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은 아침 일찍 동해로 가서 문무대왕릉과 감은사지를 둘러보았습니다. 이로써 청년들은 1박 2일 동안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끈 주역들인 김유신 장군, 태종 무열왕, 선덕여왕, 문무대왕을 모두 만나보았습니다. 이제 청년들이 탄 버스는 불국사로 향했습니다.
스님은 9시 30분에 불국사에 도착하여 청년들과 만났습니다.
“잘 주무셨어요?”
“네.”
“아침밥도 잘 먹었어요?”
“네.”
“바닷가 구경도 잘했어요?”
“네.”
“문무대왕릉과 감은사지에 대한 설명도 잘 들었어요?”
“네.”
“대답도 참 잘한다!” (웃음)
불국사 일주문 앞에서 스님은 불국사의 창건 설화와 건물 하나하나에 서려 있는 불교의 세계관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이곳 불국사는 신라가 통일이 되고 한 80년 정도 지난 뒤에 세워진 절입니다. 신라의 국력이 가장 크고 문화가 가장 발달되어 있을 때 세운 절이기 때문에 지금 봐도 건축 양식이 매우 빼어납니다. 그래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어 있습니다. 불국사에서 ‘불국’이란 ‘부처님의 나라’ 라는 뜻입니다.”
일주문을 출발하여 사천왕문을 지나 청운교와 백운교 앞에 청년들 모두가 자리했습니다. 스님은 불국사의 석축 쌓는 방식, 계단을 축조한 방식이 각각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하면서 불교의 이상 세계를 건축물에 담기 위해 정교한 설계가 있었음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연못이 있었던 자리인 구품연지에 대해 설명하고, 축대를 쌓은 방식이 의미하는 ‘모자이크 붓다’에 대해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스님의 설명을 들으며 대웅전, 다보탑, 석가탑,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사리탑, 나한전, 극락전을 차례대로 둘러보고 연화교와 칠보교 앞에서 불교대학, 경전대학, 청년특별지부 소속별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다 함께 불이문으로 걸어 나와 숙소로 가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12시 50분에 버스를 타고 분황사로 향했습니다. 청년들이 모두 모이자 스님은 분황사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모전석탑, 화쟁국사비, 석정, 약사여래불 입상 등 이곳의 유물에 대해 설명한 후 이 절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진 원효 대사의 일생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분황사입니다. 이 절은 원효대사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절로 가장 유명합니다. 원효는 원래 귀족 출신인데 부모가 일찍 죽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랐어요. 그리고 신라의 화랑이 되었는데 전쟁에 나가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친한 친구가 전사를 해버렸어요. 친구가 죽으니까 원효는 원수를 갚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친구의 무덤 앞에서 칼을 꽂으며 ‘내일 내가 원수를 갚아줄게!’라고 다짐하며 친구를 죽인 원수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 사람은 적장을 죽였으니 지금 자기 진영에서 상을 받고 있을 것 같은 거예요. 그런데 원효도 적장을 죽이고 상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내가 기뻐할 때 그들은 슬퍼했고, 내가 슬퍼할 때 그들은 기뻐하는구나!’ 하는 것을 탁 깨달았어요. 이 세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얼마나 무상하고 허무한 일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자기 머리카락을 칼로 잘라버리고 출가를 했습니다.
원효는 어느 스님 밑에 가서 스승이 출가를 시켜준 것이 아니라 본인의 머리카락을 스스로 자르고 출가를 한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살던 집을 절로 바꿔서 '초개사'라고 이름 짓고 수행을 했어요. 부처님도 자기 머리카락을 본인이 잘랐습니다. 보통 사람은 자기가 자기 머리카락을 자르면 사이비가 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크게 깨닫고 출가하면 좀 달라요. 보통 사람이 출가하면 ‘먹는 것이 힘들다’, ‘자는 것이 힘들다’, ‘사는 것이 힘들다’ 하면서 욕구에 늘 끄달리게 되는데, 이렇게 뭔가 깨달음을 얻고 출가하면 세상에 대한 욕망 같은 것이 싹 사라집니다.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달려있구나
출가한 후 엄청나게 집중해서 공부하여 뛰어난 학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신라에 들어와 있는 불교 경전을 다 읽었지만 만족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요즘 대학생들이 미국 유학을 가듯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자’ 하고 의상 대사와 함께 유학을 떠났습니다. 원효는 스물여덟 살에 늦게 출가해서 의상보다 한 대여섯 살이 많았지만 둘은 친한 친구사이였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신라가 백제 땅인 한강 유역의 땅을 차지했을 때였기 때문에,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에 당나라 등주(登州)로 건너가는 배를 타는 곳이 있었습니다. 거기까지 걸어갔는데, 배가 매일 다니는 것이 아니니까 배를 기다리는 동안에 마침 비가 와서 비를 피한다고 깜깜한 밤에 어떤 동굴 같은 곳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잤습니다. 자다가 하도 목이 말라서 더듬더듬하니깐 바가지가 하나 있어서 그걸로 물을 떠먹었어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자기가 떠먹은 바가지가 해골이었어요. 밤에는 그렇게 달콤하게 먹었는데, 아침에 해골을 보자 바로 구토를 했어요. 토하면서 이렇게 깨닫습니다.
