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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도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농사일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텃밭에서 상추를 수확했습니다.
“오늘 밤에 서울에 올라가니까 채소를 많이 수확해서 갑시다.”
스님은 서울 공동체 대중들을 생각하며 상추를 한 잎 한 잎 정성껏 수확했습니다.
“이 정도면 서울 공동체 대중들이 먹을 양이 충분히 되겠어요.”
오늘은 산윗밭에 도라지를 심은 곳에 풀이 많이 나서 공동체 법사님들 중에서 시간 나는 사람은 모두 울력을 하러 왔으면 좋겠다고 스님이 긴급히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법사님들 중 8명이 자발적으로 일손을 도와주러 두북 수련원을 찾아왔습니다.
다 함께 산윗밭으로 올라갔습니다. 지난봄에 산윗밭에 도라지, 모란, 더덕의 씨앗을 심어 놓았는데, 이제 막 싹이 터서 땅 위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스님이 법사님들에게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와줘서 고맙습니다. 이 밭에 잡초를 전부 뽑아주세요. 비가 오면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서 봄에 심어 놓은 씨앗이 햇빛을 못 보고 다 죽어버려요.”
모두 호미를 하나씩 들고 엉덩이 방석을 찬 후 줄을 지어 앉아 잡초를 뽑기 시작했습니다. 비닐 멀칭 위에 모란이 심어진 곳에는 구멍마다 풀이 가득 자라 있었습니다. 여러 명이 붙으니 아주 빠른 속도로 잡초를 뽑을 수 있었습니다.
잡초를 뽑다가 혹시 씨앗까지 딸려올까 봐 조심하며 잡초를 하나씩 뽑았습니다.
모란이 심어진 곳이 깨끗해지자 다음은 도라지가 심어진 곳으로 모두 몸을 옮겼습니다.
법사님들의 손이 한 번 지나가자 푸른 잡초밭이 흙빛 도라지밭으로 변해갔습니다.
“여기 보세요. 잡초를 뽑으니까 도라지 새싹이 올라온 모습이 보이죠?”
잡초를 다 걷어낸 밭에 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도라지 새싹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스님은 곳곳에 듬성듬성 높이 솟아 꽃이 지고 열매를 맺은 고수를 모두 뽑아서 한 곳에 모았습니다.
묘당 법사님은 예초기로 밭 주변과 고랑 사이를 깨끗하게 예초했습니다.
스님은 예초기로 작업을 하지 못하는 곳을 꼼꼼하게 살피며 잡초를 뽑았습니다.
“아이고, 더워라.”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도 땀이 났습니다. 윗단을 마무리하고 아랫단에 내려가 보았습니다. 아랫단에는 어제 향존법사님과 대구경북지부에서 거사님들이 와서 잡초를 많이 뽑아 놓고 갔습니다.
“거사님들이 잡초를 많이 뽑아주셨네요. 여기는 윗단보다 잡초가 더 무성했습니다. 게다가 어제는 비도 많이 와서 일하기가 더 힘들었을 거예요.”
아랫단에는 도라지 씨앗을 많이 뿌렸지만 작년에 들깨를 심은 자리여서 들깨가 많이 자라 있었습니다. 스님은 소물게 난 들깨 모종을 솎아서 빈 곳에 심어 주었습니다.
새벽부터 다섯 시간이나 쉬지 않고 울력을 했습니다. 스님은 잡초가 깨끗하게 뽑힌 밭을 보며 흐뭇한 웃음을 보였습니다.
11시가 다 되어 잡초 뽑기를 모두 마쳤습니다.
“수고했어요. 이제 밥 먹으러 갑시다.”
오늘 하루 종일 잡초를 뽑아야 할 줄 알았는데, 어제 거사님들이 작업을 해놓은 덕분에 오전에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법사님들은 점심을 먹은 후 곧바로 차를 타고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습니다. 스님은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업무를 보았습니다. 오후 내내 원고를 교정하고,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한 후, 저녁에 있을 정토불교대학 수업 준비를 했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8시가 되자 스님은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했습니다. 오늘은 정토불교대학 인간 붓다 제3강을 하는 날입니다.
지난 수업에서는 붓다가 태어난 인도의 자연환경과 사회환경, 그리고 어릴 때 성장 과정에 대해 배웠습니다. 오늘은 붓다가 출가하고 수행한 과정에 대한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일반인들은 대부분 부처님이 출가하신 이유를 사람이 늙고 병들어 죽는 걸 보고 인생무상을 느껴서 출가했다고 합니다. 또는 어릴 때 어머니가 일찍 죽어서 그 슬픔의 영향을 받아서 부처님이 출가했다는 식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이 기록된 경전을 조금이라도 읽어본다면, 부처님께서는 세상의 모순과 세상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출가를 결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세상의 모순과 세상 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서 부처님은 안온한 생활도, 왕위도 버리고 미련 없이 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니 다른 분도 아니고 부처님에게 ‘높은 자리에 앉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은 모순 아닐까요? 부처님이 버린 것을 부처님께 달라는 격이니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면서 부처님의 이름을 빌려서 세속적인 복을 구하는 것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에요. 부처님을 무한한 능력자인 신처럼 생각해서 ‘제가 어려우니까 좀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복을 구하는 것은 종교로서 불교입니다. 부처님은 종교적인 신앙의 대상이 아니에요. 일체중생을 고통에서 구원하려는 큰 원을 세우고 진리를 탐구하신 분이셨습니다.
