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선유동 정토연수원에 숙박하고 있는 청년 100여 명은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하여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공동 울력을 했습니다.
일부는 연수원 주변에 잡초를 뽑고, 일부는 숲 속 산책길에 부러진 나뭇가지와 솔방울을 줍는 일을 하는 등 곳곳에서 울력을 한 후 7시에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새벽부터 청년특별지부 선배들이 정성껏 만든 밥과 국을 받은 후 각자 집에서 가져온 반찬을 펼쳐놓고 맛있게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스님과 함께 계곡을 산책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침 체조를 한 후 연수원을 출발하여 넓은 기암괴석이 있는 학천정까지 천천히 걸었습니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도반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맑은 공기도 흠뻑 마셨습니다.
학천정에서 스님에게 설명을 들은 후 청년들은 넓은 바위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물놀이를 한 후 힐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은 무릎 관절이 아파서 차를 타고 다시 연수원으로 돌아가고, 청년들은 계곡에서 더 놀다가 왔던 길을 걸어서 연수원으로 돌아왔습니다.
힐링의 시간을 마치고 오전 10시부터 다시 대강당에 모여 스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시간은 ‘일과 수행, 직장생활과 정토회 활동의 조화’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스님이 정토회가 실현하고자 하는 ‘일과 수행의 통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은 일과 놀이거나 일과 휴식입니다. 주로 생산적인 일을 할 때, 즉 돈이 벌리는 일을 할 때 일이라고 하고, 육체적인 고단함을 쉬는 것을 휴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풀면서 보내는 것을 놀이라고 합니다. 놀이는 대부분 돈을 쓰면서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면 육체적으로 피곤해지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쉬어야 하고 정신적으로 놀아야 해요. 그런데 일한다고 휴식을 못 하면 육체적으로 고단해지고, 충분히 놀지 못하면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똑같이 춤을 추는데, 왜 노동이 되기도 하고 놀이가 되기도 할까요?
디스코장에 가면 무대 위에는 무희가 나와서 춤을 추고, 무대 밑에는 놀러 온 사람들이 춤을 춥니다. 무대 위에 있는 사람들은 돈을 받고 춤을 추고, 무대 밑에 있는 사람들은 돈을 내고 춤을 춥니다. 음악이 울려 퍼지면 춤추는 건 똑같아요. 그런데 무대 위의 사람들은 일하고 있다고 하고, 무대 밑의 사람들은 놀고 있다고 합니다. 똑같이 춤을 추는데 왜 한 사람은 논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일한다고 할까요? 차이는 돈을 받느냐 돈을 쓰느냐입니다. 한 사람은 돈을 벌기 때문에 일이라고 명명하고, 한 사람은 돈을 쓰기 때문에 놀이라고 명명합니다. 예를 들어, 무대 위에는 한 시간 춤추고 돈을 받기로 하고, 무대 밑에는 한 시간 춤추고 돈을 내기로 했다고 합시다. 주인이 30분 간 무료로 춤을 더 추라고 하면, 무대 밑에 있는 사람은 환호성을 지르고,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은 추가 수당을 안 준다고 불만을 가집니다. 똑같은 행위를 하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일과 놀이로 나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돈을 받고 하면 일이 되고, 돈을 주고 하면 놀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돈을 주고받음이 없는 것이 ‘자원봉사’입니다. 돈을 받아야 하는데 못 받으면 강제노동이라고 합니다. 어떤 문제가 있기에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밭에서 일하고 있다고 합시다. 