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4.1.1 안거 회향식
"공동체의 청정과 화합을 유지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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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2024년 갑진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스님은 공동체 대중과 함께 평소처럼 예불, 삼귀의, 수행문, 참회, 108배, 명상, 경전 독송을 차례대로 하며 새해 첫날을 맞이했습니다.

공동체 대중은 지난 12월 23일부터 오늘까지 열흘 동안 겨울 명상 수련 및 공동체 동안거 수련을 했습니다. 스님은 5일 동안 명상 수련을 지도하며 대중과 함께 명상을 한 후, 다시 5일 동안 공동체 대중과 안거 수련을 했습니다.




오늘은 수련을 마치며 회향식을 했습니다. 명상과 안거 수련을 마친 뒤여서 모두가 환하게 밝아진 얼굴이었습니다.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은 수련을 무사히 마친 대중들을 격려하며 새해에 어떤 마음으로 수행과 활동을 해나가면 좋을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안거를 잘 마쳤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포살을 한 달에 한 번 매월 보름날에 하고, 자자를 일 년에 한 번 안거가 끝나는 날에 했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포살은 스스로 계율을 어긴 것에 대해 대중 앞에 드러내어 참회하는 것이고, 자자는 대중으로부터 지적을 받고 그것을 자기에게 돌이켜 참회하는 것입니다. 대중의 지적이 전혀 사실이 아닌 경우에만 ‘이러이러한 지적이 있었는데 사실은 이렇습니다’ 하고 설명해 주는 정도만 했었지, 대부분 대중의 지적을 받아들이는 편이었습니다. 이런 전통을 계승하여 정토회에서는 도반들끼리 서로를 탁마 하는 ‘정일사(정토를 일구는 사람들)’ 수련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현재 정일사 수련에서는 부처님 당시처럼 계율을 어긴 것에 대해 지적을 해주는 것도 하지만, 서로 오해가 생긴 것에 대해 해명을 하거나,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하거나, 위로를 받거나, 이런 것들도 섞여 있습니다. 오해를 풀거나 하소연을 하거나 위로를 받는 것이 현재 여러분의 수준에서는 효과적인 측면도 있지만, 수행의 관점에서는 근본을 놓치고 있는 측면도 있습니다.

수행적 관점을 갖고 서로를 탁마 하는 시간

수행이란 스스로 돌이켜서 자기를 치유하는 것입니다. 누구로부터 사과를 받거나 해명을 들어서 자신의 괴로움이 해결되었다면 그것은 수행이 아니에요. 그것은 상담 치유 기법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방법이 필요 없다든지, 그런 방법을 무시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수행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이 목표입니다. 만일 나의 상처를 누군가를 통해서 치유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수행이 아니에요. 대중으로부터 나의 부족함이 무엇인지 들어서 나를 자각해 나가는 것이 자자입니다. 그래서 수행적 관점을 조금 더 분명히 가지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렇다고 정일사 수련을 자자 방식으로 하는 게 더 좋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현재 여러분의 상황에서는 위로도 좀 받고, 해명도 듣고, 또 지적도 하고, 이런 것들이 섞여 있을 때 오히려 치유 효과가 높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안거 때 명상을 먼저 한 후 자각이 된 상태에서 정일사 수련을 합니다. 명상을 하면 원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반성도 되고 그러잖습니까? 그래서 자각이 된 상태를 기반으로 해서 정일사 수련을 하고, 마지막에는 우리가 일을 하고 있으니까 일에 대해 공유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안거를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모자이크 붓다를 지향하는 이유

자세히 살피지 않거나 상황을 모르면 무난하게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각자 많은 어려움들을 갖고 삽니다. 수행적 관점에서는 하늘이 무너져도 괴롭지 않은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하지만, 도반을 위해서는 위로도 해주고 말도 들어주고 이해도 해주면서 살아가야 해요.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모자이크 붓다를 지향하는 겁니다. 부처님이 실제로 어느 정도의 인격을 갖추셨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경전에 기록되어 남아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가 아무리 수행을 해도 부처님의 인격을 따라갈 수가 없잖아요. 저도 수행을 하지만 부처님의 인격에 근접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이렇게 도달할 수 없는 경지를 목표로 세우고 정진을 하다 보면 너무 지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명 한 명은 부족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모인 60명이 힘을 합한 우리들의 모습은 붓다의 모습에 근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부족한 사람들끼리 모였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그래도 부처님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모자이크 붓다입니다. 순우리말로 하면 어불렁 부처라고 할 수 있죠.

