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4.12.22 영어 즉문즉설, 결사행자 자자수련, 백일특별정진 간담회
“성공한 사람들 앞에 서면 주눅이 들어서 의사 표현이 어렵습니다”

안녕하세요. 서울 정토회관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전 8시부터 외국인을 위해 영어 통역으로 즉문즉설 생방송을 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260여 명의 외국인들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인사를 나눈 후 먼저 지난 2일에 로힝야 난민캠프에 비누 636만 개 전달식을 하고 온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습니다.

▲ 영상 보기

오늘은 세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성공한 사람들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앞에 서면 주눅이 든다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 앞에 서면 주눅이 들어서 의사 표현이 어렵습니다

“I sometimes struggle with confidence, particularly when I'm around accomplished or senior individuals. For example, at my tennis club, I feel intimidated by stronger players and have difficulty talking openly with them, which makes it hard to build friendships. This issue is even more pronounced at work, where I find it challenging to approach senior engineers or management and express my own ideas. As a result, this has impacted my visibility at work, especially when organizing projects I’ve been assigned.”

(저는 자신감이 부족한 편인데, 특히 뛰어난 사람들이나 선배들 앞에서 더욱 그런 모습을 보이게 돼요. 일례로, 테니스 모임에서 저보다 실력이 좋은 선수들 앞에선 제가 위축되는 모습이 느껴져요. 그래서인지 그들과 편하게 대화하거나 친분을 쌓는데 어려움을 겪어요. 직장에서는 더 심각한데요, 선임 엔지니어나 담당자에게 다가가 제 의견을 표현하는 게 어려워요. 이러한 제 모습이 심지어 제가 맡은 업무에도 영향을 주게 돼요.)

“자신감이라는 것은 어떤 능력에 대한 자기 확신인데요.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키가 180cm인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키가 큰 사람일까요, 작은 사람일까요? 이 사람을 키가 190cm인 사람과 비교하면 작은 사람이라고 우리는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 170cm인 사람과 비교할 때는 키가 큰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키가 큰 사람일까요, 작은 사람일까요? 이 사람은 키가 큰 사람도 아니고 작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그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를 누군가와 비교해서 인식하면 작다고 인식되거나 크다고 인식되어서 ‘큰 사람’, ‘작은 사람’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뇌는 동일한 것을 계속해서 인식하면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키가 190cm인 사람과 몇 년을 같이 살게 되면, 내 키가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작은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거예요. 이런 뇌의 작용 때문에 열등의식이나 우월의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등의식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린 학생 때부터 어떤 사람과 비교할 때 키는 나보다 큰 사람과 비교해서 작다고 인식하고, 공부는 나보다 잘하는 사람과 비교해서 못 한다고 인식하고, 테니스는 나보다 잘 치는 사람과 비교해서 못 친다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나보다 잘하는 사람과 비교해서 자꾸 자기를 인식하게 됩니다. 한 사람하고만 비교하면, 그 사람보다 못하는 것도 있고, 그 사람보다 잘하는 것도 있을 텐데, 이렇게 각 부분에서 잘하는 사람 여러 명을 두고 비교하기 때문에 나는 뭐든지 잘못한다고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첫째, 열등의식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착각을 하는 데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둘째, ‘내가 무엇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돈을 중요한 가치로 삼으면, 돈을 나보다 많이 가진 사람 앞에 서면 내가 약간 기가 죽습니다. 그러나 나보다 돈이 적은 사람 앞에 서면 약간 우월감을 갖게 됩니다. 내가 지위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면, 지위가 높은 사람한테는 심리가 위축되는 비굴함을 보이게 됩니다. 나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는 나도 모르게 우쭐하는 우월감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부분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면 비굴하거나 우쭐대거나 하지 않습니다. 즉 자전거를 타거나, 바둑이나 장기를 두거나, 이런 데에 내가 별 관심이 없으면, 상대가 그것을 잘한다거나 못한다고 해도 별로 그것에 대해 연연해하지 않게 됩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위축이 되거나 우쭐댈 때는 내가 그 부분에 집착하고 있다는 방증이에요. 돈이나 지위, 테니스, 어떤 기술에 집착하게 되면 상대가 그 분야에 대해서 나보다 잘하면 비굴해지고, 상대가 나보다 못하면 우쭐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열등의식은 내가 무엇에 가치를 부여하고 집착하는가에 따라 일어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겹쳐서 우리는 때로는 교만하거나 때로는 비굴한 자세를 갖게 됩니다. 저는 테니스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누군가 테니스를 잘 친다고 해도 별로 관심이 없고, 못 친다고 해도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열등의식도 생겨나지 않고, 우월의식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본인이 위축되는 마음을 느낄 때는 자신이 그것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 집착을 내려놓아 버리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또한 내가 위축감을 느끼는 이유는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존재는 우월한 것도 없고, 열등한 것도 없고,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잘못된 인식을 통해서 위축된 심리나 우쭐대는 심리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서 말하면, 밤에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데 어떤 강도에게 쫓기는 꿈을 꾼다고 합시다. 객관적으로는 편안한 잠자리에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지금 강도에게 쫓기고 불안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쫓기는 것이 꿈속에서는 현실이지만, 객관적으로는 현실이 아닙니다. 그럴 때 꿈속에서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어디에 숨거나 도망가는 것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그냥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도망가거나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는 것입니다. 돈을 더 많이 벌거나 지위가 높아지거나 테니스를 잘 쳐서 해결하는 것은 꿈속에서 도망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꿈속에서 해결하려 아무리 도망을 가도 뒤돌아보면 늘 강도가 뒤에서 쫓아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꿈속에서 해결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더 많이 번 사람을 보게 되고, 지위가 높아졌다고 해도 더 높은 사람을 보게 되고, 또 기술을 터득했다던가 테니스를 잘 치게 되었다고 해도 더 잘 치는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해결이 되었어도 다시 돌아보면 또 해결이 안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반복되는 거예요. 꿈속에서 도망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눈을 뜨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내가 주눅이 드는 것들에 대한 집착을 놓거나, ‘이것이 상대적 비교구나’, ‘내가 그런 것을 염원하고 있어서 발생하는 것이구나’ 이렇게 자각하게 되면 편안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제 얘기를 듣고 이런 마음 작용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실제로 본인이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사람 앞에 가면 나도 모르게 위축이 될 겁니다. 그래서 계속 연습해야 합니다. 위축이 될 때마다 ‘이것은 꿈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자각하는 연습을 꾸준히 하면 점점 개선이 될 겁니다.”

