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10.28 정토불교대학 즉문즉설, 청년 경주역사기행 1일째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한 것이 계속 후회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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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8시부터 영어 정토불교대학 학생들과 생방송으로 즉문즉설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북미 동부와 서부, 캐나다, 독일, 네팔, 한국에서 불교대학 코스 1을 공부하는 21명의 외국인 학생들이 화상회의 방에 참석한 가운데 스님에게 궁금한 점을 묻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곧이어 오전 10시부터는 한국에서 이번 9월에 입학한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온라인 즉문즉설 생방송을 했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불교의 근본사상인 실천적 불교사상을 공부했는데 공부하면서 들었던 의문점을 자유롭게 질문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오전 내내 온라인 강의를 한 후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스님은 청년들과 역사기행을 하기 위해 오후 12시 40분에 경주 흥무공원에 도착했습니다.


새벽에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청년들도 흥무공원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조별로 친해지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님과 청년들은 함께 걸어서 김유신 장군묘로 이동했습니다.

김유신장군묘에 270여 명의 청년들이 모인 가운데 경주역사기행을 시작하는 입재식을 했습니다. 참가자를 소개하고 반갑게 서로를 환영한 후 스님이 역사기행을 하는 취지와 목적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오늘부터 내일까지 1박 2일 동안 경주역사기행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경주에 와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경주에는 주로 문화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유적이 있고,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유적이 있어요. 이번 기행은 주로 역사적인 변동기를 중심으로 기행을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경주에 왔기 때문에 주로 신라의 역사에 대해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작은 나라인 신라가 어떻게 민족사의 주류가 될 수 있었는가

역사를 공부할 때는 우리에게 뭔가 배움이 있어야 합니다. 신라의 역사를 공부할 때도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우선 작은 지류에서 출발한 신라가 어떻게 민족사의 주류로 등장할 수 있었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신라와 같이 작은 나라가 어떻게 민족사의 주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을까요? 단순히 중국의 힘을 빌려서 세력을 키웠다고 보는 것은 다소 외형적인 것에만 치우친 평가입니다. 중국이라는 요인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내재적 요인도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큰 부분은 신라가 가야와 합의 통합을 이뤄냈다는 점입니다. 이때 가야에서 제시한 조건이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불교를 공인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야의 귀족을 신라의 귀족으로 인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가야 사람들의 신분을 보장하라는 것이죠. 이 두 가지 조건을 신라에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렇게 가야의 왕족이 모두 신라의 왕족인 진골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지금 우리의 상황에 비춰보면 어떻게 될까요? 남과 북이 통일을 할 때 북한이 남한에게 공산주의 활동을 인정하고, 북한의 장성은 모두 남북한 통합군대에 장성으로 배치하고, 교사는 교사로, 의사는 의사로, 도지사는 도지사로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요구를 현재 대한민국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만약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아직은 평화적 통합을 이룰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방 입장에서는 자기 신분의 안전을 보장받아야 통합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라와 가야의 통합도 지금 보면 쉬워 보일지 모르지만 이렇게 어려운 요구를 신라가 포용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통합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근 역사에서는 캄보디아에서 이런 통합을 이뤄낸 사례가 있었습니다. 캄보디아는 폴 포트(Pol Pot)가 이끄는 무장 군사조직인 크메르 루주(Khmers rouges)가 정권을 잡은 1970년대 후반에 약 5년에 걸쳐서 30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을 학살했습니다. 1979년 캄보디아-베트남 전쟁에서 패배 후 군사 정권은 실각했지만 망명정부를 세우고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이때 크메르 루주를 축출하는 데 기여했던 훈 센(Hun Sen)이 정권을 잡았고, 훈 센 정부가 들어선 다음 크메르 루주는 숲 속으로 들어가 계속 저항하고 싸웠는데, 이때 바탐방(Battambang)에서 협상을 해서 반군의 장군들은 그대로 군대에 편제를 하고, 반군의 지사들도 그 지역의 지사로 임명하는 방식으로 흡수했습니다. 한 마디로 반군 세력도 받아들여서 통합을 한 거예요. 캄보디아의 수도인 프놈펜(Phnom Penh)에 가면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Killing Fields) 학살을 보여주는 박물관만 있는 반면, 바탐방에 가면 평화적으로 통합한 것을 기리는 평화박물관이 있습니다. 저도 지난봄에 바탐방을 방문하여 평화박물관을 보고 크게 감동했습니다.

