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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전국의 행복시민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역사기행을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행복시민들을 만나기 위해 6시 30분에 두북 수련원을 출발해 천안으로 향했습니다.
고속도로 위를 2시간 30분 달려 9시에 천안 독립기념관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행사장인 컨벤션홀을 방문했습니다. 곳곳에서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봉사자들을 격려했습니다.
컨벤션홀을 나와 겨레의 탑을 지나 겨레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겨레의 집 계단 아래 좌측 잔디밭 광장에 도착하니 새벽부터 전국에서 출발한 행복시민들이 모두 도착해 있었습니다.
6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센터별로 참가자 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늘 온라인 공간에서만 만나다가 직접 얼굴을 마주해서 그런지 열기가 아주 뜨거웠습니다. 몇몇 분들은 스님을 보자 환호를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센터가 하나씩 소개될 때마다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먼저 스님이 독립기념관을 둘러보기에 앞서 여는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독립운동사가 많이 왜소해진 이유에 대해 설명하며 전시관을 관람할 때 아직도 기록에 남기지 못한 것들이 많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가을날 여러분들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 우리가 도착한 곳은 독립기념관입니다. 1982년에 일본에서 교과서 왜곡 사건이 생겼습니다. 일본 정부가 교과서를 집필하는 사람들에게 일제의 잔혹한 침략사를 줄여서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일본의 지식인들이 양심이 있어서 이에 대해 반대를 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 안에서도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이 일어났고, 우리의 소중한 독립운동 역사를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국민 성금 운동이 일어나서 500억 원 이상이 모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5년에 걸쳐 공사를 하여 1987년에 독립기념관을 완공했습니다. 짧은 시간에 공사를 하다 보니 초기에는 부실한 것이 많았지만 지금은 오랫동안 정비가 돼서 말끔해진 편입니다. 12만 평의 부지에 웅장하게 지었지만, 제가 보기에는 내부에 전시된 자료는 아직도 많이 부족해 보입니다.
첫째, 겨레의 뿌리에 해당하는 환인, 환웅, 단군의 역사를 전시해야 하는데 그 내용이 없습니다. 둘째, 독립 운동사는 지금의 입장에서 평가하기보다는 그 당시 조건에서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들이 소련, 중국, 미국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같은 이념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일본의 압제에 저항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느냐를 평가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독립이 된 후에 나라가 분단이 되어 남북이 서로 경쟁을 하다 보니 독립운동가들 중에 북한으로 간 사람은 남한에서 다 지워버릴 수밖에 없었고, 북한도 독립운동가들 중에 남한으로 간 사람은 다 지워버리고 사회주의 계열에 해당하는 독립운동만 기록에 남겼습니다.
또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지만 늙어서 변절한 사람들은 독립운동사에서 다 빼버렸습니다. 또한 젊을 때 친일 행위를 했다가 늙어서 정신을 차리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젊을 때 행적이 나쁘다고 해서 다 빼버리는 바람에 우리가 아는 독립운동가는 젊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찍 죽은 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찍 돌아가신 분들은 변절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굉장히 풍부한데 이렇게 역사를 기록하다 보니까 굉장히 왜소해졌습니다.
변절했든, 어떤 이념을 갖고 독립운동을 했든, 그런 것들을 따지지 말고 그 당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다 인정하고 기록을 해야 합니다. 그 뒤에 변절한 사람은 변절했다고 기록하고, 북한으로 간 사람은 북한으로 갔다고 기록해야 역사가 풍부해지거든요. 중국은 만주족이 지배했던 몽골족이 지배했던 무슨 민족이 중국을 지배했던 중국 땅에서 일어난 역사는 전부 다 중국의 역사라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는 방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와 같이 살았고 우리의 백성이기도 했던 여진족이나 거란족을 모두 이민족이라고 치부하고 중국의 역사로 규정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역사는 아주 작아졌고, 중국의 역사는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이런 관점을 ‘사관’이라고 합니다.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눈이 좁다 보니까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이 독립기념관 건물에도 많은 독립운동 기록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독립운동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서 전시관을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평화재단 역사기행 안내자인 이승용 님이 제1전시관부터 제7전시관까지 어떤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는지 자세히 소개해 주었습니다.
다음은 전체 참가자가 계단 위에 서서 겨레의 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기념사진을 찍은 후 센터별로 출발해 전시관 관람을 시작했습니다. 사전에 충분히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전시관을 관람하는 것은 개별적으로 진행했습니다.