“I have lived my life placing more importance on things like personal interests and hobbies. In today’s society, though, it feels like we’re trying to categorize and quantify everything. Take the bell curve, for example, which is often used in sciences, mathematics, and engineering. The curve shows that most people fall in the middle, with fewer outliers on either side. The point where the majority of people are is considered the “norm,” or what’s considered “normal.” But as you’ve pointed out, there seems to be no true reference point for what’s normal.Then, is it more about tradition or convention?—what’s commonly accepted or practiced in a certain context.”

(저는 제 취미 생활 같이 일상의 소소한 삶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왔어요. 지금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을 분류하고 정량화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벨 커브(bell curve)라고 해서 과학, 수학, 공학 분야에서 자주 사용되는 개념이 있어요. 이 커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운데에 몰려 있고, 양쪽 끝에는 적은 수의 특이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치하는 지점이 '정상' 혹은 '평균'으로 여겨지는데, 스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정상'이라고 하는 것도 실제로는 명확한 기준점이 없는 것처럼 보여요. 그렇다면 이런 ‘정상’ 혹은 ‘평균’이라는 관념도 우리 사회의 전통이나 관습으로 인해 그렇게 여겨지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번 설명해 보겠습니다. 만약 어떤 지방에서 학생 30명의 성적을 그래프로 그려본다고 합시다. 평균 70점이 되는 학생을 가운데에 두면 거기에 많은 학생이 분포합니다. 그다음 오른쪽으로 가면서 더 잘하는 사람, 90점을 받는 학생까지 나타납니다. 또 왼쪽으로 가면서 50점을 받는 학생까지 나타납니다. 이때 이 반에서 제일 공부를 잘하는 특수하다고 할만 한 학생 30명을 전국적으로 뽑아서 다시 한 반을 편성합니다. 그렇게 한 반을 편성하면 똑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거기도 1등 하는 학생이 있고, 30등 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이럴 때 지방에서 1등 하던 아이가 전국적으로 모였을 때 그 반에서 30등을 하게 되면 이 아이는 심리적으로 굉장한 열등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자기가 항상 1등이라는 기준으로 어린 시절을 살아왔기 때문에 반에서 30등이 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전국적인 모임에서 30등을 하는 것이나 지역 모임에서 1등을 하는 것이나 그 사람이 갖는 객관적인 학업 능력은 동일합니다. 즉 열등감은 심리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옛날에는 혈통사회였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하고,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차별했습니다. 이때는 신분에 의해서 심리가 위축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차별이나 신분 차별은 없어진 대신에 어린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계속 성적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학업 성적이 떨어지면, 마치 옛날에 신분적으로 열등의식을 갖듯이, 어린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열등의식을 갖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분 차별이 없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심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학교에서부터 성적으로 등수를 매기고 모든 곳에서 능력을 수치화시켜서 그것이 떨어지면 마치 본인이 능력이 없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심리적인 열등의식을 갖게 된다는 측면에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즉, 학교 교육을 통해서 새로운 신분제도를 만든 것과 같습니다.

