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7.19 채소 수확, 농사일, 수행법회
“주위 사람에게 지적을 하고 나면 관계가 불편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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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농사일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먹구름이 걷히고 맑은 하늘이 보였습니다. 먼저 마당에 자란 잔디를 깎으려고 했는데 잔디 깎는 기계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논에서 일하고 있는 묘당법사님에게 연락을 해놓고, 수행팀 행자님들과 산밑밭으로 갔습니다.


어젯밤까지 비가 내려 잎마다 빗물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우비를 입고 빠르게 가지, 토마토, 오이, 호박을 수확했습니다.




무거운 바구니를 들고 내려오던 스님은 마을 사람에게 농산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밭을 내려오니 묘당법사님이 잔디 깎는 기계 시동을 걸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휘발유를 넣어야 하는데 오래 묵은 경유를 넣어서 시동이 안 걸린 것이었습니다.

“고마워요.”

먼저 스님이 잔디 깎는 기계로 마당에 잔디를 깎았습니다. 뒤이어 행자님이 전기예초기로 물건이 놓여있는 가장자리에 난 풀을 깔끔하게 깎았습니다.

“아이고, 시원하다.”



깎은 풀을 치우고 잔디 깎는 기계를 깨끗이 씻었습니다.


잔디 깎는 기계에 잘못 넣었던 경유를 그냥 버리기 아까워 아궁이에 불을 땠습니다. 장마 내내 꿉꿉했던 방도 말리고 오래된 경유도 사용하니 일석이조였습니다.

불을 지펴놓고 아침에 수확한 농산물을 포장했습니다. 텃밭에서 깻잎과 상추도 따서 담았습니다. 두 상자 가득 야채를 담아 오늘 서울 공동체로 가는 법사님 편에 보냈습니다.




상추를 수확한 밭을 갈고 거름을 뒤섞었습니다. 발우공양을 시작할 시간이 다 되어 스님과 행자님들은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자, 모두 힘을 합쳐서 빨리 해봅시다.”


땅을 평평하게 고른 다음 씨앗을 심었습니다. 무엇을 심을지 고민하다가 창고에서 얼마 전 산밑밭에서 캐온 쪽파 종자를 찾았습니다. 쪽파는 생명력이 강해서 땅이 어는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심을 수 있습니다. 호미로 땅에 줄을 긋고 쪽파 씨앗을 일렬로 콕콕 심은 후 흙으로 살살 덮어주었습니다.




사용한 도구를 씻어놓고 울력을 마쳤습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햇살이 뜨거웠습니다. 오후에는 실내에서 원고 교정을 하고 업무를 보았습니다.

오후 5시가 되어 다시 작업복을 입고 들깨밭으로 올라갔습니다. 이틀 전에는 땅이 질척해서 풀을 뽑지 못했는데 오늘은 땅이 조금 말라서 풀을 뽑을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손에 잡히는 대로 풀을 쑥쑥 뽑았습니다.

“이렇게 대강이라도 풀을 뽑아놓아야 해요.”



풀을 뽑는다고 앉아있으니 굶주렸던 모기들이 달려들었습니다. 잠깐 사이에 모기 여러 마리가 배를 채웠습니다. 모기를 쫓으며 어느 정도 풀을 뽑고 산밑밭으로 갔습니다.

장마가 계속되다 보니까 산밑밭에서 키우는 고추에 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농사팀 행자님들이 유기농으로 만든 약을 물에 타서 뿌려주었습니다.


7시가 다 되어 울력을 마치고 저녁예불 시간에 맞춰 수련원에 돌아왔습니다.

저녁 7시 30분부터는 수행법회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정토회 회원들이 모두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자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오랜 시간 계속되던 장마가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오늘은 오랜만에 해가 구름을 뚫고 나왔습니다. 모레까지 햇볕이 나고 주말에는 다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장마 기간이 길어진 것도 특이하지만 집중호우로 인해 전국 곳곳에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지면서 산사태가 발생하고 도로가 유실되고 농경지가 침수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아까운 인명이 50여 명이나 희생되고, 수만 명의 이재민이 생기고, 농산물 피해로 재산상 손실도 많이 발생했습니다.

