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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며칠 째 장마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아침 울력을 취소했습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오전 8시에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했습니다.
오늘은 2주에 한 번 외국인들을 위해 온라인 즉문즉설 강연을 하는 날입니다. 전 세계에서 280여 명의 외국인들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한국은 지금 비가 계속 와서 곳곳에 물난리가 나고 산사태가 나서 한 40여 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아직도 계속 비가 오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는 이런 기후변화로 인해서 홍수 피해를 겪은 지역도 있고, 미국의 남부나 서부 지역처럼 고온으로 고통을 겪는 지역도 있습니다. 물론 옛날에도 비가 오지 않아서 가뭄이 계속될 때도 있었고, 비가 많이 올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이런 현상이 옛날보다 훨씬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체감하고 있는 기후변화가 이 정도에서 끝날지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인간이 살기가 어려울 정도로 더 큰 변화가 올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 백 년간 기후변화의 추이로 봐서는 앞으로의 기후변화는 기후 위기라고 불릴 만큼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냥 자연의 현상인지 아니면 인간의 지나친 에너지 소비로 인해서 생긴 현상인지 논쟁이 되고 있지만,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인간이 탄소 배출을 지나치게 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자연현상이라면 우리는 거기에 적절히 대응하는 수밖에 없지만 인간의 인위적인 행위로 인해 생긴 현상이라면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가 필요합니다. 더 편하게 살기 위해서 취한 인간의 행동이 인간을 더 고통에 빠트린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해치는 행위를 ‘바보 같다’, ‘어리석다’ 하고 말합니다.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깨우쳐서 소비 수준을 줄여야 우리 후손들에게도 지속 가능한 삶이 보장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삶의 가치관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검소하게 살고 겸손하게 사람을 대하는 자세야말로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남도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오늘날 기후 위기의 시대, 갈등의 시대에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세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정성을 기울여 정원을 꾸며 놓았는데, 이웃집에서 개들을 데려와서 소변을 보게 하고 있다며 어떻게 해결책을 찾아야 할지 답답한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I am someone who really loves nature and on many levels including the beauty of Nature and in particular I love flowers. Last year, we bought a new home that was not in great shape, so we had a landscaper put in a lawn and flowers just to make it more beautiful. Our neighbors were really happy that we did this and they acknowledged us. But, this summer they are allowing their dogs to urinate on our newly landscaped lawn and property. There are four dogs that are particularly a part of this. Last weekend I got very sad about it and also was very angry, so I was talking to my husband and I said to him I wanted to find a Buddhist way to think about this. I'm wondering am I too attached to the garden? Should I allow it to be ruined? I'm really interested in your wisdom as a practicing Buddhist. What would be best for me and my neighbors?”
(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비롯해 여러 면에서 자연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 안에서 아름다움과 특히 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작년에 저희는 상태가 좋지 않은 새 집을 구입해서 더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조경사를 고용해 잔디와 꽃을 심었습니다. 이웃들이 정말 좋아해 주셨고 저희를 인정해 주셨어요. 하지만 이번 여름에는 이웃이 새로 조경된 잔디밭과 부지에 개들이 소변을 보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문제를 야기하는 개는 네 마리입니다. 지난 주말에 저는 이에 대해 매우 슬프고 화가 나서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불교적인 시각에서 방법을 찾아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정말로 정원에 집착하고 있는 걸까요? 그것을 망가지게 두어야 할까요? 저와 제 이웃을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 불교를 실천하는 스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네, 저도 꽃을 좋아해서 이해는 됩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든 화가 나고 슬퍼졌다면 그것은 본인의 문제예요. 수행이란 그런 모습을 봐도 화가 나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의 그런 모습을 허용할 건지 안 할 건지는 검토해 보고 자신이 결정하면 됩니다.
첫째, 정원이 완전한 개인 소유인지, 이웃과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인지를 먼저 점검해야 합니다. 우선 ‘나는 개가 이곳에 배변이나 배뇨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도 개를 좋아하지만, 정원에 배변이나 배뇨해서 정원을 망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고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혀 보세요. 그런데도 그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자기 의사를 고집한다면, 그럴 때는 방법이 없어요. 만약 이 정원이 전적으로 내 소유라면 ‘내 정원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하고 자신의 권리를 얘기하면 됩니다. 이것은 법에 보장된 권리이기 때문에 불교 수행자를 떠나서 시민으로서 주장할 수 있습니다. 불교 수행자는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권리를 주장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단호하지만 화내지 않고 웃으면서 이렇게 말을 하면 됩니다.
‘이곳은 저의 개인 소유이기 때문에 당신들의 개가 여기 들어와서 정원을 헤치는 것을 저는 원치 않습니다.’