옛날에 왕자나 귀족으로 태어나면 많은 것을 향유해도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처럼 지금은 학교 성적이 높거나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하면 그 사람이 많은 수입을 갖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세뇌가 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가속화시킨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입니다.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면 많은 것을 가져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옛날에 그가 신분이 높으니 많은 것을 향유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과 심리적으로는 같습니다. 이런 이유로 빈부격차가 점점 심해지기 때문에 앞으로 새로운 민중적 저항도 점점 거세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옛날에는 신분에 의해서 차별받는 것이 당연시되었지만 점점 그것이 부당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는데, 지금은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많은 것을 갖는 것이 부당하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신적인 세뇌가 신분제도보다 더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공부 못해서’, ‘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렇게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은 마치 노예가 ‘나는 노예니까’ 하고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강한 정신적인 세뇌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불평등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과거의 관념이 새로운 관념으로 바뀐 것일 뿐이지 차별을 합리화하는 관념으로부터 해방된 상태가 아닙니다.”

“Thank you so much for this detail, Sunim.”

(상세하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해요, 스님.)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1시간 40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9시 40분에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잠시 휴식을 한 후 10시 30분부터는 내년 1월 1일 시무식 법문을 녹화했습니다. 스님이 내일부터 보름 동안 인터넷 상황이 좋지 않은 부탄 오지 마을에서 지내기 때문에 미리 시무식 법문을 촬영해 놓기로 했습니다.

이어서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의 수행 프로그램인 수행맛보기 입재 법문도 녹화를 했습니다. 1시간 동안 녹화를 한 후 12시 30분에 방송실을 나왔습니다.

이후 오후에는 내일부터 시작되는 50일 동안의 해외 일정을 떠나기 위해 짐을 쌌습니다. 장기간의 여행이라 챙겨야 할 짐들이 많았습니다.

오후 3시 30분부터는 다시 방송실에서 결사행자 자자수련에 온라인으로 참석하여 즉문즉설을 하고, 회향 법문을 했습니다. 결사행자들은 전국 으뜸절 별로 모두 모여서 오늘 하루 종일 자자 수련을 진행했습니다.

40 계본에 따라 참회를 한 후 각자 모둠원들에게 자자를 청했습니다.

“저의 말과 행동을 보고 들으며 의혹이 있거나 저의 수행을 위하여 말씀해 주실 것이 있으면 저를 위하여 자자를 청합니다.”

결사행자들은 자자 수련을 마친 후 다시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자자를 하는 과정에서 궁금한 점이 생긴 부분에 대해 자유롭게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12.3 계엄사태 이후 정치인들이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지 않고 자기가 속한 당의 안위만 지키려는 모습에 화가 많이 났다며 수행자는 이 상황을 어떤 관점을 갖고 바라봐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12.3 계엄사태 후 자신의 정당만 지키려는 정치인들의 행동에 화가 납니다

“오늘 자자를 하면서 12.3 계엄사태를 일으킨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여당 정치인들의 행동에 대해 화가 났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정치인들이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자신의 안위만 지키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이걸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요. 이에 대해 수행자는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나요?”

“사람은 서로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릅니다. 그래서 ‘내 기준에서는 저런 행동이 잘못됐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저 사람이 객관적으로 잘못했다’ 하는 쪽으로 나아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내가 보기에 저런 행동은 국회의원으로서 잘못된 행동이다’ 하는 생각도 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개인의 자유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런데 말을 하든 안 하든 ‘내 입장에서 봤을 때’라는 전제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저 행동은 잘못됐다’ 이렇게 객관적인 것처럼 생각하면 우리는 화가 나게 됩니다. 그러면 상대를 악마화하게 됩니다. ‘법률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이다’ 하는 것도 사실은 내가 보는 관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개인이 놓인 상황에 근거하여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법률에 근거하여 주장하는 것입니다. 모두 다 자기 입장이라는 겁니다.

