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8.12 정토불교대학 & 경전대학 즉문즉설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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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안거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자마자 스님은 농사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스님은 작업복을 입고 오랜만에 산 밑밭으로 올라갔습니다. 안거를 시작하기 전에 밭으로 가는 길에 자란 풀을 예초기로 벴는데 다시 무성해져 있었습니다.

“언제 풀을 벴나 싶게 풀이 다시 자라 있네요.” (웃음)

산밑밭에 도착해 먼저 수확할 채소가 있는지 둘러보았습니다. 안거기간 동안 두북 수련원에 남은 행자들이 틈틈이 수확을 해두어서 수확할 야채가 많지 않았습니다.


이틀 전 한반도를 지나간 태풍 카눈이 산밑밭 곳곳에 흔적을 남겨두었습니다. 가지, 토마토, 고추가 이리저리 쓰러져 있었습니다.

양쪽 두둑 바깥에 지지대를 새로 박고 줄을 당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쓰러진 가지 줄기를 하나하나 세워 줄에 다시 묶어주었습니다.




스님이 가지 두둑에서 일하는 동안 다른 행자님들은 쓰러진 토마토, 고추 줄기를 세웠습니다.


태풍의 흔적을 치우고 나니 두 시간이 흘렀습니다. 쓰러진 줄기를 다 세우고 토마토 곁순도 따주었습니다.


“토마토 두둑에 난 풀을 뽑고 울력을 마칩시다.”


행자들과 재빠르게 풀을 뽑았습니다. 밭 입구에도 풀이 많이 자라 있었지만, 다음에 예초기로 풀을 베기로 하고 밭에서 나왔습니다.

사용한 도구를 깨끗이 씻어 제 자리에 놓은 후 울력을 마쳤습니다.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오전 10시부터는 방송실에서 정토불교대학 학생들과 함께 즉문즉설 생방송을 했습니다.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은 지난 3월 말에 입학했는데 벌써 5개월 과정을 수료하고 졸업식을 일주일 앞두고 있습니다. 오늘은 스님에게 궁금한 점을 질문할 수 있는 마지막 대화 시간입니다.

먼저 지난 7월에 전국에서 모둠별로 진행된 평화 실천 활동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역사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활동하신 분들을 기리는 전시관, 박물관 등 곳곳을 방문하여 그분들의 넋을 기리고 모둠별로 다양한 실천을 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두 명의 소감을 들은 후 다 함께 스님에게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부처님이 가르친 내용의 핵심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부처님이 가르친 내용의 핵심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분이 높든 낮든,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부자든 가난하든, 피부가 희든 검든, 어떤 환경에서 자랐든, 현재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든, 이런 것과 관계없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행복하게 살 수가 있다는 것이 부처님이 가르친 내용의 핵심이자 목표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있다’ 하고 표현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이나 처지를 두고 ‘이렇기 때문에 괴로울 수밖에 없다’ 하는 핑곗거리로 삼을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하고 자기 긍정으로 나아가는지는 여러분들의 선택입니다. 그래서 정토불교대학 교과과정을 잘 공부했는지 여부는 여러분이 얼마나 행복 해졌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예전보다 조금 더 행복해진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공부를 잘한 것입니다.” (웃음)

이어서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다섯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에게 궁금한 점을 질문했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공부를 마친 터라 그에 대한 질문들이 많았습니다. 그중 한 명은 힘들 때 타협할 때가 많은데 타협하는 마음과 중도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질문했습니다.

