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장수 죽림정사에서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근대불교의 중흥조이신 용성조사님의 탄생 제158주기 기념 법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기념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 5시에 두북 수련원을 출발했습니다.
차창 밖으로 날이 개었다가 흐렸다가 다시 비가 내렸다가를 반복했습니다.
“비가 와서 천만다행이에요. 그래도 비가 너무 많이 오면 논둑이 무너질 수 있으니까 농사팀 행자님들에게 점검을 꼭 하라고 해주세요.”
고속도로 위를 3시간 동안 달려 8시에 장수 죽림정사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 전 지방선거에서 장수군수로 당선된 최훈식 당선인이 죽림정사를 찾아 스님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스님은 이 지역에서 태어난 용성조사님의 업적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용성조사님의 실제로 활동하신 내용에 비해서 그 업적이 세상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본강점기에 많은 불교지도자들이 친일활동을 해서 그 제자들마저도 용성조사님의 독립운동 업적을 많이 드러낼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저의 스승이신 불심도문 큰스님이 그 업적을 알리기 위해 평생 동안 일해 오신 덕분에 그나마 이 정도라도 알려진 겁니다. 일부러 추앙할 필요는 없지만 실제로 활동한 내용은 사실 그대로 알려야 하지 않느냐 하는 측면에서 앞으로 장수군에서도 관심을 가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저도 관심을 갖겠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군수님은 스님에게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국민들의 지지로 군수에 당선이 되었는데, 초심을 어떻게 하면 잃지 않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람이란 환경에 물들기가 쉬워요. 군수를 하면 사람들이 늘 찾아와서 굽신굽신 하기 때문에 1년만 지나면 자기도 모르게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고 자연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이걸 극복하려면 행정적으로 업무를 결재할 때만 군수 역할을 하고, 나머지 시간에 사람들을 만날 때는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야 해요. 그렇게 해야 군수를 그만둬도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목에 힘을 주고 다니면 은퇴했을 때 친구가 없어집니다. 군수라는 것은 역할에 불과해요. 군수가 나는 아닙니다. 군수 역할은 분명하게 맡아서 책임을 다 하되 군수 역할을 안 해도 되는 자리에서는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해야 해요. 그러면 역할도 잘할 수 있고, 인간적인 관계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겸손해지는 방법은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는 거예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군수님 일행을 배웅하고 행사가 열리는 용성조사 교육관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늘은 코로나 이후 2년 6개월 만에 처음으로 정토회 공식 행사가 대중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습니다. 정부의 방역 지침이 완화되면서 대중이 모이는 행사가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경남지부 회원 170여 명이 죽림정사 교육관에 자리한 가운데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전국의 정토행자들은 온라인 생중계로 기념법회에 참석했습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을 한 후 순국선열 및 호국 영령에 대한 묵념을 하고, 용성조사님의 일대기를 영상으로 시청했습니다.
이어서 대중은 독립운동가 백용성조사 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스님에게 기념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용성조사님이 백 년 전에 행한 업적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음력 5월 8일, 석가여래부촉법 제68세이시고,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신 용성 진종조사님의 탄생 158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나라가 아주 어려운 시기에 태어난 분
용성조사님은 조선 말기인 1864년에 태어나셨습니다. 조선 말기는 나라가 어지러워 백성들의 삶이 무척 어려운 시기이면서 동시에 왕이 나라의 주인인 선천의 시대가 가고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후천의 시대가 열릴 기운이 일어나는 시기였습니다. 용성조사님의 삶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과 견주어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브라만교가 쇠퇴하고 세상이 극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출생하셔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인생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용성조사께서도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셔서 젊은 시절을 보내셨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하여 긴 수행 생활을 거쳐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 불교를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큰일을 하셨습니다.
