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8.17 논둑 예초, 오이 모종 심기
“교통사고로 10살 아이를 하늘나라로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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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농사일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문수팀 행자님들과 논둑으로 갔습니다. 어제 논 두 곳을 예초했고, 오늘 나머지 논 두 곳을 예초했습니다.

논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시동을 걸고 풀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앞으로 나아가며 논둑 위에 난 풀을 벴습니다. 빠르게 돌아가는 예초기에 풀잎에 맺힌 이슬이 튀어 작은 물안개가 피었습니다.

논둑 위를 다 베고 돌아 나오며 논둑 아래에 난 풀을 벴습니다. 가장 아래쪽은 허리를 숙여도 예초기가 닿지 않아 논으로 직접 들어가 예초기로 풀을 벴습니다.

반대편에서도 행자님이 부지런히 예초기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쪽 논에서도 행자님 두 명이 논둑을 깨끗하게 예초했습니다.

논둑은 다 벴지만, 논 가장자리에도 풀이 많아 논으로 들어가 예초기로 풀을 벴습니다.

길가에 튄 풀 조각을 쓸고 울력을 마쳤습니다. 오늘도 땀을 흠뻑 흘렸습니다.

예초기를 트럭에 실어놓고 수로에서 온몸에 튄 풀 조각이며 흙을 씻어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점심 먹고 오후에 또 울력을 합시다.”

낮에는 실내에서 업무를 하고 시장에 가서 가을 오이 모종을 사 왔습니다. 오후 4시에 저녁 공양을 한 후 다시 문수팀 행자님들과 울력을 시작했습니다.

저녁에는 산밑밭으로 갔습니다. 지난번 태풍으로 쓰러진 가지, 토마토, 고추 줄기를 다시 세워준 후 가지, 토마토, 고추가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오이는 제 할 일을 다 마치고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오이 덩굴을 다 뽑아 밭 가장자리로 치웠습니다.

빈 구멍마다 물을 주고 오이 모종을 심었습니다. 모종에 한 번 더 물을 주고 흙을 잘 덮어주었습니다. 스님은 오이를 하나하나 정성스레 심으며 말했습니다.

“가을에 유럽과 미국을 다녀오면 오이가 주렁주렁 달려 있겠지요.”

오이 모종을 다 심고 나서 2인 1조로 작물마다 거름을 주었습니다. 한 명이 두둑에 파종기를 꽂으면 다른 한 명이 유기농 비료를 파종기 속에 넣어 주었습니다.

통에 모인 빗물을 작물에 뿌려주고 울력을 마쳤습니다.

밭을 내려오니 곧 해가 졌습니다.

밤 9시에는 법사님 몇 분을 비롯하여 문수팀 행자님들과 함께 양산시 웅촌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출발했습니다. 정토회에서 법사로 함께 활동했던 분의 아내가 암 투병 끝에 오늘 오전에 임종하셨습니다.

스님은 밤 10시에 장례식장에 도착해 잔을 올린 후 대중들과 함께 영가를 위해 천도 기도를 해드렸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50년을 살든 100년을 살든 우주적 시간에서 보면 다 눈 깜짝할 찰나일 뿐인데 ‘10년이 길다’, ‘10년이 짧다’ 하고 분별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로다. 하루를 살다가 가더라도 진리에 눈을 뜨고 실상을 여실히 깨달아 괴로움 없이 자유롭게 사는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 진정한 복이라 할 수 있나니. 육신이 병들어 통증으로 고통을 겪다가 생을 마쳤으니 그 모든 통증 또한 순식간에 사라졌도다. 그러니 어찌 통증을 안고 하루 이틀 더 산다고 그것이 복이라 할 것이 있겠나이까. 영가시여, 병든 몸을 훌훌 털어 버리고 다시는 병들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열반의 길에 들어섰음을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이소서!

오늘 대중은 영가의 해탈 열반을 발원하며 이와 같이 염불한 공덕으로 살아 생전에 괴로움이 없고 걸림이 없는 삶을 살고, 죽어서는 해탈과 열반의 세계에 이를 것이니 부디 생에 집착하여 나느니 죽느니 오느니 가느니 하며 슬퍼하고 괴로워하지 말지어다. 오늘 영가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는 천도 기도를 하며 여기 모인 대중들 역시 이 도리를 깨달아 영가와 더불어 해탈 열반을 성취하여지이다.”

천도 기도를 하고 유족들에게 위로의 인사를 건넨 후 장례식장을 나왔습니다.

“아무리 수행을 해도 극심한 통증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마음이 아프시겠지만,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마시고 오히려 돌아가신 분께서 통증의 괴로움에서 벗어났다고 좋게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스님.”

