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4.12 제핏잎 따기, 정토불교대학 실천적 불교사상 5강
“욕망을 따르지도 말고, 참지도 말고, 그럼 어떡하란 말이죠?”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기도와 발우공양을 마치고 밭 뒷산에 가서 제핏잎을 땄습니다. 이제 산에는 진달래가 지고 연달래가 피기 시작했습니다.


제핏잎이 억세지기 전에 따서 장아찌를 담가야 하기 때문에 시기를 잘 맞춰야 합니다. 산에 도착해서 스님은 먼저 땅에 돌부리와 나무들을 치우고 앉을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제가 가지를 꺾어다 줄 테니까 여기 앉아서 편안하게 잎을 따세요.”

스님이 산을 돌아다니며 제피나무 가지를 한가득 꺾어왔습니다. 제피나무에는 가시가 돋아 있어 가죽장갑을 끼고 가지를 꺾었습니다.




스님이 가지를 꺾어주면 행자들이 나뭇가지에서 잎을 하나하나 땄습니다. 뜨거운 햇살에 잎은 금세 시들해졌습니다.

“같이 잎을 먼저 따고, 또 가지를 꺾어 와야겠어요.”

스님도 함께 앉아 제핏잎을 땄습니다. 날카로운 가시 사이로 잎을 톡톡 땄습니다. 가시를 피해 잎을 따다 보니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가시가 덜 날카로운 가지는 후드득 잎을 훑었습니다.



스님 뒤로 빈 가지가 수북이 쌓였습니다.

“몇몇 어르신들이 제피 장아찌를 아주 좋아하세요. 이번에 담가서 가져다 드려야겠어요.”

산에는 나무에 아직 잎이 덜 돋아나 그늘이 없었습니다. 햇볕이 그대로 내리쬐니 가만히 앉아서 잎을 따는 데도 땀이 흘렀습니다. 스님은 계곡으로 가서 마실 물을 기를 샘을 만들었습니다.

“물이 얼음장 같아요. 곧 흙탕물이 가라앉으면 맑은 물을 떠 마시면 돼요.”

수확해 온 제핏잎을 다 따고 조금 일찍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갓 딴 제핏잎도 데쳐서 반찬으로 냈습니다. 도시락을 먹고 스님은 다시 가지를 따러 갔습니다.

“제가 가지를 꺾어 올 테니 잎을 더 땁시다.”


날이 너무 더워서 기운이 빠졌습니다. 한 포대 가득 제피나무 가지를 베어서 산을 내려왔습니다.

산을 내려와 그늘에서 잎을 마저 따고 깨끗이 씻어두었습니다.


오후에는 정토불교대학 강의 준비와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했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8시부터는 정토불교대학 실천적 불교사상 제5강을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이 모두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자 스님이 법문을 했습니다.

지난 수업에서는 ‘이 세계의 실제 모습은 어떠한가’라는 주제로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핵심 내용인 연기법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인과응보와 인연과보의 차이에 대해 설명한 후 불교의 실천 원리에 해당하는 ‘중도’에 대한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즐거움은 항상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괴로움은 없고 딱 즐거움만 있는 것을 원하죠? 그런데 부처님이 사람의 마음을 깊이 탐구해보니까 즐거움과 괴로움은 늘 함께한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즐거움만 있을 수가 없고 즐거움이 있으면 괴로움이 늘 뒤따라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먼저 알고 접근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죠.

괴로움과 즐거움은 늘 함께 온다

실제의 세계는 즐거움이 있으면 괴로움이 있고, 괴로움이 있으면 또 뒤에 즐거움이 있는 게 항상 맞물려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분리해서 괴로움은 없고 즐거움만 가질 수 있다는 꿈을 꿉니다. 그것은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가 없는 꿈이에요.

즐거움과 괴로움은 욕망이 충족되는지 안 되는지에 따라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을 놓아버리면, 즐거울 일도 없어지고, 괴로울 일도 없어집니다. 즉, 욕망을 놓아버리면 괴로움이 없어지는 동시에 즐거움도 같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원치 않아요. 괴로움은 없고 즐거움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움으로부터 못 벗어나는 겁니다. 괴로움을 완전히 없애려면 즐거움도 포기를 해야 해요. 그래서 ‘욕망을 버려라’든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라’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욕망을 어떻게 버립니까?’

인도 당시에는 욕망에 따라서 먹고 싶으면 먹고, 하고 싶으면 하고, 가고 싶으면 가는 게 즐거움이라는 쾌락주의가 만연했어요. 욕구가 충족되면 생기는 기분 좋음을 행복으로 삼는 것을 쾌락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욕구를 따라가 보니 욕구가 충족됐을 때 잠깐의 즐거움만 있을 뿐 욕구가 점점 커지기 때문에 아무리 욕구를 충족해도 해결이 안 되고 늘 괴로움이 뒤따르는 결과가 벌어졌어요.

