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4.10.10 이스탄불 유적지 답사, 총영사 관저 만찬
“퇴직 후 제일 먼저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이스탄불을 방문하여 유적지를 답사하고, 주이스탄불 대한민국 총영사 관저에서 총영사님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숙소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7시 10분에 가지안테프(Gaziantep)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여 1박 2일 동안 무사히 일정을 소화할 수 있게 운전을 해준 화이트헬멧(WHITE HELMETS) 대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Thank you.” (감사합니다.)

오전 8시 55분에 가지안테프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1시간 55분을 이동하여 10시 50분에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수하물을 찾고 공항을 나온 후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길이 많이 막혀 오후 1시 30분에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푼 후 이스탄불 구시가지로 향했습니다. 준공식에 참석한 손님들을 위해 이스탄불에서 가장 대표적인 유적지 몇 곳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물 저장고로 유명한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ICI)입니다. 동로마 제국 시대의 지하 저수조로 예레바탄 사라이는 '땅에 가라앉은 궁전'이라는 뜻입니다. 지하 궁전이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콘스탄티노플 시대에 물을 저장하는 시설로 이용되던 곳이라고 합니다. 저수조로 사용된 이곳이 지하 궁전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돌기둥 때문입니다. 총 336개의 아름다운 대리석 기둥은 그리스와 로마의 신전에서 뜯어온 것들입니다.

관광객들을 위해 낮은 수위로 물이 들어차 있게 해 놓아서 물에 비친 돌기둥의 모습이 오묘한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무수히 많은 기둥들이 지하 궁전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습니다.

지하 궁전을 나와 성소피아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이스탄불에는 고대 문명, 그리스와 로마, 오스만 제국의 유적이 다양하게 공존하고 있는 곳인데요. 스님은 왜 이곳에 다양한 문명의 흔적이 교차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스탄불에는 크게 세 가지 문명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첫째, 이곳은 고대 그리스 문명이 발달한 지역입니다. 바다를 끼고 양쪽으로 그리스 문명이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는 트로이 등 그리스 문명의 유적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둘째, 이곳은 로마 시대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갈라지면서 여기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동로마는 ‘비잔티움’이라고 불리던 이곳을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명명하여 새로운 수도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유적이 이곳에 엄청나게 많은 겁니다.

다양한 문명의 흔적이 교차하고 있는 이스탄불

원래 그리스는 기독교 국가가 아니었고, 로마도 기독교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313년에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고 326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함으로써 이교적 행위를 전면 금지시켰습니다. 방금 전에 방문했던 지하 저수조에서 봤던 수많은 돌기둥도 모두 그리스 신전이나 로마 신전에서 가져온 겁니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가보면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유적이 로마보다 더 많이 있습니다.

셋째, 로마 시대가 지나고 지금 튀르키예의 다수 국민을 형성하고 있는 투르크족이 이곳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투르크족은 중국말로 돌궐족이라고도 하는데, 당나라의 위협을 받고 돌궐족이 서쪽으로 오다가 이곳에 이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셀주크 투르크(Seljuk Turk) 제국이 형성되었다가 망하고, 다시 오스만 튀르크가 일어나서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곳을 통치합니다.

여기는 동로마의 수도였는데 보스포루스 해협이 관통하고 있습니다. 동로마는 오스만 튀르크의 침략으로부터 성을 보호하기 위해 해협을 쇠사슬로 막아서 배가 그쪽으로 못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오스만 튀르크의 황제가 배를 밀어 산으로 올라간 거예요. 바다로 못 들어가니까 배 밑에 통나무를 대고 배를 밀고 산으로 올라가서 침략해 들어간 거죠. 그렇게 해서 오스만 튀르크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곳을 수도로 정합니다.

이런 역사가 있다 보니 이스탄불에는 그리스 시대의 유적, 로마 시대의 비잔틴 유적, 오스만 제국의 유적이 다양하게 남게 된 것입니다.”