우리 모두가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부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상처를 남으로부터 해소하려고 하지 말고 항상 모든 괴로움은 나로부터 일어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내가 이렇게 하니까 너도 그래야 한다’ 하는 잣대를 가지면 안 됩니다. 내가 부족하듯이 타인의 부족함에 대해서는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단,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는 걸 너무 강조하면 붓다의 길로 가는 목표 의식이 퇴색되고, 세속적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수준밖에 안 되어 버립니다. 너무 붓다의 길만 강조하면 우리들 중에 누구 하나가 죽어도 안 쳐다보고 ‘죽든 살든 네가 알아서 해라’ 하면서 외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붓다의 길은 오직 자기 힘으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청정과 화합을 유지하는 방법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는 수행자의 원칙을 적용하되 남은 항상 포용하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뒷말을 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적용하되 남에게는 뒷말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사라는 관점을 가져야 해요. 이렇게 사물을 보면, 나 스스로는 자립하는 인간이 되고, 도반들과는 서로 협력하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합니다. 자기한테는 ‘나만 부족하나? 너희도 다 부족한데’ 하면서 유연하게 적용하고, 남한테는 ‘계율에 어긋난 행동이잖아’ 하면서 엄격한 잣대를 적용합니다. 그래서 수행공동체 안에서 계율이 갈등의 원인이 될 때가 많습니다. 계율을 남에게만 엄격하게 적용하면 공동체를 청정하게 하고 화합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좋은 법을 전하셨지만 불멸 후 200년이 지나서 교단이 분열되었습니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교단의 청정과 화합을 뒷받침해야 할 계율에 대한 해석 차이로 인해 발생했습니다. 계율에 대한 해석 차이가 왜 발생했을까요? 계율을 자기에게는 유리하게 적용하고 남에게는 엄격하게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거기에 집착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일을 잘하는 것에 너무 집착하면 일의 성과는 좋을지 몰라도 갈등이 생겨서 대중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결과가 간혹 발생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용할 때는 항상 중도적 관점을 유지해야 합니다. 첫째, 붓다의 가르침은 오직 나에게만 적용하지 남에게 적용하지 말라는 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 말고 이해의 폭을 넓혀나가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해나간다면 스스로 계율을 지킴으로써 청정성을 유지할 수 있고, 서로 시비하지 않음으로써 화합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승가는 청정하고 화합해야 됩니다. 양면성을 가지는 두 가지를 반대로 적용하면 분열의 씨앗이 되지만, 중도적으로 적용하면 청정과 화합을 동시에 이룰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갖고 수행을 하고 해결책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이때 우리의 수행이나 해결책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 항상 점검해야 해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맹종해서도 안 되지만 우리가 현실에 맞게끔 적용한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승불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롭게 일어난 대승불교가 소승불교보다 더 세속적으로 변화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처럼 우리의 실천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을 반영해서 새로움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반영했다는 것은 세속을 끌고 들어왔다는 의미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더 세속화되고 부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늘 유의해야 합니다.


법을 배우면 법을 고집하지 말고 현실에 맞는지를 점검해야 하고, 현실에서 어떤 경험을 얻으면 다시 법과 맞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야 형식주의에도 빠지지 않고, 주관주의에도 빠지지 않습니다. 이것도 역시 중도를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법이 아닌 것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나에게 의지하라’

법에 의지하라는 것과 나에게 의지하라는 것은 어쩌면 정반대의 행위처럼 들리지만, 법에 의지하라는 것은 주관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의미이고, 나에게 의지하라는 것은 전통이라는 형식주의에 얽매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항상 양쪽을 다 점검하면서 정진을 해나가야 됩니다. 여러분들 사이에 분쟁이 생겼을 때는 대부분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를 미워해서 흠을 잡으려고 하다 보면 계율 중에 어긴 게 없는지를 찾게 됩니다. 반대로 상대가 형식주의에 빠지지 않았는지 꼬투리를 잡기도 하죠.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에 수바드라가 ‘세상에 많은 사문들이 각기 다른 가르침을 설파했는데, 누구의 말이 옳습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대해 나는 다 알고 있다.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와 거짓과 욕망이 있으면 어떤 말을 해도 신뢰하기가 어렵다.’