신라와 가야도 이와 같이 평화적으로 통합을 했습니다. 이렇게 통합이 이뤄진 것이 532년 경 신라 법흥왕 때였습니다. 이후 신라와 가야의 통합은 1 플러스 1이 2에 그치지 않고 5가 되고 10이 되는 상승 효과를 나타내며 진흥왕 때는 한강 유역까지 차지하기에 이릅니다. 이때 신라군의 중심적 역할을 한 장군들이 대부분 가야 출신이었습니다. 게다가 가야는 철기 문명이 아주 발달했어요. 철기로 단련된 가야와 통합하면서 신라군은 막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제와 고구려를 밀고 올라갈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거죠. 이러한 변화는 법흥왕과 진흥왕에 걸쳐 약 56년 만에 진행되었습니다. 변방의 신라가 50년 만에 한반도의 중심국의 하나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1960년에 경제 발전을 시작해서 19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할 때까지 비약적 성장을 이루는 데에 28년 밖에 안 걸렸습니다. 이것을 보면 국민들이 단결해서 무언가를 추진하면 약 30년, 즉 한 세대가 노력하면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뜻입니다. 30년에 걸쳐서 산업화를 이루고, 그 이후 민주화를 이루고 한류문화를 만들어내기까지 또 30년이 걸렸으니까,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은 60년 동안 일궈낸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라도 동쪽에 위치한 작은 부족 국가에서 거의 60년 만에 한반도의 중심국가의 하나로 거듭나게 되었던 거예요.


이런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데서 그칠 게 아니라, 여기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가령 오늘날 북한을 중국이 차지하든 말든 우리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건 역사를 너무 좁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민족사적 관점에서 볼 때 굉장한 역사의 축소를 가져옵니다.

신라의 삼국통일 역시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지켰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민족사를 굉장히 축소시켜 버린 역사적 과오가 있습니다. 신라는 초기에 가야와의 평화적 통합을 통해 민족사의 주류로 등장했고, 후기에는 국제 정세를 잘 읽고 당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주변국 중 가장 강력한 나라와 동맹을 맺어서 활로를 열었습니다. 이는 신라의 관점에서 보면 높이 평가할 일이지만, 민족사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신라의 선택이 결국 민족의 활동 영역을 대륙에서 반도로 좁혀놓는 결과를 가져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를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렸지만 이후 당나라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지지하지 않고 백제와 고구려 땅을 넘봤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한미연합군이 평양을 점령해서 북한의 정권을 무너뜨렸는데, 이후 미국이 대한민국의 통일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북한에 미 군정을 세운 것과 같은 거예요. 그런 의미로 당나라는 백제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고구려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습니다. 그래서 신라는 당나라 군사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했습니다. 한국군이 주한미군을 선제공격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당나라가 본토에서 20만 군대를 보내서 신라를 침공했습니다. 미국 본토에서 한국을 침공한 거죠. 신라는 당나라를 상대로 8년간 싸웠습니다. 결국 당나라 군대는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에서 모두 패하면서 철수하기에 이릅니다. 그런 다음 신라와 당나라는 다시 화친을 맺고, 좋은 이웃이라는 선린(善隣)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삼국통일 시기를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이라고 하지 않고, 나당 전쟁이 끝난 후인 676년이라고 합니다. 당나라 군대를 이 땅에서 몰아낸 다음에야 통일이라는 말을 쓰는 겁니다. 그저 백제가 망했다고 해서, 고구려가 망했다고 해서 삼국통일이 이뤄진 게 아니라, 당나라를 상대로 한 전쟁을 통해 당나라를 물리친 다음 통일을 이룬 것이기 때문에 신라를 지나치게 사대주의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그만큼 자주성을 가지고 있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한민국이 그 정도의 자주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미국과의 동맹이 필요하긴 하지만, 민족사의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때론 미국과도 싸울 수도 있을 정도의 패기가 있을까요? 그 정도의 패기가 없다면 통일을 이뤄내기 힘듭니다. 신라가 가야를 받아들이는 정도의 포용력과, 신라가 당나라와 전쟁을 치를 정도의 패기가 있어야 평화 통일이라는 과업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라의 삼국 통일을 이끈 영웅들의 이야기 속에 김유신, 김춘추, 선덕여왕, 문무대왕이 각각 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우리가 온 곳이 바로 김유신 장군의 무덤입니다.”

