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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도 스님은 농사일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산밑밭에서 채소를 수확했습니다. 토마토, 호박, 오이, 가지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고랑을 한 번 지나갔다가 나오면 바구니에 싱싱한 채소가 가득 담겼습니다.
“자, 오늘도 풀을 뽑으러 갑시다.”
스님은 요즘 연일 풀 뽑기를 하고 있습니다. 장마가 오고 비가 내리니 하루가 멀다 하고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습니다. 오늘은 저 멀리 중점 마을에 있는 밭에 풀을 뽑기로 한 날입니다. 마을 어르신이 농사를 짓지 못해 빌려준 땅인데 두북 수련원과 거리가 멀어서 자주 풀을 뽑으러 가지 못했습니다.
밭의 절반은 도라지밭이고, 절반은 땅콩밭입니다. 그런데 땅콩밭은 땅콩이 거의 안 보이고 풀만 우거져 있었습니다. 며칠 전 스님과 농사팀이 예초기로 벨 수 있는 풀은 베어두었지만, 그래도 땅콩보다 풀이 많았습니다. 스님은 대중이 오기 전에 일감을 확인했습니다.
“하나, 둘, 셋…. 총 열 일곱 고랑이네요. 한 고랑에 두 명씩 붙으면 34명, 도라지밭과 땅콩밭 밭이 두 개이니까 68명, 나머지는 반대쪽에서 풀을 뽑도록 하면 되겠어요.”
그리고 대중이 올 때까지 낫으로 큰 풀을 슥슥 베어 냈습니다.
스님 혼자서 풀을 베기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봉사자들이 모두 도착했습니다. 스님과 농사팀 몇 명의 힘으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서 어제 긴급히 대구경북지부와 부산울산지부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소식을 듣고 90여 명의 봉사자들이 달려왔습니다. 20여 명은 두북 수련원에서 풀을 뽑고, 나머지 70여 명이 밭에 집결했습니다.
각자 호미를 한 자루씩 들고 서서 스님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왜 긴급히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는지 설명했습니다.
“농사를 잘 지었으면 이런 일이 없을 텐데, 농사를 제대로 못 지어서 여러분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밭에 풀이 무성해진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고 토론을 해보니까 농사팀 행자님들은 스님이 땅을 너무 많이 받아와서 그렇다고 말해요. 한마디로 일손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 있는 밭을 살펴보면 어르신 혼자서 농사를 지어도 풀이 거의 없거든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농사팀 행자님들이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토론을 하다 보니 제가 땅을 많이 받아온 책임인 것 같아서 제가 문제를 해결해야겠다 싶어서 여러분에게 도움을 요청한 겁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명심문을 세 번 외친 후 다 함께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만물에는 다 제자리가 있습니다.”
고랑 하나마다 두 사람이 양쪽으로 붙어서 풀을 뽑아 나갔습니다. 밭 가운데에 일렬로 서서 절반은 땅콩밭 쪽으로 풀을 뽑으며 전진하고, 절반은 도라지밭 쪽으로 풀을 뽑으며 전진했습니다.
“도라지와 땅콩을 제외하고 나머지 풀은 싹 다 뽑아주세요!”
중간중간에 스님이 큰 목소리로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어제 비가 왔기 때문에 풀을 뽑으면 뿌리에 흙이 주렁주렁 붙어 있어요. 그래서 풀을 뽑고 나서 흙을 잘 털어 주셔야 해요.”
억센 풀을 뽑다 보니 땅콩도 같이 뽑히려고 했습니다. 그럴 때는 낫으로 풀을 베어 주었습니다. 땅콩이 뽑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풀을 뽑아야 했습니다. 풀을 뽑은 다음에는 땅콩이 쓰러지지 않도록 주변에 흙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울력을 시작한 지 30분이 지났을 무렵 향존 법사님이 목탁을 크게 세 번 쳤습니다.
“동작 그만! 잠시 명상하겠습니다.”
농사일을 할 때도 깨어있는 연습을 하기 위해 30분마다 목탁 소리가 울렸습니다. 목탁 소리가 나면 모두 동작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호흡 알아차림을 했습니다.
1분이 지나고 다시 목탁 소리가 울리면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스님 바로 옆에 일하면서도 스님이 함께 일하는지 모르는 분도 있었습니다.
“스님은 어디 계시노?”