만약 이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곳에 개가 들어올 수 없도록 울타리를 쳐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자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수행자는 화내거나 욕설하면 안 되는 것이지 권리를 주장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정원이 공동 소유라고 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권리를 주장할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원 가꾸기를 포기하든지, 개가 정원을 조금씩 망치지만 그래도 계속 가꾸어 나가든지, 이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개가 정원을 망치는 것만큼 나도 정원을 가꾸어 나가면 되지 않습니까? 저도 밭을 가꾸고 있는데 계속 풀이 납니다. 아무리 뽑아도 또 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수행자는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서는 안 됩니다. 풀이 나면 뽑고 또 뽑고 하는 것이 농사일입니다. 개가 똥을 누면 땅을 파서 묻는다든지, 오줌을 누어 잔디색이 노랗게 변하면 물을 듬뿍 주어서 씻겨 내려가게 한다든지, 농사를 지을 때 풀을 뽑는 것과 같은 관점에서 그냥 정원 가꾸기를 계속해나가면 됩니다.
만약 새나 야생동물이 정원에 똥을 눈다면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이웃집의 개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자꾸 기분이 나쁜 겁니다. 정원이 내 소유일 때는 강력하게 권리를 주장하거나, 그것도 안 되면 울타리를 치면 됩니다. 정원이 공동 소유일 때는 그냥 내버려 두거나, 도저히 내버려 두지 못하겠다면 정원 가꾸기를 계속하면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대응할 수밖에 없어요. 정원 때문에 또는 개 때문에 이웃과 다툰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Yes one, because in our weekly Dharma meeting this week we were talking about attachment. We were talking about how unhappiness can come from when we have expectations and when we're attached. So when I was thinking about the situation, I was thinking a lot about my own attachment. The things I can do with the neighbors or as you're saying fencing, but I guess that maybe on a deeper level I'm really wondering about my own attachment to this. I don't know if you would add anything based on that comment.”
(네, 이번 주 수행법회에서 집착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기대가 있을 때와 집착이 있을 때 불행이 어떻게 올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그 상황을 생각할 때 내 집착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웃과 함께 할 수 있는 것들, 아까 말씀하신 울타리 치는 것도 있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는 나 자신의 집착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점에 대해 덧붙여 주실 말씀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어떤 것을 원한다고 해서 그것을 ‘나쁘다’ 또는 ‘원하는 것이 없어야 된다’ 하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원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괴로워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입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데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내가 아무런 이야기를 안 해도 이웃사람들이 그곳에 개를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집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개가 들어오지 않기를 원한다면 이웃사람들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동의하도록 해야 합니다. 동의를 하면 문제는 끝이 납니다. 그러나 이웃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기분이 나빠진다면, 그것은 ‘동의해야 된다’ 하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자연스러움입니다.
이웃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때는 그냥 내버려 두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 똥을 내가 치우고 묻고 하면서 정원을 가꿔 나가면 됩니다. 그게 너무 힘이 든다고 생각한다면 울타리를 칠 수도 있습니다. 울타리를 칠 때는 이웃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면 됩니다.
‘나는 개가 이곳에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그것을 협조해 주지 않기 때문에 울타리를 칠 수밖에 없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고 울타리를 치면 됩니다. 그들이 기분 나빠하더라도 상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안 되니까 기분 나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너무 집착하면 또 고민이 생기게 됩니다. 법에 보장된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냥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면 됩니다. 그런 후 비난을 조금 들으면 됩니다. 일부러 관계를 나쁘게 할 필요는 없지만,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Thank you. I think you hit something very important, which is perhaps the fear of being criticized and I actually feel much lighter after hearing your words. Just that in listening to everything, a big takeaway for me is that my anger is my problem and that I can either act on it or let It go.”
(감사합니다. 스님의 법문이 아마도 비판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점을 짚으셨습니다. 법문을 듣고 나서 실제로 마음이 훨씬 가벼워진 것 같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얻은 가장 큰 교훈은 분노는 내 문제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스님께서 개인적으로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 믿는다면, 어떻게 그 목적을 깨달았거나 찾았나요?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두고 국내외에서 우려와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이 문제에 대한 불교적 접근 방식은 무엇일까요?
대화를 마치고 나니 약속한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다음 이 시간을 기약하며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곧이어 오전 10시 30분부터는 국제지부 회원의 날 행사에 온라인으로 참석했습니다. 국제지부 회원 130여 명이 화상회의 방에 모두 입장한 가운데 지부장, 지부법사님의 인사말에 이어 지회별 모둠 소개를 했습니다. 아시아, 호주, 유럽, 미국, 캐나다 등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국제지부 회원들의 활기찬 모둠 소개로 화상회의 방은 열기가 가득했습니다.