스님도 겨레의 집 입구에 우뚝 서 있는 불굴의 한국인상을 시작으로 제1전시관 <겨레의 뿌리>부터 차례대로 전체를 한 바퀴 둘러보았습니다. 제1관에는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인 1860년대까지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과 불굴의 민족혼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시물을 관람하는 데 유리관에 계속 참가자들의 얼굴이 비쳤습니다. 마치 과거의 역사 속에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미래를 반추하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2전시관 ‘겨레의 시련’부터 제6전시관까지는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후 대한민국이 세워지기까지의 역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니 점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한 참가자는 끝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들이 무참하게 짓밟힌 과정들을 보니 너무 가슴 아프네요.”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무자비하게 추방당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먹먹하게 했습니다. 전시된 내용은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하니 이름 없이 쓰러져간 사람들의 넋이 더욱더 가슴을 옥죄어 왔습니다.
아픔의 역사를 뒤로 하고 전시관을 나와 삼삼오오 모여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적절한 공터를 찾아 둘러앉은 후 각자 싸 온 도시락을 꺼내 밥을 먹었습니다. 점심시간을 활용하여 컨벤션 홀 앞 공터에는 행복학교 홍보 부스가 운영되었습니다. 행복시민들은 다양한 이벤트에 참여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친 참가자들이 속속 컨벤션홀로 입장했습니다. 오후 2시부터는 60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인 가운데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함께 모인 자리를 축하하기 위해 구로 행복센터와 일산 행복센터에서 멋진 공연을 보여주었습니다. 구로 행복센터에서는 오카리나 연주를 하고, 이어서 일산 행복센터에서 뮤지컬 공연을 했습니다.
공연의 열기가 강연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스님이 연단을 향해 걸어 나오자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스님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이곳 독립기념관에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많은 사람들의 기록이 있습니다. 사실은 기록된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이름 없이 희생되어 갔습니다. 이름이라도 남은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더 큰 일을 하고도 이름 없이 쓰러져간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편안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마치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내가 잘났기 때문에 잘 산다고 착각하듯, 살다 보면 우리도 우리 선조들의 희생을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유원지에 가서 노는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이런 역사의 현장에 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면 좋겠어요. 물론 아이들에게 너무 유익한 것만 보여주려고 하면 지루해하니까 맛있는 것을 챙겨 와서 먹기도 하고 구경도 하면서 산책을 해 보세요. 안개에 옷이 젖듯이 아이들과 함께 성벽을 걷거나 박물관을 다니다 보면 어느덧 익숙해지게 되어서 우리 민족의 뿌리인 역사 공부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학교에서 시험 치기 위해서 역사 공부를 억지로 하게 되면 거부 반응만 생길 뿐입니다. 오늘 역사기행이 계기가 되어서 자주 이런 곳을 찾아가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네 명과 먼저 대화를 나눈 후 즉석에서도 질문을 받았습니다. 누구든지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독립기념관을 둘러보면서 일본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보았는데, 그런 악행을 저지르고도 일본은 왜 과보를 안 받는지 답답한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이곳 천안 독립기념관을 처음 와 보는데 방문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일본의 만행이 굉장히 잔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당시 독립 운동가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갔습니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을 것이고요. 기록을 다 못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일본이 그렇게 만행을 많이 저지르고도 지금 잘 살고 있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가서 유학도 하고, 또 우리나라의 인재들이 일본에 정착해서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일본이 그렇게 만행을 많이 저질렀는데 과연 과보를 받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 질문자는 인연과보와 인과응보, 두 단어를 혼동하고 있어요. 인과응보는 나쁜 짓을 하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하고, 좋은 짓을 하면 상을 받아야 된다는 생각이에요. 예를 들어 내가 길을 가는데 바람이 불어 간판이 떨어져서 머리를 다쳤다고 합시다. 이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오늘 머리를 다쳤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 인과응보적 관점이에요. 그러나 인연과보란 어떤 원인으로 간판이 떨어져서 내 머리를 다치게 했는가 하고 그 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사고를 벌이나 복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사고로 보고 그 원인이 무엇이냐에 중점을 두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종교와 어떤 사회의 도덕관이 인과응보적 관점에 있습니다. 가령 나쁜 짓을 했는데도 벌을 안 받으면 다음 생에라도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언젠가 하느님이 벌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야 분한 마음이 풀리기 때문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못된 짓을 해도 잘 사는데, 그럼 나도 못 된 짓을 할까’ 하고 잘못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러나 인과응보는 믿음에 해당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것이지요.