“바로 앞에 계신다.”(모두 웃음)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스님 없을 때 스님 욕 좀 하세요.”(모두 웃음)
뽑은 풀을 고랑에 수북하게 쌓아놓으면 거사님들 몇 분이 풀을 밭둑으로 옮겼습니다. 그냥 두면 비가 올 때 다시 그 자리에 풀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풀을 뽑기 시작한 지 한참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땅콩과 도라지, 풀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풀은 두고 땅콩하고 도라지만 뽑으세요!” (웃음)
따가운 아침 햇살이 비치는 가운데 밭에는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거사님 한 분은 판소리와 민요를 아주 멋들어지게 불러 주었습니다. 다시 30분이 경과하고 목탁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잠시 알아차림을 한 후 다시 풀을 뽑다가 온몸이 땀에 젖었을 무렵 수박이 참으로 나왔습니다.
“참 먹고 합시다.”
수박을 한 입 베어 물자 갈증이 싹 사라졌습니다. 땀에 흠뻑 젖은 채 먹는 수박의 맛은 일품이었습니다.
수박을 다 먹고 나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땅콩! 땅콩! 땅콩!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큰 목소리로 파이팅을 하고 다시 밭으로 들어가 풀을 뽑았습니다.
“오늘 다 못 끝내면 집에 못 가요.” (웃음)
스님의 농담에 손놀림이 점점 빨라졌습니다.
땅콩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풀이 빼곡했던 밭이 훤해지면서 두둑마다 땅콩만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사람의 힘이 대단한 것 같아요. 풀밭이 땅콩밭이 되었어요!”
대중들은 풀밭이 땅콩밭으로 변한 모습을 보고 모두 감탄했습니다. 울력이 거의 끝나갈 무렵 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양해를 구했습니다.
“저는 9시부터 행복운동본부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해야 하는데 지금이 9시가 넘었어요. 먼저 일어나서 가볼게요. 마무리까지 못하고 가서 죄송해요.”
스님은 서둘러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샤워를 하고 가사와 장삼을 수한 후 오전 10시 20분에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했습니다.
행복운동특별본부는 9시부터 ‘리더십’을 주제로 모둠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모둠 토론을 통해 각자의 자리에서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모자이크 붓다를 만들어가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부 프로그램은 스님에게 궁금한 점을 묻고 답하면서 리더십을 함양하는 시간입니다.
먼저 모둠 토론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모둠별로 어떤 리더십을 발휘할 것인지 재미있고 다양한 의견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발표가 끝나고 대중이 법문을 청하자 스님은 반가운 얼굴로 인사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발표한 내용들을 모두 잘 들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저는 자원봉사자 70명과 함께 두 시간 동안 풀을 뽑았습니다. 저는 자원봉사자들보다 한 시간 일찍 일을 하다 보니 세 시간 동안 풀을 뽑았어요. 그래서 지금 육체적으로 좀 피곤한 상태입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풀을 뽑고 있는 동안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서 모둠 토론도 하고 발표도 했는데, 성과가 좀 있었어요? 이렇게 반갑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그럼 대화를 나눠봅시다.”
이어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여섯 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하고, 두 명이 건의사항을 이야기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어르신을 찾아서 돕는 활동을 하고 있는데 혼자 사는 친정 엄마 생각이 자꾸 난다며 어떻게 관점을 잡아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JTS 복지 사각지대 어르신 발굴 활동을 할 때 열악한 친정엄마 집이 생각이 나고, 혼자 사시는 현실이 생각납니다. 엄마께는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고 먹거리나 일상을 세심하게 살피지 못하는데, 복지 사각지대 어르신께는 여러 번 전화를 드리고 필요한 것들을 물어보고 복지관이나 주민센터에서 복지혜택을 알아봐 드리는 활동을 하니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어머니께 여쭤보면 ‘그런 지원 별로 필요 없다’ 하시고, 오히려 제가 자주 방문해 주길 원하시지만 해야 할 일이 많이 보이니 잘 가지 않게 됩니다. 부모님도 잘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복지 사각지대 어르신을 발굴하고 보살피며 돕는 일을 하는 게 위선적으로 느껴져서 불편합니다. 제가 어떻게 관점을 잡고 활동을 해야 할까요?”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비교하면서 어떤 일을 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내 아이도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서 남의 아이를 돌보느냐?’, ‘내가 내 집도 제대로 청소를 안 하면서 남의 집을 청소해 주냐?’, ‘우리나라에도 가난한 사람이 많은데 내가 남의 나라 사람을 돕느냐?’ 이렇게 관점을 가지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어떤 것이든 한 번 정도만 해보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계속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부부 동반으로 모임에 나가면 이런 경우가 많아요. 집에서 남편과 단 둘이 살 때는 남편이 차 문을 열어 주거나 물건을 들어주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부부 동반 모임에 가면 남편이 다른 여인을 위해서 차 문을 열어줄 때도 있고, 물건을 들어줄 때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아내는 기분이 팍 나빠집니다.