이어서 스님은 김유신 장군의 업적과 후대의 평가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김유신 장군묘를 내려와 계단에 서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넓은 계단이 청년들로 꽉 찼습니다.


다음 장소는 무열왕릉입니다. 곳곳에 단풍이 붉게 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커다란 왕릉 앞 솔숲에 청년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자 스님은 무열왕 김춘추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지금 이곳은 무열왕릉입니다.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의 세속 이름은 김춘추입니다. 김춘추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시대에 외교를 담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외교부 장관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당시 김춘추는 주로 중국에 가서 당나라와 동맹 관계를 추진했습니다.


당시 신라는 내부적으로 왕권이 안정된 시기였습니다. 김유신의 군사력과 김춘추의 정치력이 결합을 해서 우선 국정이 안정되었고, 거기서 오는 시너지 효과로 국가의 기운도 상승기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세계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당나라와 동맹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외교적으로도 안정된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백제는 의자왕이 초반에 국정 운영을 잘했지만 말년에 여러 내분에 휩싸이면서 혼란기를 맞이했고, 고구려도 내분이 일어나서 안정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국정의 안정화는 신라가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 또 하나의 배경입니다. 이처럼 국내의 정치력과 함께 외교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김춘추는 그 역할을 잘 해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명을 듣고 무열왕릉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푸른 하늘, 곱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 청년들의 발걸음이 경쾌했습니다. 청년들은 스님과 함께 길을 걸으며 노래를 한 곡씩 불렀습니다.




무열왕릉을 나와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겼다고 하는 낭산에 도착했습니다. 사천왕사지, 선덕여왕릉, 문무대왕의 화장터에 세운 능지탑을 차례로 둘러보았습니다.


사천왕사가 있던 터는 지금은 공터이지만 절과 탑을 세웠던 흔적들은 복원되어 있었습니다. 스님을 따라 12명의 유가승이 문두루비법을 행했던 터를 둘러본 후 넓은 대웅전 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스님은 사천왕사를 짓게 된 배경을 들려주었습니다.

“신라는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당나라와 동맹을 맺었는데, 막상 백제와 고구려가 쓰러지고 나니까 당나라가 그 땅을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신라는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거예요. 백제도 당나라가 차지하려고 하고, 고구려도 당나라가 차지하려고 하고, 그것에 대해 신라가 반발을 하니까 신라의 왕도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라 안에서도 강하게 저항이 일어나면서 크게 두 가지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강대국인 당나라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고, 일단 삼국을 통일했으니 고개를 숙이고 실리를 추구하자는 목소리가 그중 하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중종의 선왕인 당태종이 대동강 이남을 신라의 영토로 하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당나라가 아무리 강대국이라고 해도 절대로 굴복해서는 안 되고 끝까지 싸우자는 목소리였습니다. 문무대왕은 결국 강경파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고, 그 선봉에 선 사람이 김유신 장군이었습니다.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군대는 우선 한반도에 머물고 있는 당나라 군대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했습니다. 그러자 당나라 황제가 본토에서 20만 대군을 모아서 신라 정벌에 나섰습니다. 이번엔 신라가 위기에 몰렸습니다. 그때 명랑(明朗) 법사를 불러서 물으니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당나라 군대를 이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전력 차이가 워낙 심하게 났으니까요. 그래서 호법선신들의 가피를 입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부족하니 신들의 힘을 빌려서 대항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나라 군대는 바다를 건너와야 했습니다. 바다의 신은 용왕이니까 용왕보다 위에 있는 사천왕과 제석천에게 빌어서 바다의 용이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도록 하는 비법을 명랑 법사가 행했습니다. 그 비법을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이라고 해요. 문두루비법에는 제석천의 힘을 빌리는 비법, 사천왕의 힘을 빌리는 비법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문두루비법이라는 주력을 외우자 서해 바다에서 폭풍이 일어나서 20만 대군이 수장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러니 이 사천왕사는 불교를 전하기 위해 지은 게 아니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지은 절입니다. 이런 절을 호국사찰이라고 합니다.”