엊그제 스님의 하루에 종교인모임에서 12.3 계엄사태에 대해 발언한 내용이 나가니까 평소와 달리 댓글에 반대 의견들이 엄청나게 많이 달렸잖아요. 댓글 중에 거의 절반 가까이가 스님의 생각에 반대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심지어 반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욕설을 하는 내용들도 많았습니다. 정치적 견해를 이야기하니까 반대 의견들이 많이 나오는 겁니다.

‘계엄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하는 스님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꼭 사회가 혼란스럽거나 무질서한 게 아니더라도 야당이 입법 독재를 함으로써 대통령이 도저히 국가를 운영할 수 없게 국회가 국정을 마비시켰다. 그래서 계엄을 발동할만했다.’

‘현명하신 스님이 계엄을 발동할 수밖에 없었던 야당의 입법독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하다가 이번 사태에 대해서만 여당과 대통령을 문제 삼는 것은 정치적으로 편파적이다.’

나름대로 논리를 가지고 이런 댓글들을 단 겁니다. 이 사람들은 법률에 근거하지 않고 상황만 갖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들이 볼 때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야당의 행동은 입법독재를 한다고 하지만 모두 법률에 근거해서 하는 행동입니다. 법에 보장된 국회의원의 권리가 행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도 법에 근거해서 하는 행동이에요.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모두 법에 근거해서 권리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할 수는 있지만 탄핵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거부권을 많이 행사했다고 탄핵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군대가 의회를 침입하거나 국회의원을 체포하려고 하거나 경찰이 국회의원 출입을 막거나 하는 것은 법률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설령 계엄을 한 상태라 하더라도 그런 행동은 하면 안 됩니다. 계엄을 할 상황이냐 아니냐 하는 것과는 별개로 계엄을 할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런 행동은 법률에 어긋납니다.

여기서 논쟁이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예요. 첫째, 계엄을 할 상황이냐 아니냐 하는 겁니다. 즉, 계엄이 합법적이냐 불법적이냐는 논쟁이 있습니다. 이것은 법리적인 논쟁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둘째, 설령 계엄이 될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군대를 동원해서 의회를 통제하려고 한 것은 명백하게 헌법 위반입니다. 저는 이것은 법률을 아는 사람이라면 논쟁거리가 별로 안 될 것 같아요. 법률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국회의원들이 말을 안 들으니까 군대가 싹 잡아가야지’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은 법률적으로는 명백하게 위법행위입니다. 이렇게 군대를 동원해서 헌법을 부정한 행위를 ‘쿠데타’라고 말합니다. 다른 용어로는 ‘내란’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명백하게 법을 어긴 행위라고 보이기 때문에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인용될 가능성이 100%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법이라는 것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해석을 할 수가 있거든요. 현재 헌법재판소 인적 구성이 여섯 명밖에 안 되기 때문에 그중에 한 명이라도 이유가 어떻든 반대를 해버리면 탄핵이 부결되고 대한민국은 다시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겁니다. 그 결과를 국민이 승복하면 되는데 지금의 국민 정서에 반하기 때문에 승복이 전혀 안 될 거예요. 그러면 갈등이 더욱 심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봤을 때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때보다는 훨씬 더 탄핵의 이유가 명백합니다. 이번에는 논쟁의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여당의원이라 하더라도 위법, 위헌행위를 한 대통령을 탄핵하는 데는 찬성을 해서 혼란을 단시간에 수습하고, 재발방지를 위해서 헌법을 개정하자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위헌적 행위를 옹호하는 사람은 국회의원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로 화가 날 수는 있지만 수행자라면 화를 내는 것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내가 생각할 때 부당하기 때문에 개선을 위해서 투쟁을 하겠다면 그것은 개인의 자유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대해서도 탄핵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법률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냥 막연히 생각을 갖고 판단하는 겁니다. 즉, 선거가 부정으로 됐기 때문에 국회를 인정할 수 없고, 야당이 국회의 다수가 된 것은 부정선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믿는 거예요. 그래서 선거관리위원회를 제일 먼저 통제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리고 국회에서 계엄 해제 통과가 안 되도록 했습니다. 법 절차에 따라서 한 게 아니라 군대를 동원해서 폭력적으로 법을 어기면서까지 방해를 하려고 했다는 거죠. 그분들의 생각이나 행위가 이렇게 한쪽으로 편중이 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일어난 일련의 행위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적인 행위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 겁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만 보니까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는다는 거죠.