집중호우로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빌며

도시에서 아파트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홍수피해를 실감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시골에서 살아보면 비가 정말 무섭게 쏟아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폭우가 내리면 짧은 시간에 강물이 넘치기도 하고, 계곡물이 폭포처럼 밀고 내려오기 때문에 산사태가 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즘 같은 장마철에는 개울이나 강가나 산 밑에는 가지 않는 것이 피해를 막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먼저 이 기간에 희생된 분들을 생각하며 그분들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하겠습니다.”

스님의 제안으로 다 함께 묵념을 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다시 스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예기치 못한 사고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지하차도에 물이 차올라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2020년에 부산역 인근 초량 제1지하차도에 물이 차올라 3명이 희생되었고, 작년 9월에는 포항아파트 지하주차장 침수로 8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등 이미 수차례 희생이 있었음에도 이런 일이 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지하차도에서 똑같은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런 희생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려면

첫째, 국가 행정 책임자들이 배수펌프에 대한 유지관리와 안전점검에 소홀했습니다. 둘째, 공개된 CCTV를 보면 양쪽 도로 맨 끝에서부터 지하차도로 물이 흘러 들어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통제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하차도뿐만 아니라 도로에서조차 물이 찼을 때는 차량 출입이 금지되어야 합니다. 셋째, 운전자들 역시 지하차도로 물이 쏟아져 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차를 몰고 들어간 모습이 CCTV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안전 불감증이 만연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들을 봤을 때 모든 책임을 어느 한쪽에 전가하는 방식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다음에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막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욱 중요합니다.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은 재난에 대비해서 사회 곳곳에 안전 조치를 취해야 하고, 개인들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안전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예전에도 산발적인 집중호우가 있었지만 최근 들어 더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은 환경 파괴로 인한 기후 변화와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일상적인 환경 실천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장마가 끝나지 않았고, 주말에도 폭우가 더 내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가을까지 태풍도 몇 차례 지나갈 것이기 때문에 모든 분이 안전에 유의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토회에서는 이번 장마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는지 조사해서 서로 도울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회나 모둠별로도 주위에 수해를 입은 곳이 있는지 알아봐서 수해복구 활동에 동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지난 한 주 동안 전국 으뜸 절에서 회원들이 실천 활동을 한 모습과 스님이 농사일을 한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저는 요즘 계속 풀을 베고 풀을 뽑는 것이 하루 일과입니다. 지난 주말에는 정토회 회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90여 명이 와서 풀을 뽑기도 했는데, 이번 주말에는 공동체 법사단에 도움을 요청해서 풀을 뽑았습니다.

제가 농사짓고 있는 밭이 마을 안에 있다 보니 가능하면 외부인들이 마을을 지나다니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서 풀을 매고 있는데, 이번에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 공동체 법사님들에게 하루 시간을 내주십사 하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모두가 풀을 뽑느라고 땀을 흠뻑 흘려야 했습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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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세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주위 사람에게 지적이나 충고를 하고 나면 관계가 불편해져서 마음이 괴롭다며 어떻게 수행을 해나가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주위 사람에게 지적을 하고 나면 관계가 불편해집니다

“저는 주위 사람들에게 충고나 직언을 하곤 하는데, 그로 인해 불편한 사이가 되면 제 마음이 괴롭습니다. 관계가 틀어질 것을 알면 그냥 조용히 있어야 하는데, 어리석게도 욱하고 저지르고 후회할 때도 많습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하는 생각이 들고, 상대가 내 조언을 오해한 것 같아 억울한 마음도 듭니다. 제가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인 걸까요? 과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많이 듭니다. 이럴 때는 어떤 수행을 해야 할까요? 이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도문이 있을까요?”

“부부지간이나 부모와 자식 간에도 사람의 얼굴 모양이 다 다르듯이 사람의 생각은 항상 일치하지 않습니다. 비슷한 면이 있을 수 있지만 똑같지는 않습니다. 느낌도 조금씩 다르고, 가치관이나 판단의 기준도 조금씩 다릅니다. 개와 비교하면 모든 사람이 다 비슷합니다. 얼굴 모양도 비슷하고, 하는 행동도 비슷하죠. 그러나 사람끼리 비교하면 다 다릅니다. 육체만 봐도 피부색이 다르고, 키가 다르고, 얼굴 생김새도 다릅니다. 눈과 귀가 두 개이고, 입과 코는 하나라는 측면에서는 다 같지만, 눈의 색깔, 모양, 크기는 조금씩 다릅니다.