둘 중에 한 사람은 노동자이고, 한 사람은 밭주인입니다. 누가 노동자이고 주인인지는 일이 끝나면 알 수 있습니다. 일이 끝나고 돈을 주는 사람이 주인이고, 돈을 받는 사람이 노동자입니다. 우리는 뭐든지 얻는 걸 좋아하는데, 그것은 주인의 길이 아니라 종의 길이에요.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어떨까요?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는 주인과 노예가 있었고, 노예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습니다. 일을 해도 대가를 못 받고 마치 가축처럼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했습니다. 사람이 가축을 부릴 때는 가축을 먹여주고 재워만 주지 돈을 주지 않습니다. 실컷 부려먹고 팔아버리거나 잡아먹어버리죠. 지금 시점에서 보면 아무런 노동의 대가를 못 받는 강제 노역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더 처우가 개선된 게 중세 시대의 농노예요. 농노는 노예처럼 사고팔 수는 없었습니다. 토지에 묶여서 땅을 경작해 주고 돈을 받았습니다. 땅 주인을 위해 3천 평을 경작해 주는 대신 1천 평은 내가 먹는다든지 했습니다. 그러나 땅 주인이 농노를 사고팔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가 생겨났습니다. 돈에 묶여 있는 사람이 바로 노동자입니다. 노비는 신분에 묶여 있고, 농노는 땅에 묶여 있고, 노동자는 돈에 묶여 있습니다. 돈에 묶여 있기 때문에 신분과 학벌이 어떻든 돈만 주면 다 부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돈에 묶여 있기 때문에 이 회사에 근무하다가 저 회사에서 돈만 더 준다고 하면 옮겨갑니다. 이게 주인 된 자세 같지만 사실은 돈에 묶여 있는 겁니다. 노비는 주인이 먹는 걸 잘 주고, 입는 걸 좋게 해 주고, 잠자리를 좋게 해 주면, 다른 노비에 비해서 행복해합니다. 주인으로부터 최고의 혜택을 받기 때문입니다. 농노는 주인이 땅을 많이 준다고 하면 기뻐합니다. 노동자는 일을 적게 하는데 돈을 많이 주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동자가 행복해지는 방법은 적게 일하고 돈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어려운 일보다 쉬운 일을 하되 돈은 많이 받고, 가능하면 더러운 일을 안 하고 깨끗한 일을 하고, 가능하면 위험한 일을 안 하고 편한 일을 하고, 가능한 돈을 많이 받는 곳이 가장 좋은 직장이 되는 겁니다.
인류 역사를 봤을 때 원래 모든 인간은 자유인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의 흑인들도 원래는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인들이 아프리카 대륙에 와서 흑인들을 강제로 잡아서 노예로 판 겁니다. 자유인으로 살던 사람들은 저항을 했습니다. 강제로 잡힐 때 절반이 죽고, 배 타고 가다가 절반이 죽고, 도착해서 도망을 가다가 절반이 죽었습니다. 노예는 마치 가축과 똑같았습니다. 야생동물을 길들이려면 굉장히 어렵습니다. 야생동물이 저항을 해서 도망을 가든지, 사람이 다치든지 하게 됩니다. 그런데 야생동물이 낳은 새끼를 처음부터 가축으로 키우면 덩치가 큰 코끼리도 유순해집니다. 그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노예로 키워지면 노예적 사고밖에 못합니다. 마치 로봇에 프로그램을 설치하면 시킨 대로만 하는 것과 같아요. 처음에는 자유인이었지만, 노예로 전락했다가, 농노가 되었다가, 지금은 노동자가 된 겁니다.
무엇이 정말로 노동의 해방일까요?
그러니 노동시간을 줄이고 월급을 많이 받는 게 노동의 해방일까요? 주인이 안 때리고, 좋은 음식 먹여주고, 좋은 옷 입혀주고, 좋은 곳에 재워주고, 일하기 힘들지 않게 해주는 게 노예의 해방일까요? 노예의 해방은 신분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농노의 해방은 토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노동의 해방은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일을 적게 하고 돈을 많이 받는 게 노동의 해방이 아닙니다. 주인은 노동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주인은 모든 일이 자기 일이니까 가게가 크든 작든 몇 시간 일해야 한다고 정해놓고 일하지 않습니다.