사천왕사를 나와 산길을 걸어 선덕여왕릉에 도착했습니다.


선덕여왕릉 옆으로 모여 앉아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선덕여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입니다. 동양의 어느 나라에도 없는, 여자가 왕이 된 역사가 신라시대에 일어난 거예요. 그런데 중국 유일의 여자 황제인 측천무후(則天武后)는 누구를 본보고 왕이 됐을까요? 바로 신라의 선덕여왕을 본보고 자기도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선덕여왕은 지혜가 많았다고 해요. 그에 대해 세 가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중 하나는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선덕여왕이 아직 건강한 상태일 때 본인이 아무 날 아무 시에 죽을 것이니까 준비를 하라고 신하들에게 지시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죽거든 도리천에 묻어달라’ 하고 부탁합니다. 신하들은 도리천이 어디인지 몰라서 어디에 묻어야 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여왕은 ‘낭산 꼭대기에 묻어달라’ 하고 대답합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산의 이름이 낭산이고, 여기가 제일 높은 곳입니다. 여왕이 죽자 신하들은 낭산 꼭대기에서 약간 남쪽을 향해 무덤을 만들었어요. 묻기는 묻었지만 이곳이 왜 도리천인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나 나당 전쟁이 일어나면서 이 산 아래에 사천왕사를 세우게 됩니다. 불교의 세계관에서는 수미산의 꼭대기가 도리천이고, 수미산 중턱이 사왕천입니다. 이 산의 아래에 사천왕사를 짓게 되니까 결국 이 산의 꼭대기가 도리천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선덕여왕은 지금은 나·당이 연합하지만 자기가 죽고 30년이 지나면 결국은 당나라와 다시 전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측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은 이런 예지력이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일화들을 살펴보면 선덕여왕은 굉장히 지혜롭고 현명한 분이었던 것 같아요.”

한반도에서는 이미 1400년 전에 여성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에 청년들 모두가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다시 산길을 내려와 문무왕의 화장터에 세운 능지탑으로 향했습니다. 해가 지자 날씨가 점점 쌀쌀해졌습니다. 능지탑 주변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해가 청년들의 얼굴을 밝게 비췄습니다.

