4분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가기로 하고 강의를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하고, 스님은 지하 1층 식당에서 대중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불교사회대학 3강 강의를 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시간으로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사회문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배우는 시간입니다.

지하 대강당에는 불교사회대학 입학생 200여 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반에는 1,9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입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전 질문을 하고 답변을 받았는데요. 그 결과를 영상으로 함께 본 후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 봉독을 한 후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지난 시간에 연기법을 설명할 때 주로 자연과 과학을 예로 들다 보니 강의 내용이 조금 어려웠던 것 같다며 일상 속에서 접할 수 있는 사회 문제를 예로 들어서 연기법을 다시 설명해 주었습니다.

경제적 생산과 분배, 계급의 발생, 신자유주의, 빈부 격차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연기적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자세히 이야기했습니다.

연기법에 대한 설명을 마친 후 오늘 강의 주제인 ‘중도’에 대한 강의를 이어나갔습니다.

“오늘은 불교의 실천관인 ‘중도(中道)’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중도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이 처음 발견한 거예요. 중도는 가운데 ‘중(中)’ 자를 쓰지만 중간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목표를 향해 최대한 바르게 도달하는 길이 중도입니다.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쏠 때 정중앙을 향해 날아가는 길이 바로 중도예요. 여기에서 중(中) 자는 ‘가운데’라는 개념이 아니라 ‘적중(的中)하다’라는 개념입니다. 글자는 가운데 ‘중(中)’ 자를 쓰지만 뜻은 오히려 바를 ‘정(正)’ 자에 가까워요. 그래서 ‘중도(中道)는 정도(正道)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목표를 향해 최대한 바르게 도달하는 길

과녁에 화살을 쏠 때는 어디서 쏘느냐에 따라 화살이 날아가는 길이 다 다릅니다. 과녁이라는 목표는 하나인데 화살이 날아가는 길이 다 다른 거예요. 서울 가는 길을 예로 들어봅시다. ‘서울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합니까?’ 하고 누가 질문을 했다고 합시다. 만약 인천에 사는 사람이 물으면 동쪽으로 가라고 하고, 수원에 사는 사람이 물으면 북쪽으로 가라고 하고, 강릉에 사는 사람이 물으면 서쪽으로 가라고 해야겠죠. 각각의 조건에서 서울로 가는 방향이 중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건을 떠나면 딱히 뭐라고 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시공간이라는 조건을 무시하고 이것이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고 합니다. ‘정해진 법이 있다고 할 수가 없다’ 하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법이라고 정해놓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인연과 조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도는 다른 말로 무유정법입니다.


무유정법을 대승불교에서는 또 ‘공(空)’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자칫 중도라고 하면 ‘중간’이라는 오해가 생기고, 공이라고 하면 ‘없다’라는 오해가 생기기 쉬워요. 서울 가는 길은 어느 쪽이라고 정할 수가 없다는 말이 ‘서울 가는 길은 없다’라는 의미인가요? 길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의미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없다고 생각하거나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없는 것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가도 되는 것도 아니에요. 시간과 공간의 조건, 즉 어떤 상황이 정해지지 않았을 때는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시공간이 정해지거나 조건이 정해지면 ‘이것이 바른 길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즉, 인천에 사는 사람이 물으면 동쪽으로 가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때도, ‘서울 가는 길은 공(空)이야’ 이렇게 말하면 ‘공상(空想)에 빠졌다’라고 하는 겁니다.


중도,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관점

부처님은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 출가하기 전까지는 즐거움을 쫓는 쾌락주의를 쫓았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엄청나게 좋은 조건에 있었지만 고뇌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래서 출가하고는 고행주의를 쫓았습니다. 고행을 할 때 옆의 도반이 봐도 존경심이 날 정도로 열심히 했어요. 옆에서 보기에는 곧 성불할 것처럼 존경스럽게 느껴졌지만 정작 부처님 본인은 힘들었어요. 고뇌가 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6년 고행 끝에 자신의 수행 과정을 돌아보게 됐어요. 쾌락도 좇아보고 고행도 좇아봤지만, 고뇌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탐구했습니다. 탐구를 해보니 쾌락과 고행 이 두 가지의 길에는 다 욕망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욕망을 따라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을 억제하는 길이었어요. 욕망에는 어떠한 법칙이 있습니다. 욕망을 따라가면 과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욕망을 억제하면 스트레스를 받잖아요. 그래서 몸과 마음이 긴장하게 됩니다. 긴장이 되는 상태를 어떻게 행복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부처님이 열두 살 때 농경제에 참여해서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모습을 보고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 하나가 죽어야 하지?’ 하고 나무 밑에서 명상할 때의 편안함과 깊이만큼도 못하다고 느낀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수행했지만 이를 악물고 욕망을 억제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의 길은 정반대에 있으면서도 욕구에 대한 반응이라는 측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는데 호객꾼이 나를 잡고 가게에 가자고 해요. 그럴 때 끌려 들어가든지, 아니면 안 가겠다고 버티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도란 끌려가는 것도 아니고, 버티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즉, 욕망을 따라가지도 않고, 욕망을 억제하지도 않고, 욕망을 그냥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저 ‘욕망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통증이구나’ 하고 알아차릴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명상하다가 다리가 아프면 그냥 다리를 펴버립니다. 이것은 욕망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또는 다리가 아무리 아파도 이를 악물고 참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어떤 현상에 대해 늘 두 가지로 반응합니다. 두 가지 반응이 정반대지만, 그 뿌리는 사실 하나예요. 욕망에 대한 반응이라는 측면에서는 똑같습니다. 욕망에 반응하지 말고 욕망을 그냥 욕망인 줄 알아야 합니다. 편안한 상태에서 욕망이 일어나면 다만 알아차리는 거예요. 이 알아차림이 바로 이쪽저쪽을 떠난 제3의 길입니다. 그것이 ‘중도’입니다.