노동시간을 줄이거나 초과 근무를 할 때 수당을 받도록 하는 것은 처우를 개선하는 것이지 노동의 해방은 아니에요. 진정한 노동의 해방은 노동을 놀이화하는 것입니다. 노동이 놀이가 되려면 그 일이 자기 일이 되어야 합니다. 춤을 추고 노는 사람들은 춤을 추는 것이 자기 일이에요. 노는 사람들은 노래를 하기 위해 돈을 냅니다. 그러나 노동하는 사람들은 노래를 하고 나서 돈을 받습니다. 일을 하고 나서 돈을 안 받는다는 측면에서는 강제노역과 자원봉사가 똑같습니다. 그러나 강제노역은 대가를 받고 싶은데 안 주는 것이고, 자원봉사는 자기 스스로 대가를 안 받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문명의 다음 단계로 바로 자원봉사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은 노동이 놀이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놀이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얼마나 노느냐는 자기가 결정하면 됩니다. 노동하고 나서 휴식을 하듯이 노는 것도 과하게 놀면 피곤해져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휴식은 육체가 고단해서 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놀이는 따로 휴식이 필요 없습니다. 노동이 놀이가 되려면 주인의 사고로 돌아가야 합니다.
수행은 일을 놀이화하는 것
스님이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는 모습을 보고 여러분은 강철 같다고 하면서 신비하게 여기는데, 저는 놀이 삼아 할 뿐입니다. 일하는 것이 놀이가 되기 때문에 따로 노는 걸 더 할 필요가 없어요. 일을 놀이화하기 위해서는 관점의 정리가 중요합니다. 일을 놀이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갖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일을 놀이화하면 그 자체가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또 수행은 생산활동과 연결해 볼 수도 있습니다. 걷기 명상을 할 때는 자기 동작과 발바닥에 닿는 감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것처럼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려면 손끝에 집중해서 고추가 잡히는 감각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이렇게 수행이 생산활동과 결합하면 생산활동은 일이 아니라 놀이가 되고 휴식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새로운 문명이라고 할 수 있고,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원봉사는 사랑과 같은 겁니다. 두 남녀가 같이 지내면서 서로 주고받는 거래가 없을 때 사랑이라고 하듯이 필요한 일을 하되 거래가 없으면 자원봉사가 되는 겁니다. 거래가 있는 것은 매매춘이라고 합니다.
수행은 일을 놀이화하는 것입니다. 일을 놀이화할 때 우리는 노동으로부터 진정으로 해방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쓰고 나서 돈을 버느라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또 많은 돈을 씁니다. 많이 벌어서 많이 쓰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천만 원을 벌어서 천만 원을 쓰는 것을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십 원도 안 받고, 십 원도 안 쓰는 게 잘 사는 게 아닐까요?
여러분들이 삶을 좀 더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실컷 노동하고 재산을 모아서 노후를 설계하는 방식은 낡고 위험한 방식이에요. 제일 확실한 방식은 부처님의 방식입니다. 다 버리고 나와서 밥은 얻어먹고, 옷은 주워 입고, 잠은 나무 밑에서 자니까 재산을 잃거나 사기를 당할 일이 없습니다. 게다가 과거에 신분이 왕자였다는 게 역효과가 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좋은 효과가 났습니다. 왕자인데도 모든 걸 버리고 왕궁을 나왔으니 저절로 신뢰가 갈 수밖에 없습니다. 왕자로 살 때는 호위병이 몇 명씩 따라다니고, 잠을 잘 때도 호위병이 지키고 있었는데, 숲 속 나무 밑에서 지켜주는 사람 없이 혼자 잠을 자도 편안했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자신이 가진 것의 100퍼센트를 버리니까 100퍼센트를 편안하게 살았다면, 우리는 부처님을 흉내 내는 식으로 50퍼센트만 버리니까 50퍼센트만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겁니다.
우리의 삶이 수행이 되도록 하고, 일이 놀이가 되도록 할 때 ‘평상시의 마음이 곧 도(道)이다’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도(道)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런 길을 가는 게 도(道)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를 하고, 봉사도 하는 거예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수행, 보시, 봉사입니다.”