내가 그들의 주장을 이해하는 것과 그들의 행위에 동조하는 것 하고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 문제를 대할 때 객관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하게 되면 우리도 ‘저것들을 싹 다 잡아넣어!’ 이렇게 결론이 날 위험이 있습니다. 나와 다른 상대에 대해 인정과 이해가 없으면 결국 미움과 증오로 나아가게 됩니다. 미움과 증오는 상대를 죽이고 없애버리는 결과가 빚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늘 평화적으로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수행자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 하는 이해를 바탕에 두고 사물을 봐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더 이상 질문이 없자 결사행자들은 스님에게 회향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결사행자들이 늘 중요하게 간직하고 있어야 할 관점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오늘 정토회 결사행자와 법사단이 자자와 포살을 잘 마쳤습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 그리고 수행공동체 정토회는 이로써 청정함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청정한 개인과 승가에 의해 정토회가 잘 운영되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왜 정토회를 창립하여 이렇게 활동하는가?’ 하는 근본 목표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창립을 한 사람들과 달리 나중에 동참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창립 정신이 갈수록 옅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떤 목표를 달성하고 확산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입니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에 젖어서 정토회를 시작했을 때의 순수함과 청빈함을 배울 기회를 잃게 됩니다. 이로 인해 오로지 ‘어떻게 효율적으로 확산시킬 것인가?’ 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일이 중심이 됩니다. 결국 승가에서도 일을 잘하거나 재능이 있는 사람이 인재로 선발되어 주요한 직책을 맡게 되는 경향이 생깁니다. 이렇게 운영의 효율성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면 보통 3대만 지나도 창립 당시에 기존의 불교와 달랐던 특색은 사라지고 다른 단체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되기 쉽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비판했던 종교나 단체들이 왜 그렇게 변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정토회의 창립 정신이 오래 유지되도록 하려면

그래서 기존 단체들을 너무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낫다고 우쭐대서도 안 됩니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변화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인간사이기 때문에 부작용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창립 정신이 30년 갈 것을 50년까지 이어지도록 하고, 50년 갈 것을 100년까지 이어지도록 만들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결사행자와 법사단 여러분의 역할입니다.

개인의 수행에 늘 알아차림이 필요하듯 정토회의 운영을 위해서도 여러분 각자가 알아차림을 잘 유지해서 정토회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나가되 내부에서는 권위주의와 소비주의에 물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결사행자와 법사단은 이러한 변화를 늘 주의 깊게 살펴서 근본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창립 정신이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결사행자와 법사단이 계율과 원칙을 잘 지켜야 합니다. 계율과 원칙을 잘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윗사람이 원칙을 잘 지키면 아래로 내려가면서 분위기가 경직되는 현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원칙을 지키는 것이 군대처럼 권위주의적으로 변하지 않도록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을 동반한 원칙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법사님들은 현장을 항상 관찰하고 살펴서 원칙이 부드럽게 지켜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원칙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지만, 경직된 방식이 아니라 유연함을 유지해야 대중성을 잃지 않게 됩니다. 행정 조직은 원칙을 지켜야 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법사님들은 원칙을 지키면서도 경직성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주어야 합니다. 항상 회원들의 어려움에 귀를 기울이고, 어려움을 들어주고, 경직성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올 한 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일모레부터는 명상과 동안거가 시작됩니다. 개인적으로 정진과 휴식을 통해 연말을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1월 1일 시무식 때는 다 함께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시다.”

사홍서원을 한 후 오후 5시 30분에 자자 수련을 모두 마쳤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내년 상반기에 진행할 예정인 백일특별정진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실무 준비를 하고 있는 특별정진위원회 구성원들과 온라인으로 회의를 했습니다.

백일 동안 경전 강의를 포함하여 사회대학 등을 지역에서도 생방송으로 들을 수 있게 할 것인지, 해운대 정토법당은 정토사회문화회관과 똑같이 모든 프로그램을 진행할 것인지 등 쟁점이 되는 사항에 대해 질의응답 시간을 가진 후 마지막으로 홍보용 포스터 디자인 시안을 검토한 후 밤 9시가 넘어서 회의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서울 공동체 대중과 인사하는 시간을 가진 후 인천공항으로 이동하여 인천공항공사 직원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하고, 오후에는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인도 델리를 경유하여 부탄으로 들어갑니다. 내일부터 보름 동안은 부탄 젬강 지역의 모든 마을을 답사하는 일정이 계속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2

0/200

드림하이

. 미움과 증오는 상대를 죽이고 없애버리는 결과가 빚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늘 평화적으로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수행자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 하는 이해를 바탕에 두고 사물을 봐야 합니다.”

2025-02-13 23:21:46

김종근

감사합니다

2024-12-30 15:24:07

지명화

높다 낮다 우월하다 열등하다 내 속에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시비심을 잘 살피겠습니다.

2024-12-26 13:23:39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