사전에 설문조사한 결과와 상반기 사업 보고를 통해 회원들이 어려움을 겪는 점이 무엇인지 충분히 경청한 후 스님과의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다섯 명이 사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문화와 정서가 다른 서양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스님의 법문을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문화와 정서가 다른 서양 사람들이 영어 불교대학에서 듣는 일부 법문이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가 반영된 예시를 들고 있어서 거부반응이 있다고 합니다. 문화와 정서의 차이 때문에 불법의 근본 핵심이 잘 전달되지 못하는 사례를 어떻게 개선하면 좋을까요? 특히 잔소리하는 마누라 이야기만 나오면 귀가 닫히고 법문이 귀에 안 들어온다는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대상에 맞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면 어떻게 중도를 실천해 나가야 할까요?”
“한국에서 정토회가 출발했기 때문에 한국적 문화를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시작한 창가학회는 세계적으로 알려졌지만 우리가 보기에 일본 문화가 굉장히 많이 배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시작한 불교를 받아들이다 보니 불교 안에는 인도의 전통문화가 많이 배어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믿고 있는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기보다는 대부분이 인도의 전통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 문화적 토대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또 중국을 거쳐서 한국에 불교가 들어오다 보니까 한국 불교 안에는 중국의 많은 문화적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특히 선불교는 중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인도 불교와는 또 다른 중국적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적 요소를 완전히 배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문화적인 문제 때문에 거부반응을 일으킨다고 한다면 그것을 최소화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한국말을 영어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그 예시를 다시 각 나라에 맞게끔 바꾼다는 것은 현재 정토회의 역량으로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라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만 해도 엄청난 일입니다. 예시를 각 나라에 맞게끔 바꾼다고 해서 널리 통용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부족한 점은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작용이 20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나머지 80퍼센트의 장점을 보고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나머지 20퍼센트를 개선해 나가는 노력이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번에 영어 불교대학을 한 차례 진행한 사람들이 모여서 의논을 한번 해보면 좋겠어요. 누군가 ‘미국에서는 어떤 예시문에 거부반응이 있다’ 하고 말했을 때 그 거부반응이 자기 문화를 고집해서 생긴 문제라면 그 사람이 자기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기 고집을 내려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 요소가 상대를 깨우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게 해서 중간에 그만두게 할 확률이 더 높다면 오히려 문화적 요소를 바꾸는 게 낫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다 검토해서 한꺼번에 다 못 고치더라도 다음 불교대학을 진행할 때는 가장 크게 문제 제기된 부분만이라도 하나씩 개선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수행자의 관점에서는 어떤 것이든 다 문화로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한국 것만 문화가 아닙니다.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자기 문화를 고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수행적으로는 어떤 문화이든 수용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됩니다.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수용한다면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사람이 초심자이기 때문에 거부반응으로 인해 중간에 공부를 그만둘 확률이 높다고 할 때는 초심자에 대한 고려를 어느 정도 해야 하겠죠.
‘중도’란 모두의 입맛에 맞춰주는 것도 아니고, 자기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상대에게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 사이에서 적절히 조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국 불교를 배우려면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게 필요하듯이 모든 것을 자기 입맛대로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지에 맞게끔 변화도 해야 합니다.
스님들이 입는 승복도 현지에 맞게끔 조금씩 변해 왔습니다. 가사를 걸친 것은 인도 옷이고, 장삼을 입은 것은 중국 옷이고, 그 안에 승복을 입은 것은 한국 옷입니다. 이렇게 인도 문화도 지키고, 중국 문화도 받아들이되, 그 안에 입는 승복은 한국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지금 제가 입고 있는 법복입니다.
그것처럼 정토회의 근본정신도 어느 정도 유지해 가고, 또 현지에 맞게끔 일부는 변화시켜 나간다는 관점을 갖고, 앞으로도 조금씩 개선해 나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한국-베트남 가정 아이들이 엄마 나라의 자긍심을 키울 수 있도록 문화교류센터와 같은 단체와 협력해서 일을 추진해 봐도 될까요?
해외에는 으뜸절이 없어서 회원들이 모일 수 있는 구심점이 없습니다. 본인의 집을 ‘으뜸개인법당’으로 꾸려서 오프라인 모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영어를 모르는 중국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교재로 불교대학을 진행하면 좋을까요?
청소년 자녀를 가진 정토회 회원들의 공통적인 수요를 감안할 때 정토회 안에서 청소년들의 봉사활동 기회를 만들면 어떨까요?
궁금한 내용에 대해 답변을 다 한 후 12시가 넘어서 국제지부 회원의 날 행사를 모두 마쳤습니다. 여러 가지 질문과 답변을 통해 개척 분야인 세계 전법을 어떤 관점으로 해나가야 할지 알 수 있었습니다.
오후에도 비가 세차게 내렸습니다. 스님은 농사일을 쉬고, 두북 수련원을 찾아온 손님과 오후 내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에는 원고 교정과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한 후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아침에 비가 그치면 농사일을 한 후 오후에는 공동체 법사단과 회의를 하고, 더위가 한풀 꺾인 저녁에는 공동체 법사단과 산윗밭에서 풀뽑기 울력을 함께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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