이어서 직장생활과 정토회 활동을 병행하면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다양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세 명이 손을 들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불교대학 돕는 이를 하면서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할애하게 되니까 정토회 활동과 직장생활을 별개로 보고 물러나는 마음이 듭니다. 어떤 관점을 갖고 정토회 활동을 해야 할까요?
농업 회사 법인에 들어가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저는 농사일이 너무 힘든데 스님은 어떻게 열악한 조건에서도 평온한 상태로 농사일을 할 수 있나요?
기후 변화의 대안으로 스마트팜 농사를 짓고 있는데 에너지 소비가 많아서 정말로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스마트팜에 대해 어떻게 봐야 할까요?
검소한 삶을 유지하는 것과 가정의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는 것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경제적 부담이 큰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에 대해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2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점심 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휴식 시간을 갖고 오후 2시부터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자기실현과 사회실천’을 주제로 스님이 법문을 하고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스님은 잘 쓰이는 삶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한 후 사회실천 활동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청년들에게 이 또한 나를 위한 길임을 알려주었습니다. 청년들은 스님의 법문을 통해 수행이 개인의 마음공부를 넘어 사회실천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법문이 끝나고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 뿐만 아니라 즉석에서도 자유롭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손을 번쩍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시간이 되는 만큼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정토회 활동을 하면서 번뇌가 많이 생긴다며 스님은 어떻게 흔들림 없이 이 길을 걸어올 수 있었는지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스님은 평생 동안 흔들림 없이 활동할 수 있었나요?
“스님께서는 약 40년 전 30대에 수행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명을 만드는 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부처님도 젊은 시절에 경험한 농경제와 사문유관이 부처님의 출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활동을 하면서 여러 가지 고민과 번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이 길이 아무리 좋고 그래서 이 길을 가겠다고 결심했더라도 늘 흔들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즐길 거리도 참 많고, 직업에 대한 진로 고민도 있고, 경제생활도 조금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연애와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소소하게 계속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스님께서는 과거 젊은 시절에 연애와 결혼에 전혀 관심이 없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어떻게 해서 스님은 자기 확신을 가지고 평생 동안 사회실천과 전법 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지나 놓고 보니 확신에 찬 길을 걸은 셈이고, 당시에는 제가 확신에 찼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도 흔들릴 때가 있었어요. (웃음)
제가 가장 크게 흔들렸던 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입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 저도 큰 충격을 받았어요. 같은 해에 10.27 법난이 있었습니다. 10월 27일 날 신군부가 스님들 몇 백 명을 삼청교육대로 잡아간 사건입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불교계가 민중의 아픔에 함께 동참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실망이 컸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10.27 법난이 일어났을 때는 본인들이 군홧발에 짓밟히면서도 아무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불교계에 대해 크게 실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집단이라면 나도 떠나고 싶다’ 이런 생각이 딱 들어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미국에는 속가 형님이 살고 계셨는데 저에게 미국으로 오라고 자주 말씀하셨거든요. 저는 어렸을 때 물리학자나 천문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절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 꿈을 잊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해 두 사건을 겪으면서 ‘이렇게 된 바에야 지금이라도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가서 6개월 정도 지냈을 무렵 광주에서 있었던 학살 장면을 보게 됐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소문만 들었지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비디오로 그 장면을 생생하게 보게 되었던 거죠. 미국에서 공부를 했지만 이 길이 내 길이라는 감이 딱 잡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잘 살든 못 살든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서 몸부림을 치는 게 낫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그때가 가장 크게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고, 그 이후로는 조금 기분이 나쁜 적은 있었지만 마음이 크게 흔들렸던 적은 없었어요. 자칫 잘못했으면 미국에서 그냥 학문하는 길로 갔을지도 모릅니다. 어릴 때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보니까 어느 순간 마음속에서 그 열망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일어났던 것 같아요.