이와 달리 인연과보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과학적 사고방식입니다. 그물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물고기가 많이 잡혔을 때 ‘내가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물고기를 많이 잡았구나’ 하고 생각하고, 물고기가 안 잡혔을 때 ‘내가 전생에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안 잡혔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에요. 물고기가 많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면 아무리 악한 사람이 그물을 던져도 물고기가 잡힐 것이고, 물고기가 없는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면 아무리 착한 사람이 그물을 던져도 물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물고기가 잡히는 것은 그 사람이 착한지 악한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물고기가 있는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면 물고기가 잡히는 것입니다.
일본이 잘 사는 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해를 깨친 것과는 깊은 관련이 없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물건을 잘 만들어서 잘 살게 된 것이지 도덕성이 높거나 특별한 종교를 믿어서 잘 사는 게 아니에요. 일본의 국민성은 기계를 만들든, 도로를 닦든, 그 무엇을 해도 꼼꼼하고 착실합니다. 그렇게 성실히 일하더라도 집에 가서는 다른 태도를 보일 수가 있는 거예요. 회사에서는 기계도 잘 만지고 자동차 수리도 잘하는 유능한 기술자가 술 먹고 집에 와서는 자기 부인을 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성격은 좋은데 기술이 없다면 돈은 벌지 못하겠지요.
자꾸 인과응보와 인연과보를 혼동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질문자처럼 착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일본이 윤리적, 도덕적, 법률적으로 잘못한 것은 그들이 부유하든 않든 상관없이 그에 따른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일본의 만행을 두고 ‘지진이 나서 가라앉아 버렸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과응보적 사고방식입니다.”
“저는 일본이 과보를 받는지가 궁금해요.”
“과보란 물고기가 많은 곳에 가서 큰 그물을 던지면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것을 말해요. 질문자는 과보를 자꾸 응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일본이 저지른 수많은 만행에 대한 과보가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믿음입니다. 미국 백인이 신대륙에 정착할 때 원주민인 인디언을 많이 죽였잖습니까? 인디언들이 살아남았으면 우리처럼 ‘옛날에 너희가 우리한테 얼마나 못된 짓을 했냐?’ 하고 따질 텐데 다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항의할 사람이 없어진 거예요. 그런데도 미국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잘 살잖아요. 질문자의 생각대로라면 그들은 벼락 맞아 죽어야 합니다. 스페인 사람들도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습니까? 그때 원주민들의 인구가 오천 만이었는데 지금은 오백 만이에요. 거의 씨가 마를 정도로 죽인 겁니다.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다가 고통을 준 것도 어마어마했습니다. 배에 싣고 오다가 삼분의 일이 죽었습니다. 그냥 생선을 잡아 통에 담아서 오듯이 그렇게 데려 온 겁니다. 그래도 미국이 지금 잘 살고 있잖아요.
인과응보적 관점에서 볼 때 못된 짓을 한 사람은 전부 벌을 받아야 해요. 그런데 세상은 인과응보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금 선진국에서 탄소를 많이 배출하고 있는데 실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시적으로 생각하면 인간이라는 종이 못된 짓을 했으니까 인간이라는 종 중에 누군가가 죽는 거예요. 먹는 것은 입이 하는데 아픈 것은 배입니다. 배는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모두 웃음) 독약인지 보지 못하고 먹었다면 그걸 보지 못한 눈이 탈이 나야 하고, 입이 독약을 먹었으면 혀가 탈이 나야 하는데, 배가 탈이 나서 죽게 되잖아요. 이것은 모든 존재가 연기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긴 시간의 틀에서 보면 인과응보도 맞을 수 있겠지만, 우리가 사는 한정된 틀에서 보면 그렇지 않아요. 이 사람이 했으면 이 사람이 벌을 받고, 저 나라가 했으면 저 나라가 벌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과응보의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 그렇게 착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남편 중에 집에 와서 짜증 내고 성질내고 가끔 폭행도 하지만 회사에 가서는 일을 잘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 인간은 교통사고가 나서 죽어야 하는데 안 죽어요. 