타협하는 마음과 중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저는 자신과 타협하려는 마음과 중도의 차이점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배울 때 부처님께서 대기설법으로 대중을 깨우쳐주시는 이야기를 듣고 당시 수행자들이 무척 부럽기도 했습니다. 공부에 진전이 없어 집으로 돌아가려는 소나 꼴리위사(Soṇa koḷivisa)에게 수행을 거문고에 비유해 주신 법문에서 ‘중도가 이러한 것이구나’ 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일상생활에서 공부를 하다가 집중이 안 된다거나 강의가 어려워서 재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다른 할 일을 떠올리며 그날 공부 목표량을 채우지 못하고 끝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더 능률적이라고 제 자신과 타협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자신과 타협하는 마음과 중도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삶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복을 받는다는 전통적인 주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복을 받는다는 건 확인할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인간은 욕망을 갖고 있는데 그 욕망이 채워지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것이 세속에서 말하는 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거나 큰 집을 사거나 아이가 공부를 1등 하는 일을 두고 복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여기에 반대하는 새로운 주장은 욕망의 씨를 말려야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행복이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욕망 자체를 없애버려야 진정한 행복에 이른다고 주장한 거예요. 욕망을 충족시키는 걸 쾌락주의라고 하고, 욕구 자체를 없애려는 걸 고행주의라고 합니다.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에는 왕자로 사셨기 때문에 쾌락주의의 끝까지 가봤습니다. 왕궁에서 늘 파티를 열고, 쾌락을 즐겼습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도 쾌락을 즐기다가 출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처님은 출가하신 후로는 그와 반대로 고행주의를 따랐습니다. 고행주의자 스승을 만나서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고행을 다 하며 고행의 끝까지 가봤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쾌락의 끝에서도 완전한 자유에 이르지 못했고, 고행의 끝에서도 완전한 자유에 이르지 못하자 ‘도대체 뭐가 잘못됐을까’ 하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봤습니다. 세상에 있는 두 길을 모두 다 가봤는데, 둘 다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제3의 길이라는 건 없었기 때문에 쾌락주의 아니면 고행주의였고, 이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었던 거죠.

이건 우리가 명상을 해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명상을 하다가 다리가 아프면, 다리를 펴든 지, 고통을 참든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도 담배를 피우든지, 아무리 피우고 싶어도 이를 악다물고 참든지, 길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다리를 펴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이렇게 욕망을 따라가게 되면 과보가 따릅니다. 반대로 참으면 스트레스를 받게 돼요. 그렇기 때문에 둘 다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길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이걸 알게 되신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욕망을 따르지도 않고, 욕망을 참지도 않느냐?’ 하는 새로운 길을 탐구하셨습니다. 이 길은 욕망을 따르지 않으니까 과보를 받지 않고, 참지 않으니까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 길입니다. 그게 바로 욕망을 다만 욕망인 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욕망을 쫓지도 않고, 욕망과 싸우지도 않는 길이에요. 다만 ‘욕망이구나’ 하고 알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새로운 길을 발견하셨는데, 이것을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공자님도 이러한 이치를 발견하셨습니다. 다만, 공자님은 수행적 관점에서 발견하신 게 아니라 정치적 맥락에서 발견하셨습니다. 공자님이 살던 당시에는 여러 가지 백가쟁명(百家爭鳴)이 있었는데, 그 많은 주장들 가운데 이쪽이든 저쪽이든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용(中庸)입니다.

우리가 북한 핵문제를 해결할 때도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합니다. 한쪽에서는 저놈들은 나쁜 짓을 하니 압박을 해서 핵을 포기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관계를 개선해서 핵을 포기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금은 둘 다 안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한다고 해서 핵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고, 북한을 압박하고 군사훈련을 한다고 해서 북한이 핵을 포기한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두 가지 방식이 아닌 새로운 해결 방식을 찾는 것이 중도입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죠.

기원전 4세기 경에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와 유사한 ‘황금 중도’라는 개념을 정치에 적용했습니다. 당시 인도와 중국 사이에도 아무런 교류가 없었고, 인도와 그리스와도 아무런 교류가 없었는데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관점이 나온 건 인류사적으로도 특이한 일입니다.

지금 질문자가 공부가 안 돼서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쾌락을 따르는 것이지 중도가 아닙니다. 그냥 하기 싫은 마음을 따라간 거예요. 그건 명상을 하다가 다리가 아플 때 다리를 펴는 것과 같습니다. 중도와는 거리가 먼 거예요. 오히려 중도의 길을 가려면 공부를 하다가 이해가 잘 안 되고 싫은 마음이 일어날 때 ‘지금 싫은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공부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이 있구나’ 하고 살피면서 공부를 계속해나가야 합니다. 이를 악다물고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고, 중단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지금 싫어하는구나’ 하고 알되 그 싫은 마음에 휘둘리지 않고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중도입니다.

길을 가다가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다리가 부러져도 억지로 참고 가는 것도 아니고, 가긴 가되 다리가 아프니까 잠시 쉬었다가 가거나 다리를 좀 주물렀다가 가는 것이 중도입니다. 배가 고프다고 포기하는 게 아니라, 가긴 가되 배가 고프니 잠시 밥을 먹고 가는 것이 중도입니다.