미국에서 돌아온 뒤로는 새롭게 밑바닥부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불교 신도가 천만이라고는 하지만 다 허수였기 때문입니다. 천만 명의 불자 중에 사회 정의를 위해서 나설 수 있는 사람은 한두 명도 없었어요. 제가 경상도 지역에서 10년 동안 활동하면서 다졌던 인적 네트워크와 자산들은 그런 면에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와 대학생들을 데리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1982년, 제 나이로 29살 때예요. 그전에는 전통 불교 안에서 주로 중고등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변화를 일으키려고 했다면, 이제는 서울로 올라와서 사회운동적인 관점에서 불교를 해석하고 강의하는 쪽으로 활동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을 잘 가르쳤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반에 담임선생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과를 학습하면서 반 아이들의 공부를 가르쳤어요. 중학교 1학년 때는 선생님 집에 방을 얻어 들어가서 그 집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쳐서 생활비를 벌고, 학교는 장학금을 받고 다녔어요. 중고등학생 때는 불교학생회 회장과 영남불교연합회 회장을 하고, 그다음 바로 포교사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 경력이 대단히 길어요. 조기 교육을 아주 잘 받은 거죠. 그 덕분에 일찍 자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웃음)
고등학교 때 불교학생회 활동을 할 때도 자립을 해서 활동을 했지 다른 곳의 도움을 받지 않았어요. 항상 새로운 길을 갔기 때문에 남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스승님도 돈 한 푼 도와주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스승님이 하는 전통적인 불교 활동을 해야 도움을 주는데, 저는 전통적인 불교 활동이 아닌 새로운 활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때도 폐품을 주워 모아서 팔거나 아르바이트를 해서 자립 운동을 했지 ‘이런 좋은 운동을 하니까 좀 도와주세요’ 하고 어른들에게 손을 벌린 적이 없었습니다. 수련을 할 때 학생들이 먹을 음식이 모자라서 리어카를 끌고 인근 사찰에 쌀이나 된장을 얻으러 간 적은 있지만, 돈을 지원해 달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자립하는 방식으로 모든 활동을 했기 때문에 사업을 시작하면 중간에 그만두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런 방식은 정토회를 창립하고 나서도 이어졌어요. 초창기 정토회의 모든 활동가들이 굉장히 헌신적으로 활동을 했지만 자립이 안 되는 활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절에 사는 행자들이 인도 성지순례를 갈 때도 3개월 휴가를 주어서 행자들이 스스로 비행기값을 벌어서 순례를 가도록 했습니다.
이런 활동 방식이 가능했던 이유는 저의 개인적인 이력과 성향이 하나의 원인이겠지만 크게 보면 제가 살았던 시대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농촌이 붕괴되고 도시가 형성되는 변화의 시대였어요. 농민이 줄고, 도시 빈민이 형성되고,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갖가지 문제가 터지는 때였습니다. 둘째, 여성도 교육을 받으면서 성평등 문제가 제기되고, 여러 가지 사회 이슈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 시대를 살다 보니 조금 정신이 깨어 있다면 세상 문제에 관여하지 않기가 더 어려웠어요. 그러한 것들을 보고도 세상 문제에 관여를 안 했다면 그건 한국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되는 길이었습니다. 판사가 되든, 검사가 되든, 의사가 되든, 기득권 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문제에 대해 눈을 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 문제를 보면서 그걸 외면하기는 굉장히 어려웠어요.
제가 북한을 돕는 일을 했던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압록강변에서 북한 주민들의 시신이 떠내려오고, 난민이 거지가 되어서 중국으로 넘어오는 것을 직접 봤기 때문에 그들은 돕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인도에서도 처음부터 호텔에 묵으면서 순례를 다녔다면 거지들을 조금 보는 선에서 그쳤을 겁니다. 그러나 하필 제가 캘커타로 들어가서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뭔가를 해야만 할 것 같았어요. 저는 캘커타에 도착했을 때 부처님이 경험한 사문유관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한국이 왕궁이고 캘커타가 왕궁 밖이었어요.