“앞에 보이는 이 탑을 ‘능지탑’이라고 부릅니다. 왜 능지탑이라고 부를까요? 문무대왕이 죽은 뒤에 여기에서 화장을 했기 때문입니다. 문무대왕이 죽기 전에 이미 당나라와는 화친을 맺었고, 고구려와 백제는 멸망했고, 발해는 아직 들어서기 전이었습니다. 안보 문제가 다 해결됐지만, 바다 건너 왜는 아직 해결을 못 했어요. 왜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 건너갔기 때문에 신라에 대해서 앙금이 있었습니다. 왜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문무대왕은 자기가 바다의 용이 될 테니 자신을 동해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신을 바다에 묻을 수가 없어서 결국 여기서 화장을 하여 그 유골을 동해에 묻었습니다. 대왕암에서 실제로 유골을 넣은 자리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유골을 바다에 묻었으니까 왕릉도 없고, 흔적이 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잖아요. 그래서 이곳에 유골 일부와 재를 가지고 기념탑을 쌓은 거예요. 탑이란 보통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왕의 유골과 부장품을 넣어서 탑을 쌓았기 때문에 이 탑을 능을 대신하는 탑이라고 해서 ‘능지탑’이라고 이름을 붙인 겁니다. 참 특이한 탑이죠. 이런 탑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탑입니다. 불교문화와 능을 만드는 민족 문화가 융합이 돼서 이런 탑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래서 실제로 능은 바다에 있지만, 이 능지탑도 하나의 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를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불교 신자들은 당연히 탑이니까 절을 했고, 불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삼국을 통일한 성왕을 향해서 절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 이 탑을 보고 엎드려 절을 했다고 해서 이 동네의 이름이 엎드릴 ‘배’, 반석 ‘반’을 써서 배반동이라고 합니다.”

능지탑을 돌아 나와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갔습니다.


저녁식사를 하고 7시 30분부터 강당에 모여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 경주역사기행에는 김제동 씨도 함께 했습니다. 즉문즉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김제동 씨가 30분 동안 청년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김제동 씨와 함께 한바탕 자지러지게 웃는 시간을 가진 후 스님과의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김제동 선생님과 재미있는 시간 보냈어요?”

“네!”

미리 질문을 신청한 사람이 스무 명이 넘었습니다. 그중 네 명이 질문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원하지 않는 대학에 들어가서 학업에 집중이 안 되고 후회하는 마음이 든다며 어떻게 하면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한 것이 계속 후회가 됩니다

“저는 고등학교 1학년부터 2학년 때까지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코로나19 팬데믹과 함께 갑자기 생긴 병으로 공부에 집중을 하지 못했어요. 그 결과 성적이 많이 떨어져서 제 욕심에 차지 않는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전공과목 공부도 재미있지 않고 원치 않는 대학에 다니다 보니 만족스럽지 않아서 바로 휴학을 했어요.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게 뭘까 계속 고민하면서 휴학 중입니다. 저는 왜 하필 가장 중요했던 고3 시기에 아파서 원하는 학교에 들어가지 못했을까 후회하며 자꾸 과거에 집착하게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싶은데, 정작 내가 언제 행복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하면 지금 여기에 깨어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학과를 잘못 선택해서 가령 천문학과를 가려고 했는데 토목과를 갔다거나, 그래서 학업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문제라면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편입이 가능하다면 재수를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대학 3학년에 편입해서 본인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지금 새삼스럽게 대학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내 성적이 100인데 성적이 130이 되어야 갈 수 있는 대학을 목표로 하면 어떻게 될까요? 첫째, 입학시험에서 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 다행히 붙었다고 해도 대학 생활 내내 성적이 잘 나오질 않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합격한 기쁨은 잠깐이고, 4년 내내 헐떡거려야 돼요.

회사도 마찬가지예요. 남이 봤을 때 ‘잘 들어갔다’, ‘네 실력에 그 정도면 좋은 회사다’ 이렇게 평가되는 회사에 입사하면 어떻게 될까요? 내 실력에 대한 상사의 기대가 있고, 동료들도 실력이 있기 때문에 나는 늘 심리적으로 위축이 됩니다. 좋은 회사여서 월급은 조금 많을지 몰라도 나는 기를 못 펴고 자꾸 남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젊은 나이에 인생을 그렇게 살 필요가 있을까요?

반대로 내가 실력이 좋아서 월급을 100 정도 받을 수 있는데 월급이 60이나 70 정도인 회사에 들어간다면 어떨까요? 첫째, 들어가기가 굉장히 쉬워요. 둘째, 회사에서 눈치 볼 필요가 전혀 없어요. 회사에서 나가라고 해도 그 정도 회사는 갈 데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간부나 사장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고 간부나 사장이 내 눈치를 보게 됩니다. 괜찮은 사원이 한 명 들어왔는데 나가면 어떡할까 싶어 회사에서는 늘 잘해주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장이나 간부에게만 권한이 있고 아랫사람이나 노동자는 속박을 받는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결국 모든 문제는 관계에서 생기는 겁니다.