길을 걷다 보니 높이 솟은 성소피아 성당이 금방 보였습니다. 성소피아 성당은 튀르키예어로는 ‘아야 소피아(Aya sofya)’라고 부르는 곳인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비잔티움 건축의 대표작으로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축물입니다.

573년에서 1453년까지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총본산이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1453년부터 1931년까지는 모스크로 사용되었고, 최근에는 모스크 및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소피아 성당 안에는 들어가 보지 않고 입구에서 외관만 본 후 다음은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Sultan Ahmet Camii)로 이동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제14대 술탄 아흐메트 1세의 명령에 따라 1609년부터 착공에 들어가 7년이란 공사 기간 끝에 1616년에 완성된 사원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모스크 안 벽면을 온통 뒤덮은 푸른 빛을 띠는 도자기 타일 때문에 블루 모스크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성소피아 성당이 거대한 돔 형 건축물로 탄생한 것이 537년이고 블루 모스크의 완공은 1616년이니 무려 1,079년이나 늦은 셈입니다.

내부에 있는 거대한 돔은 네 개의 거대한 기둥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었습니다. 돔의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육중하게 만들어진 이 기둥은 직경이 5m가 넘어 일명 코끼리의 다리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모스크의 설교단에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첨탑(minaret, 미너렛)이 6개인 사원입니다.

블루 모스크를 보고 나오니 히포드롬 광장(Hippodrome Square)이 나왔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의 마차 경기장이었지만 지금은 이스탄불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이 되었습니다.

광장에는 오벨리스크가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제작 기원은 무려 기원전 3000년 이집트입니다. 이집트 카르나크 아몬 신전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집트 오벨리스크’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집트에서 이스탄불로 옮겨 온 유적입니다.

히포드롬 광장에서 잠시 휴식을 한 후 이스탄불 구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카페로 이동했습니다.

저 멀리 성소피아 성당도 보이고, 반대편에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도 보이고, 보스포루스 해협도 보였습니다. 차를 한잔 하면서 스님은 이곳 이스탄불의 역사에 대해서 JTS 대표단 일행에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카페를 나와 JTS 대표단 일행은 숙소로 이동하고, 스님은 저녁 6시에 주이스탄불 대한민국 총영사관 관저로 이동했습니다. 스님이 튀르키예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총영사님이 저녁 식사에 초청했습니다. 전 한인회 회장님이 스님을 모시고 총영사관 관저로 향했습니다.

총영사님은 스님을 반갑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관저에서는 이스탄불 전체 시가지가 한눈에 보였습니다. 아름다운 이스탄불의 야경에 대해 총영사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 저녁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스님이 어제 튀르키예-시리아 접경 지역에서 지진 피해로 무너진 학교를 새로 준공하고 온 소식을 공유해 주었습니다.

“어제 준공식을 잘 마쳤습니다. 시리아 임시정부 수반 등 귀빈들이 많이 참석했습니다. 튀르키예 관할 구역의 주지사도 자리해 주셨고, 시리아 북부 지역에서 거의 모든 내빈들이 참여한 가운데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학교 준공식 이후 남은 과제들

학교 준공식을 끝으로 1차적인 마무리는 되었어요. 아직 남은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 신발을 모두 사주기로 했거든요. 학생들이 모두 학교에 등록을 해야 신발 사이즈를 맞출 수 있어서 개교하는 날 나눠주지 못했습니다. 책가방은 그냥 적당한 크기로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용으로 준비할 수가 있었는데, 신발은 개개인에게 맞춰야 하니까요. 또 유리창으로 아이들이 떨어질 위험이 있어서 창살로 막는 작업도 남아 있고, 과학실에 실험 기자재도 마련해야 하고, 도서관에 책도 배치해야 하고, 컴퓨터실에 컴퓨터를 설치하는 일도 남았습니다. 태양광 전지를 옥상에 60여 개를 설치했기 때문에 전기는 충분했습니다. 아직 추가적인 일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어제 준공식 날에 학교를 일단 교육부에 넘겼습니다. 학교 운영은 교육부가 주도적으로 해나갈 것인데, 남은 작업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과제입니다.