물론 그런 모습을 본다고 해서 모두가 다 나서서 활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는 저의 성향도 어느 정도 작용을 했다고 봐야겠죠. 불완전하지만 어떤 이상이 있었고, 그것이 현실과 부딪치는 상황을 겪으면서 조금씩 중심을 갖고 활동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연애를 하고 싶다면 한번 해보세요. 직접 연애를 해보면 연애는 굉장히 골치 아픈 것이란 걸 깨닫게 됩니다. 사람 한 명에게 비위를 맞추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에요. 정토회 활동가 전체를 데리고 사는 것보다 더 복잡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법당 총무가 되어서 회원들의 비위를 맞춰보고 너무 힘드니까 이런 소리를 했어요.
‘내가 한 인간의 비위를 못 맞춰서 수십 명의 비위를 맞추는 과보를 받는다.’
그분은 남편과 살다가 도저히 안 맞아서 이혼을 했거든요. 남편 한 명의 비위만 잘 맞추면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그걸 못해서 한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의 비위를 맞추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함께 사는 사람이 많으면 개개인의 요구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과 같이 살면 그 요구가 수십 명의 요구보다 훨씬 더 많아요. 같이 살면 작은 것 하나까지 일일이 요구를 하거든요. 한 인간의 미묘한 감정과 비위를 다 맞추는 것은 천 명의 요구를 맞추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연애를 해보고 싶다면 한번 해보세요. (웃음) 연애를 해보고 괜찮다 싶으면 결혼이나 동거도 해보고, 연애를 해봤더니 나와는 도저히 안 맞는다 싶으면 남이야 그걸 하든지 말든지 나는 관심을 딱 끊고 다른 활동을 하면 됩니다.
저는 출가하면서 어머니의 정을 끊는 것이 참 어려웠어요. 겉으로는 쉽게 끊은 것 같지만 속으로는 힘든 점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선택을 한 것이 아니고 주어진 인연인데도 정을 끊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해서 새로운 인연을 맺는 것은 도저히 할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간땡이가 부은 인간들이나 그렇게 하지 나는 간이 작아서 그렇게는 못하겠다. 있는 인연도 해결을 못해 힘들어하면서, 여기에 무슨 인연을 더 맺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던 거죠. 그래서 항상 자기 경험을 기초로 해서 부처님 법을 기준으로 관점을 정리해야 해요. 그렇게 관점이 정리가 되어도 다음에 또 번뇌가 생깁니다. 그러면 다시 경험을 하면서 또 정리가 되고, 이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한 번에 탁 깨달았더니 모든 번뇌가 끊어졌다, 이런 경우는 없어요. 저의 경우도 지나 놓고 보니 아무 문제 없이 외길을 걸어온 것처럼 보이는 것인데, 사실은 운 좋게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젊은이들을 위해 쓴 책의 제목이 ‘방황해도 괜찮아’입니다. 젊을 때는 방황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방황할 때는 스스로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지나 놓고 보면 한 길을 쭉 걸어온 것이 됩니다.”
대화를 마치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진 후 오후 4시부터는 20년 동안 우리말 연구를 해오신 생태공동체 푸른누리 대표 최한실 선생님을 모시고 ‘우리말 바로 쓰기’를 주제로 특별 강의를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왜 우리말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말들이 전부 우리말인 것처럼 알고 사용하지만, 사실은 우리말이 아닌 말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 겨레는 다른 말들이 섞이기 이전에 아주 뛰어난 말꽃을 피웠는데, 그 뒤에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중국 한자를 들여와서 글말에 쓰다 보니 차츰차츰 우리말 속에 자리를 잡게 된 거예요. ‘강(江)’이라는 한자가 들어와서 ‘가람’이라는 우리말을 밀어냈고, ‘산(山)’이라는 한자가 들어와서 ‘뫼’라는 우리말을 밀어냈습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말이 왜 말입니다. 우리의 말글살이는 왜 종살이를 할 때(일제 식민지배를 받을 때) 온통 한자말을 배워 익혀서 쓰도록 틀 거리가 지어졌고, 우리는 거기에 갇혀서 아무도 깊이 살펴보지 않고 여태까지 와버린 거예요.”