‘바가지도 같은 바가지이고 물도 같은 물인데, 어제는 달콤했는데 오늘은 왜 토할까? 이게 바로 마음이구나. 한 생각이 일어나면 모든 법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사라지면 모든 법이 사라지는구나.’
이것이 일체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입니다.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달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까요? 이것은 모두 화엄경에 나온 얘기예요.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는데 체험은 못 한 겁니다. 그런데 토하면서 깨달은 거죠. 일체가 유심조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안 토해야죠. 그런데도 토했다는 것은 아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경계에 끄달려 토하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는 겁니다. 이렇게 딱 깨닫고 나니 진리가 내 마음에 있지 중국에 있는 건 아니었어요. 책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요. 그래서 굳이 중국이나 인도까지 갈 것도 없고, 책만 본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자각해서 다시 서라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의상은 원래대로 중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원효는 국내파이고, 의상은 해외파라고 할 수 있죠. 의상은 당나라에서 유명한 화엄학의 스승인 지엄(智儼)을 만나 공부를 했고, 돌아와 국내에 화엄종을 개창했어요. 다시 말해, 미국에 가서 공부하여 미국의 한 종파에 한국 책임자가 되어서 종파를 하나 세운 겁니다. 반면에 원효는 스스로 깨달아서 종파를 세웠어요. 원효가 세운 종파를 분황사에서 주창했다고 ‘분황종’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지금은 ‘법성종’이라고 부릅니다. ‘법의 성품은 공(空)하다’ 하는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 이후에 원효가 쓴 글들은 굉장히 유명해져서 원효는 일약 신라에서 아주 유명한 스님이 되었어요. 원효가 쓴 글 중에 논의 칭호를 받는 것이 있어요. 논의 칭호를 받는다는 것은 성인이라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금강삼매경론」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입니다. 당시 중국에는 10개가 넘는 종파가 있었어요. 화엄종, 천태종, 율종 등 여러 종파가 있어서 서른 가지 종파가 서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경쟁했어요. 그런데 원효대사가 그 모든 것을 다 읽어보고 하나로 통합했어요. 각 종파의 요점을 종요라고 하는데, 이 종요를 살펴봤더니 다른 얘기가 아니고 모두 부처가 되자는 얘기였어요. 부처님의 팔만대장경을 다 읽어봐도 모두 부처가 되자는 이야기예요. 어떤 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물었을 때 그가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동쪽, 남쪽, 서쪽으로 대답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귀결점은 모두 서울이듯이 모두 부처가 되자고 하는 것임을 깨달은 겁니다. 그러니 다툴 일이 아닙니다. 왜 말이 서로 다른가 하면 각자의 위치가 달라서 그런 겁니다. 즉, 인천 사람이 서울에 가려면 동쪽으로 가야 하고, 강릉 사람이 서울에 가려면 서쪽으로 가야 하는 것처럼 동쪽 서쪽이라고 싸울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글자를 보지 말고 그 글이 가리키는 핵심을 봐야 한다는 거죠. 열 가지 문을 열어서 쟁(諍)을 하는데 본질을 꿰뚫으면 화합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화쟁(和諍) 사상’이에요. 이것은 불교의 전통인 ‘중도(中道) 사상’과 같은 것입니다. 이 글을 당시 당나라 사람들이 보고 ‘이런 통찰력은 보살이라야 알 수 있는 안목이다’라고 평가해서 십문화쟁론이 되었어요.