그 외에 지진으로 무너진 학교가 많이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나 학부모들이 노동력을 제공하겠다고 하면 JTS에서 건축 자재는 지원해 주겠다고 이야기는 해 놓았습니다. ‘학교를 고쳐 주세요’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고치도록 하는 것이 JTS의 원칙입니다.

가장 큰 과제는 문맹 퇴치, 학교 보수, 초등학교 교육 정상화,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제가 먼저 제안을 하긴 하지만, 그들이 하겠다고 해야 진행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안 하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저는 구호 활동을 할 때 주민들의 자발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그들이 하겠다고 결심하면 JTS는 어떻게든 지원할 방법을 찾아서 도울 예정입니다.”

“스님께서 구호 활동을 하는 방식이 참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총영사님은 스님에게 지진 피해 지역의 구호 활동에 대해 다양한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은 종교가 불교이고, 구호 활동을 하는 곳은 주로 이슬람교를 믿는 지역입니다. 구호 활동을 하는 데에 제약은 없나요?”

“저는 어디를 가든 종교적인 활동은 일절 하지 않습니다. 필리핀에도 무슬림 반군들이 있지만, 저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또 어떤 종교적 가르침도 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단지 학교를 세워 아이들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할 뿐입니다. 종교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눈이 아파서 안과에 갔는데 안과 의사가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상관이 없잖아요. 종교는 그저 개인의 신앙 문제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약 같은 건 전혀 없어요.”

“저는 아랍어를 전공해서 이슬람 종교와 관련된 수업을 많이 들었는데요, 교수님께서 항상 하셨던 말씀이 무슬림들은 기독교보다 불교를 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일신 사상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독교보다는 불교에, 불교보다는 무신론자에게 더 예민하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승복을 입고 활동하실 때 그들이 어떤 시선으로 볼지 궁금했습니다.”

“여기는 제가 누구인지 몰라요. 왜냐하면 불교를 믿는 사람이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불교를 믿는다는 사실도 전혀 모릅니다. 그냥 한국 사람들이 와서 학교를 짓고 있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지은 학교’라고 받아들일 뿐이에요. 게다가 요즘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잖아요. ‘그 학교는 한국 사람들이 지은 겁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럼 학교를 짓는 데 사용한 비용은 어떻게 마련이 되나요?”

“한국에서 JTS를 후원하는 회원들이 모은 기부금도 일부 있지만, 이번 지진 피해 지원은 미국JTS에서 지원을 했습니다. 국내외에서 즉문즉설 강연을 듣는 분들이 많은데, 대부분 자기가 어려웠을 때 도움을 받았다거나, 죽으려고 했는데 덕분에 살았다거나, 이혼하려다가 안 했다거나,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는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고마움을 표시하려고 합니다. 그럴 때 저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동참하라고 권유합니다. 그러면 기부금을 조금씩 내어주십니다. JTS는 ‘가장 어려운 곳에 지원한다’ 는 원칙을 가지고 있어요. 분쟁 지역을 일부러 찾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어려운 곳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분쟁 지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시겠어요.”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세월은 흐르기 마련입니다. 누워 있어도 하루가 가고, 이렇게 바쁘게 다녀도 하루가 갑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세월이 멈추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한다고 해서 세월이 빨리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차피 세월은 흘러가고, 죽을 때가 되면 가는 거니까요.”

대화를 마치고 총영사님 그리고 영사관 관계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방명록을 남긴 후 다음 방문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영사관을 나왔습니다.