두북수련원에 돌아오니 밤 12시가 다 되었습니다. 내일도 아침저녁으로 농사일을 하고,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주 금요 즉문즉설에서 나눈 대화 내용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교통사고로 10살 아이를 하늘나라로 보냈습니다

“저희 부부는 네 명의 자녀를 두고 있으며 아이를 가르치는 일을 하며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바르게 살기 위해서 노력해 왔고 아이들도 잘 성장해 주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교통사고로 막내를 갑작스럽게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급하게 헤어진 상황이기에 아직도 꿈을 꾼 것 같습니다. 맞벌이로 살다 보니 다른 부모들보다 아이에게 사랑을 많이 주지 못한 것 같고, 잘해준 기억보다는 화내고 짜증을 낸 생각만 나서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아이를 보낸 것이 꼭 저희 탓인 것만 같습니다. 10살 막내가 너무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은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 할 것 같은데 정말 어렵습니다.”

“자녀가 병원에서 병을 앓다가 명을 달리 한 것도 아니고 갑자기 교통사고가 나서 죽게 되면 당연히 꿈만 같죠. 제정신이 아닐 겁니다. 빨리 진정할 수 있는 방법은 따로 없어요. 지금은 정신없이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는 백약이 무효예요. 스님이 어떤 위로를 한다고 해서 마음에 담길 수가 없어요. 지금은 그 슬픔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정신을 좀 차렸으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완전히 정신이 없으면 질문을 할 생각조차 못 했을 텐데, 이렇게 질문을 했으니까 얘기를 나눠 봅시다.

질문자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되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스님이나 신부님이나 목사님이 하는 생각 말고 본인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아이가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까?”

“네, 그랬으면 좋겠어요.”

“부모 심정에서는 아이가 살아서 돌아왔으면 좋겠죠. 하지만 아이가 살아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아무리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방법이 없다면 포기를 해야 할까요, 계속 붙잡고 있어야 될까요?”

“머리로는 포기를 해야 하는 줄 알지만, 가슴으로는 그것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금덩이를 갖고 싶지만 방법이 없어요. 그러면 당연히 포기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가질 수 없는 금덩이에 미련을 가지게 되면 훔친다든지 하는 어리석은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조건이 안 되는데도 집착을 하게 되면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되는 거죠. 만약 어떤 무당이 ‘굿을 하면 죽은 아이가 돌아온다’ 하고 말한다면 질문자는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굿을 할 겁니까?”

“굿을 할 것 같습니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데도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면 굿이라도 하게 되는 거예요. 남의 힘을 빌려서라도 하려고 하기 때문이죠. 만약 질문자가 스님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질문해서 그가 ‘아이를 극락에 보내기 위해서는 천도재를 지내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그 비용으로 몇 천만 원이 든다고 하면, 질문자는 천도재를 지낼 겁니다. 하지만 몇 억이 든다고 하면 고민이 될까요? 그래도 기꺼이 천도재를 지낼까요?”

“천도재를 지낼 것 같습니다.”

“몇 억이 든다고 하더라도요?”

“네, 지금 마음은 그럴 것 같습니다.”

“질문자는 슬픔 때문에 그렇게 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네요. 그런데 그 돈이 부담스럽게 생각되면 스님에게 ‘천도재를 지내면 아이가 정말로 극락에 가나요?’ 하고 물어볼 겁니다. 질문자처럼 죽은 아이에게만 관심이 있을 경우에는 묻지도 않고 돈을 냅니다. 사람들이 장례비와 재비에 많은 돈을 쓰는 이유는 너무 슬프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돈이 부담스러우면 스님에게 와서 묻습니다. ‘돈을 내면 정말로 아이가 좋은 곳으로 가게 될까요?” 하고요. 슬픔에 너무 사로잡히면 이렇게 과분한 비용을 들여서 종교적인 행사를 할 위험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열 살이었던 아이가 자라면서 크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자가 생각하기에는 만약 극락이 있다면 아이가 그곳으로 가게 될 것 같아요, 못 갈 것 같아요?”

“갈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돈을 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아이가 나쁜 짓을 많이 해서 극락에 갈 수 없는데 억지로 극락에 보내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는 아직 어리고 특별히 죄를 지은 것도 없다. 만약 천당이나 극락이 있다면 분명 그곳에 갔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죽은 아이를 염려해서 애걸복걸하며 돈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만약 아이가 죽지 않고 자라서 성인이 되고 대학까지 졸업한다면 돈이 3억 원 정도는 들 거예요. 그 돈을 지구 저 편에 있는 인도나 아프리카의 가난한 아이들 100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그들의 학비로 제공해 보세요. 그렇게 한다면 질문자는 한 명의 아이를 잃는 대신에 백 명의 아이를 새로 얻게 됩니다.