용성조사님은 이곳 전라북도 장수에서 14세까지 사셨습니다. 14세 때 부처님 꿈을 꾸고 그 부처님을 찾아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남원 교룡산성 덕밀암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혜월화상을 만나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고 행자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혜월화상은 최제우 대신사를 숨겨줬다는 죄목으로 승적이 박탈되고 절에만 머물러야 하는 가택 연금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법적으로 용성조사님을 제자로 삼을 수가 없었어요. 혜월화상은 16세의 용성조사님을 해인사로 보내셨고, 용성조사님은 그곳에서 정식으로 출가하여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후 용성조사님은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수행 정진하여 견도(見道)하고 수도(修道)하고 아도모례원에서 오도(悟道)를 성취하셨으며, 깨달음을 이룬 후의 보림(保任) 정진까지 혜월화상의 지도를 받으셨습니다.
용성조사님께서는 혜월화상의 가르침으로 통해 불법에 능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백성이 주인 되는 후천개벽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견하셨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과감히 나섰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조 5백 년 동안 탄압을 받아 위신이 추락한 불교를 되살리고자, 대중이 쉽게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불교의 대중화에도 힘을 쏟으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사는 사회 속에서 불법이 실현될 수 있도록 생활 불교를 주창하셨습니다.
미래를 꿈꾸며 거름을 주고 씨앗을 심은 분
그분이 사셨던 조선말부터 일제강점기는 혼란과 압제, 절망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시기에 사시면서도 번영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꿈꾸면서 거름을 주고 씨앗을 심는 복을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이렇게 발전한 대한민국에 살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용성조사님는 한 사람의 훌륭한 수행자, 전법 활동가를 넘어서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독립운동에 앞장서셨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자 국운이 기울었다는 것을 감지하시고, 여기저기 만석꾼들의 후원을 받고, 고종의 밀명을 받아 1907년에는 중국으로 가셨습니다. 중국 성지순례라는 명목으로 건너가셨지만, 실제로는 당시 중국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인 상해에 앞으로 나라가 망한 후 망명 정부를 세울 것을 염두에 두시고 재정투자를 해두셨던 것입니다. 1919년 3월에 3·1운동이 일어나고 바로 4월에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3월에 한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외국에 바로 청사를 구입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을까요? 누군가 미리 준비해두지 않았다면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죠. 그것을 보이지 않게 미리 준비해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한 이후에도 용성조사님께서는 상해임시정부에 꾸준히 재정지원을 하셨습니다.
결국 용성조사님께서는 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하시고 1940년에 돌아가셨지만, 1945년 해방이 되자 고국으로 돌아온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원 30여 명이 용성조사님의 영정이 모셔진 대각사를 방문해 감사 인사를 드렸습니다. ‘큰스님께서 보내주신 자금으로 독립운동이 가능했습니다’ 하고 감사를 표하고, 그 유지를 잘 받들어 나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사진이 제대로 보관되지 않아 용성조사 업적의 진위에 논란이 있었는데,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어 그 진실이 입증될 수 있었습니다.
▲ 김구 선생이 상해 임정 요인 30여 명을 데리고 종로 대각사를 방문하여 용성 스님의 영전에 참배하고 찍은 사진
나라를 일으키고 불교를 일으킨 분
용성조사께서는 평생 동안 불교를 다시 일으키고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를 불교중흥과 민족중흥이라고 말합니다. 정토회가 제1차 만일결사를 시작하면서 불교중흥과 민족중흥을 목표로 내세운 것은 용성조사님께서 이루지 못한 꿈을 우리가 이루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용성조사님의 탄생 158주년을 맞이하여 조사님의 생애를 다시 한번 돌아보면서 그 뜻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용성조사님은 불교를 바로 세웠을 뿐만 아니라 세상과 분리되지 않고 함께하는 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에 ‘한국 근대 불교의 중흥조’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는 용성조사님을 과대평가한 말이 아닙니다. 용성조사님께서 하신 일은 오히려 제대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예요. 용성조사님의 업적을 복원하는 일을 저의 스승이신 불심도문스님께서 시작하셨고, 우리는 그 유지를 이어나가야 합니다.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부처님 법을 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인연 맺고 사는 대한민국을 부흥시키는 일을 하는 이유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기념법회가 불자로서 가야 할 길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가야 할 길, 이 두 가지를 함께 새기는 다짐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홍서원으로 기념법회 생방송을 마친 후 점심 공양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둠별로 준비해 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습니다.
