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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연중 가장 큰 농사일 중의 하나인 벼를 수확하는 날입니다. 새벽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해가 떠오르자 스님은 농사팀, 유통팀 행자님들과 논으로 나갔습니다. 작은 모를 심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벼 이삭이 통통하게 영글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사람 손으로 직접 벼를 벴지만 이제 콤바인이 벼를 베고 동시에 탈곡도 합니다. 그래도 논의 모서리마다 콤바인이 회전하는 곳은 사람이 손으로 직접 벼를 베어 놓아야 합니다. 오늘은 600평 논 두 곳을 수확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논으로 가서 모서리마다 벼를 베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막 떠오르기 시작하자 들판은 더욱더 황금빛으로 넘실거렸습니다.
10시가 되자 콤바인이 도착해 벼를 베어 놓은 모서리로 입장했습니다. 그런데 벼가 눌렸습니다. 스님이 들어가서 낫으로 콤바인 앞 벼를 더 벴습니다.
기사님도 콤바인에서 내려 함께 벼를 베다 스님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아니, 법륜스님 아니세요?”
“맞습니다.”
“오늘 운이 엄청 좋네요. 영광입니다. 즉문즉설을 매일 보고 있습니다.”
스님은 기사님을 위해 콤바인에 올라가 함께 사진을 찍어드렸습니다.
콤바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스님은 다음 모서리로 달려갔습니다. 콤바인이 회전하는 각도를 계산해 사선으로 벼를 더 베 두었습니다.
콤바인이 지나간 자리에는 볏짚만 가지런히 놓였습니다. 그런데 아주 가장자리에 심은 벼는 콤바인이 수확할 수 없었습니다. 기사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참 알뜰하게도 심으셨네요. 원래 가장자리에는 잘 안 심는데….”
콤바인이 지나가고 가장자리는 직접 손으로 벴습니다. 벼는 모서리에 모아두었습니다. 나중에 콤바인에 넣어서 탈곡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콤바인은 순식간에 벼를 다 베었습니다. 손으로 벴다면 하루종일 걸려도 다 못 끝냈을 일이었습니다.
스님과 행자님들은 콤바인이 지나간 자리에 떨어진 벼 이삭을 주웠습니다. 농사를 지어보면 쌀 한 톨이 얼마나 귀한지 몸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콤바인이 첫 번째 논을 수확하는 동안 두 번째 논으로 가서 모서리마다 벼를 벴습니다. 가장자리도 미리 베 두었습니다.
곧 첫 번째 논 수확이 모두 끝났습니다. 스님과 행자님들은 모두 첫 번째 논으로 달려가서 모서리마다 모여 있던 벼가 탈곡될 수 있도록 콤바인에 넣었습니다.
두 번째 논도 수확을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도 콤바인이 지나간 자리에 떨어진 이삭을 주웠습니다. 기계가 움직이는 동안 스님과 행자님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움직였습니다.
곧 두 번째 논도 수확이 끝났습니다. 모서리마다 쌓여있는 벼를 콤바인에 넣어 탈곡했습니다.
길에 떨어진 벼 이삭도 빗자루로 쓸어 살뜰히 주워 담았습니다.
1,200평 논에서 약 3톤의 벼가 나왔습니다. 기사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점심 먹을 시간이 되어 두북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점심을 먹고 곧바로 문수팀 행자님들과 울력을 시작했습니다. 쪽파를 심었던 텃밭을 정리하고 거름을 준 후 땅을 뒤엎어 두었습니다.
텃밭에서 일을 마치고 들깨밭으로 올라갔습니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들깨를 다 수확했습니다. 저녁에는 업무를 보고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도 아침부터 농사일을 하고 오후에는 서울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22일 재한 베트남 사람들을 위해 열린 즉문즉설 내용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급속도로 경제가 발전하고 있고, 물질은 풍요로워지고, 생활은 굉장히 편리해졌습니다. 이와 함께 인간의 욕구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부처님께서 설법해 주신 사성제가 지금도 필요한 상황인가요? 세간에서 이 법이 왜 필요한지 궁금합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가 1960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이 100불이었습니다. 지금은 3만 5,000불이에요. 350배가 늘어났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그때보다 350배 더 행복해졌을까요?”