혹시라도 교통사고가 나서 죽는다면 그것은 그가 죄를 지어서 죽는 게 아니고 운전을 잘못해서 죽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도덕적으로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이 사람에게 잘해주면 이 사람도 반드시 나에게 잘해준다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은 확률론입니다. 내가 이 분에게 욕하는 것보다는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 나에게 좋은 말로 돌아올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을 뿐입니다. 욕을 하는 것보다 칭찬해 주는 것이 나에게 좋다고 봐야 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베풀었는데 베푼 사람들 중에는 나에게 손실을 끼치는 사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럴 때 ‘베풀면 손해가 난다’ 하거나 ‘베풀면 반드시 나한테 은혜를 갚는다’ 하고 생각하면 안 돼요. 내가 그 사람한테 손해를 끼치는 것보다는 베푸는 쪽이 나에게 손해를 끼칠 확률이 적어진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조금이라도 확률이 높은 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확률을 높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지 ‘이렇게 하면 반드시 이렇게 된다’ 하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의 미시 세계는 다 확률론입니다. 옛날에는 ‘비가 온다’, ‘비가 안 온다’라고 말했는데 요즘은 ‘비가 올 확률이 조금 높다’, ‘비가 올 확률이 조금 낮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마지막 질문자는 강박증을 앓고 있는 대학생이었는데요. 스님은 질문을 듣고 나서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대중들의 중지를 모아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저는 현재 휴학생인데요. 원래 고등학생 때까지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되면서 강박증이라는 병이 생겼고, 그로 인해 학교생활이 어려워지고 친구들과의 관계가 틀어지게 되어 1년을 휴학을 했습니다. 다시 용기를 내어 학교에 다녔지만 높았던 성적은 바닥을 치게 됐고, 제가 가고 싶었던 대학은 물론이고 하고 싶었던 공부조차도 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지방에 있는 작은 대학교에 간신히 붙게 돼서 그곳을 3년 동안 다니고 있습니다. 막상 졸업할 때가 다가오니 옛날에 접어두었던 꿈에 대한 미련이 올라오면서 휴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기약 없는 재수를 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그냥 지금 있는 현실에 감사하고 다니던 대학을 졸업한 후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게 좋을지, 스님의 복합적인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스님 한 사람의 지혜보다 여기 있는 600여 명의 지혜가 더 뛰어납니다. 이것을 ‘중지’라고 해요. 중지를 모으는 게 더 소중하지 않겠나 싶거든요. 그래서 지금부터 중지를 모으기 위해 투표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병이 악화되더라도 어쨌든 내 꿈을 향해서 휴학을 하고 재수를 해보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하루빨리 졸업을 해서 사회에 적응을 하는 게 좋은지, 대중 여러분이 보기에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요? 자, 하나씩 투표해 볼게요. 병이 악화되더라도 재수를 계속해보면 좋겠다는 분은 손을 드세요.”
손을 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지금 빨리 졸업하면 좋겠다는 분은 손을 드세요.”
대부분이 손을 들었습니다. 스님이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이 대답을 안 해도 되겠지요?”
질문자는 일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고민이 말끔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중 모두가 큰 박수로 질문자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 질문자는 답례로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제 고민 해결에 도움을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리고요. 사실 저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집 안에만 처박혀 있으면서 매일 울고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법륜 스님의 행복학교 수업을 듣고 나서 ‘한 사람의 몫을 해야 한다’ 하는 말씀을 듣고 용기를 내어 얼마 전에 일자리도 구했고, 면접도 보러 다녀서 간신히 붙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많은 분들이 용기를 주셨으니까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요. 제가 그 답례로 노래 한 곡을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모두 큰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질문자는 심청전의 한 대목을 아주 멋들어지게 불렀습니다. 질문자의 노래를 듣고 나서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멀쩡하네요. 이게 바로 행복학교가 만든 기적입니다.”
