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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네팔로 넘어와서 부처님 이전에 한 젊은이로서의 삶을 만나보기 위하여 룸비니 일대를 순례하는 날입니다.
대성석가사 대웅전에서 새벽예불과 천일결사기도를 마치고 6시에 부처님의 고향 카필라바스투로 출발했습니다. 7시가 되기 전에 카필라바스투에 도착했습니다.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 발자취를 좇아 자욱한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여기가 태자궁터입니다.”
순례단은 그룹별로 성지를 참배하고 있었고, 스님은 답사를 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A팀의 일부도 카필라성을 참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인데도 동네 아이들이 많이 나와 있었습니다. 스님이 그런 아이들을 보며 팔리어로 삼귀의를 욌습니다. 아이들은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합장을 하고 삼귀의를 외며 쫓아왔습니다.
“나모 닷사 바가바또 아라하또 삼마사 붓다사”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부처님이 출가하셨다는 동문에 이르러 스님은 아이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한 줄로 서 보세요.”
눈치가 빠른 아이들은 부리나케 한 줄로 섰습니다.
“자, 따라 해 보세요. 이 사탕을 먹은 인연으로 다음 생에 출가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아이들은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탕을 받을 마음에 힘차게 따라 했습니다. 스님은 사탕을 한 움큼씩 쥐어주었습니다.
사탕을 받고도 아이들은 계속 스님을 따라왔습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마을에서 새로운 꼬마들이 또 따라나섰습니다.
새로 나온 아이들이 꽤 많자 스님은 다시 아이들을 줄을 세우고 다음 생에 출가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사탕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제가 다음 생에 제자를 만 명도 더 넘게 만들어놨어요.(웃음) 여기도 학교를 하나 지어줘야 하는데 둥게스와리에 30년을 묶여 있네요. 원래 8대 성지마다 학교를 지으려고 했었어요. 가야산 밑에도, 바이샬리에도, 라즈길에도 가난한 사람이 아직 많아요.”
부처님이 수행자를 만났다는 북문을 돌아 다시 입구로 돌아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차를 타고 10여 분 거리에 있는 쿠단으로 갔습니다.
“이곳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시고 6년 만에 카필라성을 방문했을 때 정반왕과 어머니, 부인과 아들이 다 성에서 안 기다리고 여기까지 나와서 마중을 한 곳입니다. 그걸 기념해서 부처님 탑, 정반왕탑, 마야부인탑, 라훌라탑을 세웠어요. 다 있는데 부인 탑만 없어요.
후대에 이 탑의 꼭대기에 힌두교인들이 힌두교의 상징인 링가를 설치해 놓았어요. 탑을 자세히 보면 벽돌마다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다 회칠을 하니까 마치 돌로 새긴 것 같죠. 무늬가 남아있는 탑이 잘 없는데 이곳에는 원형이 남아있어요.”
탑을 한 바퀴 돈 후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나왔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랑그람으로 향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 작은 강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이 강은 로히니강입니다. 상류 쪽으로 한 4km 올라가면 부처님의 어머니 고향인 데바다하가 있습니다.
이 강을 두고 이쪽은 카필라성이고 저쪽은 꼴리성이었습니다. 어느 해에 가뭄이 들어서 서로 이 강물을 가져가려고 싸움이 붙어서 돌멩이를 집어던지며 싸웠다고 해요. 강이 얼마나 좁기에 돌을 집어던지고 싸웠나 했더니 이 정도면 싸울 만하죠. 부처님은 싸우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사람의 피가 귀합니까, 물이 귀합니까?’
‘당연히 피가 귀하죠.’
‘그러면 왜 물을 갖기 위해 서로가 귀한 피를 물처럼 흘리려 합니까?’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깨우쳐서 싸움을 멈췄다고 해요. 경전에는 이 대목에서 부처님이 로히니강 가운데 허공에 떠 있었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한 것은 ‘중립’을 상징하는 거라고 볼 수 있어요."
10분 만에 로히니강을 둘러보고 버스를 타고 랑그람으로 향했습니다. 10시가 조금 넘어 랑그람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부처님의 어머니족인 꼴리족이 부처님의 사리를 가져와 탑을 세운 곳입니다. 이곳만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남았어요.”
탑을 향해 삼귀의를 하고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탑을 한 바퀴 돌아 나왔습니다.
10시 20분까지 카필라성, 쿠단, 로히니강, 랑그람을 모두 참배하고, 11시 20분에 다시 대성석가사로 돌아왔습니다. 스님은 오가는 길에 만난 순례단을 보며 오후에 룸비니 전체 법회에 늦지 않도록 시간을 조정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1시에는 걸어서 룸비니로 향했습니다. A팀도 그룹별로 카필라성과 쿠단, 랑그람을 둘러보고 룸비니로 향했고, B팀은 인도와 네팔 국경 출입국 심사를 마치고 모두 룸비니로 향했습니다.