출가(出家)와 가출(家出)의 의미를 사전에 찾아보면 둘 다 ‘집을 나간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출가와 가출이 내포한 의미는 달라요. 집은 우리를 보호하는 안온한 안식처인 동시에 우리를 속박하는 굴레라는 두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에서 받는 속박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가는 것을 가출이라고 합니다. 아이들도 사춘기가 되면 부모 간섭이 싫으니까 집을 나가잖아요. 결혼한 성인들도 결혼 생활이 답답하면 보따리를 싸들고 집을 나갑니다. 집을 나가면 속박에서는 벗어나지만 안온함도 같이 없어집니다. 나그네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외로워지면 다시 또 집으로 돌아갑니다. 더 좋은 집을 찾아 들어가는데 거기서 살아보면 또 속박이 있어요. 그래서 또 집을 뛰쳐나옵니다. 이렇게 좋은 집을 찾아서 이 집 저 집 들락날락하는 것을 가출이라 해요. 고향도 마찬가지예요. 고향은 내가 어렸을 때 보살핌을 받은 곳이자 나를 아는 사람들이 있고 나를 반겨주는 곳이에요. 하지만 온갖 윤리, 도덕, 관습으로 나를 속박하는 곳이기도 해서 고향을 떠나고 싶어 하죠. 그런데 또 타향에 가면 외로워서 고향이 그리워집니다.
출가는 집이 안락함인 동시에 나를 속박하는 굴레라는 사실을 꿰뚫어 보고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집을 불태워버리는 거예요.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안락함도 포기해버리는 겁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즐거움마저도 놓아버려야 한다는 이치와 일맥상통합니다. 우리의 삶은 늘 이런 이중성을 가지고 있어요. 이 사실을 알면 더 좋은 집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집을 불살라버리는 거예요. 해탈과 자유를 위해 굴레와 안락함을 동시에 포기하는 것을 출가라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왕궁을 떠날 때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나셨습니다. 왕궁은 집 중에서도 제일 크고 좋은 집이잖아요. 그런 왕궁을 똥 누고 뒤도 안 돌아보듯이 떠나셨어요. 그래서 부처님의 출가를 유성 출가라고 합니다. 왕궁을 뛰어넘었다는 얘기예요. 왕궁이 상징하는 의미는 첫째, 기득권입니다. 왕궁을 뛰어넘었다는 것은 왕이나 왕자로서 누리는 기득권을 버렸다는 거예요. 높은 신분을 버리고 가장 낮은 신분으로 돌아간 거예요. 둘째, 기존의 가치관입니다.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많이 먹고, 많이 입고, 큰 집에 살고, 쾌락을 즐기고 사는 게 잘 사는 거라는 이런 기존의 가치관을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거지로 돌아간 거예요. 출가하면 옷을 갈아입잖아요. 옷을 갈아입으려면 옷을 벗어야 합니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기득권을 버린 걸 말해요. 머리를 깎는다는 것은 기존의 가치관을 버려버린 거예요. 그런데 기득권은 버리지 않고 기존의 가치관도 버리지 않은 채 껍데기인 옷만 벗고 머리만 깎으면 출가수행자가 되는 줄 알아요. 그런 모양새만 흉내 내니까 출가하고 나서도 세속적 욕망으로 괴로운 겁니다.
출가를 했는데도 높은 지위를 뽐내고 돈을 많이 가지고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런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와 명예와 권력이 좋아서 그 길을 추구합니다. 그것도 독을 삼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위지만,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출가한 사람이 부와 명예와 권력을 추구한다면 더욱 모순입니다. 매일 탐진치의 유해함을 설해놓은 경전을 읽고 대중에게 그 사실을 본인 입으로 설하고 있으면서 본인은 탐진치를 추구하고 있으니까요. 세상에서는 이런 분들을 보고 욕을 하지만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부처님께서 왕궁에 계실 때는 출가만 하면 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막상 출가를 하고 정진을 시작한 지 3일이 지났는데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거기다 배가 고파서 밥을 얻어먹는데 그동안 왕궁에서 부드럽고 좋은 음식만 먹다가 남이 버린 돼지죽 같은 음식을 먹으니까 입에 넣자마자 토를 해버렸어요. 죽어도 못 먹을 것 같았습니다. 밤이 되자 갖가지 해충들이 물고 들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추위가 엄습해왔습니다. 그때 부처님도 ‘내가 잘못 결정했나’ 하는 회의가 들었지만 바로 10년여 전을 생각합니다.
‘내가 지난 10년여 동안 출가하기를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고 부모님께도 간청했는데 출가하고 일주일도 안 된 지금 벌써 후회하는구나.’