선생님은 우리말에는 벼에 얽힌 낱말이 열 개가 넘는다고 소개했습니다. 나락, 씨나락, 볍씨, 모, 우케, 쌀, 밥, 죽, 메, 뉘 등 넉넉한 우리말을 재미있게 이야기하자 모두가 신기한 듯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에 집중했습니다.
우리가 평소 잘 몰랐던 우리말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청년들은 선생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말이 너무 재미있어요. 강의를 통해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선생님이 대답했습니다.
“재미있었어요? 그러면 우리말을 주위에 널리 전해야지요.”
저녁 식사를 하고 나자 해가 저물었습니다.
저녁 7시부터는 ‘국제자원활동’을 주제로 JTS에서 하고 있는 다양한 해외 구호사업에 대해 소개하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화를 나누기 전에 바쁜 와중에 청년들과 함께 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김제동 님이 인사를 했습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도 가람처럼 이렇게 모여 계시는 모습이 굉장히 저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우리말만 쓰려니까 더 말을 못 하겠네요. 인사말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웃음)
웃으며 자리에 앉는 김제동 님에게 스님도 웃으며 농담을 던졌습니다.
“네, 김제동 님. 인사 말씀 감사합니다. 우리말을 부탄에서 온 린첸 님보다도 못하네요.”
김제동 님은 스님의 법문과 청년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스님은 북한, 인도, 필리핀, 파키스탄, 캄보디아, 시리아, 로힝야 난민캠프, 부탄 등 여러 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JTS 사업이 어떤 원칙을 갖고 진행되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특히 청년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부탄 지속가능한 개발 사업에 대해 소개한 후 이런 활동에 참여하는 청년들이 어떤 비전을 가질 수 있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JTS가 부탄에서 하고 있는 개발은 지속 가능한 개발입니다. 구호도 아니고 개발도 아닌, 구호와 개발이 섞인 지속 가능한 개발입니다. 지속 가능한 개발이란 개발은 하되 욕망을 부추기는 난개발은 안 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미니멈 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탄만 생각했는데 캄보디아와 같은 다른 나라에서도 ‘우리도 한번 해보고 싶다’ 하며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그래서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새로운 시도가 성공하게 되면, 이것이 확산되는 속도는 매우 빨라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주민이 주인이 되어 추진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거 해주세요’ 하고 부탁만 하면 JTS는 거절합니다. 하지만 ‘이거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필요합니다’ 하고 제안하는 것이라면 JTS는 받아들입니다. 반드시 주민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공동으로 참여하도록 한다는 것이 JTS의 원칙입니다.
부탄에서 시범사업을 해보니까 도로를 고친다든지 농수로를 놓는다든지 하는 일에는 주민들의 참여율이 높은데, 가난한 이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건 참여율이 낮은 편이에요. 가기는 가지만 별로 가고 싶지 않으니까 참여도가 떨어집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번 답사에서 주민들에게 ‘이 활동을 단순히 누구의 집을 지어준다고 생각하지 말자. 우리가 힘을 모아 우리 가족을 위해 집을 짓는 것으로 생각하자’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즉 우리 집이라고 생각하고 집을 짓자고 설득하며 현재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이런 방식으로 JTS에서는 지속 가능한 개발을 한번 해보려고 해요. 물론 ‘더 이상 개발하지 마시오’ 하고 누구도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더 개발하고 싶으면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하라는 거죠. 다만 최소한의 개발까지는 우리가 함께 하겠다는 관점에서 지금 이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자리가 없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이유
그러니 여러분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오면 제일 좋습니다. 항상 저는 대환영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실업률이 높을수록 저는 항상 얼굴에 미소를 짓습니다. 원래 자원봉사는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워낙 소수이니까 누가 해고를 해줘야 자원봉사 하는 사람들이 좀 늘지 않겠냐며 농담을 하는 겁니다. 만약 청년 일자리가 많고 여러분 모두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면, 굳이 부탄까지 안 와도 돼요. 그러면 저는 또 은퇴한 사람들을 모아서 이 사업을 진행해 나갈 계획입니다.