물론 일란성쌍둥이는 육체적 모양이 거의 같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런데 정신작용은 일란성쌍둥이도 서로 다릅니다. 완전히 다르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정도의 차이가 생긴다는 겁니다. 동물과 사람의 정신작용을 비교하면 사람끼리는 거의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끼리 비교하면 모두 다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 기준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합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길을 간다고 합시다. 한 사람이 앞에 가고, 뒤에 또 다른 사람이 따라갑니다. 앞에 가는 사람은 ‘뭐 한다고 꾸물대는 거야’ 하고 자기 기준에서 생각합니다. 뒤따라가는 사람은 ‘왜 저렇게 서두르는 거야?’ 하고 자기 기준에서 생각합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출할 때 남편들은 대부분 문밖에 서서 ‘뭐 하느라고 빨리 나오지 않느냐!’ 하며 고함을 지릅니다. 아내는 방 안에서 ‘왜 당신 혼자 나가버리느냐!’ 하며 불평합니다. 살림을 맡은 아내는 외출을 하기 전에 창문도 닫아야 하고, 전기와 가스도 점검해야 합니다. 그런데 남편은 살림에 관심이 없다 보니 자기 옷만 걸치고 나가버리는 거죠. 한집에 살아도 맡은 역할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겁니다. 또 밥을 먹을 때는 반대입니다. 밥상을 차려 놓고 아내가 빨리 밥 먹으러 오라고 여러 번 외쳐도 남편은 오지 않습니다. ‘지금 하는 일 끝내놓고 갈게’ 하며 오지 않죠.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입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행동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누가 옳고 그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생겨는 불편한 마음을 없애려면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상대를 존중한다는 것은 ‘당신이 훌륭합니다’ 하고 말해 주는 게 아니에요. 상대는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존중입니다. ‘상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하는 것이 이해입니다. 사랑은 이해입니다.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비심이란 곧 이해심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인이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을 갖고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입니다. 자비심이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에요. 그의 처지에서 그를 이해하는 마음이 자비심입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지금 나와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고 있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랑도 없고, 자비심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내 식대로만 상대방을 보고 있는 거예요. 자기 성질대로 상대방한테 말 한마디 툭 뱉어놓고 ‘내가 너를 위해서 하는 이야기니까 너는 내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과 같습니다. 어떤 남자가 자기 좋다고 상대 여자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고 껴안으면 성추행을 범하게 되는 거잖아요. 꼭 성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방은 원하지도 않는 말을 해놓고 ‘나는 상대방에게 바른말을 했다’ 하고 생각하는 거죠. 충고는 상대가 원했을 때 해줘야 충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충고와 비슷한 것으로 ‘자자(自恣)’라는 것을 합니다. 자자는 내가 상대방에게 ‘당신이 보기에 내가 무엇이 문제인지 저를 위해서 이야기해 주십시오’ 하고 자발적으로 요청할 때 성립이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뤄질 때 진정한 충고라고 할 수 있어요.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데 내가 그를 위해서 충고를 해주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바탕에 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가 받아들일 수도 있고, 못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질문자는 상대의 요청에 의해 충고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꾸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럴 때는 상대방이 충고로 못 받아들이고 비난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기도문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는 자세가 바탕에 깔려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이해하는 마음 없이는 108배가 아니라 3000배를 해도 해결이 안 됩니다. 이 문제는 기도를 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자동차가 고장이 났으면 고장 난 부분을 고쳐야 해결이 되지, 자동차 앞에 떡을 갖다 놓고 절을 한다고 해서 고쳐지는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자꾸 어떤 기도문을 갖고 기도를 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마세요. 상대방은 나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바르게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실을 바르게 인지한 후에도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사실을 깜빡 놓칠 수가 있습니다. 상대는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지만 일상에서는 깜빡 놓친다면 그럴 때는 자각을 하기 위해서 기도문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기도문을 주문처럼 중얼중얼 외우는 방식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종교이지 수행이 아니에요.