“오늘 식사 잘 했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소피아 성당과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야경도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밤 10시에 숙소에 도착한 후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달 30일 창원에서 열린 행복한 대화 강연에서 질문자와 스님이 대화를 나눈 내용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퇴직 후 제일 먼저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저는 올해 12월이면 직장 생활을 한 지 30년이 됩니다. 앞으로 3년 후에는 정년퇴직을 해야 됩니다. 막상 질문지를 작성하고 보니까 이 질문에 스님이 답변하실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웃음) 왜냐하면 오늘 질문 드릴 내용이 가정 생활과 직장 정년에 관한 것인데, 둘 다 스님께서 안 해보신 경험이라 묻는 것이 송구스럽습니다.

“예. 묻는 게 예의가 아니지요.” (웃음)

“정년을 3년 남긴 시점에서 돌아보니까 지난 30년 중에 집사람과 보낸 시간보다 직장 동료와 보낸 시간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요즘 동료들의 얼굴을 가만히 보면 언제부터인가 권태가 느껴집니다. 저도 그 사람들의 얼굴이나 눈빛만 봐도 다 아니까 재미가 없고요. 거기다 정년이 얼마 안 남아서 하는 일도 재미가 없습니다. 일에 대한 권태기인가 싶을 정도로 일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느낌입니다. 저는 솔직히 현재의 회사 생활보다 퇴직 후의 삶에 더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직장에서는 하라는 일과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 됐지만, 이제 나가서는 제가 일을 찾아서 해야 하고, 또 그 속에서 행복도 찾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퇴직 후에 사회에 나가서 인생 2막을 살아갈 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를 말씀해 주시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지금 직장 다니는 게 별로 재미가 없으면 명예 퇴직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조기 퇴직이라고도 하고요. 그걸 신청하면 됩니다. 그게 무슨 큰 고민거리라고 묻습니까? 명예 퇴직하면 퇴직금을 더 받을 수 있으니 목돈도 챙길 수도 있잖아요.

퇴직을 하고 나와서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 목표가 직장 생활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돈 벌 궁리를 하는 것 같거든요. 질문 내용을 들어보니 곧 퇴직금까지 말아먹겠구나 싶습니다

퇴직을 하고 사회로 나와서 할 수 있는 일이 크게 세 가지 중에 하나예요. 가지고 있는 돈만으로 곶감 빼 먹듯 쓰면서 살 수만은 없으니까요. 첫째, 자영업입니다. 치킨집을 낸다든지 가게를 내는 거죠. 그런데 자영업이라는 게 사회 전체적인 트렌드에 비춰보면 조금씩 말아먹을 걸 한꺼번에 말아먹는 방법밖에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둘째, 주식 투자든 코인투자든 투자를 하는 겁니다. 투자를 하는 게 그래도 낫지 않나 싶을 텐데, 이것도 한꺼번에 퇴직금을 말아먹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셋째, 사기를 당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지인이 찾아와서 ‘작은 회사를 새로 시작하는데, 네가 3억만 투자하면 월급도 주고 사장 자리도 줄게’ 하는 제안을 합니다. 질문자가 그래도 한 30년 회사에 근무하면서 직급이 부장 이상 정도는 되었을 텐데, 어디 가서 수위를 할 수 없잖아요. 그렇다고 자원봉사를 할 것도 아니고요. 내 품위에 맞는 직책과 월급이 나오는 자리를 투자 조건으로 제시하면 거기에 금방 속아 넘어갑니다. 거기에 투자하면 거의 100% 돈을 날리게 됩니다. 주로 군인 출신, 경찰 출신, 공무원 출신 퇴직자가 이런 사기에 많이 걸려듭니다. 굉장히 영리한 사람들인 것 같은데, 이런 부분에는 대단히 어리석습니다. 퇴직하고 사회에 나와서 ‘뭔가 해봐야겠다’ 하고 시도하는 것은 90퍼센트 이상이 실패한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퇴직하고 나서 뭘 해야 되느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앞치마를 두르는 것입니다.”

