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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도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농사일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8시부터 생방송 법회가 있기 때문에 스님은 여느 날보다 서둘러 울력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화단과 텃밭 주변에 풀을 예초기로 깎았습니다. 오늘은 전기충전식 예초기를 시험해 보았습니다.
“기름을 넣는 예초기보다는 힘이 약하네요. 그래도 화단이나 밭 사이 풀을 깎는 데는 유용하겠어요.”
모든 것은 그 나름대로 쓰임이 있나 봅니다.
한 시간 동안 구석구석 풀을 깎고, 풀 조각을 뒤집어쓴 예초기와 앞치마, 장화를 깨끗이 씻었습니다.
어제 손님을 접대하고 난 의자와 책상도 깨끗이 닦았습니다.
며칠 전 퇴비를 뿌려놓은 뒤란 텃밭에 열무씨앗도 심었습니다.
1시간 30분 동안 알차게 울력을 하고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오전 8시부터 영어 불교대학 학생들과 함께 하는 생방송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미국, 캐나다, 인도네시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홍콩 등 전 세계에서 영어로 진행되는 정토불교대학을 다니고 있는 37명의 외국인들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We will do three seated bows to Ven. Pomnyun Sunim to request his words of wisdom followed by a brief meditation.”
스님에게 법문을 청하는 삼배를 한 후 잠시 명상을 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정토불교대학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강조했습니다.
“정토불교대학을 다니는 여러분들은 불교에 대한 기본적인 이론도 공부해야 하지만 그것을 내 삶에 적용해서 실제로 괴로움이 줄어드는 경험을 해봐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목표는 천국에 태어나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인간관계가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괴로움 없이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없는 것을 ‘니르바나’라고 표현합니다. 니르바나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 있다면 여러분은 붓다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 대해서 이론과 지식은 많이 아는데 내 삶은 니르바나에 가까이 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냥 지식을 많이 쌓는 것에 불과합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지식을 기초로 해서 통찰력을 갖는 것입니다. 어떤 편견을 가질 때 번뇌가 생깁니다. 통찰력을 갖게 되면 번뇌가 사라집니다.”
정토불교대학을 다니는 목표를 분명하게 알려준 후 학생들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학생들은 ‘실천적 불교사상’ 과목을 배우고 있는데 지난주까지 10주 차 과정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누구든지 수업 중에 궁금함이 있었던 내용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스님의 법문 중에 술 먹는 남편에게 술을 더 주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In one of the Dharma talks, you used an example of a wife nagging her alcoholic husband to stop drinking and stating that she should give him more alcohol. And yet the Fifth Precept in Modern Society is to refrain from using intoxicants that cloud the mind. So my question is, wouldn’t giving more alcohol to an alcoholic be classified as knowingly causing harm to another person? How can it be reconciled that we should not cause ourselves any kind of mental confusion or physical debilitation by consuming intoxicants while encouraging someone else to do that exact thing?”
(불교대학 법문 중 남편이 술을 마시지 못하게 잔소리하는 아내 예시를 들어주셨는데요. 스님은 부인이 남편에게 더 많은 술을 주어야 한다고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나 오계에서는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중독성 물질을 취하지 말라고 제시되어 있습니다. 음주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술을 더 주는 것은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지 않나요?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거나 육체를 약화시키는 중독성 물질을 섭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누군가에게 그와 정반대의 행동을 권장하는 것이 어떻게 조화롭게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까요?)
“술을 먹으면 몸에 열기가 나고 마음이 들뜨고 흥분이 됩니다. 마음이 흥분되니까 감정을 솔직하게 내어놓는 장점도 있지만, 감정적으로 행동하기가 쉽습니다. 욕설을 하거나 큰소리를 치거나 또는 폭력적 행동을 합니다. 운전을 하게 되면 사고를 낼 확률도 높아집니다. 또 술을 많이 먹으면 건강을 해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들뜨게 하고 흥분하게 하는 음식, 특히 술을 먹는 행위는 수행자가 삼가야 할 행위입니다.
술은 안 먹는 게 제일 좋습니다. 하지만 금지 품목은 아닙니다. 혹시 술을 먹더라도 마음이 흥분되거나 취하도록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음료수나 음식 수준으로만 먹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에요.
물론 상대도 그렇게 하면 좋습니다. ‘건강에 좋지도 않고 사고가 날 위험도 있으니까 술을 먹지 마라’ 하고 말했을 때 상대가 ‘네, 알겠습니다’ 하면 아주 좋은 일이에요. 그런데 상대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겁니다.