지금 질문자가 이야기한 것은 중도와는 거리가 먼 얘기예요. 좋고 싫은 감정에 끌려가는 것은 욕망을 따르는 행위입니다. 싫은 마음이 난다고 해서 공부를 그만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욕망을 따르는 행위예요. 즉, 한쪽에 치우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공부가 하기 싫을 때마다 ‘꾀병이 올라오네’ 하고 알아차리고 공부를 계속 진행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말귀를 잘 알아들어 줘서 고맙습니다.” (웃음)

이어서 질문들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다섯 명과 대화를 마치고 나니 약속한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다음 주 주말에 졸업식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점심에는 구름 사이로 햇살이 보였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하며 무더위가 계속 기승을 부렸습니다.

오후 2시부터는 경전대학 즉문즉설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경전대학 학생들도 지난 5개월 동안의 수업을 모두 마치고 이제 졸업식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스님은 경전대학에서 공부한 내용들의 핵심이 무엇인지 강조한 후 전체 수업을 갈무리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여 채택이 된 여섯 명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학생들은 졸업을 앞두고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 점들을 편안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평소에 시시비비를 잘 따지는 성격인데, 분별심과 분별력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요?

“저는 평소에 시시비비를 잘 따지는 성격입니다. 경전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분별심을 버려야 한다고 많이 들었는데 분별심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 상태를 말하는지요? 저는 직장에서 행정업무를 하고 있는데 평소에 민원이 많은 부서입니다. 매일 자기가 옳다고 하고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야 돼서 분별력이 있어야 업무를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별심과 분별력의 차이는 무엇인지, 그리고 분별심을 버리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궁금합니다.”

“질문자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할 줄 알아요? 기본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구분을 할 줄 아는 게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구분할 줄 모르는 게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일반적으로는 구분을 할 수 있어야 지혜로운 사람인 것 같습니다.”

“남자는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다고 생각한다면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에요?”

“지혜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남녀를 두고 이 사람은 남자이고 저 사람은 여자라고 구분할 줄 아는 것은 분별력입니다. 그러나 남자는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비심입니다. 전자는 차이를 아는 것이고, 후자는 차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있고, 뱀을 믿는 종교가 있다고 합시다. ‘두 종교는 서로 믿음의 대상이 다르다’ 이렇게 구분할 줄 모르면 분별력이 없는 거예요. ‘두 종교는 서로 다르다’ 하고 구분할 줄 아는 것이 분별력입니다.

시비심이란 ‘하느님을 믿는 종교는 훌륭하고, 뱀을 믿는 종교는 열등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갖고 시비를 하면 갈등이 생깁니다. 서로 다름을 아는 분별력이 시비심으로 이어지는 거죠. 그래서 두 가지를 합해서 ‘시비분별’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시비하지 않는 분별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비하는 분별은 버려야 합니다. 질문자가 어떤 일을 두고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하고 바라본다면 그것은 시비하는 마음이에요. ‘이것과 저것이 서로 다르다’ 하고 보는 것은 분별하는 마음이에요.

질문자처럼 민원실에서 행정 업무를 보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법률에 기준할 때 이것은 허용이 되고, 저것은 허용이 안 된다’ 하고 말해야 되는 겁니다. 법률에서 허용이 안 된다고 해서 상대의 요구가 틀린 것은 아니에요. 현실에서는 이렇게 하자고 법률로 정해놓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요구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법률에서 허용이 안 됩니다’ 이렇게 얘기해 주면 되는 거예요. 법률적으로 허용이 되는 것은 옳고, 허용이 안 되는 것은 그르다고 표현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법률에서 허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그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정한 법에 의해 그르다고 규정된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법에 의하면 옳을 수가 있고, 북한 법에 그르다고 규정된 것이 남한 법에서는 옳을 수도 있습니다. 무슬림 법에 아주 나쁜 행위라고 규정된 것이 한국 법에서는 정당한 권리에 해당될 수도 있습니다.

무슬림에서는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 연애를 하면 죽을죄를 지은 것에 해당되죠. 남편이 있는 여자가 연애를 하면 사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미성년자가 아닌 이상 여성이 누구하고 만나든 본인에게 결정권이 있다고 보잖아요. 설령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결혼한 상대편 당사자에게 심리적으로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재산상 변상은 해야 하지만 국가 권력이 그것을 처벌할 수는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만나든 그건 내 권리에 해당하기 때문에 공권력이 개입할 수가 없다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 형법입니다. 우리나라는 하나님을 욕했다거나 부처님을 욕했다고 해도 아주 심할 경우에만 모독죄가 적용되지 일반적으로는 처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슬림 국가에서는 알라신을 욕했을 경우 사형에 준하는 처벌을 받게 됩니다.