질문자는 상대가 오해를 했다고 말하는데, 상대가 내 생각대로 안 따르면 무조건 오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오해라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듯이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오해한 것이 아니에요. 오해라는 말속에는 상대가 틀렸다는 뜻이 들어있는 겁니다. ‘상대는 나와 생각이 다르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네가 오해한 거야’ 하는 말속에는 ‘네가 잘못 이해했어’ 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어요.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자세를 바탕에 깔고 그 위에 대화를 통해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개선이 잘 안 될 때는 ‘남편은 부처님입니다’ 하는 기도문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남편 입장에서는 본인이 항상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남편 입장에서 본인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구나’ 하고 우선 내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편이 부처님이라는 말은 남편이 실제로 부처님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에요. 질문자가 불교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모두 옳다고 받아들이잖아요? 그런 것처럼 ‘네, 당신 말이 맞습니다’ 하고 남편의 입장을 내가 먼저 받아들여 주라는 겁니다. 내가 남편의 말에 무조건 동의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남편의 입장에서는 본인이 틀리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문이란 내가 놓치는 것을 자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는 비밀스러운 주문이 아니에요. ‘기도문을 외우면 병도 낫고 부부관계도 좋아질까?’ 이런 마음으로 기도문을 달라고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냥 주문을 외우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것은 수행이 아니라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그동안 제멋대로 살았다는 사실을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이라는 말씀이 정말 와닿았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치를 깨닫고 괴로움 없이 살겠습니다.”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한다는 말은 상대가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상대를 존중한다는 말은 상대가 옳고 내가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와 다른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나와 다른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우선 나한테 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상대를 높이느냐 낮추느냐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 사람은 나와 믿음이 다르구나’

‘저 사람은 나와 생각이 틀리네’

‘저 사람은 관점이 나와 다르네’

이렇게 생각하면 화가 날 리가 없습니다. ‘그 말은 틀렸어’, ‘그것을 말이라고 해?’ 이렇게 받아들이니까 짜증이 확 일어나는 겁니다.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 수행의 핵심입니다. ‘상대는 나와 다르다’ 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가면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제가 한반도의 평화를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뭐? 북한하고 평화롭게 지내자고? 저런 놈들은 본때를 보여주어야 해’ 하고 반박합니다. 그럴 때 ‘저런 미친놈이 있나!’ 하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고 이해하는 겁니다. 그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당장 발생하는 이익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나한테 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폭력적인 갈등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이런 자세를 가진다면 어떤 사람 하고도 대화를 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필요 없으면 대화를 안 해도 되고요. 이렇게 화가 나지 않는 상태에서 그냥 저 사람의 행동을 그대로 내버려 두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논쟁을 해도 괜찮고, 설득을 해도 됩니다. 대신 그에 따른 과보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예요.

살다 보면 ‘야, 너 그러면 안 된다!’ 하고 내가 잔소리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 입장에서는 반발을 하겠지요. 그럴 때 그 반발을 내가 받아들이면 됩니다. 어떤 행위를 하든지 반드시 거기에는 반작용이 생깁니다. 칭찬이든 비난이든 다시 나에게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칭찬만 돌아오기를 바라죠. 그것은 과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입니다. 그런 자세를 갖고 있다는 자체가 벌써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내가 괴로움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해 주신 겁니다.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라는 말은 상대를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렇게 했을 때 나의 괴로움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 후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내가 선택하면 됩니다. 상대에게 충고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본인이 선택을 하고 그 과보를 받으면 됩니다.”

“네,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 불교에서는 마음이라는 것이 없다고도 하며, 느낌을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 궁금합니다.

  • 서암 큰스님은 다중을 동원하는 것도 힘에 의한 폭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통일의병 수업 시간에 의병이 일제에 항거하며 총칼로 맞서는 내용을 배웠습니다. 정토회 통일의병은 수행자인데 불의에 항거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스님의 법문이 끝나고 곧바로 모둠별로 화상회의 방에 모여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마음 나누기 이후에는 희망하는 사람에 한해서 백중 천도재를 온라인 함께 지냈습니다.

밤 9시가 넘어서 수행법회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오늘도 긴 하루였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거사님들과 함께 산윗밭을 예초하고, 오후에는 SK에너지 초청으로 울산 SK본관에서 특강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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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하이

자비심이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에요. 그의 처지에서 그를 이해하는 마음이 자비심입니다. /// 기도문이란 내가 놓치는 것을 자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는 비밀스러운 주문이 아니에요. "

2023-08-29 19:08:52

김민주

큰애가 떠오르네요 다르다 새깁니다 감사합니다

2023-08-20 08:45:29

햇살

상대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가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존중하는 것, 자비심은 불싸이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처지에서 이해하는 것…음~어렵지만 연습할 필요가 충분합니다.

2023-08-15 14: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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