'저 인간이 나한테는 차 문도 한 번도 안 열어주고, 물건도 한 번 안 들어주더니 딴 여자한테는 엔간히 잘하네!'
이런 생각이 들면서 화가 납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남편이 이중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상황은 일회성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리고 평소에 연습이 안 되어 있으면 지속이 안 됩니다. 맏며느리가 시어머니 모시고 살면서 늘 밥 해주고 청소해 줘도 그것이 일상화되어 버리면 시어머니는 며느리한테 고맙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자식들도 부모가 늘 돌봐주면 부모에 대해서 고맙다는 생각이 없어져 버려요.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니고, 몰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일상화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둘째 며느리나 셋째 며느리가 명절에 맛있는 것도 사 오고 용돈도 드리면 시어머니는 둘째 며느리와 셋째 며느리만 칭찬합니다. 그러면 맏며느리가 섭섭한 마음이 들죠.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시어머니가 사람을 차별해서 그런 게 아니고 인간의 심리가 그렇게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자가 내 가족만 너무 돌본다면 내 가족에 집착하는 것이고, 내 가족이라고 돌보지 않으면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수행자로서 나와 남에 대해 균형을 잡을 수가 있을까요?
질문자가 남을 돌보지 않고 자기 부모를 좀 지나치게 돌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흉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는 자기 가족을 우선적으로 돌보는 것이 인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을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은 혼자 사는 할머니의 형편이 내 어머니의 형편보다 더 열악한 경우 내 어머니를 돌보는 일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우리 집도 어려운데...’ 하는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열악한 곳을 지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외국에 가서 구호 활동을 할 때도 ‘한국은 내버려 두고 왜 외국에 지원하느냐?’ 이렇게 비교하면 안 돼요. 아무리 가난한 나라에서 구호 활동을 하더라도 그 사람이 쌀이 있는데도 지원을 하거나, 한국에는 더욱 쌀이 부족한 데도 지원을 안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한국이 더 열악하다면 한국을 우선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한국이기 때문에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더 열악하기 때문에 지원하는 겁니다.
그것처럼 만약 내가 돕는 곳보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더 어렵게 산다면,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를 돕는 것은 개인사를 넘어서서 공인으로서 도와도 됩니다. 이런 경우는 가족이 아닌 남이라 해도 도울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돕는다는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그러니 어느 것이 더 열악한지 비교해 보고 생각하면 돼요. 복지 사각지대를 돕는 활동을 하다가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우리 어머니도 이런 어려움이 있나?’ 해서 연락해 보니까 괜찮다고 하면 도울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깜빡 놓쳤는데 우리 어머니도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이 일을 계기로 어머니를 도와주는 계기가 되겠죠. 또 이런 활동을 하다 보니까 ‘우리 부모님이야말로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분이다’ 하고 판단이 되면 이 활동을 그만두고 시댁이나 친정댁에 가서 부모님을 돌봐도 괜찮습니다. 이런 경우는 내 부모님을 돌보는 것이 사적인 영역이 아니라 정토회 안에서 본인의 역할이 되는 겁니다. 질문자는 봉사하는 시간에 부모님을 돌보는 일을 해도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부모님이 더 열악한 상황이어서 ‘우리 부모님도 내가 못 도와주는데 이런 집에까지 가서 내가 도와줄 필요가 있나?’ 이런 생각이 든다면 안 도와줘도 됩니다. 정말로 내 부모님보다 더 나은 처지라면 그런 분은 지원 대상에서 빼도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여러분이 봉사를 가는 곳이 내 집보다 더 열악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20여 년 전 저희 아버님도 시골에서 혼자 사셨어요. 가끔 들여다보면 아버님의 삶이 굉장히 열악했습니다. 그런데 출가한 승려가 아버지를 돌보면 ‘자기 부모만 돌본다’ 하고 바라보게 되잖아요. 그래서 이웃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웃 노인들도 저희 아버님처럼 어렵게 사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이분들이 내 부모라면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해 봤습니다. 저는 출가를 했기 때문에 내 부모를 일부러 외면하는 게 아니라 평등성의 원칙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내 부모이기 때문에 돕는 것은 개인으로서는 괜찮지만 저처럼 공인으로 사는 사람은 평등성을 지켜야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내 부모이기 때문에 돕는 것이 아니라 이 지역 노인들을 모두 도와주면서 그 속에 부모님도 포함시켰습니다.