그래서 고행주의가 생겨났습니다. 고행주의란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생존적 욕구마저도 억제함으로써 괴로움이 생기지 않게 하는 거예요. 사람은 굉장히 어려운 조건 속에 처해서 배를 굶게 되면 ‘더 잘 먹었으면’ 하는 생각보다 ‘그저 배만 채웠으면’ 하게 되죠. 그래서 고행주의자들은 욕망의 씨를 말리면 말릴수록 인간의 정신적인 편안함은 더 늘어난다고 생각해서 인위적으로 고행을 했어요. 물속에 들어가 있는다든지, 거꾸로 서 있는다든지, 나무에 매달려 있는다든지, 가시덩굴로 덮인 곳에서 산다든지, 일정 기간 아무것도 안 먹는다든지, 이렇게 욕망을 억제함으로 해서 해탈을 이루려고 한 겁니다.

부처님은 출가하기 전까지 욕망을 따라가는 쾌락주의의 극치까지 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부처님을 볼 때 ‘저 사람은 더는 바랄 것이 없을 거야’ 하고 부러워할 정도로 모든 것을 누리는 생활을 하셨으니까요. 그런데도 부처님은 고뇌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출가해서 6년 동안은 음식을 먹지도 않고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고행의 끝까지 갔습니다. 그의 고행을 존경해서 따르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였어요. 하지만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욕망을 따르지도 말고, 참지도 마라

그때 부처님은 자신의 삶을 돌아봤어요. 그 결과 젊어서는 욕망을 따라갔고, 출가해서는 욕망을 억압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둘 다 욕망에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모순을 발견한 부처님은 욕망을 부정하지도 않고 욕망을 따라가지도 않는 새로운 길을 발견해냈습니다. 그것은 그냥 욕망을 욕망으로 아는 거예요. 담배가 피우고 싶으면 ‘피우고 싶구나’ 하고 아는 겁니다. ‘안 피워야지’ 하고 억누르는 것도 아니고, ‘피워야지’ 하고 쫓아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의지를 놓아버리는 거예요. ‘피우고 싶구나’ 하고 그냥 알기만 하는 겁니다. 이걸 ‘알아차림’이라고 해요. 욕망을 부정하고 억제하거나, 욕망을 긍정하고 따라가거나, 양극단을 모두 놓아 버려서 몸과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항상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해야 합니다. 애쓰지도 말고 게으르지도 말아야 합니다. 긴장하지도 말고 멍청해지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애를 쓰다가 지치면 포기해 버려요. 게을러집니다. ‘긴장을 놓아라’ 하면 졸아 버려요. 수행은 편안한 가운데 알아차림이 분명하고, 긴장하지 않는 가운데 꾸준히 해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 처음으로 설법한 내용이 이겁니다.

‘수행자는 양극단을 벗어나야 한다. 고행도 버리고, 쾌락을 버려라.’

부처님이 발견하신 새로운 길, 제3의 길을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중도란 중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깨달음의 길로 가는 가장 바른 길을 뜻해요. 부처님께서 중도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지고한 행복으로 가는 길을 한쪽에서는 욕구를 따라가는 길이라고 주장했고, 한쪽은 욕망을 억압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둘 다 극단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욕망에 끌려가지도 말고, 욕망을 참지도 마라. 욕망에 끌려가면 과보(果報)를 받게 된다. 욕망을 참으면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둘 다 괴로움이다. 다만 욕망을 욕망인 줄 알아차려라, 끌려가지도 말고, 저항하지도 마라.’

이런 부처님의 말씀이 이해는 되십니까? 그런데 현실에서는 잘 안 되죠. 그 이유는 우리의 오랜 습관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고 싶으면 하든지 참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 할 줄 몰라요.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피든지 참든지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합니다.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편안하게 알아차리기만 하는 것이 안 돼요. 명상할 때 다리가 아프면, 억지로 이를 다물고 참든지, 아니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다리를 폅니다. 이게 양극단이에요. 중도는 통증을 그냥 통증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다리를 펴지도 않고 참지도 않고 ‘통증이 있구나’ 하고 알 뿐이에요.

이 관점이 딱 바로 잡혀야 중도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실천은 늘 한쪽으로 치우칩니다. 결과만 좋은 게 아니라 결과로 나아가는 과정도 좋아야 해요. 죽을 고생을 해서 결과를 좋게 만드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과정도 좋아야 합니다. 부처님도 출가 후 6년 동안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엄청난 고행을 하면서 많은 긴장을 했습니다. 몸도 여위어 갔습니다.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눕지도 않더라’ 하는 이유로 친구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괴로움이 없는 게 목표이지 밥을 안 먹고 잠을 안 자고 눕지 않는 게 목표가 아니잖아요.

‘나는 구체적으로 말을 어떻게 하고, 행동을 어떻게 하고, 생각을 어떻게 하고, 생활을 어떻게 하고, 명상을 어떻게 하고, 계율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이런 모든 실천의 기초에 중도가 있어야 치우치지 않게 됩니다. 가정생활에서도 중도를 못 지키고 늘 치우치게 되는 게 대부분이에요. 자신의 감정을 너무 억압함으로써 스트레스를 받아 화병이 생기거나, 감정을 생기는 대로 너무 드러내서 갈등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이때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고 감정을 참지도 않으면서 갈등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을 중도라고 해요.