서양에서는 서양의 문화와 가치관을 기준으로 마호메트와 알라신을 비판하는 행위를 하는데, 무슬림에서는 그런 행위를 신성 모독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에 반발하여 테러를 하기까지 합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갈등이 벌어지는 겁니다. 어떤 주장이 더 옳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서로 다를 뿐입니다. ‘서로 다르구나’ 하는 것이 분별이고, ‘옳고 그르다’ 하는 것이 시비입니다.”

“저는 늘 민원을 상대하다 보니까 요구하시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제가 옳다는 생각으로 ‘됩니다’, ‘안 됩니다’ 하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까 법률을 기준으로 ‘여기까지는 허용이 됩니다’, ‘여기서부터는 허용이 안 됩니다’ 하고 말씀드리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당신 생각에는 허용이 안 될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는 허용해 주면 되겠구먼’ 이렇게 다시 요구할 것 같습니다.”

“상대가 그렇게 말할 때 ‘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고 일단 수용을 해야 돼요. 그런 다음에 ‘제가 속해 있는 관청에서는 이것은 허용이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당신이 원하면 결정권을 가진 분에게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하고 말한 후 ‘당신이 요청해서 한 번 더 확인했는데 허용이 안 된다고 합니다’ 하고 최종적으로 알려주면 됩니다.”

“분별심을 버려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분별심을 버릴 수 있을까요?”

“분별심을 버리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표현하면 ‘시비분별심을 버려라’ 하고 말하는 게 맞습니다. 분별이란 서로 다름을 구분할 줄 알고, 서로 다른 차이를 아는 것입니다. 시비심이란 옳고 그름, 높고 낮음, 우열을 논하는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용어를 쓸 때는 ‘분별심을 버려라’ 하고 쓰지만 정확하게는 ‘시비분별심을 버려라’ 하고 말하는 게 보다 더 정확합니다. 어떤 사람이 민원을 넣을 때는 자기 나름대로는 옳다고 생각하고 넣습니다.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는데 민원을 넣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입장을 일단 수용해줘야 해요.

‘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런데 법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질문자가 옳으니 그르니 얘기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과 싸우게 됩니다. 질문자는 그 사람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잖아요. 그 사람의 요구와 법규가 충돌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질문자는 그 법규에 대해서만 얘기해 주면 됩니다.

‘법규가 이래서 당신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주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해드리겠지만, 저는 지금 공무원으로서 법규를 바탕으로 일하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그것은 해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해도 ‘그래도 해줄 수 있잖아’ 하고 요구할 수가 있어요. 그럴 때는 ‘알겠습니다. 제가 위에 한 번 더 물어보겠습니다. 다음에 오십시오’ 이렇게 대답하면 됩니다.

내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법규가 엄격하게 해석되기도 하고, 민원인이 노인이거나 약자라면 법규가 약간 더 부드럽게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정도는 해주면 되겠구먼’ 하는 민원인의 말도 맞는 거예요. 그의 입장에서는 법규의 해석이 너무 경직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질문자도 어디 가서 요구를 한 번 해보세요. 상대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할 때 ‘알겠습니다’ 하고 수긍이 잘 안 됩니다. ‘그래도 방법이 없겠어요?’ 하고 한 번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입니다. 이런 심리를 이해하면 민원인이 큰 소리를 쳐도 내가 별로 영향을 안 받습니다. ‘이 사람이 여기저기 요청해 봐도 안 되니까 화가 났구나’ 하고 그냥 바라보면 돼요. 그리고 웃으면서 ‘안타깝네요. 그런데 규정상 안 됩니다. 규정은 중앙에서 바꿔야지 제가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하루 이틀만 일할 것도 아니고 몇 년을 해야 하는 일인데 민원인과 싸우면 피곤해서 어떻게 살려고 그래요? 그러면 명대로 못 삽니다. 불평불만이 심하면 질문자는 대화에서 쏙 빠지는 게 좋아요. 민원인이 그래도 계속 우기면 ‘알았습니다. 한 번 더 체크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해야 하루 종일 편안하게 일할 수가 있습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민원을 넣고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어떤 식으로 주장하는지를 주제로 연구 논문을 한편 쓴다고 생각해 보세요. 연구 과제로 삼고 임하면 민원인들의 반응이 다양할수록 정말 재미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이렇게도 주장하네’, ‘이런 식으로 고집을 하네’ 하면서 그 사례를 하나씩 수집해 보는 겁니다. 연구 논문을 쓰려면 사례가 많을수록 좋잖아요. 욕을 하는 사람, 말을 부드럽게 하는 사람, 애원하는 사람, 여러 가지 사례가 나올 겁니다. 종류별 사례, 행위별 사례를 수집해서 논문을 한 편 쓰겠다는 마음으로 임하면 민원인을 만날 때마다 정말 재미있게 도울 수 있습니다. ‘와, 이 사람은 새로운 사례다’ 하는 마음가짐으로 한번 해봐요. ‘시비심을 버리겠다’ 하는 식으로 너무 어렵게 접근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가 있나’ 하고 받아들이면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이야, 저런 사람도 있네. 사람들의 생각이 다 다르다더니 진짜 다르긴 다르네. 같은 걸 두고도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이렇게 사례를 하나씩 수집한다는 관점을 가져 보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겁니다.”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매일매일이 너무 다이내믹해서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재미있도록 한번 해보세요. 민원을 해결해 준다면 민원인이 좋아할까요? 안 좋아할까요?”