이렇게 봉사활동을 통해 가족에게 죄스러움을 가질 게 아니라 그동안 외면했던 가족에게 오히려 관심을 갖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또 가족보다 더 열악한 조건에 놓인 분들을 돕는 것이기 때문에 가족에게 미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부모나 가족들은 섭섭해서 ‘제 부모는 놔두고 무슨 남을 돕느냐?’ 하고 말할 겁니다. 그러나 항상 ‘부모님보다 더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기 때문에 돕는다’ 하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어르신들을 도우면서 저희 부모님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균형 있는 자세를 갖고 해 보겠습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새로 지원 담당이 되었습니다. 이미 잘 정착되어 있는 행복시민모임에 참석해 보니 시민들보다 제가 더 많이 모르고 있어서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행복시민모임에서 한 분의 언행에 불편함을 느껴 모임을 중단하는 시민들이 있습니다. 그분을 강퇴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시민모임을 운영해 나가야 할까요?
행복시민모임에서 회의를 할 때 방향을 제시하면서 적절하게 의견을 수렴하는 게 어렵습니다. 좀 더 지혜롭게 회의를 진행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해 저항 행동을 하고 싶습니다. 어떤 관점을 가지고 실천에 옮겨야 할까요?
행복시민모임에서 도움을 주고 있는 가정에서 중2 아이가 투신자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친인척도 없이 아이의 장례를 치러야 해서 행복시민모임이 상주처럼 장례식을 함께 해주었습니다. 살 길이 막막한 가정을 위해 앞으로는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할까요?
즉문즉설을 마치고 나서 제안 사항도 두 가지가 나왔습니다.
10년 동안 정토회 활동과 직장생활, 가정생활을 병행하면서 달려왔습니다. 요즘은 과부하가 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 년에 한 번은 휴가 제도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시민모임에서 캄보디아 노동자분들과 역사기행을 다녀왔는데 평가가 좋습니다. 세계전법 차원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행복학교를 실험적으로 개설해 보는 것은 어떤가요?
여러 가지 의견들을 수렴한 후 12시가 다 되어서 행복운동특별본부 리더십 연수를 마쳤습니다.
오후가 되자 뙤약볕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낮 기온이 31도를 넘었습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옷에 땀이 흠뻑 젖었습니다. 스님은 무더위를 피해 실내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오후 2시에는 내년 초에 진행할 예정인 인도 성지순례 준비 회의를 한 후 오후 3시 30분에 다시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했습니다. 지난 2박 3일 동안 온라인 주말명상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화상회의 방에 입장한 가운데 회향식을 시작했습니다. 참가자들은 묵언을 하며 호흡과 감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보았습니다. 수련을 마무리하면서 먼저 각자 느낀 점을 서로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표로 10명이 선정되어 소감문 작성한 것을 발표했습니다.
소감문 발표를 마친 후 참가자들은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명상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강조해 주었습니다.
“소감문 발표를 잘 들었습니다. 지난 2박 3일 동안 편안하게 명상을 잘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우리는 항상 바쁘게 생활하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맞닥뜨리는 현실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괴로워하며 스트레스를 쌓아갑니다. 명상은 이런 육체적 과로와 정신적인 과로를 해소하는 방법입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두고 한가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쉬운 일이지만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래는 편안하게 있는 것이 쉬운 일인데 우리는 힘들다고 하면서도 생각과 행동을 멈추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생각과 행동을 멈추고 ‘쉼’을 찾아가는 것이 명상입니다.
그러나 명상을 해보면 명상이 제대로 안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꾸준히 연습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흔히 말하는 연습이란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를 쓰면 피로와 스트레스를 가져옵니다. 애쓰지 않으면서도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 명상입니다.