이렇게 자신을 경책 했어요. 결심하면 무엇이든지 다 되는 절대적 존재로서 부처님이 아니라 참으로 인간적인 부처님의 모습입니다. 그 글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80페이지입니다.”
스님은 강의 중간중간에 직접 경전 속 이야기를 읽어주었습니다. 경전의 기록에 근거해서 스님의 강의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도 노트북 앞에서 경전의 내용을 함께 읽었습니다.
“부처님도 대단한 결심을 하고 출가하셨지만, 처음에는 이렇게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자기를 돌아보고 초심으로 돌아가죠. 처음에는 혼자서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깨닫지 못하자 스승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이어서 스님은 부처님이 찾아간 여러 스승들과의 만남을 마치 영화를 보듯이 주욱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부처님은 비록 그 스승들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 한계를 깨닫게 되고 결국 혼자서 정진에 들어갑니다.
“왕사성 서쪽으로 80km 정도 가면 가야라는 아주 오래된 도시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가야 주위에 있는 가야산에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가야 시내를 흐르는 네이란자라 강 건너편에 가야로부터 6km 정도 떨어져 있는 ‘둥게스와리’라고 불리는 산이 보였습니다. 그 산 아래는 가야 사람들이 노예의 시신을 갖다 버리는 시타림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그곳이 수행처로는 안성맞춤이라 생각하셨어요.
‘이 세상에 그 누구도 해 보지 못한 최고의 수행을 해보겠다’
이렇게 고행을 결심하신 부처님은 시타림에서 거의 밥도 안 먹고 옷도 안 입고 잠도 거의 안 자고 용맹정진을 하셨어요. 그 당시 부처님의 모습은 피골이 상접해서 다른 사람이 보고 죽은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해요. 경전에는 그 당시 부처님께서 하루에 대추 한 알을 먹다가 이틀에 한 알을 먹다가 삼일에 한 알을 먹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왜 하필 대추를 드셨을까 궁금했는데 제가 직접 수행하신 터에 가보니 주변에 정말 야생 대추나무가 많았어요. 부처님께서는 한 번 앉으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으셨고, 몸도 안 씻으니까 몸에 막 이끼가 끼고 이끼 위에 벌레가 생겼어요. 그 벌레를 먹기 위해서 부처님의 어깨에 새가 앉아서 벌레를 쪼아 먹었어요. 그때 양치는 아이들이 버려진 시신에 패물을 뒤지러 왔다가 부처님을 발견하고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내기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에게 침을 뱉어보고, 흙덩이도 던져보고, 귀에 나뭇가지도 쑤셔 박았습니다. 부처님은 그 고통도 지그시 참고 성내지 않고 명상에 집중했어요. 이렇게 극심하게 고행을 하셨습니다. 흔히 부처님께서 6년 고행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스승을 찾아간 기간까지 다 합친 수행 기간이 6년입니다. 그럼 경전에 나온 부처님의 고행 장면을 한 번 보겠습니다.
‘뱃가죽은 등허리에 붙었고 대나무 마디처럼 갈비뼈가 드러나고 팔을 손바닥으로 쓸면 팔에 있는 털이 드르륵 다 떨어져 버렸다’
이런 극심한 고행을 했으니까 눈앞에 죽음이 왔다갔다한 거예요. 부처님께서 스스로 숨을 쉬지 않는 고행을 할 때 몸에서 일어난 통증을 묘사한 부분을 보겠습니다.
‘고타마가 입과 코와 귀와 정수리의 숨을 모두 멈추자 바람이 벼락같은 소리를 내며 늑골 사이에서 소용돌이쳐서 마치 백정이 날카로운 칼로 몸을 가르듯 했다’
저도 이와 같은 통증을 경험해봤어요. 저도 젊은 시절에 물고문을 당한 경험이 있었는데 숨을 못 쉬게 하니까 정말로 여기에 묘사된 것 같은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강제로 숨을 못 쉬게 하니까 어쩔 수 없었지만, 자기 스스로 숨을 멈추고 이렇게까지 고행을 한다는 것은 죽어도 좋다는 각오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죽을 각오까지 하는 결심을 대결정심이라고 해요. 부처님은 일체중생과 함께 행복해지는 진리를 찾아 출가했을 뿐만 아니라 출가 후에는 극심한 고행까지도 행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까지 했는데도 깨닫지 못했다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이렇게 고행을 하시다가 탁 깨달았다는 얘기가 나와야 여러분이 공부하는 맛이 날 텐데 그렇게 고행을 하셨는데도 깨닫지 못했다는 얘기로 오늘 수업은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잖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거기서 좌절하지 말고 이 길이 바른길이라면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더욱더 정진해 나가야 합니다.”
여기까지 강의를 한 후 이번 주 수행 연습 과제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부처님이 어떻게 깨달음을 얻었는지에 대해 배우기로 하고 수업을 마쳤습니다.
방송실을 나온 스님은 곧바로 차에 올라타 두북 수련원을 출발해 서울로 향했습니다. 내일 서울에서 평화재단 국제 심포지엄에 열리기 때문입니다.
고속도로 위를 4시간 동안 달려 새벽 1시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했습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평화재단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한 후 저녁에는 수행법회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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