“예, 그거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퇴직하자마자 아무것도 하지 말고 부인한테 가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여보, 지난 30년간 나랑 살면서 고생 많았지요. 내가 항상 당신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는데, 직장일 하느라 못 도와줬다. 어차피 도와주지도 못하는데, 말로만 도와주고 싶다고 하면 진정성이 없어 보이니까 내가 말도 제대로 못 했어. 그런데 이제 퇴직을 했으니까 집안일은 내가 할게. 당신은 집안일에서는 손을 떼라. 내가 매일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다 할게.’

이렇게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첫 번째로 할 일입니다. 이것이 돈 얼마를 더 버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이렇게 3년만 앞치마를 두르고 집안일을 하게 되면 앞에서 말한 사기 당할 세 가지 위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퇴직한 직후가 사기를 당할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3년 정도 지나면 사기를 당할 확률이 줄어듭니다. 3년을 넘기면 사기 당할 일들이 눈에 안 들어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부간에 보이지 않는 냉랭함도 없어지고 신혼부부처럼 지낼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하면 처음에는 부인이 기고만장해져서 더 밟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약을 처음 먹으면 나타나는 반응처럼 약간의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과 같아요. 밟는 대로 밟히고 나서 회복을 해야 됩니다. 부인에게는 그동안 나에게 억눌렸던 감정이 있기 때문에 내가 숙이고 내려가면 나를 존중해 주는 게 아니고 확 밟아버립니다. 이때 화를 참지 못하고 ‘내가 숙여줬더니, 이게 어디서?’ 하면 안 되고, 이 위기를 잘 극복해야 됩니다. 그래서 좀 밟혀줘야 됩니다. 왜냐하면 부인도 분풀이를 좀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를 넘기면 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부부 관계가 평등해집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30년은 더 살아야 되잖아요.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한 사람은 밥하고 한 사람은 책 읽는 관계가 아니고, 누구든지 그저 한 사람이 밥 하면 한 사람이 설거지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밥하면 한 사람이 청소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늙어가는 가운데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어요.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두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 이사할 때 나만 두고 갈 위험이 있습니다. 애완견보다 집안 내 서열이 낮아집니다. 둘째, 수명이 짧아집니다.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평균 수명이 7년 정도 짧은데, 그 이유는 권위주의를 버리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도 솔선수범 하지 않고 대우만 받으려고 하는데, 그러면 부인이 대우를 안 해줍니다. 부인도 남편이 돈을 벌 때는 참고 살았는데, 이제 돈도 안 버니까 ‘너는 손이 없나 발이 없나. 입만 있나?’ 이렇게 나옵니다. 남편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속이 상하게 되죠. 안 그래도 직장 그만두고 위축되어 있는데, 마누라까지 나를 무시하나 하는 생각에 화가 불같이 납니다. 그러면 부인은 더 기분이 나빠져서 ‘돈도 못 버는 주제에 큰소리치네’ 하고 맞대응을 합니다. 그래서 싸움이 점점 커져요.