3억이 부담된다면 그 10분의 1인 3천만 원만 들여도 인도나 아프리카의 가난한 아이 열 명을 고등학교까지 졸업시킬 수 있어요. 그 나라에서는 아이들 한 명을 학교에 보내는 데 1년에 몇 십만 원밖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질문자가 ‘그들의 학비를 우리 아이의 이름으로 지원하겠다’ 이렇게 마음을 내면 죽은 아이를 승화시킬 수 있어요. 전 인류적 관점에서 보면 내 아이 한 명이 산화해서 다른 열 명을 살린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공덕을 지으면 질문자의 아이는 극락을 안 가고 싶어도 안 갈 수가 없게 됩니다.

죽은 아이 생각에 집착해서 ‘살아 돌아왔으면’, ‘좋은 데 갔으면’ 이렇게 자꾸 생각한다고 해서 아이가 살아 돌아오거나 좋은 데 가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아이가 살아오길 바란다면 그럴 수 있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아이는 살아 돌아올 수가 없어요. 그럴 수 없다는 게 분명하기 때문에 이제 미련을 끊어내야 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좋은 데 가기를 바라는 것은 달라요. 사후에 좋은 곳이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윤회해서 다시 환생한다든지, 극락이나 천당에 간다든지 하는 것은 그렇게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믿음에 따라 해 볼 수 있어요. 믿지 않는 사람도 확실히 단정 지을 수는 없기 때문에 한번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위해 돈을 내면서 천도재를 지내는 겁니다. 그러나 극락이나 천당을 가는데 왜 돈을 내야 할까요? 그곳에 가는 것은 원래 돈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열 살짜리 아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거기 가는데 돈을 내야 하겠어요. 다만 부모로서 만약 그런 곳이 있다면 아이가 그곳에 갈 수 있게 공덕을 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내 아이 하나가 희생한 공덕으로 저 인도나 아프리카의 돌보지 못한 아이 100명을 보살피겠다’

이렇게 관점을 갖고 그들을 보살피는 데 드는 경비를 아이의 이름으로 제공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이를 잃은 슬픔은 어찌할 수 없지만 그 슬픔을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죽은 아이가 부모의 힘을 빌려 좋은 곳에 갈 만한 공덕을 짓게 되는 겁니다.

며칠 전에 신문을 보니 20대의 촉망 받는 젊은 국악인이 뇌사 판정을 받아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눈 못 보는 사람에게 안구를 기증하는 등 장기 기증을 통해 여러 명을 살렸다고 합니다. 그것처럼 질문자도 아이의 몫으로 ‘백 명의 아이를 잘 크도록 도와주겠다’ 하는 자세를 좀 가져보면 어떨까 싶어요. 그렇게 하면 아이의 희생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귀해질 수 있습니다. 첫째, 질문자가 정말로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를 고귀하도록 만들어 주면 좋을 것 같아요.

둘째, 질문자는 아이와 놀아주지도 못하고 사랑도 제대로 못해 주었다고 반성했는데, 그래서 슬픔에 빠져 있는 것이 나머지 세 명의 아이들에게 정말로 도움이 될까요? 아니면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돈을 버는 데에만 더 이상 집중하지 않고 아이들과 같이 놀아주거나 여행도 같이 다니는 식으로 삶의 방식을 좀 바꾸는 것이 나머지 세 명의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까요? 돈만 벌어서 그 돈을 온전히 아이에게 다 주려고 했는데 아이가 갑자기 죽어버린다면 얼마나 허무해요. 그러니 아이들과 같이 놀아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지금이라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한 아이를 통해 세 아이에게 잘하는 교훈을 얻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야 한 아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됩니다.

한 아이의 희생이 나머지 세 아이에게 실수할 것을 막아줬으니 우리 막내 아이가 큰일을 한 겁니다. 나머지 세 아이들의 입장에서도 동생의 희생으로 오히려 부모님이 우리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느끼게 된다면, 동생의 육체적 생명은 죽었지만 그 아이의 의식은 세 명의 아이들에게 계속 살아있게 되는 겁니다. 이 일을 계기로 만약 백 명의 아이를 돕게 된다면 그 아이의 의식은 백 명의 아이들에게 계속 살아 있게 되는 겁니다. 이런 자세로 이 문제를 좀 극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슬픈 심정은 이해하는데, 슬퍼한다고 아이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에게 못해준 것만 자꾸 생각나서 여러 가지로 너무 많이 힘듭니다.”

“자꾸 그렇게 생각하면 나머지 세 명의 아이들에게 또 못해 주는 결과가 벌어지게 됩니다.”

“맞습니다.”

“하나를 잃었으면 반성을 해서 나머지 세 아이에게는 잘해 줘야죠. 한 아이를 잃었다고 계속 울고만 있으면 나머지 세 명에게 또 못해 주는 결과가 되는데 그거야말로 바보 같은 짓이 아닐까요?

