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공동체의 날’입니다. 공동체의 날에는 지난 한 달을 돌아보며 계율을 잘 지켰는지 돌아보는 포살을 하고, 다 함께 울력을 하거나 연찬을 합니다. 이번 달에는 오전 내내 밭에서 울력을 했습니다.
▲ 땅콩꽃
새벽예불을 마치고 곧바로 포살을 하고 7시에 가메달 밭으로 출발했습니다. 스님은 먼저 도착해 밭 주변 계곡을 돌아보며 함께 둘러앉아 공양할 장소를 답사했습니다.
그리고 밭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 무성히 자란 풀을 낫으로 싹 벴습니다.
한쪽에서 행자들이 공양 준비를 하는 동안 스님과 농사팀은 밭을 둘러보며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연구하고 도구를 준비했습니다.
오늘 일감은 땅콩밭에 비닐을 벗겨주고 흙을 북돋아주기입니다. 일명 ‘땅콩 구출하기’입니다. 비닐을 벗기기 쉽도록 고추 지지대 끝에 칼날을 하나씩 달았습니다.
칼을 사용해서 한 명은 비닐을 세로로 베고, 한 명은 십자 모양으로 베고 지나가면 뒤이어 한 명이 비닐을 벌려주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풀이 나는 것을 막고 수분을 유지해야 해서 비닐을 덮어주었지만, 이제 땅콩이 옆으로 뿌리를 내려야 하기 때문에 비닐을 벗겨주어야 합니다.
비닐을 벗겨내자 작은 땅콩 알이 달린 뿌리들이 드러났습니다. 주변 흙으로 살짝 덮어주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행자가 말했습니다.
“스님, 저절로 되는 게 없네요.”
“저절로 되는 것도 있어요. 풀!” (웃음)
스님의 말에 공감하며 함께 웃었습니다.
“공양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스님은 이미 땀을 흠뻑 흘렸습니다. 땀을 닦고 계곡 아래에서 공양을 하고 울력을 시작했습니다.
“쉴 사람은 여기 계곡에 앉아서 쉬고 심심한 사람은 밭으로 가서 일을 합시다.”
스님은 밥을 먹고 곧바로 밭으로 올라갔습니다. 쉴 사람은 쉬고, 일할 사람은 일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왜 안 쉬세요?”
“나는 일 하는 게 더 재밌으니까요.”
농사팀의 안내를 받아 일을 나누어 땅콩 구출을 시작했습니다.
아래쪽 밭에 일을 마치고 윗밭으로 올라갔습니다.
윗밭에서도 계속 같은 일을 반복했습니다.
“이렇게 손이 많이 가니까 국산 땅콩을 구하기 어려운 걸까요?”
“그렇죠. 한가한 정토행자들이나 이렇게 농사를 짓죠. 우리는 할 일을 다 마친 사람들이니까요.”
땅콩 줄기 사이에 뱀도 있었습니다. 묘당법사님이 손으로 잡아 밭 주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두고 왔습니다.
각자 몸 상태에 맞춰 쉬며 일하며 12시까지 모든 땅콩을 구출했습니다.
“다 했다!”
계곡에서 점심 공양까지 마치고 1시가 넘어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낮에는 무더위를 피해 실내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8시가 되자 스님은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했습니다.
오늘은 정토불교대학 인간붓다 수업 12강을 생방송하는 날입니다. 부처님의 교화 사례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요. 오늘은 부처님이 갈등을 어떻게 조정하고, 전쟁을 어떻게 평화롭게 해결했는지에 대한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세상을 등지고 세속을 떠나 수행을 하는 것이라는 인식 때문에 불교가 세상의 여러 갈등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부처님은 사회적인 분쟁이나 갈등을 적극적으로 해결하셨습니다.
물이 귀합니까, 사람의 피가 귀합니까?
가뭄이 심한 어느 해에 물이 부족해서 꼴리족과 석가족 사이에 분쟁이 생겼습니다. 두 나라의 국경에 로히니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가뭄으로 강물의 양이 줄어들자, 강물을 이용해서 농사를 짓던 두 나라 사람들이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꼴리족은 어차피 강물이 부족해서 두 나라의 농사를 모두 망치게 될 테니 자신들만 강물을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석가족도 두 나라가 강물을 나누어 쓰기에 부족하니까 자신들이 강물을 쓰겠다고 했습니다. 서로 자기들이 강물을 쓰겠다고 말다툼을 하다가 주먹다짐을 하게 되었고, 싸움이 점점 커지자 급기야 두 나라의 군대가 개입해서 전쟁이 일어날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을 듣고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곳으로 가야겠다. 내가 가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들이 전쟁을 하게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겠구나’
부처님은 분쟁이 있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경전에는 부처님께서 강 한가운데 공중에 떠서 양쪽을 내려다보며 말씀하셨다고 신비주의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런 표현은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중재를 했다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양쪽의 군대 책임자를 불러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양쪽 군대 모두 상대방의 요구가 부당하고 자신들이 피해자라면서 용서할 수 없다며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격앙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물이 귀합니까? 사람의 피가 귀합니까?’