첫째, 헤어지는 방법이 있습니다. 헤어지면 더 이상 고민할 것이 없지요. 둘째, 부모 자식 관계이거나 부부 관계이거나 어떤 특수한 관계라서 헤어질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그걸 갖고 서로 다투게 됩니다. 상대는 왜 술을 먹을까요? 술을 과다하게 먹을 때는 대부분 스트레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완전히 습관화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스트레스를 받고 답답해서 술을 먹거나, 술을 먹는 것이 습관화되었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조절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감옥에 집어넣는다든지, 병원에 입원시킨다든지, 강제로 술을 먹지 못하게 할 수 있다면 술 먹는 버릇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술을 마신다는 이유로 강제로 가두거나 입원시킬 수는 없어요. 이슬람 국가에서는 그런 일이 가능하지만 오늘날 민주화 된 한국 사회에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술을 못 마시게 설득할 수도 없고, 강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헤어지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이런 경우는 달리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로 계속 갈등하며 싸우는 게 좋을까요? 계속 싸우면 우선 내가 괴롭습니다. 상대방도 스트레스를 더 받습니다. 결과적으로 상대방은 술을 더 찾게 됩니다. 술을 못 마시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방이 술을 마실 때마다 나까지 괴로운 게 좋을까요? 아니면 상대방이 술을 마시더라도 나는 괴롭지 않은 게 더 좋을까요? 어차피 그런 남편과 같이 살 수밖에 없다면 괴롭지 않게 사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래, 술을 마실 수도 있지.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술이라도 마셔서 스트레스를 푸는 게 어쩌면 건강에 더 좋을지도 모르지’
이런 마음을 내면 괴롭지 않습니다. 음주로 스트레스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어쩌면 그 사람에게는 술이 보약일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제가 술을 준비해 주는 마음을 내어보라고 말한 겁니다. 그런데 스스로 알아서 술을 마시고 들어오니까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혹시 술을 안 마시고 들어오면 내가 준비해서 술을 주자는 겁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면 상대가 술을 마셔도 나는 괴롭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람하고 살아도 내가 괴롭지 않은 것입니다. 이해하셨나요?”
“Yes.”
“모든 사람들에게 술을 먹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남편이 술을 마셔서 괴롭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때 주로 저를 찾아옵니다. 술을 못 마시게 할 수 없으면 대부분 괴로움에 빠지게 되는데, 저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괴롭지 않게 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이 나빠지지 않느냐고 걱정하지만 술을 못 마시게 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건강은 어차피 나빠지는 거예요. 부부간에 갈등이 없으면 스트레스를 그만큼 적게 받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남편이 술을 조금이라도 덜 먹게 됩니다. 술을 덜 먹으면 건강에도 도움이 됩니다.
핵심은 남편이 술을 많이 먹느냐 적게 먹느냐가 아닙니다. 내가 스트레스 없이 어떻게 사느냐가 핵심입니다. 실제로 내가 스트레스를 덜 받으면 남편이 술을 더 적게 마시게 하는 효과가 납니다.”
“Yes. Thank you. That helped me better understand what you spoke about in the Dharma talks.”
(네, 감사합니다. 법문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질문 하나를 더 받았습니다.
“명백히 깨달음은 남성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여성은 스님이 될 수 없다고 금지했나요? 이 문제에 대해 스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스님은 부처님이 여성의 출가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졌는지 최초로 여성의 출가를 허용한 사례를 자세히 이야기한 후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곧바로 오전 10시부터는 경전대학 학생들과 함께하는 즉문즉설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전국 으뜸절에서 진행된 경전대학 학생들의 실천 활동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본 후 몇몇 분들의 소감을 들어 보았습니다.
스님은 소감을 경청한 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운 다음에는 직접 실천하고 체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정토회에서 진행하는 깨달음의 장, 나눔의 장, 명상수련, 인도성지순례 등 체험 프로그램에 대해 소개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수업 중에 궁금했던 내용을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학생들은 대승불교의 화엄사상을 배우면서 사사무애법계가 무엇인지 공부했는데요. 이에 대해 세 명이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은 먼저 사사무애법계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습니다.
“원효대사가 파계를 하여 사사무애법계를 이루었다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조개가 줍고 싶어서 일부러 물에 들어간다면 그건 욕구를 쫓아가는 일이지 수행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귀족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면 그 신분에 맞는 수준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데, 굳이 파계를 하면서 중생을 구원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원효대사가 처음으로 경전을 읽고 공부를 했을 때는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지 구체적으로 중생을 구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는 것처럼 경전을 공부하면서 ‘중생을 이렇게 구제해야 한다’, ‘중생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한 거예요. 대승불교는 중생을 구제하는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효대사는 중생을 불쌍히 여겨 자비로 섭수해야 하고, 자기를 헌신해서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사상적 공부만 한 겁니다.