원효대사는 그 이후에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어디를 가봐도 원효의 자취가 있습니다. 어느 동굴을 가든 ‘원효가 여기사 수행했다’라고 하고, 또 절에 가보면 ‘원효가 처음으로 창건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효가 아마 천 명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전국 방방곡곡에 보이지 않게 다니다 보니 그런 전설이 생긴 겁니다. 이것을 ‘화현’이라고 해요.”
스님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에 청년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습니다.
“여기가 제가 출가한 절이에요.”
“우와!”
청년들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감탄을 했습니다.
“제가 다녔던 학교가 여기서 한 300미터만 가면 있는 경주고등학교예요. 경주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중학교에 다닐 때는 경주 시내에 있는 법장사라는 절에 다니다가, 고등학교 때 분황사 주지로 계신 불심 도문 큰스님을 만나 자의 반 타의 반 스님이 되었어요. (웃음)
저는 원래 스님이 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는데 반강제로 스님이 되었는데도 오래 해보니 괜찮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원해서 한 일들인데 왜 다들 죽겠다고 난리예요? 저는 스님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에요. 지금 생각해 보면 과학자가 된 것이 더 나았을까요? 스님이 된 게 더 나았을까요?”
“스님이 된 것이요.”
“우리 어머니께서 들었으면 여러분들은 혼났을 거예요. (웃음) 우리 아버님은 ‘아들들이 어릴 때는 다 공부 잘한다고 소문이 났는데, 어찌 면 서기하는 놈도 없느냐’ 하고 한탄을 하셨어요. 형제들이 전부 자라서 사회운동을 했거든요. 부모란 그런 거예요. 주위에서 법륜 스님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말해줘도 우리 아버님은 ‘풀도 씨가 있는데, 씨도 못 남기는 게 무슨 사람이냐’ 하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 부모의 말을 잘 듣는 게 반드시 옳은 건 아닙니다. 어릴 때는 부모가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 역할을 하지만, 커서는 부모가 제일 방해꾼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웃음)
설명을 마치고 분황사 경내를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는 여기 분황사 마당에 멍석을 깔고 삼천배 절을 했습니다. 그래서 무릎이 까져서 피가 철철 나고 그랬어요.” (웃음)
보광전 안에 모셔진 약사여래 입상, 원효대사의 초상화, 국보인 모전석탑, 원효대사의 업적을 기리고자 세운 화쟁국사비적, 신라시대부터 사용했다고 전하는 우물 '삼룡변어정'을 차례대로 둘러보고 황룡사지로 향했습니다.
분황사를 나오자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던 황룡사가 자리했던 넓은 빈터가 나타났습니다.
스님은 청년들과 함께 강당과 금당이 있었던 자리로 이동하면서 황룡사가 지어진 연원과 그 과정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지나가는 저 왼쪽부터 저 오른쪽 끝까지 전체가 다 황룡사 터입니다. 절터로서는 동양에서 제일 크다고 전해집니다. 황룡사 절터가 처음부터 이렇게 크게 잡힌 건 처음에 왕궁을 지으려고 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진흥왕 때 신라의 국력이 갑자기 커지니까 반월성이 왕궁으로는 너무 작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새로 왕궁을 짓기로 했습니다. 이곳은 약간 습지여서 땅을 메워서 왕궁터를 닦는 작업을 했는데 커다란 누런 뱀이 나타났어요. 이것을 ‘황룡’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황룡이 나타난 데는 사람이 살 데가 아니다. 여기는 부처님이 살아야 이 땅을 제압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해서 왕궁터를 닦다가 절로 바꾼 거예요. 그래서 이곳에 절터가 크게 잡힌 겁니다.”
설명을 듣다 보니 황룡이 살았다고 하는 우물인 ‘용궁’에 도착했습니다.
“기록에는 황룡사는 용궁의 남쪽, 분황사는 용궁의 북쪽에 있다고 나와요. 그러니까 이 용궁이 기준점이 되는 겁니다.”
강당터를 지나 금당터에 도착해 스님이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여기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금당터입니다. 380평이나 됩니다. 이 돌을 좌대라고 합니다. 장육존불을 모셨던 좌대입니다. 불상이 워낙 크고 무거우니까 마루에 앉히면 찌그러지겠죠. 그래서 이렇게 큰 돌을 좌대로 해서 불상을 고정시킨 겁니다.”
금당터 너머에는 9층 목탑터가 보였습니다.