이 중도의 가르침은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무유정법은 ‘정한 법이 있음이 없다’ 하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서울로 가려는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합니까?’ 하고 누가 물으면 정해진 길이 없다는 거예요. 못 간다는 얘기도 아니고, 아무렇게 가도 된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정한 법이 없다’는 표현을 길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했다면 무(無)에 치우친 것이고, 정한 게 없으니까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면 유(有)에 치우친 겁니다. 유무에 치우친 거예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정확히 알려면 질문한 사람이 어디에 서 있는지 그 위치가 먼저 정해져야 합니다. 인천 사람이라면 가야 할 방향은 동쪽이에요. 수원 사람이면 북쪽이에요. 강릉 사람이라면 서쪽이에요. 인연에 따라서, 조건에 따라서, 이렇게 방향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이 인천 사람에게 ‘동쪽으로 가라’ 하고 말한 것을 듣고 법으로 정해버립니다. ‘서울로 가는 길은 부처님이 동쪽이라고 했다’ 하고 정해버린 후 수원 사람에게도 동쪽으로 적용하고, 강릉 사람에게도 동쪽으로 적용해버려요. 강릉 사람에게 동쪽으로 가라고 적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동해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날 종교나 철학이 이런 식이죠. 고정 불변한 법으로 정해버려서 변화된 현실에 맞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법은 늘 변화된 현실에 맞게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위치가 바뀌면 달라지는 거예요.

중도(中道)는 정도(正道)다

중도에서 중(中)자는 가운데라는 뜻이 아니라 적중(的中)이라는 의미입니다. 화살을 쏘았을 때 과녁에 적중한다고 하잖아요. 화살이 가는 길이 중도예요. 내가 위치가 바뀌면 화살이 가는 길이 달라집니다. 어느 상황에 처하든지 거기서 딱 적중되는 길이 중도예요. 그래서 중도는 곧 정도(正道)입니다. 바른 길은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예요.

‘사람이 옷을 입어야 합니까? 벗어야 합니까?’ 하고 묻는다면 딱 잘라 말할 수가 없어요. 목욕탕 안에 들어갈 때는 벗어야 합니다. 밖에 나오면 입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밖에서는 다 입어야 할까요? 그것도 또 달라요. 결혼한 부부에게 잠잘 때는 옷을 꼭 입어야 된다고 정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입어야 된다’, ‘벗어야 된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고 그 인연에 따라 다른 겁니다.

무유정법이란 ‘아무것도 없다’, ‘자기 마음대로 하면 된다’ 하는 뜻이 아니고 ‘딱 이래야 된다’ 하는 뜻도 아니에요. 정한 법이 없고 조건에 따라서 법이 정해진다는 뜻입니다. 인천 사람이 서울 가는 방향을 물었을 때 서울 가는 방향이 없다고 말해선 안 됩니다. 그때는 동쪽이라고 딱 방향이 정해지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동쪽으로 가는 길이 서울 가는 길이다’ 하고 법으로 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불교는 너무 어렵다. 동쪽이면 동쪽이고, 서쪽이면 서쪽이고, 북쪽이면 북쪽이라고 딱 정하면 좋을 텐데, 왜 동쪽이 됐다가 서쪽이 됐다가 북쪽이 됐다가 하는 건가요?’

그런데 이것이 현실이에요. 서울 가는 길은 인천 사람이 물으면 동쪽, 수원 사람이 물으면 북쪽, 강릉 사람이 물으면 서쪽인 게 사실이잖아요. 사실을 사실대로 알면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이게 자유자재 하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 하늘 위에서 밑을 딱 내려다보면 됩니다. 그러면 질문한 사람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만 알면 만 명이 물어도 만 가지 다 정확하게 대답해줄 수 있어요. 이것은 마치 ‘거울에 그림을 몇 개 그리느냐?’ 했을 때 ‘무수히 그릴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도 거울은 한 그림도 그린 바가 없습니다. 누가 와도 딱 비춰주지만, 그것을 잡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도예요.

오늘은 중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중도의 구체적인 사례에 대해 여러분들과 얘기해 보겠습니다.”

여기까지 강의를 한 후 스님은 지난 시간에 과제로 내어 준 내용에 대해 각자 어떤 답을 갖고 왔는지 질문했습니다. 스님의 질문이 끝나자 학생들의 다양한 대답이 쏟아졌습니다. 이어지는 모둠별 마음 나누기 시간은 스님의 질문 덕분에 더욱 활기를 띠었습니다. 마음 나누기를 다 한 후 오늘 수업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서울로 이동하여 오전과 저녁에 수행법회를 생방송하고, 오후에는 전국 비구니회 초청 강연을 한 후 밤늦게 봉화 수련원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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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영

스님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2022-10-22 09:20:11

송금숙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편안한 가운데 알아 차림이 분명하고
긴장하지 않는 가운데 꾸준히 연습해 나가겠습니다

2022-10-10 15:59:30

정화섭

고맙습니다

2022-05-01 12: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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