“좋아합니다.”

“너무 법률을 내세워서 안 된다는 방향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가능하면 해결해 주려는 자세를 가져 보세요. 범법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을 빼고는 다 해결해 주겠다는 관점을 가지면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됩니다. 스님도 어디 민원을 넣으러 가면 해결을 하고 싶겠어요? 해결을 안 하고 싶겠어요?”

“네, 해결하시려고 민원을 넣으실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질문자가 민원을 해결해 주면 스님이 질문자를 좋아할까요, 안 좋아할까요?”

“민원이 해결되고 나면 저를 좋아하시는 분은 없고 다시는 저를 보러 오지 않습니다.” (웃음)

“질문자를 다시 안 보러 오는 게 좋은 일이 아닐까요?”

“네, 맞습니다.”

“질문자가 민원부서에서 일한다는 것은 복을 지을 수 있는 큰 기회예요. 그러니 어지간하면 해결해 주세요. 오죽 답답하면 민원을 넣겠어요. 물론 가끔은 억지를 부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지간하면 해결해 준다는 관점에 서면 힘들지 않습니다. ‘어지간하면 해결해주고 싶은데 이것은 법적으로 도저히 허용이 안 되도록 되어있습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질문자가 덜 피곤하지 않을까 싶네요.”

“네, 감사합니다. 앞으로 분별은 하되 시비심은 내려놓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지혜는 통찰지와 분별지, 두 가지입니다. 사물을 볼 때 저 우주에서 내려다보듯이 앞도 보고 뒤도 보고 위도 보고 아래도 보고 왼쪽도 보고 오른쪽도 봐서 전체를 꿰뚫어 보는 것이 통찰지입니다. 통찰지가 있으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분별지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하나하나까지 아주 세밀하게 다 아는 것이 분별지입니다. 분별지가 있어야 교화를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상황마다 그에 맞는 조언을 해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통찰지만 있고 분별지가 없으면 자신은 괴롭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가 어렵습니다. 이때의 분별지는 하나하나의 차이를 아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그 차이를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잘했다 잘못했다는 차별로 받아들이면 시비심이 생깁니다. 시비심은 분쟁을 가져오고, 분쟁은 다시 미움과 괴로움을 가져옵니다.”

이어서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여섯 명과 대화를 마치고 나니 벌써 마쳐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학생들이 경전대학 졸업 후에도 정토회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수행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사회 공익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당부하며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에도 실내에서 업무를 보며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농사일을 한 후 오후에는 제14차 통일의병대회에 온라인으로 참석하여 평화와 통일에 대한 즉문즉설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3

0/200

장효선

스님의 하루 평화로워 즐겁습니다 ㅎㅎ ~~~^^

2023-09-10 07:31:41

드림하이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이나 처지를 두고 ‘이렇기 때문에 괴로울 수밖에 없다’ 하는 핑곗거리로 삼을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하고 자기 긍정으로 나아가는지는 여러분들의 선택입니다. "

2023-08-30 20:46:07

보슽

분별지와 통찰력. 시비심과 분별력...정말 놀라운 법문입니다. 스승님의 법체 강령을 축원합니다

2023-08-23 11: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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