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4.16 천일결사 기도, 경전대학 즉문즉설, 평화재단 통일의병 농사 체험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괴로워요, 어떡하죠?”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벽 4시 30분, 오늘은 천일결사 기도를 생방송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예불, 삼귀의, 수행문, 참회, 108배, 명상, 경전독송을 차례대로 했습니다.

그들은 탁발을 마치고 마을을 떠날 때,
아무것이라도 갖고자 하여 훔쳐보는 일이 없습니다.
실로 미련 없이 떠나갑니다.
때문에 저는 ‘수행자’들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창고에도, 병에도, 광주리에도
자신의 물건을 저장하지 않습니다.
저장해 두어서는 안 된다는 계율에 합당하게
완전히 조리된 음식만을 탁발합니다.
때문에 저는 ‘수행자’를 좋아합니다.”

<로히니 비구니>

경전독송이 끝나자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요즘 우리가 읽는 경전은 ‘장로니(長老尼)계’라고 하여 원로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담입니다. 일종의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

특히 오늘 읽은 경전에서는 ‘수행자들은 아무런 욕심이 없어서 어떤 물건에 대해서도 욕심을 내거나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하는 무소유 정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기 집도 버리고 수행의 길을 떠난 사람이 남의 것을 탐하지는 않겠죠. 부처님께서도 빔비사라왕이 ‘이 나라의 왕이 되어주시오’ 하고 청했을 때 ‘내가 내 나라도 버리고 떠난 사람인데, 왜 굳이 남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하겠는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라’라는 큰 재물을 준다고 해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데 다른 재물은 말할 것도 없잖아요. 이것은 필요 없는 똥 무더기는 모두 버릴 뿐이지 크다고 해서 갖고 작다고 해서 버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이를 입 안에서 뱉은 가래에 비유해서 표현했습니다.

수행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음으로 해서 오히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걸어갑니다.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수행자들이 지니고 있었던 유일한 것은 몸을 가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옷과 한 끼의 식사였습니다. 음식도 저장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당장 걸식을 해서 얻은 음식만 먹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경쟁해서 갖지 않는다

요즘 불교를 공부하는 분들 중에는 수행자가 보시를 받는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자급자족을 하는 것이 좋고, 정토회에서도 최대한 자급자족하기 위해 공동체 대중들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출가의 정신은 세상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경쟁해서 갖지 않는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 필요한 물건이라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수행자는 그것을 탐하거나 갖지 않습니다. 걸식을 할 때도 좋은 음식을 찾아서 탁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은 간혹 스님들께 대접을 할 때 좋은 음식을 대접하는데, 부처님 당시 탁발의 문화는 먹다가 남은 음식을 걸식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문화였습니다.

태국과 같이 스님들을 존경하는 불교 국가에 가보면 사람들이 밥을 해서 가장 먼저 좋은 부분을 스님들 몫으로 대접합니다. 스님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죠. 하지만 부처님 당시 탁발의 문화는 그렇게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먹다가 남은 음식을 수행자에게 주는 문화였습니다.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헤지고 떨어진 옷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 필요로 한다면 수행자는 그것을 가지기 위해 경쟁하거나 소유하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 그 누구도 가지지 않으려고 했던 옷은 시신을 덮었던 ‘분소의’였습니다. 분소의는 꼭 천이 헤지거나 낡았다기보다, 시신을 덮었던 천 조각이니까 사람들이 부정 탔다고 생각하여 버리는 천이었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시신을 덮었던 분소의는 가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분소의로 몸을 가렸습니다.

집이 아무리 낡아도 누군가 살 수 있는 집이라면 수행자는 그곳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동굴에서 살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사람이 머물지 않는 빈 집의 처마 밑에서 지내곤 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의 처마에서 지내는 것 까지는 허용이 됐던 겁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 데바닷타는 처마에 머무는 것까지 반대할 정도였습니다.

수행자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을 두고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먹을 것을 내가 먹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입을 것을 내가 입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자는 곳에 내가 자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출가의 정신입니다.

