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10.27 INEB(참여불교 세계대회) 4일째, 메인 컨퍼런스
“어떻게 하면 자비심을 낼 수 있나요?”

안녕하세요. INEB(참여불교 세계대회) 4일째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INEB의 본 행사인 메인 컨퍼런스를 하는 날입니다.

새벽 5시에 예불과 기도 시간을 가진 후 6시에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아침 식사 때마다 스님은 태국에서 온 비구 스님의 발우에 음식을 담아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스님이 발우에 밥과 반찬을 담아 주었습니다.

“제가 음식을 담아 드릴게요.”

“Thank you.”

아침 식사를 마치고 8시 30분에 메인 컨퍼런스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스리랑카에서 온 비구니 스님이 빨리어로 챈팅을 해주었습니다.

“나모 따싸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싸.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강 사라낭 갓차미...”

이어서 스님이 무대 위로 올라가 INEB 참가자들 모두에게 환영사를 했습니다.

“코로나19 이후로 INEB 대회가 직접 대면 방식으로는 처음 열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INEB 행사에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사부대중 여러분들께서 참석해 주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세계는 지금 기후위기로 인해 곳곳에서 자연재난이 더 크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서 전 세계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또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새로운 냉전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환율이 폭등하고 물가가 상승하고 이자율이 높아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각국이 서로 협력해서 문제를 함께 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세계 각국은 자기 나라의 이익을 우선하여 경쟁을 하기 때문에 문제 해결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 INEB 참가자들은 민중의 고통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고자 오늘 이렇게 모였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활동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를 마음껏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정토회 대표 김은숙 님이 환영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INEB 창시자이고 가장 큰 어른이신 술락 시바락사 박사님이 환영사를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세계에 존재하는 구조적 폭력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작지만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분열된 세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합니다."

큰 박수와 함께 컨퍼런스의 주제인 ‘분열된 세상에서의 불교(Buddhism in a Divided World)’에 대해 미얀마에서 온 사이 샘 캄(Sai Sam Kham) 님이 기조연설을 했습니다. 먼저 평화에 대해 말했습니다.

"수백만 명이 죽는 전쟁에서 기업과 국가는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습니다. 최근 세계적으로는 극우주의와 파시즘이 부상하고 있고요. 결국 양극화와 경제적 불평등이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폭력을 추구하는 불교가 어떻게 세상의 폭력을 다뤄야 할까요? 선거와 민주주의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헌신과 도덕적 책임이 필요합니다."

또 지구 환경에 대해서는 기후 변화로 인해 모든 사람이 같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고통받고 있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그리고 미얀마에서 '카르마'가 구조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에 잘못 이용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지 화두를 던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법륜 스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며 발제를 마쳤습니다.

“법륜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옳은 길이라면 결과에 상관없이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무리 좋아도 실제로 사람들의 고통을 없앨 수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상으로 제 발제를 마치겠습니다.” (박수)

다음은 패널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평화, 지구환경, 팬데믹에 대해 4명의 패널이 다양한 시각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윈토모 찬드라(Wintomo Tjandra) 님, 호주에서 온 질 제이슨(Jill Jameson) 님, 스리랑카에서 온 갈칸데 담마난다 스님(Ven. Galkande Dhammananda), 한국의 도법스님의 발표가 이어지고, INEB 참가자들도 패널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들을 했습니다. 스님은 패널들의 발표를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했습니다.



토론의 내용이 점검 깊어지다 보니 예정된 것보다 마치는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비구 스님들은 12시 이전에 식사를 해야 해서 먼저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고, 패널들도 서둘러 토론을 마쳤습니다.

“이제 마쳐야 할 시간입니다. 오늘 제기해 주신 질문에 대해 토론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남은 기간 동안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아쉽지만 시간 부족으로 충분한 토론을 하지 못하고 컨퍼런스를 마쳤습니다. 마지막으로 라다크에서 온 활동가들이 술락 박사님, 법륜스님, 김은숙 대표님에게 흰 스카프를 선물했습니다.

패널들 모두가 스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스님은 패널들과 미팅을 했습니다. 발표 내용이 아주 좋았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영어로 번역된 스님의 책을 직접 사인해서 선물했습니다.


오후에는 평화와 지구환경을 주제로 분과별 토론 시간을 가졌습니다.


평화 분과에서는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 위기, 미얀마의 내전 상황, 젠더, 신냉전 등을 주제로 INEB가 어떤 행동을 하면 좋을지 토론을 했고, 지구환경 분과에서는 기후 위기, 생물 다양성,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INEB가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지 토론을 했습니다.