누가 더 불쌍한가를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신라시대에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천민들이었습니다. 원효대사는 천민들이 불쌍하니 그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을 뿐 본인은 귀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천민 동네에 갈 일도 없었어요. 오히려 그런 곳에는 가면 안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문화가 그랬어요. 귀족이니까 그런 곳에 가면 안 되고, 스님이니까 그런 곳에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신라시대의 불교는 귀족 중심의 불교였기 때문에 중생들과는 동떨어진 지식 불교였습니다.
대안대사는 그런 생각에 갇힌 원효대사를 데리고 천민들이 사는 동네에 간 겁니다. 원효대사는 거부감이 있었지만 천민들은 불쌍한 사람들이니까 그들이 사는 동네에 가는 것까지는 감수를 했어요. 대안대사라는 위대한 스승이 가니까 자기도 거기까지는 따라간 거죠. 그러나 대안대사가 술집에 들어갈 때는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러자 대안대사가 뒤돌아서 나가려고 하는 원효대사의 등에 대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여기 마땅히 구제받아야 할 중생을 두고 어디에 가서 별도의 중생을 구제한단 말인가?’
원효대사가 돌아와서 생각을 해보니 천민 동네에 사는 사람들과 그 술집의 주모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두고 ‘나는 여기에 오면 안 된다’ 하며 외면을 한 자신이 중생 구제에 대한 온갖 이론을 말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걸 자각하게 된 겁니다. 생각과 말로만 중생구제를 외쳤지, 정말 구제받아야 할 사람을 만났을 때는 도망가는 자신을 발견한 거예요.
‘내가 이론에만 밝고 사상으로만 이해했지 실제 행동으로는 안 되는구나’
이렇게 깨닫고 나서 원효대사는 승복을 벗고 활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원효’를 숨기고 어느 절에 들어가서 부목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부목 생활을 하면서 그곳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자기보다 후배들인 데다가 지식이 그리 깊지가 못했어요. 원효대사는 비록 승복을 벗고 부목으로 지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온갖 사상에 대해 잘 아는 원효였던 겁니다. 그런데 스스로는 그 모순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다른 스님들이 공부하는 얘기를 듣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건 아니다’ 하고 말을 내뱉고 말았습니다. 결국 신분이 들통날 상황이 되니까 원효대사는 도망을 갈 준비를 했습니다.
그곳에는 방울스님이라는 천대받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신분도 천민이고, 몸도 불편하고, 행동도 품위가 없으니까 절에 있는 다른 스님들도 방울스님을 무시하고, 심지어 절에 있는 하인들도 방울스님을 무시했어요. 그런데 원효대사는 방울스님을 존중했습니다. 방울스님을 불쌍하게 여겨서 존중한 것이지, 방울스님이 어떠한 경지의 수행자인지를 꿰뚫어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원효대사가 절을 도망쳐서 나가려는데 그때 방울스님이 방문을 열더니 ‘원효, 잘 가시게!’ 이렇게 한 마디를 던진 겁니다. 그제야 원효대사는 깨달았습니다. 자기는 그저 불쌍해서 방울스님한테 잘해줬지만, 방울스님은 자기가 원효대사인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예요. 원효대사는 방울스님이 어느 정도의 수행력을 가진 사람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지만, 방울스님은 원효대사가 신분을 숨기고 부목생활을 하고 있다는 걸 간파하고 있었던 거죠.
그때 원효대사는 자기가 앞서 깨달았다고 느낀 것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불쌍한 천민들을 외면한 걸 반성하고 앞으로는 천민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방울스님도 불쌍히 여겨서 자기가 구제를 하겠다고 한 겁니다. 그러나 방울스님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겉모양만 보고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구제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지, 실제로는 방울스님이 자기보다 수행력이 훨씬 더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방울스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방울스님은 나에 대해 훤히 알고 있었던 거예요.