요즘은 출가자라고 해도 부처님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서 지내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대신 정토회에서는 이런 기준을 세우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수행자의 모습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최저 생활수준을 유지해서 산다’

사람들이 보시를 해주는 덕분에 폐교를 재활용하여 비가 새지 않는 건물에서 지내고 있긴 하지만, 그만큼 우리의 역할과 활동을 잘해나가야 합니다.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고 사람들의 보시 위에서 생활한다면 안 됩니다. 자칫 지금의 생활에 익숙해져서 세상 사람들을 따라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추구하거나 부자의 넉넉한 생활을 추구해서도 안 됩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곳에 지내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은 종교지도자나 불교를 가르치는 학자로서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수행자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 만족하기

오늘 읽은 경전의 내용을 보면, 좋은 음식, 좋은 집, 좋은 옷에 욕심을 내는 건 수행자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내용을 지금부터 모두 적용하라는 말은 아니에요. 하루아침에 가지고 있던 것들을 다 버리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더 욕심을 내지 말라는 겁니다. 지금 먹는 음식에 만족하고, 지금 입는 옷에 만족하고, 지금 사는 집에 만족하라는 의미입니다. 수행자의 정신으로 따지면 우리가 지금 먹고, 입고, 자는 환경은 아주 좋은 편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더 이상 뭔가를 가지려고 껄떡거리거나 불안해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수행자라면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검소하게 살아야 합니다. 검소하게 살면 껄떡거리지 않으니까 우선 내가 자유롭고 행복해집니다. 검소하게 살면 남이 보기에도 좋아 보여요. 항상 남기 때문에 풍족감을 느끼며 살 수 있습니다. 그 남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에 늘 공덕을 지으며 살 수 있습니다. 빚지는 삶이 아니라 공덕을 쌓는 삶을 살게 됩니다.

검소하게 사는 건 실제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보다 더 큰 집에 사는 사람, 나보다 더 좋은 음식을 먹는 사람, 나보다 더 좋은 옷을 입은 사람과 자기 자신을 비교해서 껄떡거리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음식이 있는데도 더 좋은 음식을 탐하고, 옷이 있는데도 더 좋은 옷을 탐하고, 집이 있는데도 더 좋은 집을 탐합니다. 여북하면 옷에 가짜 유명 상표를 달고, 가짜 목걸이를 하고, 가짜 귀걸이를 하면서까지 꾸미려고 하겠어요. 이런 행동들은 모두 마음이 공허하고 허전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들입니다.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얻어먹고, 나무 밑에서 자는 생활을 하더라도 마음이 따뜻하고 당당해야 합니다. 마음이 당당하지 못하니까 좋은 옷으로 자신을 내세우려고 하고, 먹는 음식으로 자신을 내세우려고 하고, 재산이나 지위로 자신을 자랑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실제로는 마음이 허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수행 정진을 해서 마음이 안정되면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우리나라도 살리고 다른 나라도 살리고, 사람도 살리고 자연도 살리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오전 10시부터는 경전대학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오는 3월에 경전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은 1100여 명입니다. 지난주까지 금강경 수업을 세 번 진행했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금강경을 배우면서 궁금했던 점들을 스님에게 묻는 시간입니다.

먼저 스님이 금강경은 어떤 경전인지,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은 무엇인지, 경전대학에서는 무엇을 중점적으로 공부해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불교대학에서는 ‘내가 화가 나는가?’, ‘내가 괴롭지 않은가?’를 주로 점검했다면, 경전대학에서는 ‘내가 공부를 함으로 인해 남편이 좋아지는가?’, ‘내가 공부를 함으로 인해 아내가 좋아지는가?’, ‘내가 공부를 함으로 인해 아이들이 좋아지는가?’, ‘내가 공부를 함으로 인해 우리 사회가 좋아지는가?’ 이런 수행 과제가 추가됩니다. 그래서 경전대학을 공부하면서는 지구 환경을 위한 실천 활동도 해야 하고, 평화를 위한 실천 활동도 해야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실천 활동도 해야 합니다.

경전대학은 생활불교입니다

남편이 어떻든, 아내가 어떻든, 부모가 어떻든, 자식이 어떻든, 나는 괴롭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불교대학의 핵심 과제였다면, 경전대학을 공부하면서는 술 먹는 남편을 어여삐 여기고, 애먹이는 자식을 불쌍하게 여겨서, 나도 편하고 그들에게도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핵심 과제입니다. 즉, 남편, 아내, 부모, 자식, 나를 욕하는 직장상사나 동료들도 내가 구제해야 할 대상이고 함께 살아가야 할 대상임을 배우게 됩니다. 조금만 더 깊이 살펴보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 팔과 같고, 내 다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경전대학은 한편으로는 더욱더 생활불교에 가깝게 다가간다고 느껴질 수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내 문제도 다 해결하지 못했는데 가족과 이웃까지 보살펴야 한다고 하니 더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곧 수행입니다. 명상이나 절만이 수행이 아니에요. 생활 속에서 내가 마주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런 점에서 경전대학은 ‘생활불교’입니다.