앞서 소감문을 발표할 때 명상이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었다고 말했는데, 그 말은 맞지 않습니다. ‘명상을 해보니 이런 증상이 나타날 때도 있었고, 저런 증상이 나타날 때도 있었다’ 하고 말하는 것이 훨씬 정확한 표현입니다. 만약 명상을 할 때 졸음이 왔다면 ‘이번 명상시간에는 많이 졸렸습니다. 졸음이 오는 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하고 말하면 됩니다. 졸리지 않았다면 ‘이번 명상시간에는 졸음이 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하면 되고요. ‘이번 명상은 잘 되었다’, ‘이번 명상은 안 되었다’ 하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는 명상을 일과 같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을 잘하려고 하는 것처럼 명상을 할 때도 애를 써서 성과를 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명상이 잘 된다’, ‘명상이 안 된다’ 하고 표현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에게 명상은 휴식이 아닙니다. 2박 3일 동안 명상하느라 애를 너무 많이 써서 회향식이 끝나면 또다시 휴식을 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한 상태에서 가만히 멈춰보면 ‘이런 증상이 나한테 있구나’, ‘산만하구나’, ‘도대체 생각과 마음이라는 게 늘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쏘다니는구나’ 하고 자신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공부에 집중하지 않고 산만하다며 늘 야단을 쳤는데 ‘아이들만 그런 게 아니라 나도 그렇구나’ 하고 자각을 하게 됩니다. ‘밥 조금 적게 먹었다고 먹는 것에 대한 욕구가 끊임없이 일어나는구나’, ‘나는 먹는 욕구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자기를 알아가는 것이 명상입니다. 그러니 명상이 잘 되느니 안 되느니 이런 말은 맞지 않습니다. 다만 나의 이런 욕구, 성향, 상태를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어서 그동안 명상을 하면서 궁금했던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네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명상을 통해 나에게 조급한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막상 직장 동료가 게으른 모습을 보이면 화가 난다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명상을 통해 회사에서 일할 때 일을 바로바로 처리해야 된다는 강박적인 생각이 저를 늘 긴장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 직장 동료가 게으른 모습을 보이거나, 시간 약속을 안 지키거나, 그로 인해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제가 참여한 프로그램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늘 불만이 생겼습니다. 제 마음속에 손해를 보기 싫은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상대의 게으른 모습을 볼 때마다 화가 크게 올라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할까요?”
“우리의 말에 ‘게으르다’, ‘부지런하다’ 하는 표현이 있는 것이지 현실에서는 게으른 것도 없고, 부지런한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빠르다’, ‘느리다’ 하는 것도 실제로는 없습니다. 실제에서는 우리들의 그런 인식만 있습니다. 기준을 시속 10km로 잡으면 시속 5km를 가는 차는 느리고, 시속 15km를 가는 차는 빠른 거예요. 그러나 기준을 시속 30km로 잡으면 시속 15km는 느리고, 시속 50km는 빠릅니다. 이것은 다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지 본래 ‘빠르다’, ‘느리다’, ‘부지런하다’, ‘게으르다’ 하는 건 없습니다.
나를 기준으로 해서 보면 ‘나보다 느리다’ 하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이 느리다’ 하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내가 빠르다고 할 때도 ‘나는 누구보다는 빠르다’ 하고 말할 수는 있지만 ‘나는 빠르다’ 하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느리다’, ‘빠르다’, ‘부지런하다’, ‘게으르다’ 하는 표현은 모두 상대적인 개념이에요. ‘부유하다’, ‘가난하다’ 하는 말도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내가 1억을 가지고 있으면 천만 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부자이지만, 100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난한 사람이에요. 한국에서 가난한 사람은 인도에 가면 다 부자에 속합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게으르다’ 이렇게 보지 말고 ‘나보다는 좀 느리다’ 이렇게 봐야 합니다. ‘게으르다’ 하는 것은 주관적인 판단인데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보통 게으른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사실은 상대방이 나보다 느릴 뿐이에요. 그 사람이 나보다 느리니까 승진도 늦겠죠. 그래서 그 사람과 같이 일하면 내가 능력이 있고 더 빠르니 내가 일을 더 많이 하게 될 겁니다. 그럴 때 ‘내가 약간 손해다’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승진할 때는 내가 유리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전부 나보다 일을 잘하면 나는 승진할 수가 없어요.