그러자 그들이 답했습니다.
‘당연히 사람의 피가 귀합니다. 어떻게 하찮은 물을 고귀한 피와 비교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다시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찮은 물을 위해서 고귀한 피를 강물처럼 흘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진정을 하게 됐습니다. 부처님의 중재로 두 나라가 전쟁 대신에 수로를 정비해서 가뭄의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저는 이 일화를 보면서 지금 남한과 북한의 분쟁을 생각합니다. 남한과 북한이 서로 비방을 하면 국민들도 서로 흥분을 하면서 전쟁의 위험이 높아집니다. 이럴 때 우리는 로히니 강의 분쟁을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감정적으로 대치할 것이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거나 난민이 될지, 얼마나 많은 경제적인 피해가 발생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설령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얻는 것이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아서 절대로 전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서 갈등을 조장하더라도 우리는 거기에 놀아나서는 안 됩니다. 불자라면 부처님께서 분쟁에 어떻게 대처를 하셨는지,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깊이 새겨서 현명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이어서 스님은 부처님이 사회적 갈등을 뛰어넘어 화합과 평화로 가는 지혜를 어떻게 설했는지 다양한 사례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꼬살라국의 침공과 석가족의 멸망, 공동체가 쇠망하지 않는 일곱 가지 법 등 여러 이야기들이 마치 영화를 보듯이 펼쳐졌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상가가 청정하고 화합하기 위해 지켜야 할 여섯 가지 길에 대해 부처님이 어떻게 설했는지 이야기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코삼비 비구들의 다툼을 화해시키고 난 후에 상가 공동체는 청정하고 화합하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청정하다는 것은 계율을 잘 지켜 부정과 부패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고, 화합한다는 것은 분쟁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부처님께서는 가정이든, 사회든, 단체든, 분쟁이 없고 화합하기 위해 지켜야 할 여섯 가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냥 ‘화합해라’ 하고 말씀하신 게 아니에요.
서로 화합하기 위한 여섯 가지 방법
첫째, 같은 계율을 같이 지켜라. 공동체를 구성하고 사는 사람들은 어떤 계율이든 차등 없이 다 함께 지켜야 합니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 하는 요즘 말과 일맥상통한 얘기죠.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 법을 어기면 처벌을 안 받거나 가볍게 받고, 돈이 없으면 중벌을 받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을 정도예요. 그래서 우리는 모든 판결의 결과에 대해서 승복하기보다는 불만을 갖거나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법이 정의롭지 못하고,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민이 화합하는 국민통합을 이루려면 만인에게 똑같이 규칙과 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이럴 때 같은 계율을 같이 지킨다고 할 수 있어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은 술 마시고 밤 12시에 들어오면서 자기 자식한테는 밤 9시까지 들어오라고 하면 애들이 힘이 없으니까 따르기는 하지만 반발심이 생깁니다. 본인은 TV를 보면서 애들에게 공부하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애들이 속으로 ‘너는 왜 보는데?’ 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소통이 안 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가정에서도 계율을 같이 지키고 규칙을 같이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의견을 맞춰라.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결론을 낼 때는 자주 모여서 의견을 조율해서 맞추라는 거예요. 요즘으로 말하면 민주주의죠. 민주적으로 운영이 돼야 합니다.