“아니요.”
“35배는 더 행복해졌을까요?”
“아닙니다.”
“3배는 더 행복해졌을까요?”
“아니요.”
“이 사실을 근거로 보면 앞으로 1인당 GDP가 35만 불이 된다고 하더라도 더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왜 계속 경제성장을 외칠까요? 의식주를 해결하기 어려울 때는 경제가 성장하면 행복 지수도 같이 올라갑니다. 그러나 경제가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아무리 경제가 성장한다고 해도 더 이상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삶의 길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였습니다.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싯다르타 왕자를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싯다르타 왕자는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가난해서 괴롭다면 돈을 벌면 되는데,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도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탐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도 경제적 측면에서만 보면 마치 싯다르타 왕자와 같이 모든 게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괴롭습니다. 왜 괴로운지 탐구를 해야 합니다. 고타마 싯타르타가 가졌던 문제의식이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욕구가 이루어지면 마음이 즐거워집니다. 하지만 욕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욕구를 이루고자 합니다. 그런데 욕구가 이루어지면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더 큰 욕구가 생깁니다. 그렇다고 그 욕구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노력해서 욕구를 이룬다고 해도 또다시 욕구가 더 커집니다.
여러분들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기뻤을 겁니다. 한국만 가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 같았을 거예요. 지금 여러분의 고민이 다 해결됐습니까? 제가 예상하기에는 어쩌면 베트남에 있을 때보다 더 괴로울 것이라고 봅니다. 여러분은 이 괴로움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여기 욕구가 있습니다. 욕구가 만족되면 즐거움이 생깁니다. 욕구가 만족이 안 되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욕구가 이루어지느냐 아니냐에 따라 되풀이됩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되풀이되는 것을 윤회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란 ‘괴로움과 즐거움이 늘 되풀이된다.’ 하는 것을 깨우쳐 아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괴로움과 즐거움 둘 중에 괴로움은 버리고 즐거움만 취하려고 합니다. 그 즐거움이라는 것이 다시 괴로움이 되는 이치를 놓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즐거움으로 행복을 삼으면 불행이라는 것이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 괴로움과 즐거움의 되풀이를 윤회라고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현상을 윤회라고 하는 것은 인도의 전통사상에 근거한 것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계속 되풀이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해탈이란 괴로움과 즐거움이 되풀이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다시는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즐거움이 옛날보다 커졌다는 것은 그만큼 괴로움도 커졌다는 것을 뜻해요. 더 큰 즐거움을 추구하면 더 큰 괴로움이 그림자처럼 계속 따라옵니다. 쾌락, 마약, 술을 통해 즐거움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면 건강도 잃고 괴로움도 그에 비례해서 따라오게 됩니다. 미국 사람들이 즐거움을 자꾸 추구하다 보니까 이 세상에서 마약이 제일 많은 나라가 미국이에요. 미국에서는 마약으로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우리는 즐거움으로만 내닫는 인생의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부처님 법을 제대로 공부하기 어려워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사회가 갖고 있는 인간의 고뇌와 병폐는 부처님 법만이 치유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고락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자각할 때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를 깨우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제를 자각했다면 계속해서 윤회하는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탐구해야 합니다.
‘욕망이 원인이구나’
‘내 마음대로 하려는 성질이 원인이구나’
‘한 치 앞도 모르는 무지가 원인이구나’
이 원인을 제거하게 되면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괴로움 없이 살려면 늘 지금 여기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성제입니다. 욕망을 충족해서 즐거움이 생길 때 이 즐거움이 곧 괴로움으로 바뀌는 줄을 알아차려야 해요. 그러면 우리는 즐거움에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팔정도입니다.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에 늘 집중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부처님의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스스로 경험해 나가야 합니다. 이는 현대사회에 적용하기 어려운 진리가 아니라 현대사회에 꼭 필요한 실천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이 법을 적용하기가 어렵지 않겠느냐고 질문을 하셨는데, 오히려 현대사회가 바로 이 법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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