그들이 갖고 있는 마음의 상태가 어떠냐 하는 것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옳고 그르다는 말을 하지 않으시고 출가해서 지난 50년 동안 부지런히 수행 정진을 했다고 강조하면서 여덟 가지 바른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말이나 형식을 따지기보다는 그때 내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시비하는 마음을 내어서 그 근거로 계율을 따지고 있지 않은지를 봐야 해요. 상대를 제압하려고 하다 보면 약점을 잡게 됩니다. 그래서 도반들 사이에서 시비하는 마음이 들었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내려놓을 수 있는 자세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갈등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사람이 살다 보면 갈등이 생기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갈등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갈등이 생기는 것을 합리화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갈등이 생기는 것은 문제다’ 이렇게 바라봐서도 안 돼요.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그 갈등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일어날 만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또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해결하지 못한다고 전제하면 우리가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어요? 서로 갈등하는 것이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내버려 두어야 하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갈등은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를 생각해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항상 희망을 가져야 하고, 또한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활동을 해나가면서 갈등이 덜 생기면 아무래도 낫잖아요? 그런 관점에서 도반들을 잘 살피면 좋겠습니다. 옆에 도반이 있어야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가 있게 됩니다. 일을 할 때 디테일한 부분을 잘 챙기는 사람은 대부분 성격이 좀 부드럽지 못해요. 디테일에 집착하기 때문에 도반들에게 화를 자주 내게 됩니다. 디테일한 부분에 집착하지 않으면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하면서 화를 낼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잘하면 되는데…’ 하고 디테일한 부분에 집착을 하면 화를 내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 분별심을 내려놓고 ‘이런저런 것도 다 인간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고 큰 눈으로 도반들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정토회는 세상의 갈등을 해결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평화를 얘기하기 어려운 이유가 정작 제가 살고 있는 남한과 북한이 서로 갈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하마스와 이스라엘에 대해 서로 싸우지 말라고 중재를 하려고 해도 ‘너희는 왜 남북 간에 싸우는데?’ 이렇게 반응하게 됩니다. 그런 것처럼 나는 갈등하고 있으면서 남들에게 ‘갈등하지 마라’ 이렇게 얘기하면 힘이 빠질 수밖에 없어요. 말에 힘이 덜 실립니다.

각자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걸 극복하는 대상으로 삼고 어떤 것도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살다 보면 남의 허물을 말할 수도 있지’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돼요. 부처가 되겠다는 목표에 언제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100퍼센트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100퍼센트에 근접해 나가는 쪽으로 꾸준히 수행 정진을 해나가야 합니다. 지난 열흘 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중도의 길을 찾아 나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관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사홍서원으로 동안거 수련을 모두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이어서 열흘 동안 사용한 공간을 청소하고 뒷정리를 한 후 각자의 처소로 향했습니다. 스님은 오후 4시에 봉화 정토수련원을 출발해 서울로 이동했습니다.

고속도로 위를 세 시간 달린 후 저녁 7시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했습니다.

저녁 8시부터는 정토회 대표님을 비롯하여 사무처 활동가들과 온라인으로 회의를 했습니다. 2024년도 정토회 중요 행사와 일정들에 대해 공유하고, 어떤 콘셉트로 행사를 진행하고, 무엇을 보완해야 할지 점검한 후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새해 첫날, 스님의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이번 동안거 수련을 통해 공동체 대중은 도반이 수행의 전부라는 말을 온몸으로 체감했고, 제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한 스님은 기쁜 마음으로 동안거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정토회 시무식 행사에 참석해 법문을 한 후, 오후에는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들과 연달아 미팅을 하고, 저녁에는 두북 수련원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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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하이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는 수행자의 원칙을 적용하되 남은 항상 포용하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뒷말을 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적용하되 남에게는 뒷말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사라는 관점을 가져야 해요. "

2024-03-22 17:53:49

Faded

그래서 막연히
공동체의 화합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것보다

나부터 깨닫고
하나님과 부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024-02-18 16:25:50

Faded

공동체의 청정과 화합을 실현하는 방법은
사실 간단합니다.

공동체의 청정과 화합은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애초에 '종교 단체'라는 것도
특정인들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21세기는
사람들이 이익만 바라보고
카르텔을 형성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진실된 화합은 존재하기 힘듭니다.

2024-02-18 16:2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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