만약 내가 가게를 운영한다고 합시다. 주위 가게가 전부 나보다 장사를 잘하면 내가 운영하는 가게는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전부 나보다 일을 잘하면 그 사람은 나가서 본인의 가게를 차리지 내 가게에 계속 있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저한테 질문을 하러 찾아온다는 것은 저한테 얻을 게 있다는 거예요. ‘나는 왜 맨날 주고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혼자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어떤 이득이 있어야 그 사람에게 갑니다. 여러분들도 저한테 이렇게 찾아오는 것은 물으면 얘기를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왜 맨날 여러분의 가정사를 저한테 묻나요?’ 하고 불평하면 여러분이 저한테 찾아오지 않겠죠. 사람들은 다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 오는 거예요. 그런데도 여러분들은 많은 사람이 나를 우러러보기를 원하면서 사람들한테 이익을 주는 것은 싫어하는 모순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주위 사람들이 전부 나보다 일을 많이 하기를 바라면서 승진은 내가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모순된 생각 때문에 번뇌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그 동료에 대해서는 ‘나보다 조금 느리다’ 이렇게 바라보면 됩니다. 어떤 프로젝트를 할 때 동료 사이에 내가 조금 더 일을 많이 하면 어때요? 같이 밭을 매는데 어떤 사람은 밭을 매는 속도가 좀 느리고, 나는 속도가 좀 빨라서 내가 밭을 좀 더 맨다고 해서 그게 큰 문제가 되나요?
그 사람이 일을 좀 빨리 해주길 바란다면 효과적인 방법을 질문자가 가르쳐 주면 되잖아요. 물론 가르쳐 준다고 금방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번 가르쳐 주면 조금 개선이 될 뿐이에요. 그러나 질문자는 가르쳐 주려고 하지도 않았잖아요. 오히려 내 노하우를 가르쳐 주면 벤치마킹해서 나를 앞서 나갈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죠. 그런 마음이 바로 모순입니다.
질문자도 실력이 월등한 사람들이 일하는 집단에 들어가면 질문자가 제일 역량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듣게 될 겁니다. 빠른 것이 나쁜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빨라야 된다고 집착을 하니까 질문자가 스트레스를 받는 겁니다.
저도 일을 빨리 하는 스타일이에요. 이왕 하는 일인데 좀 더 정확하게 하고, 좀 더 빨리하면 좋잖아요. 일부러 천천히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빨리 일해야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상대에게 짜증을 내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 본인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생긴 문제입니다.
어떤 일을 빨리하고 늦게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너무 의무감을 갖고 하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애쓰지 마라’ 하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애쓰지 말라는 것은 그 일을 하지 마라든지 천천히 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빠르게 하면서도 애쓰지 않아야 합니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알아차림을 유지하듯이 빠른 가운데도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마음이 조급하지 않게 됩니다. 나보다 느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실제로 느린 것이 아니라 나보다 느린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는 빠른 사람도 있고, 느린 사람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삽니다. 한국 사람들은 인도 사람들에 비해서 대부분 빠릅니다. 그런 차이를 인정하면 실력이 부족한 사람, 행동이 느린 사람 등 여러 사람하고 함께 지낼 수가 있습니다. 빠른 사람은 빨리 일을 하고, 늦은 사람은 일을 조금 늦게 하고, 잘하는 사람은 조금 많이 일하고, 못하는 사람은 조금 적게 일하고, 아는 사람은 스스로 하도록 하고, 모르는 사람은 가르쳐 주면서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자연계로 가면 큰 나무도 있고, 작은 나무도 있고, 풀도 있고, 강변에는 큰 돌도 있고, 작은 돌도 있고, 모래도 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다양한 존재가 어우러져서 사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나와 똑같아야 됩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동료가 조금 더 빨라야 된다고 하면 조금 더 빠르게는 할 수 있어요. 모르면 가르쳐주고 훈련을 시키면 조금 빨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온 습관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어서 세 명이 더 질문을 한 후 스님이 회향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명상수련이 끝나고 나서도 꾸준히 연습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 탐구하고 알아갔으면 합니다. 일상에서도 자기를 놓치지 않는 평정심을 유지해야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발원을 하시길 바랍니다. 더 나아가 사람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생명가진 모든 존재들이 안락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내면서 명상 수련을 마치겠습니다.”
사홍서원으로 온라인 주말 명상수련을 모두 마쳤습니다.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참가자들은 각자의 일터와 삶터로 돌아갔습니다.
방송실을 나온 스님은 비닐하우스로 가서 이틀 전에 심은 참깨 모종이 잘 자라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다행히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에는 실내에서 원고 교정과 업무를 본 후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농사일을 한 후 오후에는 기획위원회 회의에 온라인으로 참석하고, 저녁에는 공동체 법사단과 회의를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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