부처님은 이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편안해졌어요. 편안한 가운데 오롯이 집중을 했습니다. 부처님은 중도를 깨달아서 중도를 발견한 게 아니라 반성을 통해 중도를 발견한 거예요. 이쪽도 한번 가보고 반성하고, 저쪽도 한번 가보고 반성하면서 ‘아! 이 길이네’ 하고 발견한 것이 제3의 길인 중도입니다. 부처님은 새롭게 발견한 길을 따라가서 깨달음에 이른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의 첫 설법도 중도입니다. ‘수행자는 양극단을 버려야 한다’ 하고 가장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다를 뿐 틀린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 둘을 떠난 게 중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항상 양쪽 주장에 대해서 논쟁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양극단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우리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려면 각자의 신념을 가지고 살더라도 중도의 길을 가야 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어떤 일에든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서로 자기 말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중도의 길을 가려면 어떤 것을 미리 정하면 안 됩니다. 상대방의 얘기를 들을 때 한마디만 듣고 너는 틀렸다든지 너는 맞다든지 이렇게 속단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첫째, 상대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보고 그 사람의 심정을 이해한 후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그 사람 입장에서 그럴 수도 있겠다’ 하는 관점에 서면 내 마음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항상 수행자는 내 마음이 편안해야 합니다. 내가 불편하지 않아야 문제에 대해서 대화를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대화의 결과는 합치되어야 하느냐?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합치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어요. 중도적 관점에서는 여러 가지 해결책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러 갈 때를 예로 들어 볼게요. 중국집이냐 한식집이냐 서로 의견이 부딪친다면, 오늘은 이 사람에게 맞춰서 한식집에 가고, 다른 날에는 저 사람에게 맞춰서 중국집에 가면 됩니다. 반반씩 시켜서 나눠 먹는 것도 방법입니다. 또 굳이 꼭 밥을 같이 먹으러 갈 필요도 없잖아요. 한 시간씩 자유시간을 가져서 너는 저쪽에서 먹고, 나는 이쪽에서 먹고, 나중에 카페에서 다시 만나는 것도 해결책이잖아요. 해결책 중에 어떤 것이 더 좋다고 할 수 없어요. 합의가 중요합니다. 따로따로 먹자는 것도 합의를 할 수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따로따로 먹는 게 낫겠다 싶으면 평화적으로 합의를 하면 돼요. 따로 먹는 것이 나쁜 게 아니라 그것도 합의를 할 수 있다면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중도적인 관점을 가지면 많은 선택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대립과 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이런 관점이 정말 필요합니다. 현대 사회는 온갖 정보가 넘쳐나고 기술이 발달했지만, 오히려 대립과 갈등의 측면에서는 2600년 전이나 별 차이가 없어요. 오히려 더 나빠졌다고 할 수 있어요.

불교가 사회문제를 풀어나가는 두 가지 기준

앞으로 우리가 사회문제를 지혜롭게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째, ‘사실은 어떠한가?’ 하는 연기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둘째,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할 때는 중도적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불교사회대학에서 구체적인 주제 강의를 하기 전에 연기법과 중도에 대해 먼저 얘기하는 이유는 이 두 가지 관점을 가져야 불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무슨 얘기를 하든지 연기법과 중도 이 두 가지 관점이 기준이 됩니다. 중도는 정함이 없이 인연을 따라 정해지는 것을 말하고, 연기법은 이 세상이 실제 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오늘은 불교의 ‘중도’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우주와 물질의 근원에 대해 배우기로 하고 3강 수업을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음 나누기 속에서 오늘 배운 내용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볼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30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주간반 정토불교대학 2강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부탄 정부 관계자들과 지속가능한 개발 본 프로젝트 진행을 위해 온라인으로 회의를 하고, 저녁에는 저녁반 정토불교대학 2강 수업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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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jc

중도는 정함이 없이 인연에 따라 정해 지는것.
연기법은 이 세상이 실제하는 모습이다.
감사합니다.

2025-03-20 10:25:20

강설화

마음을 바꾼다고해서 괴로움이 없어지는게 아니라 바라는 마음도 없어야만 진짜로 괴로움에서 벗어날수 있음을 알겠습니다.법문 감사합니다

2025-03-20 10:03:05

길상화

감사합니다

2025-03-20 09:4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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