실력이 괜찮다가 고3 때 몸이 아파서 공부를 좀 못했고, 그 결과 A대학을 가려고 했는데 B대학에 갔다면,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로 인해 기분이 좀 나쁘긴 하겠지만 학교생활은 쉬울 거예요. 놀며 공부해도 중간은 할 수 있거든요. 자기가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 상위그룹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지도교수 눈에 띄기도 쉽고 학교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기에 훨씬 유리할 겁니다.

일부러 게으름을 피울 필요는 없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를 세워서 가슴 졸이고 애를 태우며 살 필요가 있을까요? 목표와 기대를 조금 낮추면 조금만 노력해도 남한테 뒤처지지 않고 여유롭게 살 수 있잖아요. 우리들의 열등의식은 다 상대적인 겁니다. ‘열등하다’, ‘우등하다’ 하는 것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에요. 모든 존재는 다 존엄합니다. 비교를 하다 보니 ‘누구보다 못하다’, ‘누구보다 낫다’ 하는 분별이 생기는 겁니다.

특히 좋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일수록 성적이 떨어지면 자존감이 떨어지고 열등감이 심해지는 경향이 있어요. 예를 들어, 중고등학교 다니는 내내 1등을 하다가 1등만 모아놓은 대학에 들어가서 맨날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면 자존심이 더 상합니다. 그런데 학교 다닐 때 늘 중간쯤 한 사람은 오히려 아무 문제가 없어요. 얼굴도 그래요. 젊을 때 예쁘다는 소리를 자주 듣던 사람일수록 늙음에 대한 두려움이 굉장히 큽니다. 저처럼 대충 생긴 사람은 늙어도 아무 상관이 없어요. 어릴 때 대충 생긴 사람은 오히려 늙으면 얼굴이 더 좋아져요. 젊을 때야 예쁘냐 안 예쁘냐 이런 것을 따지지만, 늙으면 얼굴형이 다 비슷해집니다.

이처럼 지금 좋은 것이 나중에 반드시 좋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질문자의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일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학을 안 갔기 때문에 공부도 하기 싫고, 농땡이 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기보다 ‘내가 고3 때 아파서 원하는 대학에 못 갔지만 또 이것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대학 생활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대학에 왔기 때문에 오히려 친구도 사귈 수 있고, 동아리 활동도 할 수 있고, 수행도 할 수 있고, 그러면서 성적도 괜찮게 나올 수가 있는 겁니다. 죽기 살기로 공부하지 않고도 이 모든 걸 이 대학에서는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지나 놓고 보면 ‘아, 내가 고3 때 아팠던 게 큰 복이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공이 도저히 안 맞으면 그건 또 다른 문제이긴 합니다.”

“우선 둘 다 좀 만족스럽지 않은 게 큽니다.”

“그런데 전공이라는 것도 내가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부모 때문에 법학과에 간 경우라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대부분 무엇을 꼭 해야 한다는 것이 없습니다. 의대, 간호대, 약대 같은 대학을 빼고는 전공과 취직이 연결되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 근본적으로 말하면 취직을 하기 위해 대학을 반드시 나올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취직만 생각하면 대학을 다니는 것이 낭비일 수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해서 바로 직장에서 필요한 실무를 익히는 게 훨씬 더 노동효율이 높습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지 않으면 승진에서 불이익이 있기 때문에 대학에 가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기술적인 분야가 아니라면 전공과 상관없는 일을 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전공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대학을 안 나와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웃음)