지금이라도 ‘아! 내가 아이를 잃고 보니까 돈도 중요하지만 아이들하고 같이 놀아주는 게 더 중요하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앞으로 나머지 세 명의 아이들에게는 화내는 행동을 더 이상 안 해야 합니다. 그 아이 하나의 죽음으로 인해 질문자가 정신을 차려서 나머지 아이들에게도 잘하게 될 때, 그 아이의 의식이 세 아이들 속에서 계속 살아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돼요. 슬픈 것은 이해가 되는데, 슬픔에 사로잡혀 있으면 이미 저지른 실수를 또 저지르게 됩니다. 똑같은 길을 반복해서 가게 됩니다.

그러니 한 번의 실수로 끝내려면 ‘지금 내가 후회했던 것들을 나머지 아이들에게는 반복하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아이들 셋이서 동생을 잃었다고 슬피 울어도 질문자가 그 아이들을 달래야 합니다. ‘괜찮아. 마음이 아픈 것은 사실이야. 그래도 동생은 우리 속에 다 같이 살아 있어’ 이렇게 격려를 하면서 아이들의 슬픔을 없애야 하는데, 엄마가 식음을 전폐하고 정신없이 있으면 아이들한테 더 큰 충격을 주게 됩니다. 그러니 질문자는 제대로 반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자신의 감정에 빠져 있는 것일 뿐입니다. 반성을 했다면 지금이라도 웃으면서 나머지 아이들한테 잘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큰 실수를 할 뻔했다’ 하면서 나머지 세 명에게 잘하는 자세로 전환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 아이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는 부모가 자식을 낳아서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내가 적은 수입이지만 우리 아이를 위해서 그런 곳에 조금이라도 기부를 해야겠다’ 이렇게 관점을 가지면 슬픔을 더 좋은 쪽으로 승화할 수 있습니다.”

“네, 말씀 감사합니다.”

“한번 웃어 보세요. 자식이 죽었는데 어떻게 웃을 수 있겠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슬피 운다고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오지 않습니다. 웃으면 나머지 세 아이에게라도 좋지만, 울면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은 똑같고 나머지 세 아이에게도 나쁜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것은 바보 같은 짓을 연달아 하는 것입니다. 빨리 마음을 수습하고 정신을 차려서 세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자식이 죽었는데 어떤 위로를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지금은 정신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럴 때는 위로를 잘 안 합니다. 위로가 귀에 안 들어오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이것도 정신적으로 분석해 보면 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충격으로 인해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병원에 가서 안정제를 받아먹으면 정신이 좀 차려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한 명을 잃었지만 세 명까지 안 잃어서 다행이다’ 하고 생각하면서 나머지 세 명에 대해서 다시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정신을 빨리 차리는 길입니다.”

“죽은 막내는 가슴에 묻고 세 아이를 위해 다시 열심히 살겠습니다.”

“너무 매몰차게 이야기해서 미안합니다. 그런데 달리 방법이 없어요. 위로가 될 수만 있다면 제가 천도재를 공짜로라도 해주고 싶은데, 이 문제는 위로를 받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자식이 죽은 상황에서 정신이 없어진 겁니다. 옛날 식으로 말하면 혼이 빠진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밥을 먹어도 먹는 게 아니고 그냥 멍하니 있는 겁니다. 그러니 너무 힘들면 병원에 가서 의사의 처방을 받아 안정제를 먹는 것이 좋아요. 그러면 예민해진 신경이 조금 완화가 됩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조금 정신을 차려서 살아있는 다른 아이들에게 직접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해야 합니다. 이미 죽어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아이는 계속 붙들고 있고, 해줄 수 있는 아이들은 외면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죽은 아이의 이름으로 공덕을 쌓는 것이 좋습니다. 즉, 내 아이의 이름으로 다른 아이들을 돕는 겁니다. 죽은 아이의 이름으로 다른 아이들을 돕는 보시를 하면 그것이 복이 되어서 아이를 좋은 곳으로 천도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내일은 오전에 농사일을 한 후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71

0/200

황병철

아~~
너무 감사합니다~
너무감사합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

2023-09-19 20:49:59

최현정

저도 큰애를 장기기증하고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자식을 잃어보지 않으면 도저히 모를 마음입니다
힘내시고요. 남은 아이를 잘 챙겨야 된다는것도 알지만...아파서 그럴 힘이 없는걸요.
아프면 아픈대로 슬프면 슬픈대로 좀 살아봐야지요.
시간의 힘을 믿고 남은 가족들의 사랑으로만 극복이 될겁니다.부디 잘 챙겨드세요.
세 아이들의 엄마니까요

2023-08-27 20:05:01

조안

내가 놓치고 사는 것이 뭘까 잠시 돌아봅니다

2023-08-24 11: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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