이미 일본에서는 황혼 이혼이 증가하고 있고, 이혼을 하면 법적인 절차가 복잡하니까 졸혼이라는 것도 나왔습니다. 요즘은 시댁과의 관계를 단절하기 위해서 사후 이혼이라는 것도 나왔습니다. 남편이 죽더라도 시댁과의 관계는 계속되잖아요. 그래서 사후 이혼을 해서 시댁과의 관계도 끊는 겁니다. 젊은 세대는 안 그렇지만, 나이 든 세대의 여성들은 어쨌든 시댁에 메여 살았잖아요. 일본의 사회 현상이 우리나라보다 10년 앞서가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걸 보면 우리나라도 어떻게 되겠는지 대충 예측이 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퇴직하자마자 앞치마 두르기 3년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실천할 수 있으면 그다음부터는 뭘 해도 좋아요. 퇴직금으로 검소하게 살면서 여러분들이 가진 재능을 세상을 위해서 한 10년 정도 쓸 수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자원봉사입니다. 우리나라 안에서 봉사하는 것도 좋지만, 전 세계로 나가서 봉사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가 큽니다. 지금 정년 퇴직하는 분들은 대부분 나이가 60대인데, 어릴 때 어깨너머로 아버지 농사짓는 것도 보고, 아버지가 기술을 사용하는 것도 봤기 때문에 비록 평생 사무직으로 일을 했어도 농사나 기술을 사용하는 일에 대한 감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베트남을 가든 태국을 가든 라오스를 가든 처음에 서툴러도 금방 일에 익숙해집니다. 왜냐하면 어릴 때에 본 게 있기 때문이에요. 퇴직 후에는 스스로 보람도 느끼고 세상에 도움도 되는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원봉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더라도 먼저 부인과 상의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군복무 하듯이 앞치마 두르기 3년을 한 뒤에 그 후에는 자원봉사를 하러 전 세계로 나가면 좋겠습니다. 절대로 투자니 뭐니 이런 머리는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영업과 같은 경제 활동을 해야 하는 형편이라면, 퇴직한 뒤에 바로 하지 말고 지금부터 미리 연습 삼아 조금씩 해야 됩니다. 퇴직 후에 빵집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앞으로 남은 3년 동안 주말마다 빵집에 가서 봉사를 하는 거예요. 파트타임으로 배달도 해보는 겁니다. 만약에 사회 운동을 하겠다고 해도 시민 단체에 가서 자원봉사를 해봐야 합니다. 농촌에 가서 농사를 짓겠다 하더라도 주말이나 휴가 때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지어봐야 합니다. 퇴직하고 바로 시골로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면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한 3년 동안 연습을 해보면 이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 알 수 있고,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는지 방법도 알 수가 있어요. 만약 경제 활동을 하겠다면 그렇게 해야 됩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보다는 퇴직하고 앞치마를 두르는 게 가장 낫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세 가지는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첫째가 뭐라고요?”

“투자를 해서 헛돈을 쓰지 마라.”

“투자한다고 해서 헛돈은 아니에요. 다 돈을 벌 수 있는 일인데, 만만치가 않다는 뜻입니다. 투자를 요청하는 게 대부분 퇴직금을 노리는 것이기 때문에 사기를 당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이야기한 세 가지는 꼭 주의를 해야 됩니다.

앞치마를 3년 두른 뒤에 경제 활동을 하는 것은 괜찮아요. 3년 정도 지나면 마음이 안정이 되어서 조급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투자 제안이 와도 조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직장을 딱 그만두면 부인이 나를 무시하니까 사람의 심리가 ‘내가 어떤 사람인데’ 하면서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집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나를 무시한 인간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심리가 일어나기 때문에 어떤 판단을 할 때 잘 따져보지 않고 자기도 모르게 속아서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경제활동을 하더라도 3년 정도 있다가 해야 됩니다. 퇴직하자마자 최소 3년은 가정일을 도맡아서 하겠다는 관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네, 스님 말씀을 가슴에 새겨서 앞치마를 3년 간 꼭 두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내일은 오전에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을 둘러보고, 오후에는 숙소로 돌아와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한 후, 저녁에는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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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행복

감사합니다.

2024-10-15 17:24:53

세명화

스님 감사합니다 스님은 참 종경스런 분입니다 좋은 말씀을 듣고 나을 잘 알겠 되여 참 감사합니다 스님 항상 행복하시고 강건하세요

2024-10-15 04:04:04

미야

3년 뒤에 질문자의 나눔을 꼭 듣고 싶습니다.
스님의 하루를 읽으면서 스님따라 매일 여행하는 것 같습니다. 튀르키예도 꼭 가보고 싶어요.
저도 은퇴후에 어떤 봉사활동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2024-10-14 15: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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