공부는 직접 사회에 나가서 하는 공부가 제일 효율적이에요. 여러분들이 하는 공부는 다 시험을 치기 위해서 하는 공부입니다. 꼭 일회용과 같습니다. 지식을 시험칠 때만 일회용으로 사용하고 쓰레기통에 넣어버리거든요. 여러분들은 그냥 시험을 잘 봐야 하기 때문에 외우는 공부를 합니다. 그래서 현실에 적용할 가치가 별로 없는 것들을 공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중학생 수준의 과학이나 수학을 물어봐도 대부분이 몰라요. 학교 다니면서 배운 것이 생활에 활용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요즘 시대는 지식적인 것은 인터넷에서 다 찾아서 공부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학교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한 10년만 지나면 관료 사회를 빼고는 학교가 별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현재 학교와 같은 이런 교육 시스템이 굉장히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처럼 독특해서 아예 대학을 안 가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냥 통과 의례로 생각하고 얼른 졸업해 버리는 게 제일 낫지 않을까요? 어느 대학이든, 무슨 전공이든, 신경 쓰지 말고, 대충 해서 졸업해 버리세요. 정말 자기가 필요한 공부는 취직해서 실용적인 것을 배우는 것이 장기적인 진로를 생각했을 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어느 대학에 무슨 전공을 해야겠다는 것이 뚜렷하다면 재수를 해야겠지만, 그게 아니면 시간 낭비일 수 있기 때문에 빨리 졸업해 버리는 게 제일 낫습니다. 학생이라는 이름으로 학비 내고 노는 것보다 자립이 될 수 있는 자기 삶을 사는 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학자가 되려면 좀 다르게 접근해야 합니다. 학자가 되어 연구소에 취직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해서 상위권에 들어야 하고 석사와 박사 과정을 거쳐야겠죠.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빨리 끝내버리고 딱 현실적으로 접근해서 자기 실력을 키우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사전에 선정된 질문자가 모두 질문을 마치자 현장에서 손을 들고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 자존감이 낮아서 고민입니다.
  • 역사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
  • 돈에 대한 집착을 어떻게 놓을 수 있을까요?
  • 블록체인 기술로 정토회를 만들 수 있습니까?
  • 유기견이 불쌍해서 돌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연 속에 내버려 두는 게 좋을까 싶기도 합니다.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 베트남 스님들이 방문하여 정토회와 스님의 검소한 삶을 보고 감동받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제가 법륜 스님을 믿는 건지 불교를 믿는 건지 헷갈립니다. 진짜 불교는 무엇인가요?

즉문즉설을 시작한 지 어느덧 두 시간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질문하고 싶은 청년들이 많았지만 밤 10시가 넘어 즉문즉설을 마쳤습니다.

늦은 밤이지만 청년들은 그룹별로 마음 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역사기행의 분위기가 점점 깊어가는 가운데 경주의 밤하늘에는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동해로 가서 문무대왕의 수중릉과 감은사지, 불국사를 안내하고, 오후에는 황룡사지에서 회향식을 한 후 청년 경주역사기행을 마무리하고, 저녁에는 보건의료인을 위한 특별 강연을 온라인으로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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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봉사자

저는 이때 국민 봉사자 시험에 최종 합격하고

산림복지종말론 연구를 좀 수행한다고

스님이 충효동에 온 줄도 몰랐네요.


금산재칼국수는 드셨습니까?

충효동 용궁단골식당도 좋습니다.


경주시 충효동은
자연 반 도시 반으로 구성된
유령도시입니다.

그러나 저는 유령도시에서도
Alan Walker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2024-02-19 00:08:25

정화

마지막 고양이에서 빵 터졌어요 ㅋㅋㅋ 이름이 무엇인가요? ㅎㅎㅎ

2023-11-14 11:21:20

드림하이

‘내가 원하는 대학을 안 갔기 때문에 공부도 하기 싫고, 농땡이 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기보다 ‘내가 고3 때 아파서 원하는 대학에 못 갔지만 또 이것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대학 생활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대학에 왔기 때문에 오히려 친구도 사귈 수 있고, 동아리 활동도 할 수 있고"

2023-11-08 13: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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