강연장은 감동의 물결로 뒤덮였습니다. 스님이 마지막으로 정리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요즘은 청년들이 방에서 나오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진다고 해요. 어제 청년 법회에서 조사한 결과를 보니까 은둔 생활을 경험해 본 청년들이 30퍼센트나 된다고 합니다. 이런 청년들이 점점 많아지는 이유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안 이뤄지거나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정신적인 질환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청년들에게는 행복학교가 정말 필요합니다. 스님이 강의를 하니까 행복학교를 자꾸 특정 종교라고 생각하는데, 행복학교는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 공부하는 곳은 정토회에서 진행하는 정토불교대학이 따로 있습니다. 행복학교는 국민 행복 운동입니다. ‘국민들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는 취지로 만든 프로그램이 행복학교이기 때문에 종교가 있든 없든 어떤 종교를 가졌든 그런 건 전혀 구애받지 말고 누구나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행복학교는 스스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행복학교를 만날 수 있도록 널리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행복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행복시민이 되면 사회적 실천 활동을 하게 됩니다. 행복학교를 만나지 않은 사람들도 행복해야 하잖아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환경을 개선해줘야 합니다. 목마른 사람들을 위해 물도 줘야 하고, 배가 고픈 사람들을 위해 밥도 줘야 하고, 몸이 아픈 사람들을 위해 약도 줘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시민이 하는 사회적 실천 활동입니다. 우선 자기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행복학교라면, 자기 스스로 행복해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환경을 개선해 주는 활동을 하는 것이 행복시민의 사회적 실천 활동입니다.
세상이 어떻든 마음의 원리를 자각하고 깨달으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학교를 널리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질문자는 행복학교가 만든 기적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즉문즉설이 끝나고 오늘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누구든지 손을 들고 소감을 한 마디씩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중국에서 온 교포입니다.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너무 힘들었는데 스님 덕분에 잘 견뎌낼 수 있었어요. 장사를 하고 있는데 코로나 시기에는 매일매일 전쟁이었어요. 그럴 때도 스님 법문을 들으며 잘 버티었습니다. 작년에 수술을 세 번이나 했지만 스님의 말씀 덕분에 하루를 행복하게 삽니다. 정말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마지막까지 감동의 물결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다 함께 노래를 부른 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퇴장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출입구 앞에 서서 퇴장하는 행복시민 600여 명과 모두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온라인으로만 만나던 스님과 악수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오후 4시 30분에 천안 독립기념관을 출발하여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차로 2시간 30분을 달려 저녁 7시에 두북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7시 20분부터 두북 수련원에 머물고 있는 베트남 청년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은 먼저 베트남 청년들이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정토회에서는 두북 수련원 주변 마을에서 혼자 살고 있는 독거노인들을 돕는 봉사 활동을 20년째 해오고 있는데요, 베트남 청년들은 독거노인들의 집을 방문하여 대화를 나누고 왔습니다. 한 분이 그 소감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어르신들이 말씀하신 내용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먹을 건 많이 있는데 먹을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저희가 방문했을 때 ‘여러 사람이 북적이는 분위기를 너무 오랜만에 느껴서 너무 좋다’ 하고 말씀하시니까 가슴이 찡했습니다.”
스님은 지금 대한민국 농촌의 문제점은 2~30년 후 베트남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베트남이 지금과 같은 속도로 계속 발전해 간다면, 아마 2~30년쯤 지나면 현재의 한국과 같은 모습처럼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곳 주변에 공장이 많이 있지만 공장에 다니는 한국인 노동자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외국인 노동자들입니다. 한국 젊은이들은 이미 다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골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외국인 자녀이거나 외국인 여성과 결혼한 사람의 자녀가 이미 절반을 차지합니다. 만약 시골에서 결혼하는 어떤 남자가 있다면 결혼 상대는 대부분이 외국인 여성입니다. 한국에서 농촌이 붕괴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70년대부터입니다.”
이어서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제에 이어서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한국의 농촌은 고령화 문제가 심각한 것 같습니다. 만약 2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스님은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것 같습니까?
베트남에서 단체를 운영해 보니 외부의 지원금이 끊기면 운영도 중단되곤 합니다. 스님이 생각하는 지속가능한 개발이란 무엇인가요?
서울은 땅값이 엄청 비싼데 정토회는 서울에 회관이 있고, 예전에는 많은 법당을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많은 비용을 어떻게 부담할 수가 있죠?
저는 남자친구와의 이별을 경험하면서 매우 힘들었습니다. 스님은 젊은 시절에 인간관계 때문에 힘든 적이 없었나요?
아침에 발우공양을 할 때마다 복잡한 형식에 스트레스를 받고 압박을 받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발우공양을 해야 하나요?
명상을 하는 올바른 방법은 무엇인가요? 명상을 하는 중에 졸아도 괜찮나요?
최근에 한 달 동안 부탄과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하고 온 결과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그중에서 한 명은 자원봉사 시스템을 도입하고 싶지만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며 정토회가 자원봉사 시스템으로 운영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해했습니다.