이웃과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

사는 걸 너무 힘들어하지 마세요. 이왕 사는데 즐겁지 않더라도 적어도 괴롭지는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 손 벌리고 살 필요도 없습니다. 산에 사는 다람쥐나 토끼도 자기 인생은 전부 스스로 살아가는데, 왜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기 인생도 못 살고 다른 사람한테 손 벌리고 도와 달라면서 살아야 해요? 이왕이면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사는 게 좋습니다. 이렇게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 ‘대승사상’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스스로에게 자존감이 생깁니다. 구걸하고 살면 자존감이 생기지 않습니다. 결혼을 할 때도 덕만 보려고 하지 말고 남편이나 아내가 나를 만나서 오히려 덕을 봤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게 좋습니다. 대부분 서로 덕만 보려고 하기 때문에 아웅다웅 싸우는 거예요. 학교 선생님이라면 아이들이 시간이 지났을 때 ‘그래도 그 선생님이 제일 좋았어’ 이런 소리를 듣는 선생님이 되는 게 좋고, 아이의 엄마라면 아이가 ‘그래도 우리 엄마가 제일 낫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엄마가 되는 게 좋잖아요. 특별히 잘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득이 되도록 하는 게 결국 나한테도 좋은 길이라는 겁니다.

우선 자기가 편안한 삶을 살고,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막상 해보면 이 길은 쉬운 길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경전대학을 다녀보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사전에 다섯 명이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남아서 끝 무렵 즉석에서도 질문을 더 받았습니다. 그중 한 명은 왜 자신은 규율을 잘 지킬 뿐인데 괴로움 속에서 살게 되는지 답답한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괴로워요, 어떡하죠?

“저는 규칙을 잘 지키는 편입니다. 군대에서도 규칙과 규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임들이나 후임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규칙을 지키지 않았어요. 저는 제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그로 인해 동시에 지옥 속에서 살았습니다. 단지 법과 규칙, 규범을 지켰을 뿐인데 왜 이런 결과가 빚어졌을까요? 이것도 아상(我相)인가요?”

“그런 걸 ‘법상(法相)’이라고 합니다. ‘이게 법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법상입니다. 무조건 ‘내가 옳다’ 하고 주장하는 것이 아상(我相)이고, ‘이게 진리다’ 하고 주장하는 것이 법상입니다. 법상(法相)은 아상보다 더 무섭습니다.

개인 사이에 갈등을 겪는 건 대개 아상 때문에 싸우는 것이고, 종교 간 싸우는 건 법상 때문에 싸우는 겁니다. 이슬람에서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에 다툼이 있는 것도 서로 자기의 믿음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법상(法相)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개신교와 천주교가 싸우는 것도 법상(法相) 때문이고, 불교에서 대승과 소승이 싸우는 것도 법상(法相) 때문입니다. 남북 사이에 싸우는 것도 서로가 ‘이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다’ 하는 것을 두고 싸우는 겁니다. ‘이것이 평화다’ 하는 것처럼 명분을 내걸고 주장하는 걸 법상(法相)이라고 합니다.

질문자도 ‘이건 내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규칙이 이러하지 않느냐’ 하고 주장하는데, 그게 법상(法相)입니다. 질문자는 아상을 버리라고 했더니 법상을 가진 꼴이에요. 금강경을 보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 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것은 아상이든 인상이든 법상이든 결국 상(相)을 가지면 보살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상(相)을 가지면 결국 갈등이 생기고 괴로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규칙을 지키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 규칙이 오히려 사람들을 구속하고 속박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규칙을 유연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 마음대로 규칙을 적용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부처님 당시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수행자가 먹는 것에 집착하면 안 된다’라고 하면서 걸식하는 것을 계율로 정하셨습니다. 아무래도 걸식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먹다가 남긴 음식이나 버린 음식을 주로 얻어먹게 됩니다. 걸식의 정신은 ‘먹는 것을 두고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말라’ 하는 뜻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먹다가 버린 음식을 먹으니까 그 안에는 고기와 같은 육류가 들었을 가능성이 낮죠. 게다가 수행자는 하루에 한 끼만 먹도록 했습니다. 옷도 시체를 덮었다가 버린 분소의를 입도록 했고, 잠도 숲이나 동굴 속에서 자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출가수행자는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간소화해서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제자 중 데바닷타가 요즘 수행자들이 이런 기본적인 계율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지금 질문자와 같은 내용의 질문이었죠.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수행자가 계율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이나, 때로는 사람에 따라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계율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걸 남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걸식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때로는 대중이 공경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초대를 하면 응할 수도 있습니다. 매번 초대에 응해서 좋은 음식을 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초대에 응하는 것이 바람직한 길일 때도 있다는 겁니다. 하루에 한 끼를 먹는 것은 좋은 일이나, 성장기에 있는 어린 사미들은 두 끼를 먹을 수도 있고, 환자들은 두 끼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또, 고기가 들지 않은 음식을 먹는 것은 좋은 일이나, 어쩌다가 한 번은 음식을 주는 사람이 고기가 섞인 음식을 줄 때도 있습니다. 제삿날에는 거지에게도 고기를 주는 경우가 있잖아요.