점심 식사 후 12시 30분부터는 경남지부 회원의 날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용성조사 탄신일을 맞이하여 지부 전체 회원이 으뜸절에서 소통과 화합의 장을 갖기 위해 마련된 시간입니다.
지부장님의 인사말을 들은 후 지부법사단을 소개하고, 지회별 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늘 온라인으로만 만나다가 2년 6개월 만에 얼굴을 마주하게 된 회원들은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지회별로 자리에서 일어나 소개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오늘을 기념하며 통일특별위원회 멤버들이 행복학교 송을 부르며 축하 공연도 선보였습니다. 교육관 실내는 뜨거운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습니다.
반가운 마음을 뒤로하고 대중은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도 웃으며 반가운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점심 잘 드셨습니까?”
“네.”
“2년 반 만에 이렇게 만났네요.” (모두 박수)
스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환호와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이제 코로나가 겁나지도 않나 봐요? (웃음) 초기에는 코로나19 확진자가 전국에서 몇 천 명만 나와도 겁을 내더니 요즘은 만 명 전후로 확진자가 나오는데도 사람들이 별로 겁을 내지 않는 것 같아요. 이제 면역이 생겼나 봅니다. 그러나 아직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위험이 없어진 건 아닙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잘 몰라서 무서워했지만 2년 정도 겪어 보니 조심은 해야 하지만 두려워할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백신을 맞으면 되고, 그래도 걸리면 치료를 받으면 되고, 그것도 안 되면 죽게 되는 수밖에 없죠.(웃음) 이렇게 어느 정도 감이 잡혀서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조화를 이루는 정토회
그래도 지난 2년 반 동안 정토회가 활동을 전면 중단하지 않고 온라인으로 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과학기술 문명의 혜택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온라인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정서적으로 만족감이 떨어지는 단점도 있었는데요. 앞으로는 온라인의 장점도 살리면서 단점은 대면 활동을 통해 보완해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온라인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기도나 학습, 회의는 이동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지금처럼 온라인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정토회는 ‘마음이 가는 곳에 부처님이 있고, 수행자가 머무르는 곳이 다 절이다’ 하는 관점으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내 방을 법당으로 만들고 그곳에서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온라인의 편리한 점은 활용하고, 실천 활동은 가까운 지역의 으뜸절과 실천 장소에 모여서 해보려고 합니다.
이제 지역 주민들을 향해
코로나 이전에 정토회 회원들은 대부분 법당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일반 국민에게는 정토회 활동이 법당 관리하는 것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나 온라인 정토회로 전환하면서 법당 관리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대신 지부별로 지정된 으뜸절에서 필요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더 여유가 있으면 각자 사는 지역에서 실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지역 주민들이 여러 가지 혜택과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실천 활동을 해나간다면, 정토회의 활동이 종교를 넘어서서 국민적인 호감과 지지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을 첫출발로 삼아 우선 각 으뜸절에서 지부별로 회원 모임을 할 예정입니다. 이것을 기회로 지회별, 모둠별로 자기 지역에서 실천할 수 있는 활동들을 조금씩 넓혀 가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한 시간 동안 스님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즉석에서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정토회 봉사 활동이 재미있고 보람이 있지만, 가족들의 성화가 너무 크다며 어떻게 봉사 활동을 조정해야 할지 어려움을 이야기했습니다.
봉사는 보람 있지만 가족들이 싫어해요
“저는 모둠장 소임을 하고 있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저녁에 회의나 법회가 빠지는 날이 없습니다, 주말에도 한 달에 두 번 정도 죽림정사에 와서 봉사 활동을 하고 갑니다. 또 죽림정사에서 홍보팀을 맡아 영상도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일이 많고 조금 힘들어도 할 만하고 보람도 있는데, 집에서 성화가 대단합니다. 제가 일찍 들어간다고 해서 애들이 반겨주는 건 아닌데, 늦게 가면 핀잔을 줍니다. 또 아내는 한 번씩 자기 기분이 안 좋으면 이혼을 하자고 해요. 제가 이 상황에서 더 열심히 봉사활동을 해야 할지, 아니면 조금 줄여야 할지 스님께 묻고 싶습니다.”