“저 앞에 보이는 네모난 큰 터가 9층 목탑터입니다. 주춧돌이 몇 개인지 한번 세어보세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총 여덟 개예요. 8 곱하기 8을 하면 총 64개의 주춧돌이 있습니다. 규모가 어마어마하죠? 이것이 황룡사 9층탑이에요. 나무로 만든 9층 목탑입니다. 높이가 지금 기준으로 한 67m 돼요. 67m면 한 20층 높이가 넘습니다. 그런 큰 탑이 여기에 솟아 있었어요.
황룡사도 가운데에 탑이 하나만 있는 외탑 가람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절은 진흥왕 때 지었는데 9층 목탑은 선덕여왕 때 지은 거예요. 자장율사가 중국에 유학을 가서 ‘신라가 어려움에 처했으니 보호해 주소서’ 하고 기도를 했더니 한 선인이 나타나서 ‘너희 나라 임금은 지혜롭긴 하지만 여자라서 위엄이 없다. 그러니 주변 나라들이 깔본다. 그래서 황룡사에 9층탑을 쌓아서 위엄을 보여야 한다’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신라는 그렇게 큰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기술이 없었어요. 그래서 백제에서 아비지 등 장인 200명을 데리고 와서 9층탑을 지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이 지역이 다 논밭이고 마을이었어요. 9층 목탑지와 금당터만 보존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두 곳은 지대가 높으니까 깎아내릴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여기는 말뚝을 박아서 소를 메는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나머지는 다 발굴해서 새로 돌을 갖다 집어넣은 거예요. 강당터는 전부 밭이었어요. 이곳 동네 이름이 구황동인데, 동네 한가운데에 이런 유적이 남아 있었어요.”
다 함께 9층 목탑지로 이동했습니다. 쇠기둥을 박았던 기초석 앞에 서서 스님이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탑의 중심에 있는 이게 심초석이에요. 이 돌의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서 높이가 67m인 쇠기둥을 박은 겁니다. 그 쇠기둥을 중심으로 해서 9층 목탑을 세웠어요. 쇠기둥이 중심을 잡아준 거죠.
그런데 몽고의 9차 침입 때 몽고가 이 황룡사에 불을 질러 버렸어요. 그때 거대한 황룡사 9층탑이 소실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황룡사에는 48만 근짜리 대종이 있었습니다. 에밀레종이 12만 근이예요. 그것보다 4배나 큰 황룡사 대종이 있었는데 그것도 불탈 때 녹았는지 어떻게 됐는지 소실이 됐습니다.
청소년 시기에 세운 원(願)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분황사에 살면서 원을 세운 게 이 황룡사 9층탑과 금당을 복원하겠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살 날이 한 10년 남았는데 복원을 할 수 있을까요? 제가 못하면 여러분들이 해야 합니다. (웃음)
또 하나 원을 세운 게 있는데, 황룡사 대종을 복원하는 겁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황룡사 대종을 복원하기 위해 주말만 되면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고철을 주워서 계속 절에 모았어요. 고철을 얼마나 모아야 대종을 만들 수 있을까요?
그때는 이 들판에서 땅을 파면 수도 없이 기와 조각이 나왔어요. 농사짓는 데는 기와 조각이 돌멩이처럼 방해가 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기와 조각을 주우면 밭둑에다가 모아놓곤 했습니다. 그중에는 기와가 불에 타서 그을음이 져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중에 무늬가 괜찮은 것은 솔로 씻어서 집집마다 보내기 운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경문을 이렇게 써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금은보화입니까? 아닙니다, 조상의 얼입니다. 이 기와에는 조상의 천년의 얼이 서려 있습니다. 그러니 조상의 얼이 담긴 이 기와조각을 집집마다 하나씩 장롱에 보관하십시오.’
이렇게 해서 기와 보내기 운동을 했어요. 요즘은 그렇게 하면 문화재 훼손으로 처벌을 받겠죠. 옛날에는 그런 게 없었어요. 그렇게 기와 조각을 주워서 분황사에 엄청나게 모아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듣기에는 어릴 때 꾸었던 허황된 꿈 같이 들리겠지만, 그런 원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제가 많은 사회실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염원하며
황룡사 9층탑을 세우면서 신라인들이 삼한일통의 꿈을 꾸었듯이 지난 2017년에 한반도에 전쟁 위기가 닥쳤을 때 정토회 회원들도 전쟁을 막기 위해서 여기에서 불심도문 큰스님을 모시고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기도를 했어요. 큰스님을 모시고 주문을 외우면서 문두루 비법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전쟁이 안 났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한반도의 상황은 곧 전쟁이 날지도 모를 정도로 위태위태해요. 지금 다시 기도를 해볼까요? 지금 상황은 여러분 모두가 전쟁이 나지 않도록 마음을 모아야 해요.”