분과별 토론을 마치고 다시 대강당에 모여 토론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토론 결과에 대해 질의응답을 하거나 새로운 제안을 받은 후 컨퍼런스를 모두 마쳤습니다. 스님은 패널 분들에게 풍경을 하나씩 선물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부탄에서 오신 INEB 참가자 분들과 미팅을 했습니다.

부탄에서 얼마 전 비구니 수계식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탁시 장모 박사님은 스님에게 부탄의 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조언을 구했고, 스님은 GNH(국가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해서는 성평등 문제와 비구니 제도를 더욱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비구니 수계식을 진행한 것에 대해 특별히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부터는 INEB 참가자들과의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INEB 참가자들은 스님에게 궁금한 점에 대해 자유롭게 질문했습니다.

네 명이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는데요. 그중 한 명은 극단적인 가혹함에 대해서도 과연 자비심을 가질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비심을 낼 수 있나요?

“This question has been disturbing my mind for a long time. I hope I get the answer today. In the face of extreme cruciality, when facing something like extreme cruciality, how to deal with that with compassion?”
(오랫동안 제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오늘 스님께서 그 의문을 풀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극단적인 가혹함에 맞설 때 그 극단적인 가혹함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며, 과연 자비심을 갖고 대처할 수 있을까요?)

“사람의 마음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인연을 따라 이렇게도 일어나고 저렇게도 일어납니다. 상대를 이해하게 되면 자비심이 저절로 일어나고,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면 악심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악심이 있는 사람이 따로 있고, 자비심이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해하면 자비심이 일어나고, 이해하지 못하면 악심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비심을 내라’ 하는 말은 정확하게 맞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첫째,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상대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입니다. 이해 없는 사랑은 자기의 욕구일 뿐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본질을 꿰뚫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에 나오는 것처럼 ‘좋은 일을 해라’, ‘나쁜 일을 하지 마라’ 하는 말들은 붓다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On the visit yesterday to the Dubuk Jungto Center, I was very inspired by the work that has been done there. I was wondering if you can share a bit about the Dharma teachings behind that generosity and the work that has been done at the retreat center. If you can share about the dharma teachings that inspired that work.”
(어제 두북 유기농 농장 투어를 하면서 큰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진행되는 일과 스님의 자비심을 뒷받침 하는 전법을 조금 공유해주실 수 있으신가 여쭤보고 싶습니다?)

“I understand that you have given aid to North Koreans in the past. I'm just curious if there is a law against South Koreans giving aid to North Koreans. How do you manage that? How do you manage to overcome the legal restrictions?”
(북한에 지원을 해주셨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남한에서 북한에 지원을 막는 법적 제한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럴 경우 스님께서는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법적 제한을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I was wondering if you have started teaching online before the pandemic or due to the pandemic.”
(스님께서는 온라인 강의를 팬데믹 이전에 시작하셨는지 아니면 팬데믹 때문에 시작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모든 질문에 답변을 한 후 스님은 오늘 오전에 쟁점이 되었던 컨퍼런스의 내용에 대해 스님의 생각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오늘날 불교에서 말하는 ‘까르마’는 운명론이 되어 있습니다. 운명론은 인도의 전통적인 사상입니다. 인도뿐만 아니라 원시적인 모든 사회에서는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붓다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까르마는 정해진 것이 아니고 형성된 것이라는 겁니다. 마치 습관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습관은 잘 바뀌지 않잖아요. 그래서 정해져 있다고 믿게 된 겁니다. 그러나 붓다는 까르마가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변한다고 말했습니다.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겁니다.

운명론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운명은 신이 정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의 운명은 전생이 정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인간의 운명은 태어난 연월일시가 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붓다는 운명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에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내가 어떤 사람을 칼로 죽여도 죄가 안 된다. 신의 뜻이기 때문에, 전생 때문에, 태어난 연월일시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운명론은 인간의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불교에는 타인의 운명을 점치지 말라는 계율이 있습니다. 관상을 보든, 손금을 보든, 어떤 행위를 하든 그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행위는 모두 계율에 어긋납니다. 한국 사람들은 승려가 되면 손금을 보든 관상을 보든 운명을 점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얼마나 모순입니까? 이것은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문제가 아니라 부처님 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만약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에 동조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차별을 합리화하게 됩니다. 2600여 년 전에 이미 붓다는 계급 차별을 부정했으며, 여성이 비구니가 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붓다가 그 당시에 비구니 제도를 허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는 허용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허용한 비구니 제도를 왜 지금은 허용하지 않을까요? 붓다는 계급 차별을 부정했습니다. 그런데 스리랑카에서는 승려 사회에도 카스트 제도가 적용됩니다. 이것을 불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저는 어떤 종교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담마에 대해서 얘기하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너는 린포체이다’라고 하는 것과 어린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너는 왕자다’라고 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왜 3,000명의 린포체 중에 여성은 한 명도 없을까요? 여성은 환생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담마가 아닙니다. 물론 문화는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담마는 객관적 사실입니다. 서로 다른 종교는 존중해야 합니다.