룸비니는 곳곳이 정비가 되고 깨끗하게 잘 가꾸어져 있었습니다. 보트를 탈 수 있는 관광 시설도 마련되어 많은 학생들이 단체 관람을 하거나 가족끼리 관람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순례단보다 1시간 일찍 도착하여 현수막 설치 등 실무자들이 사전 준비하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A팀과 B팀이 모두 도착하자 오후 2시에 전체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순례단은 가사를 수하고 한 줄로 룸비니에 입장했습니다. 마하데비 사원 안으로 들어가 부처님의 탄생 설화를 새긴 조각을 둘러보고 너른 공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순례자들이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스님이 순례단 모두를 환영했습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은 국경을 통과하는 데 하루 종일 걸릴 것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일정 없이 국경을 넘기만 하자고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B팀까지 일찍 들어올 수 있게 되어서 일정을 반나절 앞당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A팀이 이곳을 돌아보는 데 여유가 조금 없었네요.” (웃음)
이어서 이곳 룸비니에서 부처님이 태어나실 때의 모습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저희가 도착한 이곳 룸비니는 네팔 땅으로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곳입니다. 이곳은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는데, 약 150년 전에 저기 보이는 아쇼카 석주가 발견되면서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부처님이 어디에서 태어나셨는지 찾기가 어려웠을 텐데 이곳에서 아쇼카 석주가 발견되고, 또 주변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마야부인이 나뭇가지를 잡고 아기를 출산하는 조각상이 나오면서 부처님 탄생지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앞에 보이는 흰 건물은 비교적 최근에 지은 건물입니다. 그전에는 조각상을 조그마한 건물에 모셨었는데, 지금은 저렇게 크게 지어서 그 안에 조각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고향은 나라 이름이 ‘카필라바스투’였습니다. 카필라바스투는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약 28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차를 타고 가면 40분에서 1시간 정도 걸립니다. 룸비니에서 또 동쪽으로 28킬로미터 정도 가면 데바다하(Devadaha, 천비성 天譬城)라는 곳이 나오는데, 그곳은 부처님의 어머니 종족인 꼴리족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룸비니는 카필라바스투와 데바다하의 중간에 위치한 곳입니다.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 부처님을 낳을 때가 되어, 카필라성의 동쪽 문을 나와서 이곳 룸비니까지 왔습니다. 데바다하가 카필라성의 동쪽에 있으니 동쪽 문으로 나온 거죠. 28 킬로미터면 약 70리 정도 됩니다. 아마도 꼭두새벽에 성을 나서서 이곳에는 정오경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산기가 느껴져서 이곳에 천막을 치고 아기를 낳았다고 합니다.
경전의 기록에는 이곳에 오니 아쇼카 나무에 흰 꽃들이 아주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고 합니다. 아쇼카 나무는 한문으로 무우수(無憂樹)라고 합니다. 꽃이 아주 잘 피어있는 모습을 보고 꽃구경을 하기 위해 잠시 가마를 세우고, 오른손을 들어 아주 탐스러운 나뭇가지 하나를 잡는데 그때 마침 산기를 느꼈다고 합니다.
천막을 치자 오른쪽 옆구리에서 아기가 태어났고, 그러자 천인들이 아기를 받았고, 용왕이 더운물과 찬물을 뿜어서 아기를 목욕시켰다고 합니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일어서서 동서남북으로 일곱 발자국씩을 걸었고, 발걸음마다 송이송이 연꽃이 피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한 손을 들어서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늘 위는 신들의 세계를 말하고, 하늘 아래는 인간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러니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인간의 세계와 신들의 세계를 합해서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삼계에 살고 있는 모든 중생들이 괴로움에 빠져 있으니 내 이를 마땅히 구제하리라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이 실제로 태어날 때의 모습이 이러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불소행찬(佛所行讚)’이라고 알려져 있는 ‘붓다차리타(Buddhacarita)’라는 경전은 서기 1세기 경에 기록된 것이라고 하니까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적어도 500년 내지 600년이 지나서야 나온 부처님의 일대기에 대한 경전입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 한참 지나서 부처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것이니까 그들에게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어 사람들의 공경을 받는 모습을 기준으로 기록을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태어나실 때의 모습도 그분의 총체적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고 나타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의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나지 않으면 부처가 될 수 없고, 태어나자마자 걷지 않으면 부처가 될 수 없고, 태어나자마자 소리 내어 이렇게 외치지 않으면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한다면, 부처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그런 묘사는 모두 부처님의 일대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인도의 신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인도 신화에서는 제사장인 브라만은 신의 입을 통해 만들어지고, 왕족인 크샤트리아는 신의 옆구리에서 만들어지고, 평민인 바이샤는 신의 배에서 만들어지고, 하층민인 수드라는 신의 발에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왕족 출신이니까,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은 크샤트리아 출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발자국을 강조하는 것은 육도윤회에서 벗어났다는 걸 의미합니다. 여섯 발자국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이렇게 육도윤회를 뜻합니다. 그러니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는 것은 육도윤회를 벗어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리라는 걸 상징합니다.