“첫째, 정토회 활동을 하고 싶고 조금 힘이 들어도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계속하면 됩니다. 대신에 아내와 아이들이 뭐라고 해도 큰소리치지 말고 ‘늦게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해야 해요. 아내가 ‘말로만!’이라고 하면 ‘예, 말로만이라도 죄송합니다’ 이렇게 숙이면 이혼당할 일은 없습니다. 이 일 때문에 이혼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서로 주장을 굽히지 않고 갈등하다가 성질이 나서 못 살겠다고 하죠. 배우자가 경제 능력이 없어도 공손하면 누구도 버리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정토회 공동체에 들어온 사람도 성질이 더러워서 나가지, 일을 못해서 나가는 경우는 없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질문자가 이 활동이 좋으면, 항상 숙이는 자세로 가족들을 대해 보세요. 처음에는 아내도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생각이 점점 바뀔 거예요. 남편에게 불만은 조금 있어도 어디 가서 이렇게 공손한 남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이혼을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내 인생의 원칙은 정하기 나름입니다. ‘내가 출가는 못하더라도 이 정도 봉사는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이렇게 딱 원칙을 정할 수도 있죠. 질문자도 가끔 ‘당신 그러면 나도 확 출가해버린다’ 이렇게 한번 해보세요. 소신껏 살고 싶다면 이런 관점을 가지면 돼요. (웃음)
둘째, 질문자가 판단하기에 아내가 진짜 집을 나갈 것 같고 가족들의 불만이 심하다면, 정토회 업무를 조금 조절해야죠.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정을 살펴보세요. 불교대학 진행자라면 수업하는 날, 사전 연습하는 날, 회의하는 날, 학생들과 함께 실천 장소 가는 날 등 일주일에 꼭 참가해야 하는 날을 계산해 보고 추가로 다른 소임을 더 할 수 있겠는지 판단을 하는 거예요. 모둠장은 하겠는데 불교대학 진행까지는 못 하겠거나, 진행은 하고 모둠장은 내려놓을 수도 있어요. 질문자가 시간을 계산해 보고 한 개 정도는 겸직할 수 있으면 하고, 한 개도 못하겠다면 전법활동가는 사표를 내면 됩니다. 내가 정토회 활동에 동의하지 않는 게 아니라 지금 내 현실로는 어려우니까 ‘다음에 형편이 되면 하겠습니다’하고 사표를 내도 돼요. 업무 조정은 지회장하고 의논해서 정리를 하면 됩니다.
정리하면 첫째, 질문자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활동하되 집에 가서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사는 길이 있습니다. 둘째, 업무를 조정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중에 어떤 길을 갈 것인지는 질문자가 선택하면 됩니다.
그런데 가족들의 반응 때문에 불안해하는 건 수행적 관점이 안 잡힌 거예요. 집에 갈 때는 떳떳하게 들어가야죠. 내가 사회에 해를 끼치는 일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나 가족적 이해라는 관점에 서 있는 사람이 볼 때는 질문자를 문제 있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가족을 떠난 관점에서 보면 좋은 일이지만. 가족적 관점에서 볼 때는 다른 데 정신을 쏟으니까 나쁘게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은 청정하고 더 좋은 세상을 위해서 활동을 하는 거니까 위축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가족의 입장에선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고 이해하고 그 비난은 감수를 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더욱 겸손해지고 더욱 당당해져야 합니다. ‘겸손하되 당당하라’ 이는 부처님께서 수행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오빠에게 자꾸 돈을 빼앗겨서 저한테 돈을 맡겼는데, 12년이 지나고 오빠가 다시 돈이 필요해지자 어머니가 맡긴 돈을 달라며 저에게 소송을 걸었습니다. 저는 너무 억울한데, 어떡하면 좋을까요?