분소의를 입는 건 좋은 일이나, 분소의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옷을 입지 않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이때 ‘분소의만 입어야 한다’고 정하면, 결국 옷을 입지 못하거나, 천을 구해와도 굳이 시체를 한 번 덮었다가 입어야 하는 인위적인 행동을 해야 합니다.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자는 건 수행자로서 좋은 일이나, 비가 오는 날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 처마 밑에서 자는 걸 나쁘다고 할 순 없습니다.

이때 ‘규칙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훌륭한 걸까요? 부처님이 훌륭한 걸까요? 규율을 지키되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것, 이게 바로 중도입니다. 규율을 지키는 건 나에게 적용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용인을 해야 합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무질서해지기 쉽고, 그렇다고 너무 엄격하게 정하면 사람의 숨이 막힙니다.”

“군대에서 선임들 중에 후임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오늘 말씀해주신 내용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군대 규율에 부하를 괴롭히지 말라고 되어있는데 만약 선임이 후임을 괴롭힌다면 고발을 해야죠. 비슷한 예로, 요즘 사회에서는 남녀차별을 하면 안 됩니다. 그건 법적으로도 보장된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오랜 관습에 의한 남녀차별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누군가 법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도 명백하게 남녀차별을 한다면 그 사람을 고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관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면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지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엄마가 물을 떠 오라고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 자기도 모르게 아들을 시키지 않고 딸을 시킬 때가 있습니다. 그때 딸의 입장에서는 ‘왜 동생은 시키지 않고 나만 시키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분란을 일으킬 수 있어요. 하지만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먼저 심부름을 한 후 ‘엄마, 매번 딸이라고 시키면 남녀차별이야’ 하고 문제제기를 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커피를 타거나 차를 대접해야 할 때 은근히 여성 사원에게 많이 시키는 문화가 남아 있습니다. 그럴 때 커피를 타도록 시켰다고 입사하자마자 ‘제가 여기에 커피나 타러 들어온 줄 아세요?’ 하고 따지는 게 좋을지, 아니면 처음에는 커피를 한 번 타 주고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좋을지,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법적으로 따질 일인지, 관습적으로 남아있어서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일인지 구분을 해서 접근하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고 관습적인 부분인데도 일일이 다 따지면 세상살이가 갑갑해져서 살기가 어려워집니다.

같은 문제가 반복되면 그때 문제제기를 하는 게 좋습니다. 문제제기도 성질을 내면서 하기보다는 ‘제가 바쁩니다, 직접 가져다 드세요’ 하고 말로 해보고, 그래도 시키면 알겠다고 하고 갖다 주면서 넘어지는 척 커피를 쏟아버리면 돼요. 그때도 웃으면서 ‘죄송합니다’ 하고 말하면 됩니다. 이렇게 조금 유머러스하게 문제제기를 하는 게 좋습니다. 커피를 타오라고 한다고 해서 법적으로 고발하기도 어렵잖아요. 이렇게 관습적인 문제를 개선하는 데는 유머와 삶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대신 구타나 성추행과 같은 명백한 범죄 행위는 고발을 해서 개선해야 합니다.”

“스님께서 능엄경에 나오는 ‘헛꽃을 꺾는다’ 하는 구절을 알려주셨는데, 그게 제 마음속에 많이 와닿았습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상을 짓는 게 헛꽃을 꺾는 것과 같을까요?”