여기까지 황룡사지에 대한 설명을 마친 후 스님이 1박 2일 동안의 통일역사기행을 마치며 닫는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타인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 자기를 아름답게 가꾸는 방법입니다
“불교대학 학생들은 아직 초심자니까 부지런히 정진하세요. 경전대학 학생들은 이제 공부만 하지 말고 봉사도 좀 해야 합니다. 경전대학을 졸업한 정토회 회원들은 이제 모자이크 붓다가 되어서 한 가지 역할을 맡으셔야 합니다.
너무 개인생활에만 빠져서 전전긍긍하지 마세요. 조금 바삭하게 살면 좋겠습니다. 연애하다가 헤어졌다고 울고 있지 마세요. ‘네가 떠나 주니 고맙다. 더 좋은 사람 만나면 되지’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헤어진 사람을 욕할 필요가 없어요. 헤어진 사람을 욕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나쁜 놈하고 3년을 살았으면 누가 바보예요? 자기가 바보죠. 그래서 항상 헤어질 때는 ‘그동안 같이 있어줘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훌륭하십니다’ 이렇게 받아들여야 나도 훌륭한 사람하고 연애해 본 게 됩니다. 이렇게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해요. 알았죠?”
“네!”
“타인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 곧 자기를 아름답게 가꾸는 방법입니다. 직장에서 잘렸을 때도 울면 안 돼요. 다른 데 가면 되지 뭐가 그렇게 큰일입니까. 그렇다고 함부로 아무렇게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개인적인 삶에서 조금은 벗어나서 사회 정의라든지, 환경 실천이라든지, 인권을 증진하는 일이라든지, 평화를 위한 일이라든지,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이라든지, 이런 이슈에 대해서도 여러분들이 조금 관심을 갖고 참여하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다 그만두고 사회 정의를 위해서 사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직장생활을 하는 가운데 조금 더 사회 정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건강한 시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사홍서원을 한 후 청년 경주통일역사기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청년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하고, 스님은 곧바로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천룡사지 복원을 위해 애를 많이 써주시고 있는 분의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잠시 조문을 했습니다.
조문을 마치고 오후 5시가 넘어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해가 저물고 6시부터는 정토회 발전을 위한 모둠장 공청회를 했습니다. 스님은 두북 수련원 방송실에서 온라인으로 참석하고, 정토회에서 모둠장을 맡고 있는 700여 명은 각자 집에서 화상회의 방에 입장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오늘 공청회를 마련한 취지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정토회가 30년 동안 조금씩이라도 계속 성장을 해왔는데 지난 5년간은 정체되어 있다는 진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마련하거나, 조금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 정도만 해도 대성공이다’ 이렇게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대부분의 시민단체 활동이 많이 축소가 되었는데, 정토회는 지금 현상 유지라도 했으니까 잘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특별한 대책을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토회는 이런 변화된 상황을 예상하고 만든 단체이기 때문에 다른 단체와 비교해서 잘했다고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정토회는 기후 위기 시대에 지구 환경을 살리고자 원을 세웠고, 분단 시대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고자 원을 세웠고, 지구촌에 기아, 질병, 문맹을 퇴치하고자 원을 세웠고, 개인의 행복을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고자 원을 세우고 출발한 단체입니다. 미래사회에 어떤 대안을 만들기 위해 출발했기 때문에 기존의 단체들과 비교해서 잘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조금 더 적극적인 활동을 해나가야 하고, 새로운 방식을 찾아내야 합니다.