이때 원효대사는 대안대사가 한 말의 의미를 새롭게 깨치게 되었습니다. ‘여기 마땅히 구제받아야 할 중생’이라는 말은 천민들을 뜻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나는 여기에 오면 안 된다’ 하며 그곳을 부정한 곳이라고 구분 짓고, 옳고 그름을 구분 짓고, 깨끗하고 더러움을 구분 짓는 나의 어리석은 마음이 바로 ‘여기 마땅히 구제받아야 할 중생’이라는 말의 의미였던 거예요. 그 어리석은 마음을 보고 깨치는 것이 곧 중생구제라는 거죠. 과거에 대안대사의 말을 듣고 자기 나름대로 반성은 했지만, 여전히 중생과 부처를 구분하고, 세간과 출세간을 구분하고, 내가 저 사람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일으켰던 겁니다. 그런데 방울스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중생이 마음 밖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구분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어리석은 내 마음이 곧 중생이라는 걸 깨달은 거예요. 중생심을 알아차리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게 곧 중생구제였던 겁니다.
이것이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유심(有心) 사상’입니다. 중생이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다는 겁니다. 부처도 마음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 생각 어리석은 마음을 내면 중생이고, 한 생각 밝은 마음을 내면 그게 곧 부처입니다. 원효대사는 이것을 깨우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시비분별하는 마음을 놓아버리고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깨달은 내용은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을 나누는 깨달음이었다면, 이제는 깨달음이니 깨닫지 못함이니 하는 것도 떠나버린 깨달음을 증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천민촌에 들어갈 때도 그들을 구제하러 간 것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구제할 게 없었습니다. 내 마음이 맑아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그냥 숲이었고, 그냥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이 불쌍하다느니 구제해야 한다느니 이런 생각을 이미 떠나버린 상태에서 천민촌으로 들어간 겁니다.
그렇게 천민촌에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그들이 나를 보면서 ‘유명한 원효대사가 왔다’ 하고 분별심을 냈습니다. 내가 그들을 외면한 것은 내 문제지만, 그들이 나를 떠받드는 건 내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들은 어리석은 분별심으로 나를 그렇게 대우하는 것이니까요. 이때 ‘나는 너희들과 친구를 하러 왔는데 너희가 나를 안 받아주는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들을 탓하고 있는 겁니다. ‘저 사람들이 왜 나를 안 받아줄까’ 하고 생각하면 그들이 문제가 되지만, 일체유심조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면 이 역시 나의 문제입니다. 즉, 나에게 붙어 있는 ‘유명한 원효’가 그들에게 장애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명한 원효’를 버리고 나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이죠. ‘유명한 원효’라는 껍데기를 버리는 행위가 파계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저 승복을 벗고 다니는 것으로는 부족했고, 천민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파계였습니다. 파계를 하면 사람들이 완전히 배제를 하기 때문에 기존에 가진 기득권을 한 번에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
물론 이러한 동기를 갖고 원효대사가 그러한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하는 건 우리가 원효대사의 삶을 보고 그렇게 해석한 것이지, 실제로 원효대사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누구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결과적으로 원효대사의 파계는 천민들과 친구가 되는 데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원효대사가 파계를 함으로 인해 기득권 사회에서는 원효를 아예 지워버렸고, 천민들은 그를 친구로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이러한 경지를 화엄경의 표현을 사용하여 말한다면 ‘사사무애법계’라고 하는 겁니다.
원효대사가 승복을 벗고 어느 절에 가서 보살행을 한 것은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의 경지이고, 파계를 하여 천민들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어 간 것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의 경지에 비견될 만합니다. 이 중에 어떤 것이 낫고 못한 건 없습니다. 굳이 구분을 한다면 사법계(事法界), 이법계(理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이렇게 네 가지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길을 갈 것인가는 각자 선택을 하면 됩니다.”
“네, 이해가 되었습니다.”
“원효대사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 승려의 신분을 가지고 활동을 할 수도 있었고, 승려의 신분을 버리고 활동을 할 수도 있었고, 귀족으로 활동을 할 수도 있었고, 귀족의 신분을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원효대사는 신분을 버리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원효대사는 물들지 않는 자기 자신을 꿰뚫어 봤기 때문에 파계를 행함에 걸림이 없었던 것 같네요. 정작 저는 파계라는 울타리에 갇혀서 제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계속해서 다양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 외에도 즉석에서 현장 질문도 받았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약속한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다음 달에는 경전대학 졸업식이 있습니다. 스님은 앞으로 경전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다양한 실천 활동과 수련 프로그램에 계속 참여할 것을 당부하며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오후에는 비가 계속 내렸습니다. 스님은 비를 피해 오후 내내 실내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에는 원고 교정을 보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90여 명의 대중들과 함께 풀 뽑기 울력을 함께 한 후 행복운동특별본부 리더십 연수에 참석해 온라인으로 즉문즉설을 하고, 오후에는 주말 온라인 명상 회향식 법문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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