셋째, 보시받은 물건을 똑같이 나눠라. 상가는 보시를 받으면 똑같이 나눠야 합니다. 경제적 평등이죠. 오늘날 우리 사회는 경제적 불평등이 굉장히 심화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상위 20%의 소득이 하위 80%의 소득과 같은 정도였는데, 얼마 전에는 상위 10%가 하위 90%와 같은 정도에 이르렀고, 최근에는 상위 1%가 하위 99%와 같다고 할 만큼 빈부격차가 계속 벌어지고 있어요. 이렇게 빈부격차가 커지면 사회 안에 불만을 품고 억울한 마음이 쌓인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서 공동체가 깨지게 됩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누구에게 들어온 보시물이든 모아 두었다가 같이 나누어 씁니다. 그래야 불만이 없어요. 같은 공동체 안에서 개개인의 소비 수준에 차이가 나면 결국 불평과 불만이 생기고 공동체가 붕괴되게 됩니다. 한국은 1960년대 이래 고속성장과 민주화를 거치면서 단기간에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이룬 좋은 점이 있는 반면, 지나친 빈부격차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이 미래 한국사회의 안정성에 큰 장애가 될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래서 빈부격차를 완화하는 정부의 정책이 필요합니다. 지난 정부는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자 최저임금 인상안을 내놓았는데,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결과적으로 빈부격차가 더 벌어져서 의도와 결과가 전혀 다른 상황이 발생했죠. 이것이 국민들이 정부에 대해 실망하게 되는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경제적인 평등은 가정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부모는 보석과 명품으로 치장하는 등 사치하면서 애들에게 검소하게 살라고 하면 불만이 생기기 마련이죠. 자식이 오토바이 사달라고 하는데 위험하다고 안 사주면 아이가 자기 친구와 비교하면서 ‘아버지는 외제차 타면서 나는 오토바이 하나도 안 사준다’ 하고 투덜대잖아요. 그래서 자식을 검소하게 키우고 싶다면 부모 스스로가 검소하게 살아야 합니다. 부모는 돈 있다고 함부로 쓰면서 자식에게 검소하게 살라고 하면 교육적 효과가 없어요. 자녀의 심리만 억압되고 승복하지 않게 됩니다.
넷째, 같은 장소에 모여 살아라. 출가한 승려들의 사회에서는 따로따로 살면 오해가 생깁니다. 그러나 한 방에 같이 살면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자는 것도 투명하게 공개되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지 않고 경제적 평등이 이루어집니다. 같은 장소에 모여 살라는 것은 요즘 말로 생활이 투명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특히 지도층이 사는 게 투명해야 합니다. 청와대를 구중궁궐 같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늘 오해가 생기기도 하는 겁니다. 유언비어가 국민들에게 먹혀드는 이유도 투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승가가 화합하려면 삶이 투명해야 해요.
다섯째, 말을 자비롭게 해라. 위에 네 가지가 갖추어졌다 하더라도 말을 사납게 하면 갈등이 생깁니다. 살면서 분쟁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가 말이에요. 승가가 화합을 하려면 말을 자비롭게 해야 합니다. 말에 감정을 섞어서 날카롭게 말하기 때문에 상대에게 비수가 되는 거예요. 그런 말은 곧 갈등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말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부부로 살면서도 말 때문에 속상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잖아요. 그래서 부드러운 말은 화합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여섯째, 남의 뜻을 존중해라. 사람은 다 뜻이 다르고 의견이 달라요. 그래서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존중’이라는 말은 상대가 무조건 옳다는 뜻이 아니라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에요. 타인의 믿음을 존중하라는 말은 나와 다른 믿음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라는 것은 나와 다른 의견을 인정하라는 거예요.
이 여섯 가지가 갖춰지면 이 공동체는 화합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로 화합하라고 해도 이 여섯 가지가 갖춰지지 않으면 불평과 불만이 커져 결국은 분쟁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화합하는 여섯 가지 길이라고 해서 ‘육화합’(六和合)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 육화합을 한번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육화합은 오늘날 가정과 사회에도 전반적으로 적용이 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사회적 갈등을 어떤 관점에서 보고,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고 화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부처님 가르침을 이어받아서 원효대사는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이라는 책을 썼어요. ‘쟁’이란 갈등을 뜻합니다. ‘쟁을 화합시킨다’라는 뜻의 ‘십문화쟁론’이라는 유명한 글을 써서 붓다의 평화 사상을 ‘화쟁론’으로 정리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서 달라이라마와 틱낫한 스님 같은 분들이 여러 가지 평화적인 활동을 하고 있죠. 그러나 대부분의 불교는 복을 비는데 치중하다 보니 어느 나라 불교라고 할 것 없이 승가가 분열되고 재물과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갈등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에요. 하지만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잘못되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런 세속적인 이익에 지나치게 끌려 다니는 것은 붓다의 출가 정신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강의를 한 후 이번 주 수행 연습 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부처님이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마지막 여정에 대한 강의가 이어집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방송실을 나오니 밤 9시가 훌쩍 넘어 있었습니다.
내일은 아침에 농사일을 한 후 오전에는 두북 수련원에서 수행법회를 하고, 오후에는 서울로 이동하여 수행법회를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