딸이 강아지를 키우고 있는데, 새로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왔습니다. 두 달 전에는 새끼 고양이 두 마리를 또 데리고 왔고요. 고양이 털 때문에 너무 힘든데, 어떡하죠?
정토회가 좀 더 폭넓게 사회활동을 할 수는 없을까요? 30년 동안 활동을 했는데도 확산이 별로 되지 않은 것 같아요. 좀 더 저변을 넓히는 활동을 하면 좋겠습니다.
더 질문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약속한 한 시간이 다 되어 즉문즉설을 마쳤습니다. 스님이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지난 2년 반 동안 코로나로 인해서 맨날 화면으로만 보고 직접 보지 못했는데요. 제가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이에요. 저는 죽고 미리 찍어놓은 영상을 보여준 게 아니에요.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습니다. (웃음)
물가 상승 시대, 적게 먹고 적게 쓰는 삶
온라인 정토회로 전환하고 꼭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니죠. 앞으로 물가가 굉장히 많이 오를 거예요. 건축 경비도 오르고, 곡물 가격도 오르고, 장바구니 물가도 이미 많이 올랐죠. 전쟁을 비롯한 여러 가지 국내외 사정이 겹쳐서 물가가 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토회가 법당을 정리한 일은 단기적으로 보면 조금 섭섭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지출을 팍 줄였기 때문에 좋은 일입니다.
법당을 관리했으면 유지를 해야 하니까 적자가 나면 사람들에게 자꾸 돈 이야기하게 돼요. 그러면 시간이 흐를수록 법당에 오는 사람들에게 자꾸 부담이 됩니다. 어려운 걸 뻔히 아는데 내가 돕지도 못하면 마음이 무거워지죠. 그런데 정토회는 어차피 적게 먹고 적게 쓰는 삶을 지향하니까 법당을 정리해서 수입도 적고 지출도 적어진 건 잘 된 일이에요. 그러니 앞으로 활동하는 데에 재정 부담은 가지지 않아도 됩니다. 자기가 형편이 되어서 좋은 마음으로 보시하는 건 좋지만 사람들에게 보시하라고 강조할 필요는 없어요.
제가 볼 때 앞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면이 닥쳐도 정토회는 크게 구애받지 않고 잘해나갈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정토회 활동을 하려면 보시보다도 봉사가 문제죠. 숫제 돈 좀 내라 하면 팍 내겠는데 돈만 내서 안 되고 반드시 봉사를 해야 하니까 힘들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힘들어도 지나 놓고 보면 보람이 있을 거예요. 온라인으로는 전법활동을 하고, 으뜸절이나 실천 장소에 나오셔서 봉사활동도 하고, 지역에서 틈나는 대로 봉사하면서 2차 만일결사를 준비해 나갑시다. 다시 한번,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각자 앉은 방석을 정리한 후 다 함께 대웅전 앞으로 나가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찍는 단체 사진이었습니다.
스님은 대중들에게 인사를 한 후 곧바로 차에 올라탔고, 대중은 모두 경남지부 회원의 날을 맞이해 도량의 구석구석을 정비하는 울력을 함께 했습니다.
“저도 대중들과 같이 울력을 하려고 작업복까지 챙겨 왔는데, 오후에 회의가 연달아 잡혀서 지금 출발해야겠어요. 미안합니다.”
스님은 차창을 열고 울력을 하고 있는 대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한 후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다시 3시간 동안 고속도로 위를 달려 두북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오후 5시부터는 공동체 법사단 회의에 온라인으로 참석하고, 저녁 7시 20분부터는 인도성지순례 준비회의에 화상으로 참석했습니다. 회의를 다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긴 하루였습니다.
내일은 공동체 법사단과 함께 산윗밭에 올라가 잡초 뽑기 울력을 하고, 저녁에는 정토불교대학 인간붓다 제3강 수업을 생방송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