그러니 일자리가 없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직장에서 너무 성질부려도 안 되지만, 너무 전전긍긍하며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직장일이 마음에 안 들면 직장을 나와서 부탄으로 가면 되잖아요. 1년 내지 2년 정도 봉사하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일자리를 구해도 됩니다.
이제는 우리가 함께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은 지금 K드라마와 K팝이라고 하는 한류 열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덕분에 한국 음식까지 덩달아 유명해졌어요. 그런데 솔직하게 말해서 한류라는 것이 다 소비문화 아니에요? 한류 열풍이 부는 것이 그저 자랑스럽기만 한가요? 물론 대한민국이 세계인의 관심을 받는 것은 좋아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좀 부족하다는 겁니다. 그뿐 아니에요. ‘K방산‘이라고 해서 우리가 파는 탱크, 포와 같은 무기들이 공격용으로 쓰이게 되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양심적이고 평화를 사랑한다면, 방어용까지는 몰라도 공격용 무기는 수출하지 않도록 집회라도 해야 합니다. 미얀마에서 우리가 판 대포로 주민들을 학살하려고 한다면 그런 곳에는 무기를 팔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에게 단순히 돈만 지원하려고 하면 많은 돈이 필요하겠지만, JTS에서는 주민들이 자신들의 터전을 스스로 개발하고 가꾸도록 하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개발을 하면 돈을 크게 들이지 않고도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어요. 돈이 적게 드는 방식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예산의 1퍼센트만 사용해도 동남아시아 빈곤 문제를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습니다. 이런 개발이 성공하려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각국의 현지 자원봉사자들과 협력을 해야 합니다.
진정한 K평화를 세계로 확산시키려면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참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토회만으로도 굉장히 유의미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하던 일을 그만두고 정토회에 들어와라’, ‘정토회 활동만 해라’ 이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인생의 길에는 많은 선택지가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기죽어 살지 말고 삶을 조금 더 긍정적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면 어떻겠느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언제든지 시간 여유가 생기면 망설이지 말고 단기 봉사도 갈 수 있다는 조금 열린 자세를 갖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인기 있는 차원을 넘어 다른 나라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일도 우리가 도울 수 있다면, 이거야말로 진짜 K평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대한민국의 진로도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국제자원활동과 정토회 활동에 대해 궁금한 점과 제안하고 싶은 점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즉석에서 질문 신청을 받겠다고 하자 여러 명이 손을 들었습니다. 3시간 동안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면 선거를 할 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떤 방식으로 설득을 해야 할까요?
온라인으로 전환하고 오프라인의 장점인 재미와 활력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병행하면 좋겠습니다.
환경실천을 하고자 개인적으로는 많은 노력을 하지만 환경실천에 관심 없는 가족들이나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계속 보게 됩니다. 어떤 관점을 갖고 환경실천을 해야 할까요?
가을에 인도 봉사활동인 선재수련을 가기 위해 참가 신청을 했는데, 차라리 비행기값을 JTS에 보시하는 게 더 도움이 되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스님은 뉴스를 어떻게 접하시는지, 어떻게 하면 뉴스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나요?
모둠별로 지역실천이나 오프라인 봉사활동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청년들과 대화를 나눈 긴 하루였습니다.
내일은 청춘캠프 3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청년의 미래’를 주제로 대화의 시간을 갖고, 문경수련원 방송실로 이동하여 백중 회향 법문을 생방송하고, 오후에는 정토불교대학 졸업식 생방송을 한 후 다시 선유동 정토연수원으로 돌아와서 2박 3일 동안의 청춘캠프를 마무리하며 회향식을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