“상을 짓는다는 것은 실제로는 없는데 내 생각 속에 존재하는 걸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거예요. 꽃이 없는데도 있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내 생각 속에 존재하는 걸 실제로 존재한다고 객관화하는 게 상을 짓는 겁니다. 나의 주관적인 생각을 객관화하는 오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은 나와 다를 뿐인데 그것을 다르다고 인식하지 않고 나쁘다고 인식한다면, 그것도 상을 짓는 거예요.”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정진하겠습니다. 저에게 왜 괴로움이 생기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삶에 문제가 있으면 조금 유머러스하게 개선하는 지혜를 발휘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질문들이 있었고, 스님은 질문마다 자세하고 쉽게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나니 오전 12시가 다 되었습니다.

스님은 곧바로 점심 식사를 한 후 작업복을 갈아입고 밭으로 나갔습니다. 평화재단 통일의병들이 오늘부터 1박 2일 동안 농사 체험을 하기 위해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평화재단 통일의병 농사 체험

스님과 평화재단 통일의병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연장을 챙겨 마을 앞밭으로 함께 갔습니다. 앞밭은 동네 어르신이 연세가 많아 더 이상 밭을 경작할 수 없게 되어 빌려준 밭입니다. 밭에 돌이 많아서 작년에도 한 차례 줍고 농사를 지었는데 여전히 돌이 많았습니다. 스님과 통일의병들은 오후 내내 앞밭에 돌을 줍기로 했습니다.

포클레인이 땅을 뒤집자 돌이 우르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돌을 줍고, 또 줍고, 또 주웠습니다. 늘 일손이 부족하던 참에 오랜만에 10명의 봉사자가 생겨서 스님은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일했습니다. 즐겁게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돌이 아니라 농산물을 수확하는 풍경 같았습니다.




아주 큰 돌도 나왔습니다.

“가끔 이렇게 큰 돌이 있어요. 이런 돌이 농기계에 걸려서 문제예요.”

트럭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운 돌이 차곡차곡 쌓여 갔습니다. 모은 돌은 강둑에 모아두었습니다,


빈 트럭을 채우기를 반복했습니다. 손으로 하나하나 돌을 줍다가 누군가 레기를 가져와 돌을 긁어모아주니 일이 조금 더 빨라졌습니다. 스님은 돌과 함께 버려지는 흙이 아까워 돌을 체에 걸러 모았습니다.

“일 하는 게 점점 발전하네요!”

저녁까지 울력을 하고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해가 산 너머로 지고 있었습니다.

저녁 7시 20분부터는 스님과 통일의병들의 간담회 시간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각자 자신을 소개한 후 오늘 스님과 함께 농사일을 해본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스님도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저는 의병번호가 0번입니다. 외우기 쉽죠? (웃음) 주로 저녁에는 법회를 하고, 낮에는 회의가 있으면 회의를 하고, 회의가 없으면 농사일을 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지금 정토회에서 하고 있는 농사일을 주욱 소개한 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의병들은 그동안 궁금했던 점에 대해 자유롭게 질문을 했습니다. 모두 통일에 뜻을 두고 활동하는 분들이어서 그런지 정치, 통일, 사회운동에 대한 질문이 많았습니다. 그중 한 명은 최근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난 뒤의 답답한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갈등이 더 심해져요, 어떡하죠?

“이번 대통령 선거를 통해 남북 관계가 변화의 시기를 맞이할 것이라 기대를 많이 했는데, 점점 더 갈등이 심해지는 모습이 나타나고, 오히려 더 고꾸라진 느낌이 들어서 너무 속상합니다. 통일의병으로서의 역할, 그리고 국민으로서의 역할을 고려할 때 앞으로 5년을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답답합니다. 그저 뉴스를 안 보는 게 최선일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일에만 몰두할까 고민도 해보는데 어떻게 지내는 게 좋을지 스님께 질문드립니다.”