담마는 문화와 다릅니다. 운명론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초기 불교를 계승한다고 하는 태국에서 비구니 제도를 왜 허용하지 않는지 저는 이해가 됩니다. 비구니 제도는 AD 1세기와 2세기 사이에 없어졌습니다. 인도에서는 1세기에서 5세기까지 굽타 시대입니다. 이때는 성차별과 계급 차별이 확고했던 때입니다. 불교가 살아남으려면 이 시스템에 순응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테라밧다의 모든 경전이 그 시스템에 맞게끔 편집이 되어 있습니다. 특히 아비달마는 더 심합니다.

태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4세기 또는 5세기경입니다. 최초로 불교가 전래된 것은 그 이전이지만 불교가 발달한 시대는 그때였습니다. 비구니 제도가 없을 때이니까 왜 비구니 제도를 허용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태국에서는 비구니가 있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비구니 제도를 인정하는 않는 자세를 고수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시 대화가 되어야 합니다.

또 다른 문제는 ‘억압에 대해서 저항할 때 무력을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붓다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고 전쟁을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카족과 꼴리족이 로히니 강물을 가지고 싸울 때 붓다는 강 가운데로 가서 말렸습니다. 또 마가다국의 아자타 사투 왕이 밧지족을 침공할 때도 붓다는 일곱 가지 예를 들어서 전쟁의 무익함을 말했습니다. 이렇게 평화를 옹호한 붓다는 코살라국이 석가족을 멸망시키려고 했을 때 세 번이나 평화적으로 군대를 막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막무가내로 나오자 무력으로 저항하지 않았고 결국 석가족은 전멸해야 했습니다.

석가족의 일부가 도망을 간 덕분에 인도 상카시아 근방에는 지금도 석가족이 살고 있습니다. 그럼 한국은 어떨까요? 400년 전에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습니다. 그때 일본의 요구는 중국을 침공하러 가는 길을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전쟁할 이유가 없었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한국의 왕이 도망가면서 승려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승려들은 무장을 해서 일본군을 막았습니다. 일본군이 많은 사람을 죽이려고 하였고, 왕의 요청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일본군은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절을 불태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느 절을 가더라도 ‘400년 전에 임진왜란으로 불태워져서 새로 지어졌다’ 하는 안내 문구를 볼 수 있습니다. 승려들이 일본군에 저항해서 싸웠기 때문에 결국 일본군은 절에 불을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100년 전에 한국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저의 스승인 용성조사님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3.1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당시 인구가 2천만 명이었는데 그중 2백만 명이 참여했습니다. ‘대한독립 만세’ 하고 부르는 비폭력 투쟁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군은 총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죽은 사람이 수 만 명이고, 다친 사람은 수십 만 명이었어요. 결국 1년 만에 진압이 됐습니다.

그 후 무장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용성조사님은 무장 투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상해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했습니다. 용성조사님의 제자 중에는 아예 승복을 벗고 무장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는 독립운동을 했다고 굉장히 탄압을 받았지만, 지금은 국가에서 존경하는 애국자가 되었습니다.

억압에 대한 무력투쟁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는 많은 토론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호랑이가 내 어머니를 물어 죽인 것 때문에 호랑이를 죽였다면 살생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 호랑이가 또 다른 이웃집 할머니를 또 물어 죽이려고 해서 호랑이를 죽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면, 원한에 의해서 죽인 것이 아닙니다.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서 죽인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 수용합니다. 그렇다고 과보가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어떤 이유로든 살생을 하면 과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보를 기꺼이 자신이 받고 이웃집 할머니를 살린다는 거죠. 대답이 길어졌습니다. 여러분들이 더 많은 대화를 이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Thank you.”

대화를 마치고 나니 벌써 7시 40분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곧바로 문경 수련원으로 이동하여 정토경전대학 생방송 수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 행사장을 나왔습니다.

곧바로 문경수련원에 도착하여 8시부터 정토경전대학 금강경 제10강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생방송 수업을 한 후 이번 주 수행 연습 과제를 이야기하고 수업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문경 정토수련원으로 이동하여 분과 토론을 진행한 후 오후에는 한국 문화를 체험하는 시간을 갖고, 소감 나누기를 하고 INEB 본대회를 폐회할 예정입니다.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이 있습니다.

전체댓글 50

0/200

김승희

감사합니다 스님🙏🙏🙏

2023-12-25 18:57:09

보각

감사합니다 우리가 평화를 위해 어떤 활동을 해나가면 좋을지도 토론을 하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2022-11-13 19:21:00

이임숙

감사합니다

2022-11-11 15:32:29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