정토회의 발전을 위해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지난 한 달 동안 합동회의와 전법행자대회를 거치면서 새로운 제안도 많이 나왔고, 그동안에 쌓인 불만도 많이 나왔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전법회원들이 업무 과부하로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활동을 자꾸 그만두게 되고, 전법회원의 수가 늘지 않는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습니다. 온라인 방식으로 모두 전환을 했다가 다시 오프라인 행사가 더해지면서 일이 더 많이 늘어났다든지, 불교대학이 하나 끝나면 바로 다음 학기를 준비하기에 급급하다든지 하는 많은 문제 제기가 있었고,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의 학사 기간을 일 년으로 늘리면 어떻겠냐는 제안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에 대해 깊이 토론을 하려면 짧은 시간 안에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설문조사도 하고 토론도 해야 해요. 불교대학 학사 기간을 6개월에서 1년으로 바꿔보는 실험도 해봐야 합니다. 바꾸려면 실험을 먼저 해보고 변화를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래서 전체 정토회 활동을 활성화시키거나 많은 부분을 바꾸자는 제안은 앞으로 2차 천일결사 준비위원회가 만들어지면 거기서 해나가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토론의 주제는 두 가지로 범위를 좁혔습니다. 첫 번째 토론 주제는 서울 정토사회문화회관을 어떻게 활성화시킬 것인가입니다. 두 번째는 추진 주체를 누구로 해서 그 일을 추진하는 게 좋겠는지입니다.
서울 정토사회문화회관을 중심으로 오프라인을 활성화시키게 되면, 저녁반도 활성화가 되겠지만 주간반이 더 많이 활성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상근으로 봉사하는 활동가도 나올 가능성이 있고요. 여기에 대해 자신의 의견이 있으면 마음껏 얘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방법 자체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반론을 제기해도 됩니다. 그럼 토론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이어서 누구든지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습니다.
“정토사회문화회관의 출입이 좀 더 자유로워지면 좋겠습니다.”
“수행법회도 이제 오프라인에서 진행하고, 그걸 생중계하면 좋겠습니다.”
“상근 활동가를 양성하기 전에 먼저 반상근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확대해 보면 좋겠습니다.”
“온라인으로 바꾸고 나서 조직구조가 복잡해졌는데 삼단계로 단출하게 바꿔보면 좋겠습니다.”
“온라인정토회가 확대되려면 현장에 해당하는 모둠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게 필요합니다.”
“온라인으로 바뀌고 회의와 업무가 더 많아졌습니다. 과부하된 업무를 줄이면 좋겠습니다.”
“상근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고 발굴하는 시스템을 적극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오프라인 불교대학을 운영하면 그에 따라 봉사하는 사람들도 늘어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회 안에 모둠 수를 좀 줄이더라도 지회장이 인력 관리를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조직을 재편하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이후 먼 거리 이동을 꺼려하는 분위기 속에서 오프라인 불교대학이 성공할 수 있을지 시범 운영이 필요합니다.”
“하루 출가, 1박 2일 출가, 8일 출가,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활동가 양성의 토대를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각 부서별로 필요한 상근 인력과 봉사 일감들을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불교대학과 수행법회를 오프라인에서 진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요법회도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할 수 있게 열어주면 좋겠습니다.”
“활동을 오랫동안 해오다가 온라인 전환 이후 활동을 그만둔 사람들을 다시 발굴해 보면 좋겠습니다.”
“불교대학과 경전대학 졸업생들이 회원이 되면 이들의 정착을 위해 해당 모둠장이 연속해서 일정 기간 수행법회를 함께 듣는 프로그램을 진행해 보면 좋겠습니다.”
많은 제안과 의견들이 쏟아졌습니다. 쟁점이 나올 때마다 스님은 700여 명이 손들기 버튼을 통해 찬성과 반대 의사 표시를 해보도록 하여 전체 대중의 여론을 확인했습니다.
오늘 나온 제안들을 잘 정리하여 다음 주 주말에는 지회장과 지부장이 참석한 가운데 1박 2일 동안 집중 토론을 더 해보기로 했습니다. 원래는 밤 10시까지 하기로 했는데, 예정보다 30분 일찍 밤 9시 30분에 모둠장 공청회를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두북 수련원에 불교계 손님들이 찾아와서 함께 식사를 하며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눌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29
굴뚝연기
스님ᆢ고교때 분황사에 사시며,
황룡사 9층탑과 금당을 복원하겠다는 원과ᆢ
황룡사 대종을 복원하기 위해 주말만되면 리어카를 끄시고 고철을주워 계속 절에 모으시고요ㅜ
그때 그 들판에서 땅을 파면 수도 없이 나왔던 기와 조각들을 모아,<기와 보내기 운동>도 하셨었군요^^참남다르셨고 순수하셨네요^^
2017년,도문스님께서 평화통일기원 문두루비법도 하셨었군요!
2024-10-27 14:53:10
CACTUS
들어도 들어도 원효대사의 이야기는 재미가 있네요. 스님의 뜻대로 황룡사기 다시 복원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