“가장 큰 문제는 현재 우리나라에 협력하는 정치가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협력이 부족한 정치가 계속되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국민 정서가 그렇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것은 지난 100년의 역사가 남기고 간 유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100년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는 독립투쟁이었습니다. 독립투쟁은 일본과 타협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죠. 목숨을 걸고 비타협적으로 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해방이 되고 나라를 되찾았습니다. 그 후 6.25 전쟁이 터지고 좌와 우를 두고 투쟁을 벌였고, 이후 독재에 맞서서 다시 투쟁의 시기가 이어졌습니다. 독재와도 타협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타협적인 투쟁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상대방과 타협을 하면서 운동을 하지 않는 경향이 강합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를 보면 반대 정당과도 연정을 해서 국가적 과제를 해결해 나갑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이런 정치가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상대방과 타협을 하면 내부에서 정의롭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서가 우리에게 깔려있기 때문에 타협이 어려운 거예요. 다시 말해, 우리가 비타협적으로 투쟁을 한 것이 과거에는 장점으로 작용했지만, 타협의 정치가 필요한 현시점에는 아주 큰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삶에 정치가 매우 중요하고, 정치적 변화가 있어야 우리의 삶에도 변화가 생긴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정치가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는 정치의 변화가 우리 삶의 변화를 이끄는 큰 부문이었지만, 지금은 정치의 변화 외에도 시민운동 등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도 우리 삶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과거처럼 정치에 우리의 모든 명운을 걸어야 하는 시기는 지났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조급 해지다 보면 정치적 변화가 빨리 일어나길 기대하는 심리가 일어납니다. 사회 변화에서 정치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보니 정치적인 변화가 사회 변화의 가장 빠른 길이라는 측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남북문제나 북한 인도적 지원 문제 등 정치인들이 힘을 합해서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면 바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정치적 변화에 가장 큰 관심을 두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길게 내다보면 정치적인 변화 외에도 여러 가지 변화를 만들어나갈 방법들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대선 결과를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하는데, 오히려 이를 계기로 통일의병 활동이 활성화될 가능성도 있어요.

통일의병은 기본적으로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더라도 항상 균형 잡힌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민주주의에서는 누군가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습니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졌다고 해서 너무 낙담하는 건 올바른 민주시민의 자세가 아닙니다. 항상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이긴다면 그걸 어떻게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 이번 대선 결과로 인해 나라가 거꾸로 돌아갈 것이라고 걱정해서는 안 돼요.

이번 선거 결과처럼 아주 적은 표 차이로 승부가 갈렸는데도 모든 권한을 한쪽 당이 가져가는 것이 부당하게 느껴진다면, 선거 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정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승자독식 구조와 대통령 중심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 두 가지 제도를 지지하는 편입니다. 정치인들조차 이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국민들의 정서에 이 두 가지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인식이 부족하니까 선거 때가 되면 이 문제는 잘 부각시키지 않습니다. 그만큼 국민들의 관심이 없기 때문이에요. 정치인들도 늘 합리적인 길과 국민들의 정서 사이에서 고민을 하는 거죠.

그러니 국민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정치도 바뀌고, 국민들의 의식이 바뀌는 만큼 정치도 바뀝니다. 이 문제는 그렇게 바라봐야지, 국민들은 다 잘하고 있는데 정치만 문제라고 인식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긍정 위에 부정이 있고 부정 위에 긍정이 있듯이, 어떤 상황에서도 유리한 점을 발견해서 역사의 변화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통일의병의 역할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앞으로 통일의병의 활동이 보다 활성화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부가 남북문제를 잘 해결하면 통일의병이 할 일이 없어져요.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단, 정부가 남북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키면 통일의병은 평화의 목소리를 내어야 하고, 그럴수록 통일의병에게 주어지는 역할이 더 커집니다. 시민운동이나 평화운동은 대개 약간의 탄압 속에서 활성화됩니다. 그만큼 긴장감이 생기고 저항하는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통일의병 여러분들이 오늘을 계기로 잘 준비해 놓으면 하반기부터는 역할이 조금씩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요.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스님의 격려에 통일의병들은 다시 기운을 받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밤 10시가 다 되었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보름달이 휘영청 밝아 있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외국인을 위해 영어로 즉문즉설을 하고, 오후에는 평화재단 통일의병들과 시간을 같이 보낸 후, 저녁에는 일요 명상을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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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근

감사합니다

2022-05-18 07:30:55

보리수

수행자는 먹고 입고 자는 것으로 세상사람들과 경쟁하지 않는다.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향해 나아간다... 협력의 정치가 잘 안되는 것은 근현대 오랜 시간 비타협적 투쟁의 결과물이구나!현실에서 정치가 차지하는 비율이 크긴 하지만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민간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질 수도 있다!! 위안이 됩니다. 고맙습니다

2022-04-24 08:06:08

다보행

감사합니다. 스님. 관세음보살

2022-04-22 15:4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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