인도는 신들의 나라, 신화의 나라입니다. 신들도 붓다를 공경하고 받든다는 표현은 붓다가 신보다 위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위대한 신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육도윤회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 육도윤회에서 벗어난 분이니까, 아마도 불자들이 전통신앙을 기준으로 붓다라는 개념이 신들 위에 있다는 의미로 ‘천상천하’라는 말을 쓴 것으로 짐작됩니다.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났다’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이곳 룸비니에서 그때의 정황을 재현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초파일 때도 부처님의 탄생을 기념하여 욕불의식을 하는데, 오늘 우리도 이곳에서 욕불의식을 하려고 해요. 아기 불상을 목욕시키는 욕불의식을 통해 우리의 업장을 소멸하고자 하는 원(願)을 세우고 또 다짐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보드가야를 가장 중요시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4월 초파일 행사를 해서 그런지 룸비니를 가장 중요시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도 연등을 들고 행렬을 하려고 합니다. 1,250명 모두가 연등을 들고 가기에는 연등 개수가 부족하니까 차량 별로 몇 개씩 나누어서 앞에 걸어가는 사람들이 들고, 초파일 행사처럼 연등행렬을 하겠습니다.”
이어서 경전독송을 하고 명상을 한 후 다 함께 예불을 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이 땅에 태어남을 기뻐하며 경전내용을 바탕으로 부처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아기 부처님을 목욕시키는 욕불의식을 했습니다.
욕불의식을 마친 사람들은 연등을 들고 탑돌이를 시작했습니다. 1250명이 스님의 뒤를 이어 긴 줄을 만들어서 사원을 참배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탑돌이를 마치고 사홍서원을 한 후 행사를 모두 마쳤습니다. 순례단은 차량별로 룸비니에서 여유 시간을 갖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곳곳을 둘러보았고, 스님은 룸비니를 나와 걸어서 대성석가사까지 이동했습니다.
A팀과 B팀이 대성석가사에 모두 도착하자 오후 5시 30분부터 특별 법회를 했습니다. 1,250명이 대성석가사 대웅전의 앞마당을 가득 메웠습니다.
스님은 대성석가사에 대해 잠깐 소개해 주었습니다.
“룸비니 대성석가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절의 이름은 대성석가사입니다. 룸비니 개발 구역 안에 있는 한국절입니다. 용성진종조사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불교의 발전과 민족 부흥을 위해서 10가지 유훈을 남기셨습니다. 그 10가지 유훈 가운데 ‘경주 고위산 천룡사를 잘 가꾸어라’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힘을 빌어서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신 보드가야, 부처님께서 처음 설법하신 사르나트,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쿠시나가라, 그리고 부처님께서 가장 오랫동안 머무셨던 쉬라바스티(사위성)의 기원정사까지 이렇게 다섯 곳을 잘 가꾸라는 유훈이 있습니다. 부처님과 관련 있는 성지를 가꾸라는 유훈은 천룡사 유훈에 덧붙여져 있는 내용입니다.
불심도문 큰스님께서 용성조사님의 10가지 유훈을 실현하는 가운데 네팔 정부와 협의를 하고, 룸비니개발위원회와 계약을 맺고, 이 땅을 100년 동안 계약해서 이곳에 대성석가사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현장에 저의 도반인 법신스님을 파견해서 이 불사를 총 감독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이곳 주지스님은 법신스님입니다. 키는 자그마한 스님이지만 이처럼 크나큰 불사를 진행해 오셨고, 지금처럼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도록 해주셨습니다. 현재 법신스님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한국에 머물고 계시고, 지금은 법신스님의 제자인 보현스님이 이 절의 총무로 지내면서 관리를 해나가고 있습니다.
용성조사님은 유훈을 남기셨고, 불심도문스님은 유훈을 실현하셨고, 법신스님은 이 절을 지으셨고, 보현스님은 이 절을 관리하고 계십니다. 이분들에게 큰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순례단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이어서 대성석가사를 지을 수 있게 유훈을 남기신 용성조사님에 대해서도 소개해 주었습니다.