“정토회는 모든 활동이 자원봉사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고, 성공할 수 있었나요? 왜 정토회에서는 가능한데 다른 곳에서는 구현하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첫째, 정토회는 이념적으로 부처님 당시의 수행자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살았다는 것을 따르고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모든 수행자는 밥을 얻어먹는 것과 옷을 주워 입는 것 빼고는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정토회는 부처님 당시 출가자의 원칙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처음 정토회를 시작할 때는 이런 뜻에 동조해서 공동체에 들어온 젊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공동체에 들어오는 젊은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의 젊은이들은 사회 정의를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한다는 정신이 아주 강했습니다. 그런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대학에 다니다가 공장에 가서 노동 운동도 하고, 농촌에 가서 농민 운동도 하고, 사회 민주화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런 토대 위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결합하면서 많은 청년들이 정토회 공동체에 들어왔습니다.
지금 법사로 활동하는 분들은 젊은 시절부터 이런 취지에 기꺼이 동의해서 활동했습니다. 지금 베트남에 가서 정토회를 새로 시작하면 많은 청년들이 참여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 당시에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정토회를 통해서 수행도 하고, 환경 운동도 하고, 구호 활동도 하는 등 봉사를 많이 했습니다.
둘째,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 이 운동에 동참할 때는 반드시 보시와 봉사를 하도록 했습니다. 수행, 보시, 봉사, 세 가지를 할 수 있어야 정토회 회원이 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처럼 온전히 다 버리고 공동체에 들어가서 살아야 하는데, 가족을 이루고 직장을 다니는 것까지는 양해를 해줄 테니까 하루에 한 시간은 수행하고, 일주일에 두 시간은 봉사하고, 내 수입의 일부는 기부를 하도록 한 겁니다. 대신 여기에 동의할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기 때문에 정토회의 확산 속도는 매우 느린 편입니다.
만약 기부를 하면 칭찬을 해주거나 활동가에게 월급을 주어서 운영하거나 이렇게 다른 종교처럼 정토회를 운영했다면 규모가 엄청 커졌을 겁니다. 그러나 정토회는 정부의 지원도 일절 받지 않고, 재벌의 돈도 일절 받지 않았어요. 그것은 자본주의적 시스템이지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 결단을 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선 젊은이의 인구가 삼분의 일로 줄어들었고, 거기다가 사회적 분위기가 개인의 취향을 즐기는 쪽으로 바뀌었어요. 그리고 정토회를 이끌어가는 리더들이 나이가 들어있다는 것도 하나의 원인입니다. 제가 정토회를 처음 시작할 때는 나이가 30대였고, 함께하는 멤버들도 전부 20대였어요. 늘 청년들끼리 함께 일하고 먹고 자고 하니까 분위기 자체가 젊은 분위기여서 청년들의 결합이 용이했습니다. 그때는 아무리 힘든 일도 젊은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서 일을 했기 때문에 주인의식을 가질 수가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정토회의 리더가 나이가 많은 어른들이다 보니깐 젊은이들은 소극적으로 임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지난 5월에 제가 여러분들이 사는 베트남을 한번 찾아가 본 이유 역시 제가 40년 전에 정토회를 시작할 때와 여러분들의 상황이 비슷해서 그렇습니다. 제 경험이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렇게 여러분을 만나고 있는 겁니다. 정토회는 지난 40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듭해서 지금의 자원봉사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어요. 지금 돌아보면 정토회를 시작할 때는 제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 길밖에 선택할 수가 없었던 것도 하나의 원인인 것 같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이 길을 온 것도 있지만, 그때는 이 길 빼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어요.” (웃음)
대화를 나누고 나니 밤 10시가 다 되었습니다.
“내일은 논에 모퉁이마다 손으로 벼를 베어야 하는데, 낫질할 줄 아는 사람 있어요?”
“저희 모두 낫질을 다 해봤습니다.”
대부분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좋아요. 내일은 논에 가서 벼를 베는 일을 같이 합시다.”
밤이 깊어서 오늘 하지 못한 이야기는 내일 계속하기로 하고 대화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논의 모퉁이마다 벼를 베는 일을 하고, 주간반 전법회원 법회 생방송을 한 후, 오후에는 정토회 기획위원회 회의에 온라인으로 참석하고, 베트남 청년들과 마지막 대화의 시간을 가진 후, 저녁에는 저녁반 전법회원 법회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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