“이곳 룸비니 개발은 1961부터 1971년까지 약 10년에 걸쳐 UN 사무총장을 지낸 미얀마 출신의 우탄트(U Thant) 님이 시작을 했습니다. 우탄트 사무총장이 계실 때 UN 차원에서 룸비니개발위원회를 구성하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지금 저희들이 있는 곳은 그때 마련된 국제사원 구역입니다. 이 국제사원 구역에는 각 나라 불교도들이 와서 절을 지을 수 있도록 땅을 내어 주고, 또 오늘 우리가 방문한 룸비니를 아름답게 가꾸고, 다른 부지에는 명상수련 시설도 갖추고 있습니다. 아직 전체 계획의 절반도 건설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차츰 개발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네팔이 경제적으로 어렵다 보니까 주로 불교 국가인 일본에서 지원을 많이 하고 있고, 또 UN과 세계은행 차원에서도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비하면 도로 시설이나 공항 등 룸비니 개발 사업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용성조사님은 조선조 500년 동안 억불정책으로 인해 소멸되다시피 사지로 내몰린 한국불교를 새롭게 일으키신 분입니다. 한국 근대불교의 중흥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셨고, 그것을 넘어서서 ‘선천은 임금이 주인인 제왕의 시대라면, 후천은 백성이 주인인 민주 시대’라고 하시며 국호를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정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3.1 운동을 통해 단순히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 대한민국을 수립하자는 뜻을 내걸었기에 상해임시정부의 국호가 ‘대한제국 임시정부’가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용성조사님께서는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0년에 열반에 드셨습니다. 조국이 해방되고, 한국 정부가 들어선 다음, 용성조사님께 건국 훈장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남기신 유훈으로 인해 이곳에 대성석가사가 지어졌습니다.”
스님이 법문을 하고 있는 중에 룸비니개발위원회 부위원장님이 순례단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대성석가사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부위원장님을 법상 앞에 모시고 함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룸비니개발위원회 위원장님은 우리나라로 치면 문화관광부장관이라고 할 수 있고, 부위원장님은 현장에서 상근을 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부위원장님을 모시고 잠깐 말씀을 청해 듣겠습니다.”
룸비니개발위원회 부위원장님에게는 한국에서 온 정토회 순례단에 대해 소개해 주었습니다.
“마하야나(대승)의 금강경을 보면 부처님께서 1,250명의 비구와 함께 수행했다고 나오는데, 우리도 이번에 1,250명의 수행자가 이곳에 모였습니다. 갑자기 초대를 했는데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어서 부위원장님에게 법문을 청해 들은 후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대성석가사를 운영하고 있는 보현 스님에게 인사말을 청했습니다. 보현 스님은 순례단을 반갑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정토회 인도성지순례객과 함께 법회를 하면서 이렇게 1,250명에 가까운 대중이 모인 것은 살다 살다 처음 보는 모습입니다. (웃음)
여러분들이 이렇게 석가사를 방문해 주시고, 석가사에서 숙박도 해 주시고, 또 공양도 하셔서 감개무량한 마음입니다. 이렇게 많은 대중이 방문해 주시니 한국 사원 대성석가사가 이곳에 마련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최근 코로나와 관련된 여러 가지 검사가 강화되어서 여러분들이 인도에 오실 때 많은 어려움이 있으셨을 텐데도 불구하고 석가사를 방문해 주신 것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순례단은 큰 박수로 이국 땅에서 한국절 대성석가사를 지키고 있는 보현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법회를 하는 동안 해가 저물었습니다.
사홍서원으로 법회를 마친 후 순례단 모두가 대성석가사의 운영과 발전을 위해 조금씩 보시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법회가 끝나고 대성석가사에서 준비해 준 음식으로 저녁 공양을 했습니다. 너무나 반가운 김치와 깍두기, 미역국, 토마토 수프, 사부지를 맛있게 먹고, 따뜻한 물도 마셨습니다.
순례단은 조별 나누기를 한 뒤 취침에 들었습니다. 스님은 원교 교정과 내일 일정을 점검한 후 하루 일정을 마쳤습니다. 네팔 룸비니의 밤하늘에는 동그란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습니다.
내일은 네팔 국경에서 출입국 심사를 받고 다시 인도로 넘어갑니다. 오전에는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을 참배하고, 오후에는 기원정사와 사위성이 있는 쉬라바스티에 도착해 천불화현탑을 참배한 후 한국절 천축선원에 짐을 풀고 실무준비팀과 다음 일정을 위해 회의를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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